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접어들면서 시작한 드라마가 세 달이 지나자 끝이 났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종결된 덕분에 진명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고 이젠 세희가 힘을 써주지 않아도 사방에서 그에게 드라마나 광고, 심지어 영화사에서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겨울방학이라 진명도 시간이 있어 주로 돈이 되는 쪽을 골라 광고를 찍고 후속 드라마를 결정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그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는 선영 때문이었는데 만약 현서와 결합하게 되면 선영은 진명이 그녀를 버리지 않을 지라도 굉장한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런 그녀에게 진명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멋진 식당을 차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명이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 대명절인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컷!”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그날 분의 촬영이 모두 끝나자 진명은 긴 한숨을 쉬고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어 보통 사람이면 몸살이 몇 번이라도 날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진명은 체력이 좋아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설에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좀 쉬어야지.’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
번호를 보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이진명 씨 핸드폰이죠?”
낯 선 여자의 목소리에 진명이 물었다.
“예.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음. 나 현서 엄마예요.”
“아. 안녕하십니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전화를 받은 진명은 깜짝 놀라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인사를 했다.
“우리 현서 잘 알죠?”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음. 현서 아빠가 오늘 사실을 알았는데 진명 씨를 좀 만나자고 하세요. 시간 되세요?”
“오늘은 촬영이 모두 끝나서 시간이 있습니다.”
“잘 됐네. 그럼 우리집으로 와줄래요? 우리집 알죠?”
“예. 알고 있습니다.”
“현서 아빠가 오후 세 시에 시간이 된다니까 그때 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진명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말투로 느끼기엔 현서 엄마는 나한테 그다지 나쁜 감정은 없는 것 같은데...’
진명은 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서가 전화를 바로 받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빠한테 전화 왔어?”
“아니. 엄마한테서 왔어.”
“뭐래?”
“오늘 집으로 오라는데? 아빠가 날 보자고 하신대.”
“음. 일단 만나자.”
“알았어.”
한강 고수부지에서 진명이 차를 세우고 잠시 기다리자 현서가 그의 차 곁에 자신의 차를 세웠다.
진명이 차에서 내려 그녀의 차로 들어가자 현서가 물었다.
“몇 시까지 오래?”
“오후 세 시.”
“음.”
현서가 진명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빠가 반대하시는 구나?”
진명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화가 많이 나셨어. 뭐. 예상한 일이긴 한데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화를 많이 내시네.”
“엄마는?”
“엄만 항상 내 편이긴 했지만 이번엔 배신감을 느꼈나봐. 항상 모든 일을 엄마한테 상의했고 숨기는 것도 없었는데 오빠 문제만큼은 내가 엄마한테도 말을 안 했거든.”
“이거 긴장 된다. 이번에 가면 엄청 깨지고 나올 것 같은데?”
진명이 웃으며 말하자 현서가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아랫배에 가져갔다.
“만져 봐.”
진명이 손을 대자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가 발로 가볍게 그의 손을 차는 것이 느껴졌다.
“아우. 발로 찬다. 이 녀석. 태권도 선수인 아빠 닮았나 보다.”
현서가 진명의 웃는 얼굴을 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빠. 우리 부모가 뭐라 하든 마음 약해지면 안 돼? 난 우리 아기를 위해서 부모와 싸울 결심이 돼 있고 최악의 경우엔 집을 나올 생각까지 있으니까.”
‘네가 집을 나오면 난 어떻게 하냐?’
진명은 현서의 말을 듣는 순간 집에 있는 선영과 진영의 생각이 났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서가 집을 나오더라도 얼마든지 먹여 살릴 수가 있고 태어날 아기도 양육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서와 아기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렵지만 선영에게 현서의 얘기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서에게 이모와의 비밀은 절대로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속으로 드는 생각을 숨기고 진명이 현서에게 말했다.
“현서야. 집을 나오겠다는 생각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마. 이제껏 널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배신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오늘 아빠의 화난 얼굴을 보니까 그런 극단의 생각까지 드네.”
“일단 내가 부모님을 만나볼게. 그러고 나서 우리 행동을 정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부모님 뜻을 거역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우리가 양보할 생각을 하자.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배신감이 들 거야.”
