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박으면 악상이 떠올라-209화 (209/450)

209.

“안녕하세요! 제가 제일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냐. 아직 녹화시간 전인데 뭐.”

“왔어?”

효정 누님과 미리는 예전에 같이 듀엣곡도 내고 프로그램도 많이 해서 꽤 친한 편이다.

효정 누님이 여러모로 인맥이 많으신 거 같다.

“헤헤. 언니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같아요.”

“어머, 얘는 아줌마 놀리면 못 써.”

“에이, 누가 언니를 아줌마로 봐.”

20살 가까이 차이 나는 누님과 살갑게 대화하는 미리.

왜 효정 누님과 대화할 땐 늘어지는 목소리가 아니냐.

방송용 톤과 비슷한 거 같다.

“피디니임! 보고 싶었어요오.”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미리는 다시 늘어지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종잡을 수가 없네.

“하읏!”

미리를 꽉 안아 줬다.

“어머어머, 너희 설마? 나 촉 되게 좋아아?”

“헤헤, 그런 거 아니에요오. 반가워서 그렇죠.”

“하하, 누님 촉 좋으신 거 맞죠?”

나는 살짝 당황했는데, 미리가 웃으며 상황을 잘 넘겼다.

으음, 미리는 이런 거로는 상처 안 받나 보네?

아니면 거짓말이 익숙한 거려나?

흐음, 아주 만약의 경우엔 날 진짜 애인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아무 사이 아닌 건 아니죠.”

“그러엄?”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하는 누님.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어머, 어머머, 진짜?”

“아직 말 안 했는데요?”

“비밀로 할 사이가 또 뭐가 있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완전 친한 프로듀서와 가수 사이죠!”

“아이, 그게 뭐야!”

실망하는 효정 누님.

“하하, 그냥 장난 한 번 쳐 봤어요.”

“치이, 정말 둘이 뭐 없어?”

“그럼, 뭐가 있어야 하나요?”

“흐음, 서로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는데.”

나와 미리는 눈을 마주치고 찡긋 웃었다.

“봐봐. 이거 진짜 분위기가 이상한데에?”

“에이, 언니. 그런 거 아니에요오.”

“넌 말투 좀 고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여전하구나?”

“헤헤. 제 트레이드 마크를 왜 고쳐요오.”

고개를 끄덕인다.

미리는 특유의 나른하고 힘 빠진 목소리가 정말 듣기 좋다.

뭔가 실신할 때까지 뒤치기 하고 싶은 느낌?

“흐으음, 봐봐요. 제가 이러니까 피디님 눈빛이 음흉해 지잖아요오.”

“아니, 뭐가 음흉해?”

“호호, 둘이 반응 보니까 했네. 했어.”

“아니, 누님은 하긴 또 뭘 합니까?”

하긴 했지만,

혹시 여기 카메라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 멘트들이 꿀잼이긴 하지만, 방송에 나가면 꽤 곤란할 거 같다.

“심사위원님들 준비 하실게요.”

“네!”

다행히 스텝이 적절한 타이밍에 대화를 끊었다.

우리 셋이 심사석에 앉았고, 진행자가 나와 참가자를 설명하고 무대를 진행한다.

이미 한번 해 봐서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으음, 초유 누님의 빈 자리를 미리가 아주 잘 채우기도 했고.

효정 누님 입담이야 검증됐고.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참가자의 퀄리티 정도?

곡이 너무 어려웠는지 제대로 소화한 사람이 너무 없다.

“흐음, 어렵네요.”

“그러게.”

“후우, 피디님 곡이 너무 난해해요.”

“그런가?”

클래식이라고 그렇게 난해한 건 아닌데?

그리고 정통 클래식도 아니고 약간 록 발라드 느낌이 섞인 곡인데도 힘든가?

로커가 많이 참가하긴 했지만, 다들 고음만 땍땍거리고 제대로 노래한 참가자가 드물었다.

“고음만 잘 한다고 노래가 좋은 게 아닌데.”

“근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음을 지르는 거 말고 노래와 어울리는 창법을 모르겠어요.”

“그래? 흐으음, 어렵나?”

촬영을 잠시 중단하고 김 피디님을 불렀다.

“네. 프로듀서님. 무슨 문제라도?”

“으음, 참가자들이 방향을 잘 못 잡는 거 같아서요.”

“아, 그런가요? 음악 쪽은 제가 잘 몰라서. 그냥 듣기 좋으면 다 합격이었거든요.”

“흐음, 촬영을 미룰 수 있을까요?”

김 피디님이 고민에 잠긴다.

“제가 가이드라도 만들어 올 테니까 그걸 들려주고 다시 심사하는 거로 하죠?”

“아! 그런 건 가능하죠. 오늘 촬영분도 방송에 내서 분량 늘리고 하면 될 거 같아요.”

“그럼, 제가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까지 가이드 곡 완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김 피디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참가자들에게 공지가 나갔다.

