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박으면 악상이 떠올라-408화 (408/450)

408.

진행자 옆으로 투명한 유리 보울이 등장했다.

안에는 파란색 공 네 개가 들어있다.

“자! 각 참가자는 앞으로 나와 이 구슬을 하나씩 챙겨가 주시면 됩니다.”

옆에 등장하는 보드 판.

숫자 1, 2, 3, 4가 쓰여 있고.

1과 2, 3과 4가 연결된 토너먼트 판이다.

일반 판과 다른 건 승자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패자가 올라가는 방식이라는 점.

한 번만 이기면 다음 라운드 진출 확정이네?

혹시 모르니 다들 두 곡을 준비해야 하기도하고.

어우, 벌써 머리가 아픈 기분이다.

“자! 그럼 각자 구슬을 확인해 자기 이름을 여기 번호에 붙여 주세요.”

진행자의 말대로 네 사람이 구슬을 확인했다.

루와 몰은 같은 팀이지만, 이번엔 그런 거 없나 보다.

모두 확인한 참가자들이 앞으로 나가 자기 이름을 대진에 올린다.

“허허.”

내 입에서 이상한 웃음이 났다.

1번에 루의 이름이 올랐고, 2번에 몰의 이름이 올랐다.

확률상 가능한 얘기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까 또 심란하다.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패자전을 해야 하다니.

아니, 딱히 나쁘게 생각할 건 없다.

오히려 좋을 수도?

“혹시, 패자전에도 주제곡을 준비해야 하는 겁니까?”

대충 대진이 확정되고 인터뷰가 끝날 때쯤 존이 질문했다.

나야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거 좀 힘들 거 같다.

곡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소화하는 가수들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패자전은 따로 주제 없이 자유곡으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진행팀에게 연락을 받은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아마, 질문을 안 했다면 그냥 주제곡으로 하는 거처럼 했겠지?

하여간 방송국 놈들은 우리를 못 갈아 마셔서 안달이니까.

여기서 제일 방송 경험이 많은 존이라 제작진의 의도를 눈치채고 질문을 한 거 같다.

나도 이런 점은 배워 둬야지.

한국이야 내게 배려 넘치는 환경이라 뭘 어떻게 해도 어렵진 않겠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으니까.

하긴, 한국 시청자들은 내게 조금이라도 불합리한 일이나 불편한 일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나겠지?

지금 내 한국에서의 위상은 정말 장난 아니니까.

미국에서 잘 나가는 프로듀서 정도가 아니라 세계 최고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당당히 올리고 있으니까.

사람들 인식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한 이유는 당연히 토리스와 코안의 역할이 컸다.

세계적으로 팬덤이 커다란 대 스타가 인정해 준 거니까.

또 지금 하는 프로젝트S도 확실히 내 인지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누가 봐도 내가 제일 유리한 상황이고 잘 하는 중이니까.

“자!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리고. 다음 녹화는 생방송이니 단단히 준비해 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존과 신디 나 셋이 촬영장에 모였다.

루와 몰, 그리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먼저 나갔다.

우리가 모인 건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잡담이나 나눌 생각으로 모인 거다.

아무래도 벨이 탈락했으니 변화가 있을 수밖에.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요.”

신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벨은 탈락했지만, 존도 탈락자를 한 명 배출했다.

당연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으음, 그러게 선배가 탈락할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말을 하고 날 살짝 보는 존.

내가 탈락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이건 내 눈치를 보는 거구나.

사이가 애매하긴 한데 벨과 라이벌 구도로 잡힌 건 나였으니까.

우리야 그냥 가벼운 분위기에서 이런저런 스토리가 나온 거긴 한데 방송에 나오는 모습은 또 달랐다.

편집의 힘이란 정말.

나와 벨이 제대로 서로를 도발하고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거처럼 나왔으니까.

벨과 그 정도로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아니, 토리스와 코안의 프로듀싱 이후로 오히려 사이는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고.

근데 사람들은 또 싸움 붙이기 좋아하잖아?

나나 벨도 시청률을 위해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거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묘한 대결 구도가 생기긴 했다.

젊고 새로운 얼굴인 나. 게다가 외국인이기까지 하고.

토종 미국 백인 기득권에 이미 십여 년 인기를 끈 프로듀서인 벨.

그림 뽑기엔 이만한 구도도 없지.

근데 내가 너무 빠르게 완승해 버린 거 같다.

아니, 완승은 아닌가?

초반에는 내가 많이 밀리는 모습을 보인 거 같으니까.

