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55)

학과수업을 마치고 진명은 체육관을 향해 걸어갔다.

촬영 때문에 항상 수업일수가 모자라 될 수 있으면 수업을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발신번호를 보니 민정이다.

“민정아.”

“선배. 지금 어디야?”

“수업 끝나고 운동하러 체육관 간다.”

“잠깐만 보자.”

“어디서?”

“저번에 우리 키스 하던 곳에서 보자.”

“오케이. 지금 갈게.”

진명이 그때 그 벤치로 가자 민정이 먼저 그곳에 앉아있었다.

“빨리 왔네.”

“앉아.”

진명이 그녀 곁에 바짝 붙어 앉자 민정이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촬영은 어때?”

“거의 드라마 끝나가는 시기라 몇 장면 안 남았어. 이거 끝나면 좀 쉴 수 있겠다.”

“고생이 많네.”

민정이 진명을 바라보는데 왠지 그 눈빛에 정감이 어려 있다.

“너도 공부하느라 힘들지?”

“응. 우리 과는 특히 죽어라고 공부하는 녀석들이 많아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그래서 그런가, 살이 더 빠진 거 같다.”

진명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선배. 키스하고 싶어.”

“할까?”

진명이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기척을 살폈다.

‘......!’

다행스럽게도 이쪽을 특별하게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진명이 민정의 얼굴을 붙잡고 진하게 키스를 했다.

쭉-

한참 동안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다 두 사람은 떨어졌다.

민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린다.

“씨. 왜 내가 먼저 이런 말을 해야 해. 자존심 상하게.”

“내가 먼저 하자고 하면 항상 허락해 주긴 할 거야?”

진명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그렇게는 못하지.”

“거봐. 그러면서 나한테 뭐라 그러냐?”

“그래도 남자가 먼저 청해야지. 거절을 당하더라도 남자라면 용기 있게 먼저 하자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아우 뭐가 그리 복잡하냐? 마음 가는 사람이 먼저 시작하면 되지.”

“하긴. 선배 말도 맞다. 그나저나 정수 선배가 걱정이다.”

“왜?”

“선배도 알지? 정수 선배 엄마가 현서하고 사귀는 거 반대한다던데.”

“응. 며칠 전에 정수한테 듣긴 했는데 두 사람 아직도 그러나?”

“지금은 더 심한 거 같던데?”

“큰 일이네. 이러다 여름에도 같이 못가는 거 아닐까?”

“그러게. 나도 걱정이야. 엄마가 너무 완강해서 정수 선배 요즘 거의 죽음이던데. 엄마랑 말 안 한지 여러 날 되나봐.”

“정말 심각하구나.”

그때 진명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세요?”

수화기 저편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진명이?”

“예. 누구시죠?”

“나. 정수 엄마야.”

“아. 어쩐 일이세요?”

진명이 놀라 묻자 그녀가 말했다.

“지금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을까?”

“예. 어디서 뵐 까요?”

“지금 학교지?”

“예.”

“내가 그리로 가서 다시 전화할게.”

“예. 그러세요.”

전화를 끊자 민정이 묻는다.

“누구?”

“정수 엄마다. 처음 걸려온 건데 내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아셨을까?”

“그거야 알려고 맘 먹으면 다 아는 거고. 아무래도 정수 선배 때문에 그러는 거 같다.”

“응. 그런 거 같은데. 만나면 뭐라 하지?”

“뭐. 선배가 할 말이 달리 있겠어? 그냥 말이나 들어주고 그 분 설득이나 잘 해 봐.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분 이해가 안 되거든. 우리나라에서 현서 같은 며느리 감이 어디에 또 있다고.”

“나도 그래. 뭐.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에이. 모처럼 선배하고 육체적인 접촉 좀 해보려고 했더니만 엉뚱한 사람이 흥을 깨네.”

“하하. 육체적 접촉? 거 참. 말만 들어도 마음이 묘해진다.”

“나름 진지하단 말이야.”

“그럼 어디 으슥한 곳이라도 찾아볼까? 정수 엄마 오려면 아직 시간 있는데.”

“싫어. 나보고 그 아줌마 기다리는 동안 시간 때워주는 역할 맡으라고? 다음에 보자.”

