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박으면 악상이 떠올라-354화 (354/450)

354.

루와 릴리에게 내가 요구한 무대의 컨셉은 고풍스러운 섹시다.

너무 야한 거 말고, 너무 노골적인 거도 말고.

야한 노래지만 야하단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는데 섹시한 그런 모순되는 느낌.

두 사람 모두 감도 못 잡았네.

노래가 진행될수록 내 표정은 굳었다.

“으음.”

노래가 끝나고 내 평가를 기다리는 두 사람.

“우선 루.”

“네!”

“노래랑 전혀 안 어울리잖아요.”

“히융, 그, 그래요?”

귀여운 표정이지만, 여기서 봐줄 순 없지.

“뭐, 차차 느낌을 찾아가면 되겠죠. 일단은 노래에 숨소리를 더 넣어서....”

루의 노래에 할 수 있는 피드백을 모두 했다.

“제가 한 얘기 기억하면서 연습하고 있어요.”

“네! 열심히 할게요!”

거의 혼난 거나 다름없는데도 텐션이 좋은 루.

진짜 발랄한 캐릭터네.

순정 만화 주인공 느낌이랄까?

캔디 같은 여성에 딱 어울리는 그런 캐릭터다.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겠지만, 침대에서는 앙앙대며 울겠지?

어우, 벌써 기대되는데?

“흠흠.”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릴리가 기다리지 못하고 기침 소리를 냈다.

“릴리.”

“네.”

“노래에 섹시함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노래에 우울한 감정을 담으면 어떡해요.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루에게는 나름의 피드백이 있었다.

뭘 어떻게 바꿔서 어떤 느낌으로 노래하라는.

릴리는 피드백할 거리가 없다.

그냥 잘못된 점만 줄줄 나열했다.

이건 마인드의 문제니까.

아마도 섹시한 무대에 거부감이 있는 거 같다.

“릴리. 이 곡 하기 싫어요?”

“아니요.”

“그럼 왜 그래요?”

“느낌을 모르겠습니다.”

신랄한 비판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무뚝뚝한 감정 없는 목소리.

으음, 릴리에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던 거 같다.

“좋아했던 남자를 생각해 볼래요?”

“좋아했던?”

“네. 사귀었던 사람도 좋고 짝사랑도 좋아요.”

릴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설마 없어?

“없는데요.”

진짜? 없다고? 무슨? 감정이 없는 사람인가?

아니,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지금까지 오디션이 진행되며 종종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표정을 보였으니까.

연기는 아니었겠지?

촬영 중이었으니 연기였을 수도 있나?

“릴리. 혹시 레즈비언이에요?”

“아뇨. 이성애자일 겁니다.”

“근데 좋아했던 남자가 없어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습니다.”

으음, 이거 문제가 심각하네.

이러니까 섹스어필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지.

“으음, 혹시 정신적인 문제가 있나요?”

진짜 사이코패스인가? 이건 짚고 넘어갈 문제인데.

감정을 못 느끼는데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근데 슬픈 노래는 또 곧잘 하잖아?

“문제가 있긴 합니다.”

“흐음, 제게 말해줄 수 있나요?”

“개인사입니다만?”

말해주기 싫은 건가?

“노래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선 감정을 느끼는 게 중요해요. 근데 릴리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묻는 거예요.”

“아!”

내 설명을 듣고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거 같다.

노래는 잘 부르기만 한다고 끝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어야 진정한 가수라 할 수 있다.

단지 스킬만 좋아서는 감정을 건드리기가 쉽지 않다.

물론, 대가 중에는 노래를 너무 잘 해서 본인은 아무렇지 않지만, 청중이 감동하는 때도 없는 건 아니다.

그건 한나 정도나 돼야 가능하겠지?

릴리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대부분 가수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청중이 함께 느끼도록 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같은 감정을 느끼고 노래를 통해 공감하는 것.

팬들이 가수에게 원하는 모습이다.

물론, 아이돌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릴리는 아이돌이 아니니까.

“음, 어릴 때 일이에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릴리.

꽤 무서운 이야기였다.

자신의 어머니는 유명한 스타였고, 그 때문에 납치당했다가 풀려났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크게 다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원망을 받으며 살다가 괴한에게 어머니마저 죽었단다.

방어기제로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느끼는 감정이 매우 약해졌으며, 슬픔 말고 다른 감정은 잘 모르겠단다.

“으음.”

이거 생각보다 큰 사건을 겪었구나.