“알았어. 난 오빠가 오늘 상처 받을 까봐 그게 걱정이 돼. 우리 아빠, 보통 분이 아니거든. 뜻을 세우면 거두는 법이 없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이루고 마는 분이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현서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돼 있으니까.”
“후우. 알았어. 난 오빠랑 같이 갈 수 없으니까 잘 하고 와.”
약속시간이 되자 진명은 현서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집은 현서와 데이트 하면서 몇 번 와봤었지만 볼 때마다 위압감을 주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딩동-
진명이 벨을 누르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이진명입니다.”
“아! 잠시만요.”
문이 열리고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한 아름다운 여자가 그를 맞았다.
“어서 와요.”
현서에게 들은 바로는 이제 나이가 오십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현서의 엄마답게 나이에 비해 젊고 고귀한 품위가 흘러넘치는 여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진명이라고 합니다.”
진명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공손하게 절하자 그녀가 그의 얼굴과 몸을 한차례 훑어보다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화면으로 본 것보다 더 잘생겼네. 어서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진명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진명이 거실을 둘러보는데 족구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넓었고 화려한 실내 장식들에 집기들도 최고급으로 돼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현서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자 진명은 집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나 살폈다. 현서에게 들은 걸로는 그녀의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밑으로 여동생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는 게 아마도 현서 부모가 다 내보낸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자 안방문이 열리더니 현서 엄마가 한 남자와 함께 나왔다.
진명은 첫 눈에 봐도 낯익은 그가 바로 현서 아빠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진명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그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 쪽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진명이 어색하게 서 있자 현서 엄마가 그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현서 아빠가 지금 화가 아주 많이 나 있어요. 그 이가 이렇게 화 난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나도 많이 불안하네. 들어가 봐요.”
“예.”
진명이 그가 들어간 방안으로 들어갔다.
‘.....!’
그 방은 넓은 서재였는데 사방에 책장과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고 가운데는 책상, 의자, 침대 등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 앉게.”
한 쪽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진명에게 맞은편을 가리키자 진명은 침착한 태도로 그의 앞에 앉았다.
문이 열리며 현서 엄마가 차 두 잔을 가져와 그들 앞에 놓았다.
“고마워요. 이 젊은이하고 긴히 얘기할 게 있으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아요.”
“예.”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진명의 얼굴을 한 번 보다 조용히 물러났다.
“차 들지.”
그가 권하자 진명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진명은 뜨거운 차를 입으로 가볍게 불며 한 모금을 삼켰다.
진명의 침착한 모습을 보던 그가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런 문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돌리지 않고 말 하지. 대체 우리 현서를 어떻게 한 건가?”
진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
TV에서만 보던 유명 정치인에 재벌 총수다.
오십 초반인 그는 지금도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겼을 뿐 아니라 여자의 감성을 자극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명의 말에 그가 차가운 눈빛을 쏟으며 추궁하듯 말했다.
“우리 현서 이제 대학 1학년을 마쳤을 뿐이야. 그런 어린 아이에게 임신을 시키다니. 자네 젊은 나이에 인생 끝장내고 싶은 건가?”
그가 막말을 하자 진명은 순간,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속으로 긴 숨을 몰아쉬며 억눌렀다.
“죄송합니다.”
“죄송? 이게 죄송하다고 말 한 마디 하면 끝날 일이야?”
“현서가 지금 갖고 있는 아기의 아빠는 분명 제가 맞으니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거지? 설마 우리 현서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이제 완연한 반말이다.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해? 내가 볼 때는 그런 것 같은데? 천민 주제에 정상적으로는 우리 가문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현서를 유혹한 것 같은데... 어때. 내 말이 틀렸나?”
“아버님 생각은 맞지 않습니다.”
“맞지 않다고?”
그가 냉혹한 눈으로 진명을 보는데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진명은 벌써 몇 번은 이미 죽은 목숨일 정도로 그의 눈에는 독기가 어려 있었다.
“예. 저는 단 한 번도 현서의 집안이 탐나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진명이 침착하게 말하자 그의 침착함이 더 얄미운지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네 엄마 같이 하찮은 여잔 관심도 없고, 더구나 그따위 하찮은 여잘 걸고 하는 맹세 따윈 나한테 일 푼의 가치도 없다.”
