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아침에 눈을 뜨니 나체로 널브러진 세 여인이 보였고.
팔짱을 끼고 탐탁잖은 눈으로 우리 모습을 보는 아인이 보였다.
“정비서?”
“아주 짐승들이 따로 없어.”
“하하.”
어제 우리가 하는 소릴 모두 들은 아인은 살짝 삐친 얼굴로 날 타박했다.
“이리 와.”
“아이, 싫어어, 먼저 씻기나 해. 스케쥴 가야 해.”
“스케쥴? 갑자기 무슨 스케쥴?”
미국에서 지금은 딱히 할 일이 없어, 세 여인과 계속 놀 생각이었는데.
그걸 탐탁잖게 생각한 아인이 스케쥴을 물어왔다.
마침 지인이 촬영지가 미국일 건 또 뭐람.
이번에 지인이와 김 피디님이 하는 여행 프로의 여행지가 미국이었다.
원래는 유럽이었던 거 같은데 왜 미국이 됐지?
다른 애들의 스케쥴에 관심을 안 가졌더니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른다.
“차로 꽤 가야 하니까 편한 옷으로 입어.”
“알겠어.”
세 여인을 깨워 말해주려 했는데, 아인이 그냥 메모만 놓고 가자고 한다.
왜? 깨면 따라올 거 같아서 그런가?
아인의 질투가 나날이 심해지는 거 같다.
언제 한 번 확실히 교육해 줘야지.
물론 교육은 좆 방망이가 효과가 좋으니 그걸로 해야겠다.
“어디로 가는 데?”
“시애틀.”
“차로 갈 수 있어? 오래 걸리지 않아?”
“일주일은 잡고 가야 한다던데?”
근데 운전해서 가려고?
“비행기 타고 갈 거야.”
“아, 그럼 차는?”
“다 방법이 있더라고.”
아인의 설명은 이 차를 다시 반납하고 시애틀에 있는 같은 업체에서 다른 차를 렌트하는 방법이었다.
나라가 크니까 이런 건 잘 돼 있네.
공항에 도착해 차를 반납하고 6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니 도착할 수 있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비행기 타고 이동하는데, 6시간이나 걸리다니.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으, 이틀 연속 비행기 타니까 피곤한 거 같아.”
아인이 볼멘소리를 냈지만, 나는 냉정하게 쳐다봤다.
“네가 잡은 일정이잖아.”
“헤헤. 나도 이게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다음부터는 내 허락 없이 스케쥴 잡지 못하게 해야지.
“아무튼, 이번만 봐준다.”
“아주 고맙네, 그려.”
할머니 같은 소리를 낸 아인이 앞장서 차를 가져왔고,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한 스타벅스 앞이었다.
“미국까지 와서 스타벅스야? 사람은 뭐 이리 많아?”
“후후, 여기가 세계 최초의 스타벅스래.”
“오! 그래?”
어쩐지 스타벅스에 줄까지 서서 기다릴 이유가 없지.
“구경 가자.”
“난 좀.”
우리가 관광 온 건 아니지 않니?
내가 언짢음을 표하자 아인이 잔뜩 시무룩해져 운전대를 잡는다.
“보고 와도 돼.”
“아니야. 혼자서 무슨 재미야.”
“후우, 잠깐 구경만 하고 가자.”
“헤헤. 고마워.”
바로 표정이 밝아지는 아인.
시무룩한 거 연기였지?
“와! 로고가 다르네?”
“그러게.”
줄을 서서 입장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주문은 하지 않아서 빠르게 들어왔지만, 대충 보고 빨리 나가야 할 거 같다.
“어? 성민이다!”
갑자기 들려온 한국말.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여성이 커피를 들고 날 보고 있다.
“아! 안녕하세요.”
“와! 팬이에요. 어떻게 여기서 만났죠? 사진 찍어도 돼요?”
텐션이 올라 내게 달려들듯 다가온 여인.