난 심사석으로 돌아가 두 여성에게 말을 꺼낸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다시 촬영해도 괜찮을까요?”

“흐음, 그래?”

“왜요오?”

“제가 가이드 녹음해서 들려준 다음 다시 촬영하기로 했어요. 괜찮죠?”

참가자 들이야 스케쥴 바뀌어서 참가 못 한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뭐, 간절한 건 내가 아니니까.

두 사람이 제일 중요하긴 한데, 두 사람 모두 딱히 스케쥴을 많이 잡는 스타일이 아니라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흐음, 그게 좋겠다.”

“저도 동감해요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나요오?”

“일찍 끝난 김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난, 할 일 있어, 가야 해. 젊은 사람들끼리 먹어.”

으음, 장난스럽게 웃는 효정 누님.

“아이, 누님 정말. 하하, 같이 드세요.”

“아냐, 정말 가봐야 해.”

“정말이에요?”

“그럼, 내가 왜 이런 거로 거짓말하겠어.”

묘하게 아쉬우면서도 좋은 애매한 기분이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방송도 일찍 끝났는데 어딜 가시는 거예요?”

“후후, 그건 숙녀의 비밀이란다.”

“헤헤. 언니 다음 촬영 날에 봬요.”

“그래. 너도 남자 조심하고.”

말하며 날 보는 누님.

“아니, 왜 절 보시는 거죠?”

“호호, 그럼 난 먼저 일어날게.”

빠른 속도로 효정 누님이 대기실로 가셨다.

“흐음, 작업실로 가자.”

“작업실이요?”

“응, 가이드 녹은 네가 할 거야.”

“네? 제가요?”

말을 하니 김 피디님이 다가온다.

“오! 그럼 녹음 하는 거 촬영하는 건 어떻습니까?”

“흐음, 작업실에 촬영 준비하려면 꽤 걸리지 않겠어요?”

“흐음, 스텝들 지금 바로 보내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아뇨. 그냥 제가 카메라 하나 들고 찍어 보낼 게요.”

김 피디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융통성 없는 사람은 내 말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거 같다.

“으음, 그럼 제가 카메라 가져가서 촬영하겠습니다.”

“피디님 혼자서요?”

“네. 이 정도는 괜찮겠죠?”

“당연하죠. 그럼 슬슬 준비해서 가시죠.”

조연출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우릴 따라 오는 김 피디님.

원래 이렇게 융통성 있는 사람이 아닌데 웬일이래?

“프로듀서님. 잠시 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뭐 저쪽으로 갈까요?”

갑자기 김 피디님이 내게 독대를 요청했다.

뭐지? 무슨 문제가 있나?

“요즘 조금 이상한 일이 있는데,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려고요.”

“이상한 일이요? 무슨 일인가요?”

“프로듀서님 촬영하는 팀에 자꾸 사람 좀 넣어 달라는 요청이 오고 있어요.”

“흐음, 그래요? 뭐 스파이 같은 걸까요?”

김 피디님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 촬영 특성상 스파이가 있다고 해도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프로듀서님을 노리는 거 같거든요.”

혹시?

스님의 세력이나 마약 관련 세력이 내게 접근하려는 건 아닐까?

흐음, 위험하겠는데.

스님 관련 세력은 아닐 거 같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활동할 거 같지 않다.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만큼 사람들이 모르게 내게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제약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그쪽은 배제해도 괜찮을 거 같다.

그럼 마약 관련 단체가 제일 유력한데.

아주 희박한 확률로 내가 감옥에 넣은 사람들의 보복이나, 빌리 팬의 보복이 있을 수도 있겠다.

흐음, 적을 안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어쩔 수 없이 너무 많은 적을 만든 거 같기도 하다.

“일단 알고는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제가 막는다고 하지만, 언제 누가 들어왔는지 다 알 순 없거든요. 저도 늦게 알아채서 지금도 스파이가 있을지 몰라요.”

“으음, 더 신경 써야겠네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촬영장에서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뭐, 지금까지도 충분히 조심한 편이지만, 대기실에서 여러 가지 몹쓸 짓 많이 하긴 했지.

앞으론 하지 말아야겠네.

“오셨어요오?”

“응, 갈까?”

“네에에.”

잔뜩 풀이 죽은 미리.

일 끝났다고 기뻐했는데, 바로 힘든 일이 생겨서 그런 거 같다.

“녹음 잘 하면 알지?”

“헤헤. 알겠어요오.”

밝게 웃으며 말하는 미리. 억지로 올린 텐션인 거 같지만, 그래서 더 고맙다.

아인이 운전하는 차에 미리와 함께 탔다.

김 피디님은 혼자 오신다고 한다.

본인 차도 가지고 가야 하니까.

“하으으, 피디니힘, 흐응.”

“왜 이렇게 칭얼거려?”