“벨과는 그냥 이렇게 작별인가요?”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좀 생겨서 얼굴은 한번 보고 싶은데.

“아마 촬영 끝나고 뭐라도 할걸?”

“그래?”

미국은 파티 문화가 있으니까 끝나면 파티하겠구나.

“벨이 올까?”

신디를 보며 물었는데 존이 답했다.

“선배도 그리 쪼잔한 성격은 아니니 올 거야.”

“아, 그렇군요.”

존의 입에서 쪼잔하지 않다는 말이 나왔는데 왜 쪼잔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처럼 느껴지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도 좋겠어?”

“네?”

“신구 대결에서 이긴 거잖아.”

“아, 이게 그렇게 되나?”

하긴, 나와 신디는 젊은 프로듀서고 존과 벨은 나름 경력과 연배가 꽤 있는 사람이니까.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존이 신디의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는지 소심하게 덧붙였다.

평소 충돌을 피하는 존의 입에서 저 정도의 발언이 나온 건 꽤 도발이 먹힌 거겠지?

어차피 다음 미션에서 둘이 붙으니까 또 결판나겠네.

“흐음, 그나저나 다음 미션 너는 어떡하냐?”

“그러게. 고민이네.”

신디가 내 걱정을 해줬다.

존도 나름 고심하는 표정으로 날 봤고.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두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생각은 없다.

“잘 해봐야지.”

“그래. 넌 항상 잘 했으니까.”

“응원하지.”

두 사람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대충 스테프들과 인사하고 나왔다.

생각해 봤는데 이거 나름 괜찮은 대진 같기도 하다.

두 사람 다 한 곡만 제대로 준비하면 되는 거 아닐까?

내가 마음대로 1라운드 결과를 정해서 할 수 있잖아?

패자전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건 아무래도 루다.

그러니까 1라운드에서 몰의 포텐을 터트릴만한 무대를 만들고 루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적당한 무대를 주는 거지.

패자전으로 간 루는 그때 내 곡으로 승리를 가져오면 되는 거고.

으음, 너무 속 보이려나?

그래도 전략적으로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조금 괘씸해 보일 수는 있을 거 같다.

그러면 이번에 두 사람을 모두 올려도 다음 미션에서 뭔가 안 좋은 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냥 정정당당하게 하기도 좀 뭐 한데.

네 곡이나 준비하는 거 너무 귀찮잖아.

드림 스테이지 힙합 버전도 한 번 봐줘야 하는데.

벌려둔 일이 이렇게 많았는데 한국에 가서 너무 꿀 빨다 온 거 같기도 하다.

그래도 한 번은 가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힐링 타임으로 간 게 가장 크지만, 슈민을 만나 중국 걸그룹의 진행 과정도 확인했다.

오랜 시간 아주 천천히 가랑비에 옷 젖듯 파고들 생각이라 시간적 여유는 꽤 많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로운 건 또 아니니까.

“후우우.”

“웬 한숨?”

“한국에서 쉬다가 갑자기 바빠진 거 같아서.”

“넌 좀 바쁘게 지낼 필요가 있어.”

아인이 날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

으으, 얄미워.

아인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나로서 아인의 말에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얄미운 건 얄미운 거다.

오늘 밤에 확 울려 버릴까?

아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미국에 왔는데 민초 세 명과 루, 몰, 멜스를 한 번씩은 안아 줘야지.

그동안은 조금 예민하다는 이유로 섹스를 피해 왔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기가 쭉쭉 빨리고 온 게 기나긴 현탐에 원인이었겠지.

이제 현탐은 다 끝난 거 같다.

뭔가 의무 방어전 느낌의 섹스를 하니까 아무리 재밌고 쾌감이 쩔었다고 해도 성욕이 싹 사라지더라고.

덕분에 깨끗한 머리 상태로 며칠 잘 준비했으니까.

“흐음, 일주일 동안 네 곡을 준비하긴 너무 빡신데.”

컴퓨터에 앉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늘 촬영을 끝내고 들어온 참이라 피곤하긴 하지만, 놀고 있기엔 좀 그렇다.

내가 곡을 만들어야 두 여인도 연습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일단 오늘은 1차 경연곡 두 곡을 완성할 생각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두 명에게 전략을 말하고 조금 편하게 갈까 아니면, 정말 공정하게 경쟁을 시킬까.

으음, 이건 그냥 두 사람에게 물어보고 정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다.

곡 먼저 만들고 두 여인을 불러야지.

