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병원?”
신앙을 얻은 뒤로는 올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병원 신세를 지네?
몸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앙을 비롯한 기운들도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사라진 걸까?
“성민아!”
“아! 정비서.”
“어떻게 된 일이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몸을 일으켜 본다.
“아, 아니! 누워있어.”
“괜찮은 거 같아.”
몸을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다.
으음,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네.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고마워.”
“아이, 지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못 하잖아. 흐윽, 어, 얼마나 걱정, 끄흑, 했는데에.”
눈물을 흘리는 아인.
“누구한테 말했어?”
“아니, 흐끅, 아직.”
“잘 했어.”
다행히 아무도 모르고 있는 거 같네.
아! 혹시 기사가 뜨거나 하진 않겠지?
일단 병원에서 어떤 진단이 나오는지 확인은 할 필요가 있겠다.
아인을 보내고 병원에서 홀로 남아 검사를 받는다.
병원이라는 게 내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뭔가 빨리 되진 않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CT, MRI를 비롯한 여러 검사가 끝났고,
결과는 허무하게도 원인 불명의 일시적 뇌졸중.
병원에서 쉬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정리했다.
사라졌던 기억도 떠올랐다.
내가 희성 선배님께 약을 받고 그날 스님이 나타나 날 재웠고,
기억이 사라졌다.
스님은 아군이 아닌 거 같다.
근데 내가 뭘 할 수 있지?
신앙도 없어졌는데?
내가 병원에 입원했단 사실이 기사로 났다.
숨기려고 했지만,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하느라 시간이 지체됐고 결국 들키고 말았다.
수많은 전화를 받았고, 병문안은 모두 거절했다.
의욕을 많이 잃었다.
내가 새로운 곡을 쓸 수 있을까?
신앙도 없이 만든 곡이 지금처럼 사랑받을 수 있을까?
색기도 없는데 내 여인들은 계속 좋은 곡을 부를 수 있을까?
아니, 나와의 관계가 계속될까?
모든 고민이 꼬리를 물고 점점 더 날 잠식해갔다.
그냥 다 포기하고 어디로 들어가 혼자 있고 싶다.
“퇴원하겠습니다.”
“네. 안내해 드릴게요.”
결과가 나오고 경과를 지켜보자는 말을 들었지만, 그냥 퇴원했다.
아인이 있었다면, 다 처리하고 밖에서 기다렸겠지만, 이미 예전에 집으로 보내버렸다.
혼자 있고 싶어서.
홀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흠.”
적막한 집.
정신이 멍하다.
“뭘 해야 하지?”
아니! 내가 뭘 할 수 있지?
노래나 만들어 볼까?
익숙하게 컴퓨터를 켠다.
몰두할 일이 필요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멜로디를 찍는다.
그래, 이런 분위기로. 느낌은 이게 더 좋네. 음, 코드 진행을 좀 바꿔 볼까?
여기서 악기를 몇 개 추가해야 할 거 같은데, 음, 너무 난잡하다 조금 빼 볼까?
마기의 존재를 알기 전, 그때의 나로 돌아가 작곡하던 방식과 마음으로 곡을 만든다.
뭐, 보나 마나 뻔하고 별로인 곡이 만들어지겠지.
“일단 다 만들었다.”
한 곡이 뚝딱 만들어졌다.
“들어 볼까?”
좀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노래 하나 들어 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왠지 이 곡을 들으면 다 끝날 거 같다.
이 곡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을까?
과연 지금 상태로 엉망인 내 곡을 듣고 멘탈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한 곡만 더 만들어 볼까?”
결국, 회피를 택한다. 완성된 곡을 저장하고 다시 처음부터.
영감도 없이 막무가내로 곡을 만든다.
배경음을 깔고 멜로디를 찍고 악기를 넣었다 뺐다 해본다.
내 귀에 더 좋은 소리를 찾아 넣는다.
듣기 좋지 않은 소리를 빼낸다.
“벌써?”
너무 빠르게 두 번째 곡이 완성됐다.
“한 곡만 더? 아니, 아니야.”
듣지도 못할 곡. 만들어 봐야 의미도 없다.
조금 쉬자.
쉬고 나서 한 번 들어보자.
침대에 눕는다.
“으음.”
처음이다.
뭔가 어두운 감정이 들어찬다.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기분.
“외롭나?”
외롭다는 감정을 느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폰을 열어 누군가를 부르려다 고개를 젓는다.
그녀들은 예전과 같이 날 사랑하고 있을까?
노래보다 더 겁이 난다.
그녀들이 떠날까 봐. 그녀들이 더는 날 좋아하지 않을까 봐.