“죄송해요. 미국에 온 걸 비밀로 해야 해서요. 대신 사인 해드릴까요?”
“에이, 어디 안 올릴게요. 사인 말고 사진 찍어요.”
후우, 진상이네?
뭐, 빌리가 내 사진 찾아보는 거도 아닌데, 들킬 리가 없겠지?
아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여성과 스타벅스 로고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감사합니다.”
“네. 좋은 여행 되세요.”
올리지 말라고 계속 말하는 거도 이상해 그냥 웃으며 그녀를 보냈다.
뭐, 어디 올려봤자 SNS일 텐데 누가 알아보겠어.
별생각 없이 스타벅스를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왔다.
“촬영팀은 언제 만나?”
“여기서 만날 거야.”
“그래?”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 여기서 공연이 있다고 한다.
지인이 출연하고 있는 여행 프로는 외국과 국내를 번갈아 가며 여행하는데.
외국 여행 때는 거리공연으로 돈을 벌어서 생활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 해가 지고 조금 어두워지니 촬영팀이 도착했다.
“김 피디님.”
“하하, 안녕하셨어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잘 지내셨죠?”
“저야 똑같죠.”
피디님과 인사하고 작가님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인사를 마치자 지인과 현정이 다가온다.
“호호, 이게 누구야?”
“선생님! 여긴 어떻게?”
내가 오는 걸 몰랐는지 격하게 반기는 현정과 놀라서 펄쩍 뛰는 지인.
“서프라이즈!”
뭐, 내가 한 건 아니지만.
“깜짝 놀랐어요!”
지인이 내게 달려들어 안기려는 걸 살짝 잡아 말렸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지인이 얼굴을 붉히고 나와 악수를 했다.
다른 출연자들과도 인사를 마치고 나는 촬영지에서 조금 떨어졌다.
컨셉이 내가 몰래 등장하는 거란다.
그럴 거면 완전 리얼하게 하지, 인사 다 했는데 갑자기 만난척해야 하잖아.
시간이 지나고 공연이 시작됐다.
지인과 현정이 같이 노래도 하고 사이가 좋아 보여 다행이다.
이따가 지인이 따로 불러서 물어봐야지.
공연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상자에 돈을 넣고 간다.
공연이 거의 끝난 느낌이 들어 미리 준비한 금액을 꺼내 상자로 다가갔다.
“어?”
지인의 목소리.
“좋은 공연이었어요.”
“피디님!”
“하하. 안녕.”
세상 어색한 인사.
지인이의 연기는 좋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티 나는 연기였다.
“푸훗, 피디니임.”
“아이, 작가님 이거 못 하겠어요. 그냥 하래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몰래 온 컨셉인데 몰래 온 게 아니라서 못 하겠네요. 하하.”
출연자들이 날 보며 웃는다.
“그럼 정리 도와드릴까요?”
“네. 이거부터 해 주세요.”
그렇게 딱히 특별한 거 없이 출연진들과 어울려 공연장을 정리했다.
“피디님. 미국은 어쩐 일이에요?”
“음, 비밀.”
“헤헤.”
지인이 내게 다가와 재잘재잘 말을 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정 누님은 어때?”
“헤헤. 이젠 저한테 잘 해주세요.”
“다른 출연자들은 괜찮고?”
“네. 좋아요.”
다행이다.
김 피디님이 새로 구한 남자 출연자들은 딱히 관심이 없다.
적당히 예의만 차리고 벗어났는데, 나와 친해지고 싶은지 아까부터 한 명이 근처에서 쭈뼛댄다.
여자도 아니고 왜 저런담?
먼저 말 걸기도 그래서 그냥 지켜본다.
아마 나랑 친해지면 뭐라도 떨어질 거 같아서 그렇겠지?
승철 형님 대신 들어온 가수 선배님은 원래 과묵한 사람이라 할 일만 하고 무게 잡고 가만 계신다.
“다했다.”
