421.
민초 셋이서 어디로 놀러 갔었는지 집에 없었던 리사.
나도 씻은 뒤 잠시 쉬면서 기다리니 리사가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온 거야?”
“응. 두 사람은 더 놀다 올 거 같아.”
“하여간 노는 거 정말 좋아한다니까.”
“헤에. 쉴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씩 웃으며 내게 안긴 리사.
리사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이번에 몰이 결승전에서 네 노래를 부를 거 같아.”
“내 노래?”
“응. convinced.”
“와! 그걸 한다고? 나도 연습 좀 부족하면 라이브 못 하는 곡인데.”
고개를 끄덕여준다.
“확실히 어려운 노래긴 해.”
“흐음,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오늘은 나랑 작업 좀 하자.”
“어떤?”
이 곡을 편곡 없이 몰이 소화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다.
원곡을 너무 그대로 불러도 재미가 없을 거 같기도 하고.
리사와 몰은 태생이 다른 보컬이니까.
리사는 화려한 스킬을 가진 기교형 보컬이고.
몰은 감성을 건드리는 묵직하고 직선적인 보컬이다.
그런 감성적인 보컬이 화려한 기교가 담긴 노래를 하면 어떻게 될까?
경지에 올라 그 노래에 자신의 감정과 감성을 담으면 엄청난 명곡이 탄생한다.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이 한나 같은 레전드 가수가 되는 거고.
몰이 그게 가능할까?
언젠가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리사가 화려하게 불렀던 곡을 몰의 감성에 맞게 편곡해야 한다.
그러면서 약간의 화려함을 남겨 눈속임하면 더 좋고.
“후우, 이거 또 너무 어려운 숙제를 받았네.”
“그래서 내가 도와줄 건 뭔데?”
리사와 함께 작업실에 왔다.
사실 편곡에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리사의 도움을 받아볼 생각.
“몰처럼 불러볼 수 있어?”
“으음, 몰처럼?”
“응.”
우선 리사의 상태를 좀 보자.
“한 번 해볼게.”
“반주 틀게.”
부스에 들어가 준비를 마친 리사.
몰처럼 부르라는 요구는 간단하다.
기교를 최대한 자제 하면서 감성적으로 불러 달라는 부탁.
리사는 내 부탁을 잘못 이해한 거 같다.
아니면 몰을 엄청 높게 쳐 주는 것도 같고.
평소의 기교를 유지하며 최대한 감성을 넣어 보려고 노력하는 리사.
누가 한나의 딸 아니랄까 봐 재능 미쳤다.
그동안 리사도 엄청 성장했구나.
진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한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다.
거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한나를 뛰어넘는 엄청난 가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내가 곁에서 곡까지 준다면?
소름 끼치는 엄청난 역작이 나올 거 같은데?
근데 나 그런 작품 남기면 죽는 거 아닌가?
그 때문에 사실 힘 조절하고 있기도 하다.
너무 좋은 노래 만들면 조금 위험할 거 같다는 이유 모를 예감이 드니까.
리사의 노래가 끝이 났다.
노래가 끝났단 사실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훌륭한 노래.
사실 중간에 끊고 내 요구사항을 정확히 말해야 했지만.
저런 노래를 끊는 건 노래를 만드는 프로듀서로서 할 짓이 아니니까.
“어땠어?”
“너무, 너어무, 좋았어. 그래서 문제야.”
“왜?”
“몰이 지금 네가 한 정도의 기교를 보일 수 있을 거 같아?”
리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못 해?”
역시. 내 생각이 맞았던 거 같다.
자기는 천재라 숨 쉬는 거처럼 쉬운 기교니까.
내 소속 가수들이 다들 자기 정도는 하는 줄 안다.
하긴,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이 줄리랑 카디니까 그럴 수 있겠다.
줄리가 퍼포머라 보컬적으로 살짝 부족한 느낌이 있지만.
무대에 함께 서 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간다.
평소의 카리스마는 카디가 압도적이지만, 무대에서만큼은 다들 줄리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래한다.
물론, 카디의 묵직한 랩 한 마디면 분위기가 확 반전되지만.
리사는 언제 어느 타이밍에 끼어들어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민초 얘네들 진짜 괴물들이네.
하긴, 혼자서도 빌보드 씹어 먹는 괴물 셋이 뭉쳤는데.
게다가 작곡을 내가 했고.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게 당연한 거 같기도 하다.
“음,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면서 방금처럼 감성적으로 부르려고 노력해 줘.”
“할 수 있을까?”