다 잊고 잠이나 자자.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멍하니 살아냈다.
살아간다기보단 단순히 연명했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배달원과 일주일에 세 번 청소를 위해 오시는 도우미 아주머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간간이 아빠가 찾아와 내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간다.
지금까지 달렸으니 푹 쉬라는 말만 하는 아빠.
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자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빌리 자살에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말부터.
뭔가 병을 얻었다는 말까지.
심지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소문도 돈다.
어쩌면 시한부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신앙도 사라졌고 내 이용가치는 다 한 거 아닐까?
언제 스님이 날 해할지 모른다.
죽이진 않더라고 뭔가 수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뭐라도 해야 한다.
근데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마기?”
문득 마기에 생각이 미쳤다.
과거에 마기가 말했다.
자신을 받아드렸다면 필생의 역작을 남기고 죽었을 거라고.
그게 천재의 숙명이라고.
세상이 그렇게 정해뒀다고.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제 내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래. 마기를 찾아보자.
희성 선배에게 받았던 약은 스님이 가져갔다.
희성 선배를 다시 만나볼까?
지금 내가 마기와 연결될 방법은 그뿐이다.
희성 선배에게 약을 전해준 그 단체를 만나야 한다.
그들이 약을 만드는 사람을 쉽게 만나게 해 줄 리 없다만.
일단 끄나풀이라도 잡아야 한다.
전화나 해 보자.
폰을 들고 잠시 심호흡한다.
정신 차리고 하는 첫 전화가 희성 선배님이라니.
조금 느낌이 이상하다.
-네.
“선배님. 안녕하셨어요. 성민입니다.”
-그래. 입원했다는 얘기는 들었네. 몸은 좀 괜찮나?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그래. 무슨 일인가?
내 전화에 바로 용건을 묻는 선배.
약 이야기를 바로 꺼내기가 조금 걱정이다.
“그, 그냥 안부 인사차 전화 드렸습니다.”
-그런가? 몸 괜찮아졌으면 한 번 보는 게 어떤가?
다행히도 희성 선배님이 먼저 만남을 제안해 주셨다.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가죠.”
-그럼 오늘 우리 집에서 한잔하지. 술 마셔도 괜찮은가?
“네. 문제없습니다. 준비해서 저녁때 뵙겠습니다.”
-그러게.
떨림이 무색하게 바로 약속을 잡았다.
술 조금 먹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말할 수 있겠지?
약은 그냥 잃어버렸다고 할까?
일단 천천히 나갈 준비나 하자.
화장실로 들어와 거울을 본다.
“가관이네.”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않고, 면도도 안 했다.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니다. 머리도 언제 이렇게 길었는지 산발이 돼 있었다.
“씻고 미용실 가야겠다.”
몸을 깨끗이 씻고 산발이 된 머리도 간단히 정리했다.
옷을 챙겨입고 나온다.
“얼마 만에 집 밖으로 나오는 거지?”
밖 공기가 낯설다.
매번 다니던 미용실이 아닌 동네에 가까운 미용실로 간다.
설마 날 알아보진 않겠지?
“어서 오세요.”
“네.”
“머리 자르실 건가요?”
“네.”
직원이 밝게 웃으며 날 반겨주고 자리를 안내해 줬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커피 한잔 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다.
희망이 생겨서 그런 걸까?
아니, 마기가 희망이라고 할 수는 없지.
단지 무언가 살아갈 목표가 생겼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거 같다.
근데 내가 신앙을 잃기 전에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았던 거지?
내가 삶의 목표가 따로 있었나?
의문이 든다.
나는 신앙을 잃고 왜 이렇게 절망했을까?
내가 뭔가 목표가 있었나? 그냥 되는 대로 살던 거 아니었어?
신앙의 상실감이 생각보다 큰 걸까?
“여기로 앉으세요.”
“아! 네.”
안내된 자리에 앉아 머리를 깎는다.
“오랜만에 깎으시나 봐요.”
“그렇죠?”
“많이 기르셨네요.”
“하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미용사와 대화를 나누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그래, 너무 복잡한 생각은 이만 접어두자.
“다 됐어요. 와! 인물이 확 살았는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뭐, 서비스 멘트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다.
아직 조금 시간이 남는다.
작업실에 가 볼까?
희성 선배님의 집은 작업실이랑 가까우니까.
“괜찮을까?”
내 여인들 모두 그대로일까?
뭐가 변하진 않았겠지?
마기가 사라졌을 때도 약간의 혼선은 있었지만,
모두 그 자리에 있어 준 여인들이다.
내가 그녀들을 안 믿으면 안 되지.
