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잘 부탁드려요. 사장님.”
“부사장입니다만?”
“헤헤, 저한테 돈 주시는 분이시면 사장님이죠.”
벌써 아부하는 건가?
그래 봤자 사장 자리에 관심이 없어서 효과는 별로 없는데.
손바닥을 비비는 모습이 귀여워서 넘어갔다.
“내가 스케쥴이 들쑥날쑥하니까 쉬는 날이 마땅치 않을 거야. 주말에 촬영이 없는 게 아니니까.”
“방송 나가?”
“아! 앞으론 방송에 꽤 출연할 생각이야.”
아인과 내 앞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인지도를 얻고, 믿고 듣는 작곡가라는 인식을 대중에 심으려는 계획을 밝혔다.
“대단하네.”
순수하게 감탄하는 아인.
동그래진 눈이 귀여워서 무심결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미안.”
“흐으응, 괜찮아.”
아인은 콧소리를 내며 내게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 머리를 내민다.
-딱!
“앗!”
이마가 반질반질해서 딱밤을 날려줬다.
“히잉.”
“아직 고용도 안 했는데, 너무 일 얘기만 했나?”
“나 고용된 거 아니었어?”
장난스런 내 말에 아인이 맞받아치고 그렇게 장난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아인이도 티키타카가 잘 되네.
성격 참 좋은 거 같다.
꽤 오랜 시간 대화하고 함께 잠들었다.
물론, 아인은 침대에서 나는 소파에서.
한 집에 여자와 둘이 있는데, 따로 자는 건 해봤나 싶을 정도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솔직히 아인과 같이 자려면 못 할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조심하게 된다.
아무래도 그간 색기에 너무 의지했던 거 같다.
내 색기로 물들이지 않은 사람이 날 좋다고 하면 믿기가 힘들다.
잃을 게 점점 많아져서 그런가?
아인에 관한 생각을 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시선을 느꼈다.
누가 날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슬며시 눈을 뜨니 꽤 예쁜 여성이 날 보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아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집에 왔으면 내 여자겠지?
확 끌어당겨 안으려다 아인과 함께 잠든 게 떠올랐다.
어우, 큰일 날 뻔했네.
눈을 비벼 시야를 회복하고 앞을 본다.
일찍 일어났는지, 깔끔한 모습의 아인이 보였다.
“사장님?”
“언제 일어났어?”
날 부르는 목소리에 물으니 아인은 그냥 웃기만 한다.
“세면도구 좀 썼어.”
“응.”
아인이 식탁으로 날 이끌었고, 간단히 차려진 아침이 날 반겼다.
“요리도 했어?”
“헤헤. 배달이야.”
“아아.”
아침밥도 배달되고 새삼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무난한 한식으로 시켜봤어.”
“잘 먹을게.”
“여기, 영수증.”
아인이 내게 영수증 종이를 건넸다.
고개를 갸웃하며 영수증을 받자 아인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비용 처리 안 해주실 거예요?”
“으음, 애매하네.”
돈 얘기는 왜 존댓말로 하냐?
그냥 사비로 먹은 거로 치고 넘어가도 되지만, 이런 건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나?
일단은 그냥 넘어가자.
영수증을 챙기는 척 지갑에 넣고, 밥을 먹었다.
소고기 뭇국과 간단한 반찬들.
집밥 감성이 가득한 식탁이다.
“식기에 다 옮긴 거야?”
“감성이 중요하지. 헤헤.”
앞에서 천천히 밥을 먹던 아인이 말했다.
“설거지도 내가 할 게.”
“아니야, 놔둬 청소하는 아주머니 오셔.”
“와, 가사 도우미 오는 집 처음 봐. 신기하네.”
별것이 다 신기하구나?
무시하는 발언이 될 거 같아서 드립을 참았다.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싱크대에 넣고 우린 고민에 빠졌다.
“뭐 하지?”
“으음.”
막상 둘이 집에만 있으려니 할 일이 마땅치 않다.
개인플레이 하기도 조금 꺼림칙하고, 뭘 같이 하려고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아! 보드게임 할래?”
“보드게임?”
민하씨와 했던 젠가가 떠올랐다.
우리 집에 그런 종류의 게임밖에 없긴 한데,
뭐, 대충 수위 맞춰서 놀 수 있는 게 있겠지?
간단한 보드게임을 준비하려는 데 자꾸 하나의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연인 밸런스 게임.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하나를 고르는 간단한 게임인데,
저거 하면 엄청 재밌을 거 같은데.
상자를 개봉해 카드를 봤다.
1단계부터 3단계로 나눠진 카드.
뒷면의 색이 초록, 노랑, 빨강인데, 순서대로 수위가 높아진다.
초록색 질문 몇 개를 보니 할만할 거 같다.
카드 더미를 가져가 아인에게 말했다.
“이거 재밌을 거 같아.”
“뭔데?”
아인이 카드에 관심을 보인다.
“밸런스 게임인데, 너무 센 거 말고 1단계만 해 볼래?”