너무 잘 하는데, 숨 쉬듯 하니까 안 하는 게 더 어려운 경지가 된 거 같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 노래에서 기교를 빼는 건 작곡자인 나도 편곡 방향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니까.
“도움만 받는 거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해줘.”
“일단 해볼게.”
“응.”
평소의 리사가 아닌 리사의 감성 충만한 노래.
얘는 발라드 해도 잘 하겠다.
문제는 기교를 확 줄이니까 곡과 노래가 너무 안 어울린다는 사실.
“잠깐만.”
노래 중간에 리사가 잠시 노래를 멈췄다.
어떤 문제를 느끼고 있는지 알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리사를 봤다.
“이게 맞아?”
“아닌 거 같아.”
“어떻게 하려고?”
“그걸 같이 고민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지.”
“아하!”
리사가 이제야 내가 자신을 부른 목적을 이해한 거 같다.
천재라 그런가?
한 분야의 천재들은 다른 곳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리사와 함께 지내며 딱히 큰 문제가 있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사실 리사는 섹스와 노래 할 때가 아니면 좀 맹한 구석이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섹스랑 노래 빼고 잘 하는 거도 없는 거 같다.
이런 게 재능 몰빵인가?
그래도 한가지 재능만 몰빵 된 게 아니라 다행이네.
섹스 천재이자 노래 천재인 리사.
그런 리사기에 나도 진지하게 질문해 볼 수가 있다.
“기교를 빼고 이 노래를 할 수 있을까?”
“지금 해봤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그렇다고 몰이 갑자기 기교를 막 부릴 수 있을 거 같진 않은데.”
“시켜 봤어?”
시켜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켜본 적 없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럼 먼저 시켜보는 건 어때?”
기교를 만들어 줄 수는 있다.
근데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가야지 처음부터 최고난도의 기교를 보이라는 건 프로듀서로서 시킬 수 없는 짓이지.
“생각보다 쉬운데.”
“그건 너라서 그렇고.”
“아니야. 내가 알려줘 볼게.”
“그래. 해보자.”
조금 쉬게 뒀던 몰을 작업실로 다시 불렀다.
잠시 졸았는지 살짝 덜 깬 모습의 몰이 작업실로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
“응. 잘 잤어?”
“헤헤. 덕분에요.”
두 여인의 살가운 인사를 뒤로 나는 소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모르겠으니까. 지금부터는 리사가 알아서 알려 줘봐. 옆에서 들으면서 첨언이라도 할 게 있으면 해줄게.”
“응, 알겠어. 몰. 여기로 와 앉아 봐.”
“네.”
초롱초롱한 눈으로 리사의 말을 따르는 몰.
“아니다. 먼저 노래를 들어 봐야지. 불러 볼 수 있어?”
“아, 아직 연습은 안 해봤는데요.”
“그래? 다행이다. 괜히 이상한 버릇 생긴 거보단 안 해본 게 나아. 그럼 바로 불러볼래?”
“자, 잠시만요.”
몰이 물을 가져와 한잔 마시며 목을 가다듬는다.
약 오 분 정도 목을 푼 몰.
하긴, 자다가 바로 와서 이 어려운 노래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몰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린다.
“준비됐어요.”
“민. 반주 틀어 줘.”
“아! 알겠어.”
부스로 들어가 자세를 잡은 몰.
그런 몰과 눈을 마주치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반주를 튼다.
시작된 몰의 노래.
노래가 거의 끝날 때까지 나와 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노래를 들었다.
“하아. 흠, 어, 어땠나요?”
노래를 마치고 잔뜩 긴장해 말하는 몰.
나는 심각한 표정인데 리사는 가볍게 웃는다.
몰의 노래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엉망. 엉망이다가 가장 맞는 말인 거 같다.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다.
몰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감성도.
이 곡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기교도.
리사가 기교를 최대한 자제하고 불렀던 노래도 프로가 부른다는 느낌은 들었는데.
이건 뭐,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수준이다.
동네에서 노래 좀 한다는 애들이 겉멋만 잔뜩 들어서 고난도의 노래를 하는 걸 흉내 낸 느낌?
흉내 낸 느낌이라는 건 그 정도도 못 했다는 뜻이고.
리사가 살짝 어색한 얼굴로 날 본다.
내게 다가와 나긋하게 말하는 리사.
“얘가 결승까지 왔다고?”
“음, 다른 노래를 들어 볼래?”
“방송에서 들었어. 그땐 이렇지 않았는데.”
“곡이 너무 안 어울리니까.”
“아니. 아니야. 할 수 있을 거 같아.”
