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어차피 오디션에 내가 아는 몇 명 꽂아 넣었는데, 더 꽂는다고 문제 될 건 없지.
나중에 말이나 해봐야겠다.
그렇게 연습생들을 유심히 보며, 내 취향에 맞는 애들의 이름을 몰래 적었다.
너무 여자만 뽑으면 이상할지도 몰라 남자애들도 몇 적었지만, 바로 나가서 삭제할 생각이다.
“음, 그럼 평가할게.”
모든 무대가 끝나고 트레이너들이 한 명씩 평가한다.
누구는 뭐가 좋아졌고, 누구는 뭐 안 했니 하며 혼내기도 하고, 평가가 쭉 지나갔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음, 나중에 따로 말씀드릴게요.”
“아, 네.”
몇몇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몇은 내가 이름을 적은 애들도 있다.
기대되네.
그렇게 평가를 모두 지켜보고, 딱히 할 일이 더 없는 거 같아서 퇴근했다.
집에 오니 두 여인은 방송을 위해 돌아갔고, 집은 고요했다.
“청소하고 갔나 보네?”
깨끗해진 집에서 침대에 몸을 눕힌다.
얼마 만에 혼자 자는 건지 모르겠네.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났다.
몸에 아무런 터치 없이 깨어난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적당한 스트레칭 후 몸을 일으켜 씻는다.
“작업실 가기 귀찮아.”
아인이 없으니까 여러모로 불편하네.
내일은 아인이 불러야겠다.
하루 쉬었으면 됐지 뭐.
택시를 잡아 작업실로 향한다.
오늘은 우연의 녹음이 있다.
우연이 녹음할 곡을 조금 손보며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작업을 마치고 하품이나 하며 기다리니 우연이 들어왔다.
표독스러운 고양이상 얼굴.
길쭉길쭉한 체형. 모델 해도 잘 어울리겠다.
모델 체형이 춤 선이 이쁘긴 하지.
몸만 보면 초유 누님과 비견될 정도로 비율이 좋다.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표독스러운 얼굴이다 보니 살짝 색기가 묻어난다.
얘는 섹시한 거 하면 남자들 죽어나겠다. 아효는 못 이겨도 엄청난 섹시미를 뽐낼 수 있겠다.
“왔어요?”
“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아 짧게 이야기를 나눈다.
나에 대한 호감이 많이 올라갔을 텐데도 대부분 단답형으로 답하는 게 원래 말을 잘 못 하나 보다.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어는 스타일인가?
생긴 거랑 다르네.
“연습은 많이 했죠?”
“네!”
연습 얘기에 눈이 빛나는 걸 보니 자신 있나 보다.
하긴 저번에도 봤지만,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대단했지?
조금 놀려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불러 볼래요?”
“네.”
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주에 맞춰 적당히 리듬 타며 랩을 뱉는 우연.
으음, 잘은 하는데 내가 카디랑 있다 와서 그런가?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흐음.”
“마, 마음에 안 드셨나요?”
“잠시만요.”
이 노래에 카디가 랩을 하면 어떻게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실제로 들어본 랩 중에 제일 잘하는 게 카디니 카디를 대입해 생각해봤다.
으음, 카디가 EDM에 랩 하는 건 잘 안 떠오르네.
“잠시만요.”
카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이! 브로! 와썹!
“응, 지금 바빠?”
뉴욕은 지금 늦은 밤이지?
-아니 괜찮아.
“메일로 곡 하나 보낼 테니까 랩 좀 해봐 줄 수 있어?”
-당연하지.
“힘 빼고 대충 해도 돼. 신인 들려줄 거야.”
카티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기다리죠.”
“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우연은 뻘쭘하게 앉아 애꿎은 물잔만 만지작댄다.
카디가 메일을 보냈다는 문자를 했고, 바로 내려받아 헤드셋을 끼고 혼자 들어봤다.
음, 역시 카디는 다르네.
특별한 가사 없이 대충 흥얼대는 랩도 우연에 비하면 꽤 퀄리티가 높다.
“우연씨.”
“네?”
“이거 들어봐요.”
“네.”
우연에게 카디의 랩을 들려줬다.
“카, 카디 미나즈?”
“가이드라고 하긴 뭐한데, 한 번 부탁해 봤어요. 어때요?”
떨리는 눈으로 날 보는 우연.
하긴 이제 신인으로 데뷔하는 래퍼와 미국에서 이미 최정상 래퍼로 인정받은 사람의 랩이 같을 순 없지.
게다가 우연은 랩만 하는 거도 아니니까.
“대, 대박. 저 다시 들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들어도 괜찮아요.”
우연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헤드셋을 끼고 계속해서 노래를 재생하는 우연.
표정이 많이 없는 줄 알았는데, 계속 변하는 표정이 다채롭다.
우연은 거의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들었다.
“와, 정말.”
“어땠어요?”
“너무 좋아요.”
질투하거나 시무룩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의욕에 불타는 우연.
이런 모습도 좋긴 하지.