근데 릴리의 어머니가 누구길래?

물어보면 조금 그런가?

릴리의 성은 데이비스.

릴리가 흑인이니까 어머니도 흑인이었을 확률이 높겠지?

데이비스 성을 가진 흑인 여성 뮤지션이라.

와! 머릿속에 한 여인이 떠올랐다.

빌리와 더불어 이른 나이에 떠나 아쉬운 가수를 말할 때 꼭 등장했던 그녀.

엘라 폭스 데이비스.

미국 알엔비계의 전설적인 가수다.

결혼 후 자신의 성 뒤에 남편의 성을 붙여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됐었지.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종종 엄마 아빠의 성을 모두 붙인 애들이 있었다.

그 정도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가수.

괴한에게 습격받아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녀는 노래뿐만 아니라 인권 운동에도 열성적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 사건을 겪었다.

그중에 딸 납치 사건과 본인이 습격당한 사건은 유명했고.

사람이 죽었으니까 아무래도 더 알려졌겠지.

그 엘라의 딸이 릴리였다니.

아니 이걸 왜 아무도 몰랐지?

이 정도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면 방송국에서 미리 알 수도 있을 텐데.

“으음, 이 사실을 방송국이 모르나요?”

“잘 숨겼으니까요.”

뭐, 어떻게든 숨겼나 보다.

하긴 사건이 있고 시간이 꽤 오래 지났으니까.

릴리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이상 숨기긴 어렵지 않았겠지.

데이비드라는 성도 흔한 편이고.

“릴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노래하는 건가요?”

“어려서부터 엄마의 노래만 듣고 자랐어요. 노래 말고는 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노래도 딱히 잘 하는 건 아닙니다만?

뭐, 일반인치고는 꽤 하는 편이겠지만.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엄마의 친구분께 도움을....”

엘라와 같이 인권 운동을 하던 여인에게 거둬졌다고 한다.

그 여인은 자신을 딸처럼 대했지만.

자신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노래에 취미가 붙었고.

이런저런 커뮤니티에 부른 노래를 올렸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집 밖으로 오디션을 보러 나온 거라고 한다.

기구한 사연이네.

이걸 이용한다면 꽤 인기를 끌 수도 있겠다.

물론, 실력이 받쳐줘야겠지만.

지금 실력으로는 어머니 이름에 먹칠했다고 욕이나 먹지 않을까?

한나의 딸인 리사는 한나의 영향으로 이미 훌륭한 보컬로 성장해 있었지만.

릴리는 원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음, 생각해 보면 엘라가 노래를 소름 끼치게 잘 한 가수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과 그에 어울리는 감수성 넘치는 가사.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노력이 그녀를 돋보이게 했지.

노래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하진 않았다.

아! 물론, 노래가 영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충분히 가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불렀다.

단지 전설로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으음, 이 사실을 계속 숨길 거예요?”

“딱히 숨길 의도는 없었는데요.”

이걸 어쩌나.

이용해? 말아?

뭔가 도박 수 같은데. 양날의 검이다.

나에게 피해가 오는 일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데.

릴리 인생이 너무 많이 변할 테니까.

이건 릴리의 결정에 맡기는 수밖에.

“뭐, 릴리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네요. 지금 중요한 건 감정의 전달이죠. 으음, 남자 때문에 가슴 앓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을 멈추고 릴리를 본다.

어떡하지? 방법이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여기서 내가 뭔가를 하기에도 지금 꼬무룩 상태다.

릴리의 사연을 듣고 기계적으로 변한 릴리를 보고 있으니 성욕이 돌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 생각하면서 릴리를 꼬시기는 또 뭐하고.

마기를 사용해 보컬 실력을 늘린다고 해도 지금은 딱히 좋아지지 않을 거 같다.

릴리는 기본기가 꽤 잡혀있으니까.

소리는 조금 더 좋아지겠지만, 딱 그 정도.

감정을 느끼고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으음, 릴리.”

“네.”

“일단 감정에 관해서 공부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마땅한 방법이 없다.

으음, 한나나 토리스에게 조언을 구해야겠다.

“으음, 릴리는 일단 오늘은 돌아가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릴리는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다.

이번 오디션에서 뭘 보여주지는 못할 거 같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데뷔하는 게 그녀에게도 이득일 거 같다.

“루, 연습은 잘 했어요?”

“네. 들어 보실래요?”

릴리의 사연을 듣고 대화를 나누느라 한 시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루의 노래가 변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

한 시간 동안 얼마나 변하겠느냐마는.