민정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명도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사람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너 그렇게 네 맘대로 행동하면 나 조금 불쾌해진다.”

민정이 그를 보며 웃었다.

“선배. 화났어?”

“그래.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한가한 사람인줄 알아?”

진명의 말에 민정이 찔끔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붙잡는다.

“아이. 선배가 그러면 무섭잖아? 화 풀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선배 하자는 대로 뭐든 할게. 그럼 됐지?”

“뭐든 다?”

“으응. 그래도 너무 무리한 거는 곤란하지. 하여튼 미안해. 나도 제멋대로인 성격 좀 고쳐야 되는데. 앞으로 조심할게.”

“그래. 알면 됐다. 가라. 다음에 보자.”

“미안. 갈게.”

민정이 사라지자 진명은 체육관으로 가서 정수 엄마가 올 때까지 샌드백을 쳤다.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하자 휴대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나야.”

“예 어머니.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 학교 앞인데 바로 나올 수 있어?”

“지금 운동하고 있어서 샤워 좀 하고 나갈게요. 장소 좀 알려주고 들어가 계세요.”

“응. 여기 앞에 비엔나 카페라고 있는데 알아?”

“예. 거기서 기다리세요. 곧 갈게요.”

진명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 맞는데...’

진명이 계속 두리번거리자 여자 종업원이 와서 그에게 물었다.

“여자 손님 찾고 계시죠?”

“예.”

“룸에 계십니다. 그리로 모실 게요.”

“아 예.”

진명이 종업원을 따라가자 그녀가 조그마한 룸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진명아. 어서 와라.”

정수 엄마가 앉아 있다 그를 반갑게 맞는다.

진명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메뉴를 놓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 룸을 사용하시려면 술을 드셔야 하는 데요.”

“음. 진명이 너 양주 한 잔 할래?”

“전 아무 거나 상관 없습니다.”

“여기 발렌타인 17년산 작은 걸로 한 병하고 안주는 과일로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잠시 후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왔다.

“우선 한 잔 하자.”

그녀가 진명의 잔에 술을 따르자 진명도 그녀의 잔에 양주를 따랐다.

“이런 자리 처음이라 조금 어색한데 진명이는 괜찮아?”

“‘예. 어머니랑 이렇게 술을 마시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어쨌든 기분 좋은 데요?”

“자. 건배하자.”

잔을 부딪친 뒤 두 사람은 작은 잔에 들어 있는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딸기를 하나 입에 넣는데 그 모습이 무척 섹시해 보여 진명은 아랫도리가 불끈 섰다.

“운동은 잘 돼?”

그녀가 묻자 진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촬영 때문에 시간이 없어요. 이제 곧 촬영이 끝나니까 운동할 시간이 늘어나겠죠. 정수는 요즘 어때요?”

“후. 사실 그것 때문에 널 보자고 한 거야. 우리 정수 요즘 공부는 뒷전이고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신다.”

“예?”

진명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러다 잘 키운 자식 페인 되는 거 아닌 가 싶어 요즘 내가 잠을 못자고 있어.”

진명이 그녀의 잔에 술을 다시 채우자 그녀도 그의 잔에 술을 채워준다.

“한 잔 더 해요.”

진명이 잔을 내밀자 그녀가 잔을 마주 부딪쳤다.

쨍-

이번에도 두 사람 모두 잔을 한 번에 털어 넣고 술을 다시 채웠다.

두 사람은 똑같이 연거푸 석 잔을 원샷으로 마신 뒤 다음부터는 술을 조금씩 나눠 마셨다.

“어머니. 이제 그만 정수, 현서하고 만나는 거 허락하세요. 정수 진짜로 폐인 만드실 거예요?”

“진명아. 내가 그럴 거면 뭐 하러 널 만나러 여기 왔겠니? 그 두 사람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왜 그러는 데요. 현서라서 안 되는 겁니까, 아니면 모든 여자는 다 정수하고 사귀면 안 되는 건가요?”

“으음.”

그녀가 괴로운 듯 술을 또 단 번에 털어 넣는다.

“어머니. 속마음을 확실하게 말해보세요. 오늘 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

“진명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솔직하게 얘기할게.”

“예.”

“난 우리 정수가 현서하고 사귀는 꼴 절대로 못 봐. 절대로. 이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야.”“정수가 폐인이 되거나 죽는 데도요?”