“하루만 시간을 더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하루가 아니라 며칠 더 드릴 수 있어요.”
어차피 녹음은 방송 일정에 맞춰야 하니까.
오늘도 임시녹음하면서 실력이나 보려고 부른 거다.
정식 녹음은 방송에서 할 예정이다.
“파일은 보내드릴게요. 어디 유포하시면 안 돼요.”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우연에게 유에스비를 들려 보냈다.
메일로 보내려고 했는데, 불안하다나 뭐라나.
내 생각엔 유에스비가 더 불안한데.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럼 연습실로 가시죠.”
“네!”
랩은 이 정도면 됐고, 춤을 보러 가야지.
연습실에는 스트레칭하며 몸을 푸는 초유 누님이 계셨다.
“안녕!”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두 사람.
초유 누님은 밝게 웃었고, 우연은 조금 머쓱해 했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죠?”
“그렇지.”
“네.”
서로 회포를 풀 시간 같은 게 필요한 사이는 아니니까 바로 춤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방송으로 찍어야 하니까 오늘은 간단히 점검하는 느낌으로 봐 주세요.”
“알겠어, 자기.”
초유 누님이 우연의 춤을 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했고,
나는 뒤에서 지켜봤다.
“후, 오늘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열기에 우연의 볼이 붉게 달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해 초유 누님은 살짝 볼이 붉어지긴 했지만, 아직 쌩쌩해 보인다.
젊은 애도 초유 누님의 체력은 못 따라가는 구나.
“체력 좀 길러야겠다.”
“하아, 네에. 흐으.”
우연의 신음 섞인 대답이 엄청 섹시했다.
조금 꼴리는데?
“후훗.”
“엇, 누, 누님.”
내 표정을 읽었는지 초유 누님이 조용히 다가와 내 몸을 살짝 터치했다.
“다음 스케쥴은 뭐야?”
“전 따로 없어요.”
“그래?”
노골적인 눈빛, 우연이 옆에 있는데 이래도 되나 몰라.
“우연씨는 이제 돌아갈 생각인가요?”
“가능하다면 더 연습하고 싶습니다.”
“얼마든지요.”
나는 샤워실과 각종 장비 사용법을 대충 알려줬다.
“난 좀 씻어야지.”
초유 누님은 연습실에 달린 샤워실로 가며 내게 윙크를 날렸다.
난 기다리면 되겠지?
“연습하는 거 봐도 되죠?”
“네.”
초유 누님의 조언을 들은 우연의 춤이 확실히 좋아졌다.
그래도 자꾸 거슬리는 움직임이 있는데, 왜 저러지?
자세히 지켜보니 오른쪽 발목이 조금 불편해 보인다.
“우연씨.”
“네?”
“오른쪽 발목 아파요?”
“앗! 그, 그게.”
우연을 불러 내 앞에 앉혔다.
“아, 지, 지금은.”
내가 거리낌 없이 발을 잡자 조금 민망해한다.
하긴 그렇게 연습했는데 땀이 좀 났겠지.
“괜찮아요.”
딱히 냄새가 나지도 않고.
우연의 발목을 잡고 신앙으로 확인한다.
상태가 말이 아닌데?
최근에 다친 게 아니라 오랜 시간 가혹하게 다룬 흔적이 느껴졌다.
“으음, 상태가 안 좋네요?”
“그, 그렇죠?”
“병원은 가봤어요?”
“그, 그게.”
우연이 뜸을 들인다.
“사실대로 말해 줄래요?”
나는 지긋이 우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추, 춤을 추지 말라고 해서요.”
“그래서 병원을 안 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우연.
참 대책 없네.
“후우, 그렇다고 발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놔두면 어떡해요?”
“이, 이번 노래만 받으면 데뷔하고 치료해도 될 줄 알았어요.”
“우연씨 몇 살이죠?”
“올해로 23살 됐어요. 왜요?”
확실히 어리네. 어리니까 몸 소중한지 모르지.
“아니에요. 음, 고칠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정말요?”
있겠냐? 신앙으로 고칠 수 있긴 한데, 공짜로 해줄 순 없지.
때마침 초유 누님이 나오셨다.
뽀얀 피부가 물기에 젖어 반짝거리는 게 아름다웠다.
“흠, 누님 혹시 우연씨 발목 안 좋은 거 아셨어요?”
“응? 그래?”
누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한다.
“춤출 때 조금 거슬리긴 했는데, 어디 잠깐 삔 줄 알았지.”
“으음, 우연씨 검사 좀 다녀와야겠어요.”
“그래? 흐으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녀와.”
누님이 말을 끝내고 내게 윙크했다.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연과 함께 위로 올라왔다.
“병원으로 가는 건가요?”
“아뇨. 제가 확인할 거예요.”
“네?”
놀란 눈으로 날 보는 우연.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
“제가 좀 특별하거든요.”
“아, 네.”
혼란스런 표정으로 우연이 날 따라왔다.
작업실에 들어와 화장실로 안내했다.
