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꽃샘추위도 한풀 꺾이고 날씨도 하루가 다르게 점점 기온이 올라간다.
퍽- 퍼벅- 퍽퍽퍽-
진명은 모처럼 시간이 나 학교 체육관에서 한 시간 정도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운동을 먼저 하는 습관은 들였지만 올림픽 준비하는 기간에 비하면 지금은 운동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연습량이 적었다.
이 정도로만 해도 워낙 그 동안 갈고 닦은 것이 많아 다음 올림픽 까지는 한 번 더 금메달을 딸 것 같았지만 연예계 쪽으로 계속 바빠진다면 운동은 그만 접어야할 지도 몰랐다.
‘뭐. 기량이나 힘이 떨어지면 미련 없이 물러나면 되지.’
스포츠를 직업으로 갖는 것은 어차피 수명이 짧다. 하지만 진명은 몸매관리를 위해서라도 운동은 멈출 수가 없어 이렇게 하루 꾸준한 양은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어이. 철각. 운동 열심히 하는구나. 대회라도 나가는 거야?”
언제 왔는지 승욱이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니. 오늘 시간이 좀 남아서. 너 본 김에 좀 쉬어야겠다.”
진명이 구석자리로 가 앉으며 승욱에게 물었다.
“참. 너 저번에 내가 소개시켜준 초희랑은 어떻게 됐냐? 따 먹었어?”
승욱이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아니. 걔는 얼굴도 꽤 반반하더니 역시 얼굴값 하느라 그런 건지 엄청 튕기더라. 시간 좀 걸릴 것 같다.”
“하하. 초희는 성격도 괜찮고 외모는 최상급이잖아? 연예 쪽에서 눈독 들이는 놈들도 많은 아인데 공 좀 들여도 되지.”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넌 고모 때문에 그런 거냐? 클럽엘 가도 여자하고 어울리기만 하지, 섹스는 안 하는 거 같더라?”
“응. 고모하고 사이가 좋으니까 그런 점도 있고, 이 쪽 업계에서 롱런하고 싶은데 처음부터 여자나 밝히는 놈 취급당하면 이미지 관리 상 불리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조심 하는 거야.”
진명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승욱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의 말처럼 진명은 연예계 쪽으로 발을 들여놓은 뒤 단 한 번도 그쪽 계통에서 일하는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다만 승욱이 그쪽 여자들을 워낙 좋아해서 몇 번 다리를 놔준 적은 있지만 직접 본인이 여자에게 들이댄 적도 없고 또 여자가 먼저 유혹을 해도 냉정하게 거절하고 다 물리쳤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조세희 때문이었는데, 아직도 그녀와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또 연예계 쪽으로는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세희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했다. 더구나 집에 가면 아름답고 매력 있는 섹스 상대가 두 명이나 있고 정신적으로 그의 마음을 채워주는 딸 진영이가 있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잠시 생각하고 있는 진명에게 승욱이 물었다.
“너 오늘 시간 있냐?”
“응. 오늘은 완전히 프리다.”
“잘 됐네. 오늘 클럽에나 가자. 초희 만나기로 했거든? 네가 옆에서 좀 거들면 빨리 개통식 할 것 같은데. 걔가 널 아주 좋게 보고 있더라고. 사생활도 깨끗하고 멋있는 오빠라고.”
“나 오늘은 정수 만나기로 했는데... 본 지도 오래됐고 해서 내가 조금 있다가 찾아 간다고 했거든.”
“그래? 같이 가자. 정수도 이제 2학년인데 됐는데 콧바람이라도 좀 쏘여야 하지 않겠냐?”
“하하. 네 말이 맞다. 오늘은 그 샌님 한 번 꼬셔보자.”
진명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승욱과 함께 정수가 공부하는 건물로 갔다.
“저기 정수다. 수업 다 끝난 모양인데? 어. 웬 여자야?”
승욱이 먼저 정수를 발견하고 소리치자 진명도 곧 그를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발했다.
‘저 녀석. 어쩐 일이냐? 여자하고 얘기를 다 하고.’
진명이 가까이 다가가 그를 불렀다.
“정수야.”
정수가 진명을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진명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그에게 다가갔다.
“수업 끝났냐?”
“응. 인사해라. 여기 우리 과 후배야.”
여자가 진명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박민정이라고 합니다. 정수 선배한테 얘기 많이 들었는데 TV에서 본 거보다 더 멋지시네요.”
“하하. 고마워. 정수 후배면 말 편하게 놔도 될 것 같은데. 괜찮지?”
“예. 저도 그게 편해요.”
민정이 승욱과도 인사를 한 뒤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린다.
“얘가 왜 안 오지?”
“누구 오기로 했냐?”
진명이 정수에게 묻자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말한다.
“으응. 민정이가 누구 좀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여자?”
“아. 그, 그래.”
정수가 얼굴까지 붉히며 멋쩍어 하자 진명이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우리 정수 많이 발전했다. 소개팅까지. 너 소개팅 처음이지?”
“아아. 소개팅은 아니고 그냥 얘가 하도 졸라서 그냥 한 번 얼굴만 보기로 했어.”
정수가 하는 말을 듣고 민정이 입술을 비틀며 웃는다.
“흐응. 어디 내 친구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한 번 두고 봅시다.”
자신감 넘치는 민정의 표정을 보고 진명은 문득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우리 학교 학생인가?”
진명이 민정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흔든다.
“아니. 바로 옆에 있는 S대학 다녀요.”