“믿자.”
택시를 타고 작업실에 도착했다.
작업실에 늘 있는 인원은 아마도 슈가 페어리 셋.
시연과 민하씨. 공연이 없다면 선유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녀들은 거의 여기서 살다시피 하니까. 초유 누님도 스케쥴이 없을 땐 연습실에 있을 때가 많다.
“흐음.”
작업실에 들어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익숙한 곳인데 뭔가 익숙하지 않다.
신앙이 없이는 처음 들어와 보는 작업실이구나.
컴퓨터를 켜고 그간 작업해둔 노래들을 듣는다.
그리고 클라우드에 자동으로 동기화된 노래 두 곡이 보였다.
“지금이라면.”
들어 봐도 되겠지?
떨리는 마음으로 곡을 내려받았다.
용량이 그리 크지 않아 금방 다운이 완료된다.
“후우.”
괜히 스피커 설정을 만진다.
후우, 그냥 빨리 들어보자.
프로듀서가 자기 곡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야 어떻게 곡을 주겠어.
곡을 틀었다.
음악이 흐른다. 첫 곡이 끝난다.
바로 나오는 다음 곡.
고급 스피커답게 음질이 아주 깨끗했다.
두 번째 곡도 끝이 났다.
반복 재생을 걸어뒀기에 다시 첫 곡이 나온다.
“음.”
이상하다.
다시 집중해 곡을 듣는다.
첫 곡이 끝나고 두 번째 곡도 끝이 났다.
“왜?”
왜 좋지?
내 귀가 이상한 걸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작곡 능력보다 곡을 듣고 평가하는 능력이 월등히 좋다.
작곡이야 온전한 내 능력이 아니었지만, 곡을 보는 안목은 온전한 내 능력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 있게 레돈 프로듀싱도 도전했던 거고.
“설마, 이것도 변한 걸까?”
나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한 곡 평가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들려줘 볼까?”
누군가에게 곡을 들려주고 평가받는 게 얼마 만이지?
작곡가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워낙 내 곡에 확신이 가득하다 보니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아무래도 작곡을 하는 선유한테 들려주는 게 좋겠지?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선유의 공연 스케쥴을 확인한다.
음, 오늘은 공연이 있지만, 내일 하고 모레는 쉬는구나.
내일 불러 봐야겠네.
아래에 연습하고 있을 슈가 페어리나 초유 누님도 좋지만,
시연과 민하씨를 부르는 게 좋겠다.
민하씨가 회사에서 일했던 만큼 곡을 보는 안목이 꽤 좋다고 들었다.
오랜만인데 전화로 부르기보단 내가 올라가는 게 좋겠지?
민하씨가 운동하고 돌아왔을 시간이라 둘 다 자리에 있을 확률이 높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적막한 스튜디오.
항상 시연이 앉아서 날 맞아주던 자리에 시연이 보이지 않는다.
방에서 쉬고 있나?
스튜디오 옆 방 문을 열어본다.
“없네?”
무슨 일정이 있나?
아니면 점심때니까 둘이 같이 외식을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그래도 회사소속 연예인들보다 운신이 자유로운 편이니까.
자주 같이 나가서 뭘 먹는 거로 알고 있다.
유티비에 맛집 탐방 영상이 꽤 있으니까.
“음, 아쉽네.”
괜히 쿨한척하며 불안한 마음을 털어낸다.
차라리 마주치고 부정적인 일이 벌어지는 게 낫지.
이렇게 심장 떨리는 긴장은 몸에 좋지 않은데.
원래 매는 맞을 때보다 맞기 전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연습실로 내려가 볼까?”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아우! 무슨 공포 영화 찍는 거도 아니고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냐.
도착한 연습실.
“조용하네.”
늘 연습실에 박혀 안무와 노래를 갈고 닦는 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건 좀 불안한데?
슈가 페어리 담당 매니저에게 전화해 스케쥴을 물어보자.
-네.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하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애들 어딨는지 아세요?”
-아! 오늘 앨범 컨셉 회의라 같이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다른 이유로 연습실에 없었던 건 아닌 거 같다.
컨셉 회의 내가 참여해야 했는데.
뭐, 나 없이도 잘 돌아가겠지.
문득 작업실에 나 홀로 있다는 생각에 뭔가 마음이 씁쓸하다.
이상한 느낌.
아니! 이게 우연이라고?
우연히 모두 자리를 비운 걸까?
뭐,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던 거겠지?
어쩔 수 없이 노래는 내일 선유를 불러서 들려주는 게 좋겠다.
천천히 연습실을 나가려는 데 누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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