“일단 땀을 많이 흘렸으니 씻을래요?”
“여, 여기서요?”
“뭐, 어때요?”
“아, 그, 옷도 없는데.”
나는 웃으며 새 옷들과 수건을 꺼내왔다.
“어지간한 건 다 있어요. 우리 회사 소속 여가수가 몇인데요.”
“아아.”
“제가 부담스러우면 나가 있을까요?”
“괘, 괜찮습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부담스럽겠지.
“위층에 있을 테니까 다 씻으시면 올라오셔요.”
“아! 네.”
시연과 민하씨를 보러 잠시 올라왔다.
“피디님!”
“오셨어요?”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음?”
“헤헤.”
“좀 드실래요?”
닭가슴살 샐러드와 한식 도시락.
도시락은 시연이 먹고 있었고, 샐러드는 민하씨가 먹고 있다.
“식단하고 있어요?”
“나이가 있으니 관리해야죠.”
민하씨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고 시연을 빤히 본다.
“헤헤. 전 살이 안 찌는 체질이에요!”
“이거 뭐야?”
시연의 러브 핸들을 잡고 말했다.
“우웅. 그, 그건 피디님을 향한 제 마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시연이는 아직 관리가 필요한 몸매는 아니니까.
“그래도 시연아! 운동은 조금 하자.”
“저, 필라테스 등록했어요.”
“그래?”
“제가 억지로 데려갔지만요.”
민하씨가 끼어들어 시연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히잉.”
“잘 하셨네요.”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우연이 올라왔다.
“아! 안녕하세요?”
두 사람을 보고 인사하는 우연.
“그럼 난 가볼게요. 시연이도 밥 맛있게 먹고.”
“네! 들어가셔요!”
“가세요. 프로듀서님.”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우연과 작업실로 내려왔다.
확실히 인방으로 단련된 입담이라 대화를 나누면 시간이 금방 지난다.
“자, 여기로 들어가 보세요.”
“치, 침대.”
“응? 아! 밤샘 작업도 자주 하니까, 힘들면 여기서 쉬는 거예요.”
“아! 네.”
쪽방에 침대를 보고 놀란 우연을 진정시켰다.
하긴 작업실에서 잠시 쉬려고 놔둔 침대치곤 너무 크긴 하지.
“앉으시겠어요?”
“네.”
침대에 앉는 우연.
나는 바닥에 앉아 우연의 발목을 잡았다.
“아프면 말해 주세요.”
“네.”
사실 내가 뭘 알겠어? 그냥 발 쪼물딱 대는 거지.
춤추는 사람 같지 않게 귀여운 발이다.
씻어서 그런지 뽀얀 발이 귀엽게 느껴졌다.
발을 꾹꾹 누르고 돌리며 가지고 논다.
“괜찮아요?”
“하으, 차, 참을만 해요.”
간지러운 건지 아픈 건지 모를 신음에 살짝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꺄흣?”
“감각은 정상이네요.”
“아, 네.”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발을 주무른다.
“그, 저기 뭔가 하고 계신 건가요?”
“으음, 아직 상태를 보는 중인데, 뭔가 하려면 더 알아볼 게 있어요.”
“알아볼 거요?”
우연의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한다.
“발은 제2의 심장이란 말 들어보셨죠?”
“아, 네.”
“발이 심장이라면 발목은 심장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혈관이나 다름없어요.”
“그래요?”
내 말에 흥미가 있는지 집중해 듣는 우연.
미안하지만 개소리란다.
“혈관에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심장에 문제가 있겠죠?”
“그렇죠?”
“혹시, 별다른 문제를 느낀 적 없나요? 이상하게 체력이 안 늘어난다든지, 아침에 갑자기 피곤하다든지 하는 거요.”
“어? 있어요!”
체력은 원래 잘 안 늘어나고, 대부분 사람은 아침에 피곤하다.
“역시, 조금 봐야겠는데요.”
“어, 어떻게요?”
“음, 조금 민감한 부위지만, 제가 우연씨 건강 상태를 잘 알아야 하니까요.”
“그, 그렇죠?”
나는 몸을 일으켜 우연을 옆으로 이동했다.
“윗옷만 좀 벗어 보시겠어요?”
“아! 이, 이것만 벗으면 되나요?”
“일단은요.”
병원 놀이 컨셉도 재밌네.
우연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스포츠 브라가 보였다.
일반 브라였으면 더 이뻤을 텐데. 이 정도 복장은 헬스장만 가도 많이 입고 있는 복장이다.
“으음, 스포츠 브라네요.”
“아, 네. 춤출 때 편해서요.”
“어쩔 수 없이 이것도 벗어야 할 거 같은데요?”
“아, 그, 속에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우연의 눈을 지긋이 봤다.
“그럼 어쩔 수 없죠. 흐음, 건강 상태를 알아야 계약 얘기라도 해 볼 텐데.”
뒷말은 아주 조용히 말했지만, 우연이 못 들었을 리는 없는 크기였다.
“계약이요?”
우연이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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