“가요! 가요! 우리 숙소 엄청 좋아요.”
지인이는 내가 와서 좋은지 한껏 업됐다.
카메라에 귀엽게 담기겠네.
도착한 숙소는 지인의 말처럼 좋은 숙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간의 방송을 보면 여긴 꽤 좋은 편.
“근데 촬영지가 유럽 아니었어?”
“유럽이랑 미국 중에서 미국 먼저 왔데요.”
“왜?”
“우움,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김 피디님한테 물어볼까?
아니, 됐다. 이미 왔는데 뭐.
“이제 뭐 해?”
“장 봐서 밥하고 쉬어야죠.”
예능답게 장 보러 갈 사람을 간단한 게임으로 정했다.
“나이스!”
남자 둘이 먼저 빠졌고, 나와 지인 현정이 눈을 부라리며 대결에 임했다.
“어떻게? 한 명 몰아줄래? 둘이 갈래?”
“그래도 둘이 좋죠?”
“그래요, 둘이 가요.”
현정 누님은 몰아주길 원했던 거 같은데, 나와 지인이 둘이 가는 거로 정했다.
셋이서 한 게임은 테이블에서 병뚜껑 밀기.
각자 2개씩 병뚜껑을 받았고, 순서대로 가장 테이블 끝에 가깝게 뚜껑을 보낸 사람이 이기는 간단한 게임이다.
“자! 순서 정하자.”
남의 뚜껑을 쳐서 떨어트릴 수 있으니 순서도 중요한 게임.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고, 현정 누님, 나, 지인 순서로 정해졌다.
“흐음, 오늘 운이 안 좋네.”
현정 누님의 병뚜껑은 중간을 조금 지난 위치에 안정적으로 멈췄다.
“저것만 넘기면 되겠네요?”
“후후, 아직 기회는 한 번 더 있으니까.”
나는 뚜껑을 약하게 쳐 현정 누님의 조금 앞에 멈추게 했다.
“나이스!”
“헤헤. 제 차례죠?”
지인이 뚜껑을 쳤고, 테이블 밖으로 나갔다.
“히잉.”
“호호, 지인이는 탈락했네?”
“한 번 더 할 수 있어요!”
현정 누님이 다시 자세를 잡고 뚜껑을 날린다.
“아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감탄사지만, 그만큼 잘 보냈다.
끝에 거의 걸친 듯한 뚜껑.
쳐내지 못하면 무조건 현정 누님이 우승이다.
지인이는 잘 못 하니까 일단, 현정 누님 뚜껑을 쳐내야겠다.
“후우.”
“호호, 잘 해봐.”
옆에서 얄밉게 장난치는 누님.
나중에 봅시다. 아주 죽여드릴라니까.
정신을 집중하고 뚜껑을 손가락을 튕겨 쳐냈다.
손에 감기는 감촉이 좋다.
이건 잘 맞았는데?
내 뚜껑은 빠르게 날아가 현정 누님의 뚜껑을 쳐냈다.
“아좌!”
“아아, 너무해.”
“후후, 지인아 네 차례.”
지금 이 상황대로면 지인과 현정 누님이 장을 보러 간다.
현정 누님의 뚜껑을 떨어트리며 내 뚜껑도 떨어졌지만, 그 전에 올려둔 뚜껑이 내가 제일 앞이니까.
근데 생각해보니까 방송 나왔는데, 분량 좀 챙기려면 장 보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출연자들이야 공연하고 와서 피곤하겠지만, 난 딱히 피곤하지도 않은데.
지인이가 심호흡하며 뚜껑을 본다.
지인이는 자신이 안 가려면 제일 앞으로 뚜껑을 미는 수밖에 없는데, 나나 현정 누님의 뚜껑이 그리 멀지 않아서 불안했다.
“후우, 얏!”
귀여운 소리와 함께 뚜껑을 쳐낸 지인.
“엇!”
기세 좋게 날아간 지인의 뚜껑은 내 뚜껑을 맞춰 떨어트렸다.