“후후, 좋아. 상품 같은 거 걸까?”
“상품?”
아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고르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그럼 어떻게?”
아인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상대방 설득하면 소원권 어때?”
“그럼 절대 설득 안 당하지 않을까?”
“으음, 심한 소원은 안 할 거니까, 둘 다 양심을 걸고 해 보자.”
“뭐, 그래.”
그냥 하는 거보단 재밌을 거 같아서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자! 그럼 첫 번째 질문!”
내가 가져왔는데, 아인이 더 신나서 진행한다.
뒤집히는 카드.
“내 애인이 남사친 또는 여사친과 허용 가능한 스킨십은? 포옹 VS 팔짱!”
살짝 고민하는 아인.
나는 바로 답 나왔는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민하면 안 돼! 셋 하면 말해! 하나, 둘, 셋! 포옹!”
“팔짱!”
“오! 벌써 갈렸는데?”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불꽃이 튀기는 느낌이 들었다.
“포오옹? 포옹하면 전신이 닿는데? 팔만 닿는 게 더 낫지 않아?”
아인의 선제공격.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게 아니지. 포옹은 잠깐 하고 풀지만, 팔짱은 길게 하잖아.”
“아?”
아인이 어벙한 소리를 냈다.
이긴 거 같은데?
“포옹은 살짝 안고 떨어질 수도 있는 건데? 보통 팔짱은 꽤 오래 하는 거 아냐?”
“그, 그렇지?”
아인이 표정을 구겼다.
“소원권 하나 적립인가?”
“아, 아직. 그래도 팔짱은 팔만 닿게 할 수 있으니까 그 정도 스킨십은 오래 해도 상관없지.”
“에이, 움직이다 보면 슬쩍 닿기도 할 텐데?”
내가 강하게 말하자 아인이 필살기를 썼다.
“한국 여자는 대부분 작아서 잘 안 닿아.”
“푸웃!”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친구가 가슴이 크면 어떡해?”
“그, 그러면 팔짱도 포옹도 안 되지!”
“이건 답이 없는 문제다. 넘어가자.”
“그래. 그럼 다음 질문!”
논쟁이 끝날 거 같지 않아 질문을 넘겼고, 아인이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섹시함. VS 귀여움.”
“쉽네?”
아인이 읽었고, 내가 답했다.
“쉬워? 그럼 하나, 둘, 셋. 귀여움.”
“섹시함.”
와 또 갈렸네.
나는 당연히 섹시함을 말했는데, 아인이 귀여움을 말할 줄 몰랐다.
아! 아인이 좀 귀여운 스타일이지?
“에이, 섹시는 금방 질려. 귀여운 게 안 질리고, 귀여운 건 한 번 빠지면 답도 없다 얘.”
아인이 자신을 어필하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지! 보통 남자들이 귀여운 여자보다 섹시한 여자를 더 어려워하잖아. 섹시한 게 더 고차원의 매력이라 그런 거야.”
“아니! 섹시한 사람이 쎄 보여서 그런 거지, 귀여움보다 섹시한 게 더 강한 매력은 아니야!”
흐음, 보통 섹시한 여자를 귀여운 여자보다 높게 보지 않나?
“귀여운 애가 자기 섹시하다고 우기는 경우는 많은 데, 섹시한 사람은 자기 귀엽다고 안 해.”
“아닌데, 아닌데. 섹시한 여자도 귀여움 어필하는데?”
“누나는 선택한다면 섹시보단 귀여움?”
아인이 살짝 멈칫했다.
“누나라고 부르지 마아아.”
“아, 그래. 그럼 그냥 이름 부를까?”
“으음, 이름은 좀. 그래도 동생인데.”
“그럼 정비서? 어때?”
갑자기 호칭 문제로 넘어갔네.
아인이 말 돌린 거 같지?
“으음, 일단은 정비서가 제일 좋네.”
“그래서, 이번엔 소원권 나오나요오오?”
내가 말꼬리를 늘리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자 아인이 고개를 저었다.
“인정 못 해! 난 귀여운 게 좋아!”
“뭐 나도 귀여운 건 좋아. 섹시한 건 더 좋고.”
“씨이, 이것도 넘어가.”
“그래.”
아인이 거친 손놀림으로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오! 진지한 질문도 있네?”
“그러게.”
질문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VS 나를 좋아하는 사람. 이었다.
“하나, 둘, 셋,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 아!”
“이건 겹쳤네?”
“그러게.”
서로 소원권을 바라고 있는 만큼 바로 다음 카드로 넘어갔다.
“흠! 이건 좀 어렵네.”
“흐음, 그러게.”
“동생 있어?”
“아니. 넌?”
“나도 없어.”
이번 질문은 절친 동생과 사귀기. VS 내 동생이 절친이랑 사귀기.
“바로 가! 하나, 둘, 셋. 내 동생이 절친이랑!”
“내가 절친 동생이랑”
“갈렸네?”
내가 나서서 빠르게 진행하니 서로 다른 걸 골랐다.