그가 엄마를 모욕하자 진명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불꽃을 피웠다.
‘씨팔 놈이네. 개새끼.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엄마를 모욕하자 진명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그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한 방 날리고 나가버려?’
생각 같아서는 발차기 한 방 날리고 시원하게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현서와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자 진명은 입술을 깨물고 모욕을 참았다.
‘후우!’
한숨을 쉬고 진명이 두 눈을 감자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그가 눈에 이채를 발했다. 진명이 극단의 행동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실망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진명이 두 눈을 뜨고 그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시니 저도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말 해봐.”
“옛날 일에 대해 저를 추궁하신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현서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지울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과거는 그대로 두고 앞으로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좋아. 내가 말하면 그대로 따르겠나?”
진명의 말이 마음에 드는 듯 모처럼 그의 안색이 약간 풀어지며 말했다.
“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당연히 자네가 할 수 있지.”
“말씀해 보십시오.”
“우선 현서하고 헤어지게.”
“으음!”
현서와 헤어지라는 말에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신음소릴 냈다.
“왜? 내가 첫 지시를 내렸는데 그것부터 안 되겠나?”
그가 묘한 눈길로 진명을 보며 묻자 진명이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아기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지우기엔 이미 늦었으니 낳아야지. 하지만 아기도 자네한테 줄 수 없네.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키울 수 있으니까 아기 걱정은 하지 말고 그냥 자네는 조용히 현서의 삶에서 물러나주면 되는 거야. 물론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강제로 이별을 당하면 마음이 괴롭겠지. 하지만 그것에 대한 보상은 내가 해 주지. 자네 꿈이 연예계에서 성공하는 거라니까 내가 그쪽 방면으로 알아봐서 자넬 키워줄 것이고 금전적인 것을 요구하면 그것도 들어주지. 우리 현서는 말이야. 내가 그야말로 가장 기대하고 있는 아일세.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부모 말을 거역한 적도 없고 너무나 순수하고 착한 아이였어. 머리도 영리한 데다 리더십도 있어 난 두 자식이 따로 있지만 나중에 현서한테 내 모든 걸 물려줄 생각까지 갖고 있네. 그런데 자네 같은 날라리에게 우리 현서를 내줄 주 없지. 그것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되는 일이야. 만약 자네가 끝까지 반항한다면 그때부터 자네 인생은 지옥이 될 거야. 내가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서 자넬 파멸시킬 것이고 사실 자네 정도의 인간 하나 쯤은 눈 한 번 깜박거리는 정도로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어. 내 말 못 믿겠나?”
“아니. 믿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니 저도 살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군요.”
진명의 말을 듣고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자구책을 강구한다고. 설마 나하고 한 번 싸워보잔 말은 아니겠지?”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죠. 사랑하는 여자와 제 아기를 위해서 싸우는 일인데 설사 싸우다 죽은들 어떻습니까? 하지만 아버님도 저를 죽이시려면 대가를 좀 지불하셔야 할 겁니다.”
진명이 침착하게 말하자 그가 허허,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현서를 포기하지 못하겠단 말이지?”
“현서가 날 포기하면 포기합니다. 하지만 현서가 날 사랑하고 있는 한 나는 그녀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현서가 지금 이러는 건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야. 남자라고는 모르는 순진한 애가 네 달콤한 꼬임에 빠져 이러는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눈에 덮인 꺼풀이 벗겨지면 그때는 아빠의 이런 행동이 다 그 아일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땐 오히려 이 아빠에게 감사하겠지.”
“일시적인 감정일 지라도 현서의 지금 감정을 존중해 주십시오. 제가 현서하고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게 아닙니다. 현서와 결혼해서 팔자 고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우리 아기를 낳아 기르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서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결혼 절대 안 합니다. 현서가 처음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저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나이가 많이 어리고 아기를 낳아 잘 기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죠. 하지만 현서의 의자가 강했고 저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서 이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현서하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우리 가족으로 들어올 의사가 없다는 말인가?”