“어마? 지인이 요 예쁜 것. 후후후. 다녀오시죠 프로듀서님?”
“아아, 지인이.”
“헤헤. 죄송해요.”
지인이 혀를 내밀고 살짝 웃는다.
뭐, 바라던 대로 분량은 뽑을 수 있겠네.
근데 아무리 봐도 지인이 표정이 노린 거 같은데?
아! 얘가 나랑 같이 장 보러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랬구나?
“너 일부러 그랬지?”
“헤헤. 비밀이에요.”
맞네. 지인이 돈과 장바구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 마트가 있네.”
“네. 그래서 좋아요.”
미국 마트답게 모르는 식재료가 많았지만, 아는 걸 고르기 시작했다.
“와! 고기가 정말 싸다.”
“헤헤. 소고기 좋아요!”
오늘 받은 돈이 꽤 많아서 적당히 구매할 수 있었다.
사실 피디님이 내가 왔다고 돈을 조금 더 주시긴 했다.
“이거 사자.”
“이것도 사요.”
그렇게 우리는 신혼부부처럼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장 봐온 사람이 요리까지 담당해야 해서 지인과 나는 주방에서 사 온 식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음, 무슨 요리 하시는 거예요?”
뒤에서 바라보던 젊은 남성 출연자가 다가와 물었다.
어디 아이돌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까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남자 이름 따위는 기억하지 않지. 후후후.
“아, 그냥 찹스테이크에 감자는 튀기긴 힘드니까 볶고, 계란은 그냥 프라이로 먹으려고요.”
소고기를 먹기 좋게 자르고, 양파와 피망, 양송이버섯까지 같은 크기로 잘 잘랐다.
불에 고기를 굽고 채소를 넣은 뒤 사 온 스테이크 소스를 부어 조금 더 익힌다.
“와! 요리 잘하시네요?”
“하하, 그냥 간단한 요리니까요.”
“히잉, 선생니임.”
내가 스테이크를 하는 동안 감자볶음을 하던 지인이 울상으로 다가왔다.
양파 조금 볶다가 감자만 넣고 볶으면 되는데 왜 그러니?
“감자가 다 으깨져요.”
“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감자는 색이 완전히 갈색으로 변했고, 주걱에 으스러졌다.
“지인이는 요리하면 안 되겠다.”
“흐엥.”
지인이 삐진 표정으로 후라이팬을 놓고 방으로 도망갔다. 지애 누나가 요리를 잘하니까 평소 집에서 요리 안 하겠지?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웃음이 터졌고, 나는 감자를 모두 으깨 그냥 계란을 삶아 샐러드처럼 만들었다.
“와, 이걸 살렸네요?”
“하하.”
완성된 요리를 다 같이 먹고 치우는 건 나머지 사람들이 했다.
장 봐온 사람에 대한 배려로 이렇게 하나 보네.
잠시 촬영을 중단하고 모두 쉬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거치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지만, 다들 이 시간엔 씻고 조금 풀어진 모습으로 지낸다.
나도 홀로 방에 들어와 씻고 잠자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선생니임?”
지인이가 내 방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응? 들어와.”
“헤헤.”
지인이 내 방에 들어와 주변을 둘러본다.
“여긴 카메라 없어요?”
“응, 내가 치워 달랬거든.”
“와아!”
“어이쿠!”
지인이 내게 달려들어 안겼다.
그대로 지인을 안고 쓰다듬으며 바닥에 앉았다.
“헤헤. 좋아요.”
“그래. 촬영이 힘들진 않고?”
“다들 잘 해주셔서 괜찮아요.”
“현정 누님은 어때?”
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선생님 곡을 준다고 한 효과가 있나 봐요.”
“다행이네. 그럼 조금 쉴까?”
“하읏, 여, 여기선.”
“뭐 어때. 소리 잘 참아 봐.”
지인의 은밀한 부분을 살살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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