“으음. 그러니까 진명일 찾아온 거야. 진명이가 날 좀 도와 달라고.”

“내가 뭘요?”

“진명이가 정수와 현서를 좀 갈라 놔주면 안 될까? 마음 같아서는 사람을 사서라도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은데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서 너에게 정식으로 부탁하는 거야.”

“으음. 어머니는 내가 정수 친구라는 사실을 모르세요?”

“알지.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내가 진명이를 돈으로 사고 싶어.”

“예?”

“그냥 친구 엄마로서 부탁하는 게 아니라 고용주로서 진명이를 사고 싶다는 말이야. 물론 이런 일을 시키려는 이유는 다 정수를 위해서니까 그런 줄만 알고 그냥 일을 해주면 안 될까?”

진명이 한참을 생각하다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얼마를 주실 건데요?”

“얼마면 되겠어?”

“글쎄요. 이런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천만 원 정도면 되겠어?”

진명이 웃었다.

“어머니. 저 CF 한 번 찍으면 1억 정도 벌거든요?”

“그렇겠지. 그럼 얼마 정도면 되겠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두 사람을 갈라 주고 정수가 원래대로 돌아와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게.”

진명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시니까 제가 조건을 제시할게요.”

“응. 말해봐.”

“돈은 천만 원으로 하세요. 하지만 그 외에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뭔데?”

“어머니하고 제가 하룻밤 자는 거예요.”

“뭐?”

정수 엄마가 예상치 못한 진명의 말에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진명도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자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

“진명아. 난 친구 엄마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어머니. 지금 내 생각엔 어머니가 하는 행동이 더 이상하거든요. 정수가 그렇게 좋다는데 갈라놓으려는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안 가요. 두 사람이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번 사귀겠다는데 그것조차 막으려고 하는 게 정상일까요?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봐도 아마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은밀하게 부탁하는 거잖아? 너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난 납득이 안 가는 상황에서 어머니 부탁을 들어주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터 마음에 품어온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구요.”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예. 어머니 처음 본 날부터 너무 예뻐서 마음에 품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도 영영 고백을 하지 못할 거 같으니까 오늘 한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고 싫으시면 거절하면 돼요. 무리하게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마음이 결정되면 제게 연락 주세요.”

“으음.”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진명을 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섹시해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뒹굴고 싶었다. 하지만 최대한 냉정한 모습을 유지한 채 진명은 술잔을 내밀었다.

“어머니. 이 잔만 마시고 나가죠. 그리고 제 말, 너무 귀담아 듣지 마세요. 그냥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항상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가 되니까 그냥 고백 한 번 한 거니까요. 어머니가 거절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알았어. 너에게 먼저 무리한 부탁을 한 내게 책임이 더 있겠지. 어차피 돈으로 너를 사려고 한 사람은 나니까 너의 주장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해. 한 번 고려해 볼게.”

“예. 내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 게요.”

“그럴래? 오랜만에 마셨더니 좀 취한다.”

정수 엄마가 일어서며 비틀거리자 진명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둘은 같이 뒷좌석에 탔다.

“으음. 어지러워.”

정수 엄마가 얼굴을 기대오자 진명은 그녀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잡았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가 갑자기 진명에게 물었다.

“너 정말 처음 볼 때부터 날 좋아했어?”

“그럼요. 처음 보았을 때 어머닌 정말 천사처럼 예뻤어요. 얼굴도 어려 보여서 정수하고 나이 차가 얼마 안 나는 누나 같았으니까.”

“그때만 해도 젊었는데 지금은 많이 늙어버렸어. 나쁜 자식. 이 엄마는 나이가 들도록 저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엄마 마음 하나 헤아릴 줄도 모르고.”

‘......!’

갑자기 어깨가 축축해지자 진명이 그곳을 보니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고여 그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정말 왜곡된 사랑이지만 안타깝다.’

진명은 순간 엄마 유선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도 엄마와 그런 관계를 가졌었는데 아마 지금 이 여자도 아들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진명은 일부러 더 가벼운 어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니. 지금도 이십 대로 보여요. 어디 가서 불어보세요. 내가 거짓말 하나.”

“후후. 고맙다. 오늘은 정수보다 진명이 네가 더 친아들 같구나.”