한 시간 동안 뭔가 변했다면 그녀는 확실한 재능이 있는 거니까.

“흠흠, 아아.”

목을 풀고 노래를 준비하는 루.

갑자기 변한 표정에 살짝 기대된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음, 전혀 변한 게 없네요.”

“하앗.”

내 평가에 혀를 빼꼼 내밀고 서운한 표정을 짓는 루.

아 진짜 깨물어주고 싶다.

“그, 느낌을 잘 모르겠어요.”

“으음.”

하긴 어려운 느낌이긴 하다.

고풍스러운 섹시미.

이게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 그냥 풍기는 분위기니까.

분위기라는 건 눈으로 보고 따라 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그냥 섹시한 거 해볼래요?”

“네!”

루가 다시 표정을 바꾸고 섹시한 노래를 부른다.

한때 클럽에서 유행했던 노래라 익숙한 노래.

확실히 루는 섹시하다.

문제는 섹시함이 너무 적다.

압도적으로 귀엽다.

귀여움이 섹시함을 잡아먹는다.

나처럼 오랜 시간 음악을 평가한 사람이나 볼 수 있는 섹시미.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봐도 된다.

대중이 눈치채기 힘든 매력이니까.

“으으, 이게 아닌가요?”

“으음, 다른 방법이 필요할 거 같네요.”

섹시함을 높이는 건 힘들다.

귀여움과 발랄함을 죽이기는 쉽다.

발랄함을 최소한으로 죽이는 거다.

그럼 자연스럽게 섹시한 모습이 나올 테니까.

물론, 전체적인 매력의 총량이 감소할 수 있다.

그건 무대의 완성도로 메꿀 수밖에.

으음, 릴리도 문제도 루도 문제네.

이 팀은 어디와 붙어도 질 거 같다.

벨과 루팀을 붙일까?

희생양으로 패배시키고 릴리를 탈락시킨다.

그리고 신디네 팀과 넬팀을 붙인다.

내 예상이지만 높은 확률로 이기겠지.

몰과 로나 모두 마기로 업그레이드됐으니까.

넬도 가사는 완성했고 이제 연습만 남았다.

“하아. 잠깐 쉴까요?”

“네에!”

루와 함께 휴게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대결을 피하는 게 맞을까?

쉬운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정성을 쏟았다.

루에게 부족한 건 시간이다.

넬과 몰, 로나는 시간은 부족하지 않다.

넬은 몰라도 몰과 로나는 실력이 부족하다.

이건 시간으로 메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릴리도 따지고 보면 실력이 부족한 거지.

아니, 셋 모두 실력뿐 아니라 재능이 부족하다.

노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떠한 능력.

뛰어난 가수에게는 그런 능력이 분명 존재한다.

세 사람에게선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몰은 사람 자체의 매력이 있기에 혹시 모르지만.

릴리와 로나는 답이 없다.

릴리에게는 가정사라는 히든카드가 있지만.

그걸 쓰기엔 아직 이르다.

릴리는 나중을 기약하고 로나는 아마 얼마 안 가서 탈락하겠지.

그래. 루에게 집중하자.

어차피 우승자는 1명.

“루. 남자친구 있어요?”

“네? 아니요.”

“사귄 경험은 있죠?”

“으으, 없는데요?”

음? 이건 예상외인데?

루처럼 사교성 좋고 밝고 귀여운 애들은 많은 남자가 좋아할 수밖에 없다.

외모가 못난 거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홀릴 정도로 꽤 이쁘다.

거기다가 교태까지.

“주변에 남자 많지 않아요?”

“근데 갑자기 왜요?”

아! 너무 뜬금없이 물어봤다.

“이번 무대 컨셉을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서요.”

“아하! 저 주변에 남자 별로 없어요.”

“그래요?”

이것도 예상치 못한 답인데.

“으음, 왜요?”

딱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땐 직접 물어봐야지.

나는 루를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으, 비, 비밀인데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여자 좋아해요?”

“아, 아니요!”

“그럼 남자가 무섭거나 싫다거나 하는 문제예요?”

“아니에요!”

내가 말을 할수록 루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흐음, 비밀을 말해주긴 힘든가요?”

남의 개인사를 파고드는 느낌이지만 이건 중요하다.

고풍스러운 섹시를 보이기 위해선 남자 경험 여부가 중요하다.

모쏠 아다쉑이 바람둥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니까.

“으으, 그, 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하!”

대충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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