그렇게 작곡을 시작했다.

몰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반전이다.

귀염뽀짝한 느낌의 여인이 몸매를 드러내면 갑자기 포텐이 터진다.

곡도 그 비슷하게 만들어 주는 게 좋겠지.

그럼 귀염뽀짝한 느낌의 곡을 찾는 게 먼저다 2절에 확실한 포인트를 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래서 몰이 이기면 내가 생각한 데로 흘러가는 거니까 좋긴 하겠는데 루의 곡이 만만치 않을 거 같아서 걱정이다.

루의 매력은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활달하고 청량한 느낌이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라 어디선가 교태가 흐르는 게 그 매력을 확 살려 준다.

청량한 곡을 골라 2절을 교태 넘치는 섹시한 느낌으로 편곡하면 루에게 딱 맞는 주제곡이 나올 거 같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엄청날 거 같고.

루는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감 높은 매력을 보일 수 있는데 몰이 또 거기에 싸우기엔 좀 부족한 건 사실이다.

몰의 포텐은 반전이고 그 반전이 나오기 전까진 어쩔 수 없이 좀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의 포인트로 매력을 확 끌어 올리는 몰이라 루를 이기려면 루 무대 전체 보다 그 반전 포인트가 더 커야 하는데.

루도 나름의 청량함에서 섹시함으로 변하는 반전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힘들 거 같다.

그래서 몰이 이기려면 루가 봐주는 수밖에 없을 거 같긴 하다.

이걸 사실대로 말하면 몰이 조금 상처받을 거 같기도 한데.

아무리 내 여자라지만, 가요계는 냉정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는 게 몰에게는 더 좋을 거다.

“후우, 얼추 곡은 나왔네.”

머릿속에 있는 곡을 뒤져 결국 두 곡을 선택해냈다.

몰의 노래는 여성 댄스 가수의 데뷔곡이었던 노래로 경쾌한 노래에 귀여운 안무가 인기를 끌었던 곡.

루의 노래는 꽤 나이가 있는 가수의 가벼운 팝발라드 곡으로 그 가수 특유의 청량한 싸운드를 잘 살린 노래다.

두 곡의 1절은 원곡에 살짝만 손을 대 두 사람이 조금 부르기 쉽게 만들고 2절을 편곡한다.

몰에게 어울리는 편곡은 섹시함. 루에게 어울리는 편곡도 섹시함이다.

하지만, 둘의 섹시에는 꽤 커다란 차이가 있다.

몰은 큐티 반전 섹시고 루는 교태로운 섹시니까.

루도 보고 있으면 귀엽다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몰의 귀여움은 압도적이다.

뭔가 새끼 동물을 보는 거 같은 귀여움이 있으니까.

루의 귀여움은 그냥 활달한 여자에게 보이는 귀여움이라 루보다 동생이나 여자들은 루를 귀여워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몰은 누가 봐도 귀엽고 소중한 느낌을 주는 가련한 느낌이 있다.

작은 체구도 확실히 역할을 하고 있지.

“후우, 다 했네.”

두 사람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열심히 곡을 만졌더니 금방 곡이 완성됐다.

이제 두 사람을 불러 볼까?

조금 시간이 늦었지만, 두 사람은 연락을 바로 받았다.

작업실로 내려온 두 사람.

“둘 다 1차 경연 곡은 완성됐어.”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서로를 보는 두 여인.

같이 싸우던 전우에게 칼을 겨누려니까 감정이 조금 묘하겠지.

“곡을 들려주기 전에 해줄 얘기가 있어.”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해서 공정하게 1차 경연을 하면....”

루가 이길 확률이 꽤 높다. 패자전에 몰이 가는 거보다 루가 이길 확률도 높고.

몰이 지금까지 버틴 건 사실 운이 좋아서도 없지 않아 있다.

이번에 루가 양보를 하면 몰은 또 살 수 있다.

루의 패자전은 어떻게든 내가 이기게 해 주겠다.

단지, 그렇게 하면 내 의도를 눈치챈 사람이 있을 거고 그게 이슈화 될 확률이 높다.

그러면 당연히 다음 경연에 안 좋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자! 공정하게 할래? 아니면 전략적으로 할래?”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사실상 선택은 루가 하는 게 크다.

몰은 루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으음,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그래도 마음씨 좋은 루는 몰을 보며 질문을 했다.

몰이 원하는 대로 해줄 요량이겠지?

“나는....”

몰이 입을 열었고 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살짝은 예상한 결과였기도 하다.

다음화 보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