“으으, 내 동생이랑 절친은 못 보겠어, 넌 그게 돼? 차라리 내가 사귀고 말지.”
“절친이 내 처형이 되는데? 난 그건 못 보지.”
“으음, 어차피 절친이면 상관없지 않아?”
이건 남녀 차이가 좀 있을 거 같다.
“이건 성별에 따라 좀 다를 거 같으니까 넘어가!”
“그래.”
그렇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본다.
한 달 동안 뽀뽀 VS 포옹 금지. 입 냄새 VS 발 냄새. 하루 24번 연락 VS 한 달 1번 연락. 등 질문이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전부 같은 걸 골랐다.
“1단계는 이게 마지막이다.”
“그래?”
바로 카드를 뒤집는다.
“오!”
“이야.”
우리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10년 이상 알고 지낸 남사친 또는 여사친 1명 VS 몇 달에 한 번 안부 묻는 남사친 또는 여사친 10명. 으으, 둘 다 싫다.”
“뭐 어때 친군데.”
“넌 남녀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아인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이게 화날 일인가?
“갑자기 왜 이래? 여사친한테 애인 뺏겨본 거 같다?”
“어읏!”
진짜였나 보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아인.
“크큭, 반응 너무 솔직한데?”
“후우, 열 받네.”
아인이 냉장고로 가 음료수를 하나, 아니, 저거 맥준데?
“맥주? 아직 점심도 안 됐는데?”
“몰라, 마시면 안 돼?”
“돼.”
뭐 술 마시는 데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거도 아니고.
마시고 싶으면 마셔야지.
아인과 맥주 캔을 따고 건배한 뒤 마셨다.
“크으, 좋다.”
“후우.”
술까지 꺼냈길래 아인이 썰이라도 풀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간다.
“자! 딱 정해! 하나, 둘, 셋. 열 명.”
“열 명.”
이번에도 같은 답을 말했다.
“에이, 재미없게. 우리 조금 비슷한 듯?”
“그러네.”
“2단계도 하자.”
“조금 야할 텐데 괜찮겠어?”
내가 도발하듯 묻자 아인이 씩 웃는다.
“뭐, 여기 애는 없잖아?”
“오! 방금 좀 멋있었다?”
“후후.”
술이 한잔 들어간 아인은 훨씬 편한 자세로 말하기 시작했다.
맥주를 쭉 들이켜고 카드를 뒤집는다.
“아! 이런 식이구나?”
“그러게, 생각보단 별거 없다.”
내 말에 별거 없다며 미소짓는 아인.
“그래도 1단계보단 확실히 조금 수위가 올라갔네.”
“후후, 그래 봤자 15세 이용가지.”
“그럼 확! 19세까지 달려?”
“콜!”
시원하게 건배를 하고 맥주도 달렸다.
아침부터 술이 들어가니 맥주일 뿐인데도 아인이 많이 업됐다.
아니, 그냥 술이 약한 걸까?
2단계 질문은 크게 맵진 않았다.
얼굴 VS 몸매, 집착 VS 무뚝뚝, 친구의 전 애인과 사귀기 VS 전 애인의 친구와 사귀기. 등
살짝 노골적인 질문도 있었지만, 대체로 1단계보다 그리 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의견이 갈릴 때마다 열띤 토론을 나눴지만, 술이 들어가서 뻔뻔해진 건지, 고집이 세진 건지 서로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카드를 한 장 넘기니 다음 카드 뒷장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오 2단계 끝이네?”
“흐으음.”
아인이 질문을 보고 살짝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읽어 보니 재밌는 질문이었다.
“애인 바지 속에 내 손 VS 내 바지 속에 애인 손.”
아인이 질문을 읽었고, 내가 카운트를 했다.
“하나, 둘, 셋. 애인 바지 속에 내 손!”
“내 바지, 헤헤.”
아인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웃었다.
“그래도 내가 주도적인 게 좋지. 애인 손은 내 맘대로 못 하잖아.”
“그래도 난 만져지는 게 좋은데.”
아인의 볼이 붉어졌다.
말은 당당하게 하면서 얼굴을 붉히니 분위기가 묘하다.
귀엽기도 하고, 살짝 설레기도 하는 묘한 감정 속 다음 카드를 집었다.
“이건 취향이니까 넘어가.”
“으응.”
마지막 단계 카드는 조금 더 성인용으로 노골적인 질문이 있겠지?
“가슴 VS 골반? 하나, 둘, 셋.”
짧은 질문이라 바로 읽고 카운트했다.
“가슴!”
“흐으음, 그럼 나도 가슴.”
“그게 뭐야.”
내가 가슴을 외치니 뒤늦게 아인이 가슴을 정했다.
“그치만 둘 다 자신 있는걸?”
아인이 살짝 옷을 당겨 몸의 굴곡을 드러낸다.
확실히 몸매가 좋긴 하다. 살짝 홀릴 뻔했다.
“후후, 그럼 넘어가고.”
다음 카드를 잡고 넘겼다.
“워후.”
“허허.”
아인이 환호와 비슷한 소리를 냈고,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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