그가 조금 뜻밖이라는 듯 묻자 진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부족하지만 제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일구고 있습니다. 꿈도 있고 앞으로의 제 인생에 대해 충분한 자신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현서의 배경을 보고 그녀와 사귄 것이 아닙니다. 아버님이 절 믿지 않으시니 이제 진실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진실?”
“예. 아버님. 김정수를 아십니까? 박정화 씨 아들 김정수요.”
진명의 말을 듣자 그의 얼굴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자네가 정수를 어떻게?”
“정수와 저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지금도 같은 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수란 아이를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가?”
진명은 자신에게 시치미를 떼는 그를 보자 가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현서 친구 민정이를 아실 겁니다. 민정이와 정수는 Y대 경영학과 선후배 사이였고 그런 인연으로 서로 친해져서 민정이가 현서를 정수에게 소개시켜 주었죠.”
“으음.”
그가 진명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상황이 심각하게 변해간다고 느꼈는지 굳어진 얼굴이 풀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현서가 정수와 만났습니다. 그러다 정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둘 사이를 결사반대 했죠. 저한테도 둘 사이를 갈라놓아달라고 애원을 하다시피 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도 현서를 좋아했지만 친한 친구 정수가 먼저 현서와 만나고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었죠. 그런데 정수 어머니가 너무 심하게 반대를 하시면서 저에게 애원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수와 현서는 사귀면 안 된다고요.”
“으음.”
그가 침통한 신음소릴 내는 것을 들으며 진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계속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대체 왜 둘 사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냐고요. 객관적으로 보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이였는데 어머니가 그러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께서 저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몇 번이나 하게 한 뒤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정화가 자네에게 사실을 말했다고.”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었지만 어머니에게 정수는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 분도 고민 많이 하시다 결정한 것이죠. 하지만 아버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수와 현서 둘 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고 저도 죽을 때까지 발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도 돌아가신 엄마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겠습니다.”
진명이 그렇게 말하자 그가 이번에는 진명의 엄마를 모욕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사실을 듣고 저는 현서와 만났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겨우 손만 잡고 다닐 정도로 깊은 사이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정수에게서 현서를 떼어놓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관계였지만 저는 현서와 계속 만나면서 걔가 아버님 말씀처럼 너무 예쁘고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가 눈부신 보석처럼 아름답게 보였고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이 현서에게 빠져버렸습니다. 현서도 저를 많이 좋아하고 있고 그래서 아기까지 갖게 된 것입니다. 절대로 무슨 불순한 의도를 갖고 현서에게 접근한 게 아닙니다.”
“음. 그런 일이 있었나?”
진명에게 큰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이 전과 전혀 다르게 변했다.
“예. 그리고 저도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현서와 결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고려해 주십시오.”
“그래? 현서와 결혼할 생각이 없단 말이지?”
“현서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할 생각이 없습니다. 현서는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집을 나오겠다고 말을 했지만 제가 말렸습니다. 여태껏 낳아주고 훌륭하게 키워준 부모님을 배신하면 안 된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정말인가?”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으음. 그러면 자네 생각은 어떤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젠 그가 진명에게 의견까지 물어오자 진명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버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진명이 공손하게 말하자 그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
진명이 말없이 기다리자 한참 후에 그가 말했다.
“내가 조금 오해를 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우리 현서는 나이도 너무 어리고 결혼을 시키기엔 무리가 많이 따른다고 보네. 다행스럽게 우리 집안의 재력이 충분하니 아기는 따로 키울 수 있을 것이고 현서도 1년만 휴학하면 아무 일 없이 대학생활을 할 것이고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갈 거야. 문제는 현서와 자네 두 사람인데... 솔직하게 말해서 아직 자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 가족으로 들이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주게.”
“제가 걱정하는 것은 단 한 가지, 현서가 상처받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인데 그녀를 아프게 하고 눈에서 눈물 나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님은 저보다 더 현서를 사랑하실 테니까 우선 현서가 하고 싶은 대로 두시면 어떨까요?”
“현서가 하고 싶은 대로 둔다?”