리사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마도 방송에서 불렀던 몰의 노래가 생각이 난 듯 잠시 생각에 잠긴 리사.
“저번 방송에서 불렀던 노래 지금 해줄 수 있어? 그 재해석 라운드.”
“네. 할 수 있어요.”
“바로 틀어줄까?”
리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몰과 눈빛을 교환한 뒤 노래를 틀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노래.
맑은 음성으로 귀엽게 노래하는 몰.
확실히 몰은 이런 노래가 가장 잘 어울린다.
섹시한 것도 반전매력 느낌으로 잘 소화하지만.
섹시는 잠시의 임팩트지 섹시함으로 4분의 무대를 끌어갈 능력은 없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런 모습의 노래는 몰이 부른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보고 있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렇게 하면 되겠네.”
“음?”
리사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편곡 방향을 혼자 정한 거 같다.
좋은 일이지 뭐. 잘 하면 오늘 중으로 두 번째 곡을 픽스할 수 있을 거도 같다.
convinced를 부를지 말지 곧 결정할 수 있겠다.
“음, 몰. 나와 볼래?”
“네.”
조용히 몰을 부른 리사.
뭘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도 가만히 소파에 앉아 리사의 말을 기다린다.
“음, 오래 걸릴 거 같은데 같이 듣게?”
“왜? 내가 있으면 불편해?”
“그건 아닌데.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
“그래?”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럼 난 쉬고 있지 뭐. 얼마나 걸릴 거 같아?”
“그건 몰이 하기에 달렸지?”
“오늘 안으로 이 곡을 할지 말지 정할 거야.”
“오늘이면 충분해.”
아직 오늘은 꽤 많이 남았으니까.
그동안은 조금 다른 일을 해야겠다.
요 며칠 너무 프로젝트 S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뭔가 머릿속이 전부 프로젝트 S로 가득 찬 거 같다.
곧 결승전을 하고 프로그램이 끝나는 만큼 그 전에 미리 리프래쉬하는 거도 좋겠지.
그렇다고 해서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할 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건 힙합 음악 작업.
몰에게 줄 곡을 작곡하던 도중 꽤 인상적인 노래가 하나 나왔다.
결승전만 끝나면 릴리의 노래도 녹음할 예정이니 그때 한가지 프로젝트를 더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릴리의 싱잉랩.
화려하면서도 가벼운 느낌이지만, 그 안에 힙합 특유의 감성이 들어 있다.
카디의 묵직한 붐뱁.
마치 드럼이 내는 소리를 입으로 내는 것 같은 카디의 묵직한 랩.
여성이지만, 낮은음으로 카리스마 있게 랩을 뱉는 모습은 정말 과거 골든에이지 시대의 레전드들을 기억나게 한다.
만약 둘이 한 곡에 어우러져 노래하면 어떤 노래가 나올까?
힙합의 레전드 비기와 네이트 독이 한 곡에서 어우러지는 명곡 같은 느낌이 나지 않을까?
그런 랩을 할 수 있는 꽤 재밌는 비트의 곡이 나왔다.
그걸 조금 다듬어 릴리와 카디가 어울어져 함께 뛰놀 수 있을 만한 곡으로 완성하고 싶다.
“흐음, 근데 릴리가 그게 될까?”
꼭 릴리가 아니어도 괜찮긴 한데. 릴리처럼 스타일리쉬한 랩을 하는 사람을 또 찾기에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잘못하면 카디의 카리스마에 릴리가 묻힐 거 같은데.
릴리 부분을 조금 더 살려가면 편곡을 해야 할까?
그렇다고 카디의 랩을 죽이는 건 작곡가로서 못 할 짓인데.
2본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면 할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의 실력이 부족해 하향 평준화하는 노래를 만들 순 없다.
“흐음, 이것도 릴리를 한 번 불러서 시켜봐야겠는데.”
시간은 충분한 거 같은데 릴리가 어디 있으려나?
드림 스테이지 우승 곡 녹음 전에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도 한 번 볼 겸.
릴리가 멀지 않다면 집으로 초대해 보는 거도 좋겠다.
전화를 들어 릴리에게 연락했다.
-프로듀서?
“응. 릴리 혹시 지금 바빠?”
-아니. 연습 말고 다른 건 안 하고 있으니까.
“지금 내 집으로 올래? 간단히 피드백해줄게. 좋은 소식도 있고.”
말이 끝나자 릴리의 텐션이 갑자기 엄청 오른 게 느껴진다.
-바로 갈게. 30분이면 도착해!
“알겠어.”
기쁘게 답하는 릴리의 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나도 잠시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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