“어머니가 원하시면 나도 언제든 아들 해 드릴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 맘을 편하게 가지세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니까.”

“과연 그럴까? 후우. 진짜 피곤하다. 한 숨 자고 싶어.”

“내게 기대고 한 숨 주무세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그래. 부탁한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진명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

그녀의 감긴 눈 위로 유난히 긴 속눈썹이 내려와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데 왠지 그 모습이 그녀를 더욱 외로워보이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집에 도착하자 진명은 그녀를 깨워 부축하고 그녀를 집까지 데려갔다.

“컷!”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진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진명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첫 드라마 촬영이 모두 끝난 것이다.

주인공들은 아직 남은 분량이 있었지만 진명은 자신의 분량을 모두 마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트장을 내려왔다.

진명이 휴대폰 전원을 켜자 바로 벨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진명 선배? 저 현서예요.”

“아!”

진명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웬일인가? 현서가 나한테 마음이...?’

“지금 안 바쁘세요?”

현서가 묻자 진명은 그녀가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 듯 고개까지 마구 옆으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시간 많은데. 지금 막 촬영이 모두 끝났거든.”

“아. 그럼 여기 좀 와주실래요?”

“왜?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예. 정수 선배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 정신을 못 차리네요.”

순간 진명은 급실망으로 돌아서 말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으응. 거기가 어딘데?”

“신촌이요. 우리 저번에 만났던 그 카페인데...”

“알았어. 곧 갈게.”

진명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석진 자리에 있는 현서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정수야!”

현서의 옆자리에서 고개를 탁자에 박고 있는 정수를 진명이 불렀다.

“으응.”

진명이 어깨를 흔들어봤지만 정수는 잠깐 고개를 드는 시늉만 하고 그대로 다시 인사불성이다.

“안되겠네. 내가 업고 가야겠는걸?”

“죄송해요. 괜히 힘든 일만 떠맡겼네요.”

진명이 정수를 들쳐 업자 현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한다.

“아니. 난 괜찮으니까 빨리 계산하고 나와. 차 가져왔지?”

“예.”

“가자.”

진명이 정수를 업고 밖으로 나오자 현서가 차를 그의 앞에 대령했다.

진명은 정수와 함께 차 뒷좌석에 타고 현서에게 말했다.

“정수네 집 모르지?”

“예.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운전 좀 해줄래? 내가 길은 안내할 테니까.”

“예.”

현서의 차로 정수네 아파트에 도착하자 진명이 다시 그를 차에서 내려 등에 업었다.

“선배. 난 그만 가 볼게요.”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정수 엄마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러기 싫어?”

진명의 말에 현서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선배랑 같이 가서 정수 선배 어머니한테 인사 드릴게요.”

“그래.”

딩동-

진명이 벨을 누르자 인터폰으로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어머니. 저 진명입니다.”

“아. 잠깐만.”

문이 열리고 정수 엄마가 진명의 등에 업힌 정수를 보았다.

“어머. 우리 정수 또 술 마신 거야?”

“예. 잠시 들어갈게요. 오늘은 현서랑 같이 왔어요.”

그의 말을 듣고 그녀가 몸을 굳히더니 현서의 얼굴을 보았다.

‘......!’

정수 엄마가 말없이 바라보자 현서가 그녀 앞으로 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현서라고 합니다.”

상대가 공손한 예의로 먼저 인사를 하는 데 그녀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그냥 현서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진명이 얼른 정수 엄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 정수 녀석 계속 업고 왔더니 너무 무거워요. 얼른 침대에 눕힐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 미안하다. 어서 들어오렴.”

그녀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자 진명도 현서에게 따라 들어오라는 눈짓을 하고 먼저 들어갔다.

털썩-

정수를 침대에 눕히고 진명이 한숨을 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 오늘은 되게 힘드네.”

진명이 두 팔을 번갈아 휘두르며 밖으로 나오자 정수 엄마가 물을 한 컵 내밀었다.

“수고했어. 마셔.”

“네. 고맙습니다.”

진명이 물을 마시고 그녀에게 말했다.

“정수가 요즘 술을 자주 마시나 봐요.”