“예. 지금 현서의 유일한 관심은 뱃속에 있는 아기니까 편하게 낳을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그 다음 문제는 서서히 풀어 가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현서를 설득해서 일단 결혼은 뒤로 미루자고 할 것이고 현서와 저의 관계는 제가 알아서 잘 해보겠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사이인데 강제로 떼어놓으시면 엄청난 비극이 초래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아기 문제를 해결하면 그 다음은 평소와 똑같이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지?”
“예.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 저도 아빠니까 가끔 한 번씩 볼 수 있게 해 주시면 되고. 현서와는 겉으로 전혀 표 안 나게 만나겠습니다. 두 번 다시 무책임하게 이런 일 안 벌이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중까지 우리 두 사람이 변하지 않고 또 제가 이 가문과 떳떳하게 결합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가 될 때 현서에게 청혼하겠습니다. 그때가 사십이 되더라도 제가 떳떳한 위치가 되지 않으면 현서와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지?”
그의 진명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풀렸다.
“예. 아버님은 정치만 신경 쓰시느라 잘 모르시겠지만 저도 제법 유명한 사람입니다. 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도 많고 아버님 나중에 대선에 나오시면 제가 발 벗고 나서서 돕겠습니다. 아버님도 저를 도와주시면 국민배우가 되려는 제 꿈이 훨씬 앞당겨 질 것이고 저도 나중에 정치로 뛰어들어 아버님처럼 대통령까지 해 볼 생각입니다. 아버님께 도움이 되면 됐지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저를 한 번 믿어 주십시오.”
“음.”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진명의 얼굴을 보며 한 동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현서가 아무 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넘어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그 녀석이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었어. 좋아. 내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아직은 아니지만 지금 자네가 한 말을 모두 지키면 내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네.”
“감사합니다.”
진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허허. 이 사람. 성질도 급하군. 어서 일어나게.”
진명의 곁으로 와서 그의 팔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이 처음 진명을 볼 때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밖으로 나온 진명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현서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정수와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현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잘 풀리자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기를 부모가 허락하고 키워준다면 두 사람은 여유를 갖고 충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정수나 민정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공개적으로 사귀는 것을 미뤄왔고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다른 연인을 사귄 뒤에나 드러낼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리자 진명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집으로 갔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영이 변함없이 그를 맞으며 활짝 웃는다.
“빨리 왔네?”
“응. 우리 이모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진명이 그녀를 안자 선영이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소미 없는 모양이네?”
“응. 정수하고 데이트하러 나갔어.”
“요즘 자주 만나네?”
“응. 잘 되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진영이는?”
“자고 있어.”
“아. 우리 딸 자는 모습 좀 봐야지?”
진명이 딸의 침대로 가서 곤히 자고 있는 진영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 딸. 아직은 아빠랑 항상 같이 있을 수 있겠다.’
현서와의 관계가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만약 당장이라도 그녀와 결혼을 한다면 선영이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고 이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은 진명이 정말 바라지 않는 것이기에 현서의 아빠가 결혼을 반대해 준 것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세월이 흘러 선영이 나이를 더 먹게 되면 그때는 현서와 결혼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진명은 딸의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설 연휴 첫 날이 되자 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현서야.”
“오빠! 빅뉴스가 있어.”
“무슨 일인데?”
“이번 설날 아침에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데 오빠도 오라고 그러네.”
“누가?”
“아빠가.”
“정말?”
“응. 아무 의미도 없고 그냥 식사나 하는 거라고 강조를 하지만 이것도 어디야? 잘 차려입고 와.”
“응. 알았다.”
진명이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설날이 되자 진명은 옷장에서 가장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양복을 골라 입고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현서의 집으로 간 그는 거대한 저택 입구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넓고 견고한 담이 마치 그가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크게 위압감을 준다.
진명은 입구에 서서 벨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현서의 목소리는 아닌 걸로 보아 아마도 그녀의 여동생인 것 같았다.
“이진명이라고 합니다.”
“아!”
안에서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와 함께 즉시 문이 열렸다.
진명은 문을 밀고 들어가며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이 거대한 저택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현서도, 이모도, 내 자식들도 모두 버리지 않고 끝까지 내가 지킬 거야. 두고 봐.”
진명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본 뒤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