미리가 계속 날 부르며 엉겨온다.

애정결핍에 가까운 이 여인은 몸을 돌려 내 위로 올라타 허벅지에 가랑이를 문지르고 있다.

그 때문에 아인도 신경 써서 운전하는 중.

뭐, 서울 시내는 어느 도로든 막혀서 제대로 달릴 수도 없지만.

“흐으응, 피디님 입원하셨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아, 그랬어?”

“그런데에, 연락도 안 하고, 갑자기 스케쥴만 잡고오오.”

미리가 살짝 화난 거 같은데?

“하하, 미안. 나도 정신이 없었어.”

“히이잉, 너무해요오오.”

“아이고,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우리 미리.”

“흣, 흐으응, 헤응, 이, 이런 거로, 흐으응!”

부드럽게 등을 쓸고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애무한다.

역시 켕기는 게 있을 땐 스킨십이 최고지.

특히 미리같이 애정을 갈구하는 애들에겐 더욱 효과가 좋다.

“하으응, 정마알, 흣, 흐으응!”

“앞으론 걱정 안 시키도록 노력할게. 요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

“운동이요오?”

미리가 표정을 찡그린다.

얘도 운동 엄청 싫어하지?

운동 싫어하는 여자 투 톱이 시연이랑 미리 아닌가?

“후후, 오늘 저녁에 운동 좀 시켜줘야겠네.”

“흐흣, 하으응, 운동은 싫은데에, 저녁 운동은 좋아요오, 헤헤, 헤응. 흐으으. 하으.”

묘한 웃음을 보이는 미리.

미리가 얼굴을 가까이하며 키스한다.

-츄르릅, 츄릅.

“하아아, 하아, 녹음 전에 못 하니까 아쉽네요.”

“어쩔 수 없지. 촬영해야 하니까.”

“히잉, 여기서 하면 안 돼요오?”

차에서 하는 건 너무 힘들다.

그것도 서 있는 차가 아니라 달리는 차에서는 까딱하면 다칠지도 모른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위험해.”

“흐으응, 지금 이대로 넣고 흔들기만 하면 되는데요오?”

“그리해서 만족할 수 있겠어?”

“히잉.”

축 늘어져 옆으로 돌아 좌석에 앉는 미리.

“김 피디님 가시고 하면 되잖아. 조금만 참자. 참을 수 있지?”

“알았어요오.”

미리를 옆으로 안아 애정을 듬뿍 담아 쓰다듬는다.

“헤헤.”

내 손길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는지 바로 반응하는 미리.

예쁘게 웃으며 내게 다시 안긴다.

작업실에 도착해 김피디님을 기다렸다 같이 올라왔다.

김피디님이 촬영을 시작했고, 나는 미리에게 가이드 녹음을 시켰다.

“음, 지금 느낌 좋다. 아니! 조금 더 강하게 질러 줘. 락 느낌 조금 빼 볼까?”

예전엔 신앙과 색기로 만들어진 곡에 목소리를 얹으며 조율하는 작업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내 귀를 믿고 더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 뿐이다.

“와, 프로듀서님 작업하는 모습 엄청 멋있게 나올 거 같아요.”

“그래요?”

미리가 물 마시며 잠시 쉬는 동안 김 피디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 누구나 전문적인 일에 열중한 모습은 멋있어 보이니까.

“촬영은 이 정도면 될 거 같네요. 완성본만 보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아직 녹음이 다 끝나진 않았지만,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긴 하다.

“오늘 녹음해서 바로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모레까지 시간을 생각한 건 생각만큼 노래가 안 나올 경우를 대비한 건데.

내 생각보다 미리가 잘 따라오고 있다.

으음, 신앙 없이도 미리는 역시, 훌륭한 가수다.

“나 피디님 마중하고 올게.”

“네에. 다녀오세요오오. 전 좀 쉴래요오오.”

“아! 안 나오셔도 됩니다.”

“에이, 그래도 가시는 모습은 봐야죠.”

김 피디님을 차까지 배웅해 드렸다.

다시 올라온 작업실. 미리가 뭘 기대하는지 얼굴을 붉히고 애타는 눈으로 날 본다.

“자! 마무리 가자.”

“네에에.”

물을 한잔 마시고 노곤하게 답하는 미리.

힘이 쭉 빠지는 어투네. 뭐, 원래 미리가 저렇기도 하고. 지금 기대한 걸 얻지 못해서 저렇기도 하겠지?

그래도 텐션 좀 올려서 하면 좋은데.

“방금 좋았어, 조금 박자를....”

그렇게 녹음이 끝났다.

“하으응, 피디니히임.”

부스에서 나오자마자 내게 안기는 미리.

“왜?”

“저, 잘 했어요오?”

“응, 너무 잘했어.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놀랐잖아.”

진심이다.

“헤헤. 그러엄.”

미리의 눈빛이 요염하게 변했다.

얘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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