그러자 그녀가 진명의 물음에 대답대신 현서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너 때문에 정수가 술을 마신다’ 는 표정이 정수 엄마의 얼굴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현서는 정수 엄마의 얼굴에서 호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음에도 웃는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정수 선배하고 만났는데 마음이 힘들다고 하면서 술을 많이 마셨어요.”

진명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좀 말리지 그랬어?”

“말렸어요.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너무 안 좋다며 오늘 하루만 용서하라더군요.”

“뭣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는 말은 하지 않고?”

현서가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정수 엄마가 대신 말했다.

“오늘 정수가 나하고 크게 싸웠거든.”

“어머니.”

진명이 그녀를 보며 뭐라 말을 하려하자 그녀가 먼저 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 줄래요? 나 너무 피곤하고 기분도 좋지 않아서 좀 쉬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현서의 말에 정수 엄마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진명은 정수 엄마의 눈길에서 심한 적의를 느끼고 당황해 현서의 얼굴을 보았다.

‘......!’

다행스럽게도 현서는 정수 엄마의 눈을 보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숙인 뒤 바로 뒤돌아섰다.

“어머니. 저도 가 볼게요.”

그러자 정수 엄마가 진명에게 말했다.

“내가 진명이 너한테 할 말이 좀 있는데 있다 가면 안 돼?”

“아. 알겠습니다. 현서야. 밖에서 기다려. 어머니하고 얘기만 잠깐 하고 나갈게.”

“예.”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쿵-

“어머니. 무슨 일인데요?”

“진명이 묻자 정수 엄마가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직도 진명이 네 제안, 유효한 거지?”

순간 진명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럼 내일 시간 내서 집으로 올래?”

“내일이요?”

“응. 시간 없어?”

“아니요. 오늘 촬영이 모두 끝나서 이제 시간 많아요.”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낮 3시에 집에 와.”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진명은 행여나 그녀가 마음을 바꿔 다른 말을 할까봐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서가 그에게 말했다.

“금방 왔네요.”

“응. 별로 중요한 말이 아니라서. 그만 가지.”

“예.”

현서의 차 조수석에 앉은 진명은 그녀가 차를 출발시키자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오늘 정수랑 무슨 얘기했어?”

“예. 정수 선배가 엄마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얘기했어요.”

“현서 자존심 많이 상하겠다.”

“네. 자존심 많이 상해요.”

현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정수 선배랑 오늘 확실하게 그 문제 매듭지었어요.”

“어떻게?”

“우리가 노력해서 어머닐 설득시키기로요. 어머니가 정수 선배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제가 그만큼 더 노력하면 되겠죠. 정수 선배도 많이 노력할 거구요.”

“그렇구나. 정수가 현서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가게 할 만큼 좋은 거네?”

현서가 잠시 말이 없다 진명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정수 선배. 사람이 너무 착해요.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또 날 많이 좋아해주니까.”

“뭐. 좋아해주는 거라면 나도 사실 정수 못지않게 현서 좋아하는데.”

진명이 웃으며 반 농담식으로 얘기하자 현서도 따라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나도 진명 선배 좋아해요.”

“얼마만큼? 만약 정수가 없었고 내가 사귀자고 하면 사귈 마음이 들 정도까지 되는 거야?”

“음.”

현서가 잠시 생각하다 그에게 말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심각하게 고민은 해 봤겠죠.”

“하하. 현서 지금 하는 말이 내겐 정말 기분 좋은 말인 거 알아?”

“아무튼 고마워요. 항상 정수 선배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는 거 같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유일한 친구니까. 나도 사실 정수하고 현서 때문에 고민 많이 했어.”

“왜요?”

“태어나서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사람 좋아해보는 것은 현서가 처음인데 하필 그게 제일 친한 친구의 여친이 돼버렸으니까 그렇지.”

“선배.”

현서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진명이 가볍게 웃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고 말 한 것뿐이니까 부담 같지마. 그냥 현서를 보면 자연스럽게 내 마음이 그러는 걸 나도 어떡하겠어? 아마 현서 얼굴을 본 남자라면 누구나 나 같은 생각 안 해본 적 없을 거야.”

“그래도 부담 돼요.”

“하하. 알았어. 다신 이런 얘기 안 할게. 그럼 됐지?”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다.

진명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현서가 집까지 데려다주자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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