‘S대학이면 여기만큼은 아니어도 꽤 들어가기 어려운 곳인데... 흐음.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다 이 말이지? 그래도 정수 눈에 차려면 어지간해서는 어려울 걸?’
진명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민정의 몸을 훑어보았다.
‘......!’
키는 160정도에 몸매는 말라보일 정도로 날씬했고 얼굴도 꽤 지적으로 생겨 샤프한 멋이 흘러넘치는 여자였다. 정수와 같은 과 후배면 공부도 보통으로 해서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 영리해 보이는 얼굴처럼 실제로 머리도 아주 뛰어날 것이다.
진명이 민정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 정수가 여자 보는 눈이 무지 높은데 과연 어떨지 모르겠네?”
그러자 그녀가 진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수 선배 눈 높은 거야 저도 잘 알죠. 내가 사귀자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으니까.”
“하하. 그랬어?”
진명은 민정의 말하는 태도가 솔직하고 화통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오고 있는 친구는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예요.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얼굴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뭐? 그럴 리가 있나? 민정이는 미국영화도 안 봤나?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예쁜데.”
승욱이 미국에서 살다 온 티를 내며 참견하자 민정이 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말한다.
“그거야 주관적인 부분이 있으니까 시험지에 답안 제출하는 것처럼 같은 답이 나올 수는 없겠죠. 뭐, 내 친구니까 점수를 더 후하게 주는 것이기도 하겠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래요.”
민정이 자신 있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진명이 물었다.
“아주 친한 친구인가?”
“예. 고등학교 동창에다 같은 반도 두 번이나 한 친군데 공부도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며 했어요. 제일 친한 친구사이죠. 어. 저기 온다. 현서야! 여기야 여기.”
민정이 손을 흔들며 손짓하자 세 남자가 모두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민정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데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신음소릴 내고 말았다.
‘으음!’
‘......!’
그야말로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얼굴이 진명 앞에서 민정을 보며 웃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의 눈이 저토록 예쁘게 생길 수 있는 거지?’
진명은 호수처럼 맑고 흑백이 뚜렷한 여자의 눈을 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얼굴 어느 부분 중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단아한 이마, 오똑 솟은 콧날에 부드러우면서도 뚜렷하게 윤곽이 지어진 맵시 있는 입술을 보자면 절로 키스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더구나 적당한 굵기의 눈썹은 길게 뻗어 아름다운 눈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녀를 더욱 고귀한 공주처럼 보이게 했다.
진명은 그녀의 얼굴에서 단 한 가지 결점도 발견하지 못하자 시선을 몸으로 내려 그 쪽에서라도 흠을 찾아보려했다.
‘......!’
키는 165정도나 될까? 전체적으로 가녀린 몸이었지만 학처럼 우아한 목으로부터 이어진 가슴선은 잘 발달돼있어 벗겨보면 제법 풍만한 유방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밑으로 이어진 가느다란 허리와 또 그와는 정 반대로 잘 발육된 엉덩이, 그리고 그 밑으로 쭉 뻗어 내린 하체를 보자 진명은 갑자기 목이 말라 물이라도 벌컥 마시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외모가 완벽해서인지 여자는 별로 치장을 하지 않았다. 머리 스타일도 그냥 어깨까지 내려온 생머리에 가방을 어깨에 맨 옷차림도 수수해 보인다. 하지만 가방이나 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니 전부 명품 아닌 것이 없다.
‘이거. 집도 엄청 부자인가 본데? 아니면 벌써부터 스폰서를 물었나?’
진명은 뒤이어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며 시선을 돌려 정수의 얼굴을 보았다.
‘이 녀석 봐라? 완전 맛이 갔군.’
진명은 정수의 얼굴을 보고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보면서 녀석의 이런 넋 나간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다. 평소처럼 정수가 무관심했다면 자신이라도 꼭 들이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여잔데 지금 보니 정수도 자신 못지않게 여자에게 빠진 모양이다.
진명은 씁쓸한 마음으로 승욱에게 얼굴을 돌렸다.
‘......!’
승욱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자를 향해 말을 걸기까지 한다.
“여어. 김현서! 너였구나.”
“어머! 승욱 오빠?”
민정과 손을 잡고 웃던 그녀가 승욱을 보고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오빠. 이 학교 다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승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게 됐다. 아버지가 성의껏 넣어준 건데 지금도 학점 때문에 위태위태하다.”
진명이 승욱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야?”
“응. 너희들 국회의원 김상명씨 알지?”
정수가 눈을 반짝이며 승욱에게 물었다.
“국제그룹 대표이자 지금 여당 원내총무 맡고 있는 그 김상명씨 말하는 거야?”
“맞아. 진명이 넌 모르냐?”
“야. 우리나라에서 김상명씨 모르면 간첩이지. TV에서도 자주 나오잖아?”
“여기 현서가 그 김상명씨 막내딸이야. 그 분이 가족 중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데다 우리 쪽 계통에서도 좀처럼 얼굴을 안 보여주는 귀한 분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승욱이 장황하게 설명하자 현서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승욱의 말에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진명은 왈칵, 그녀를 껴안아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거. 내가 왜 이러지. 가만 보니까 이 여자는 내가 올라갈 나무가 아닌데. 정신 차려라. 이진명.’
아무리 신분이 격상했다고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이 현서란 여자는 진명의 상대가 아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외모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텐데 학벌도 상위에, 더구나 집안이 국제그룹이면 한명그룹보다는 약간 떨어져도 역시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막강한 재력이다.
한 마디로 진명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여자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승욱의 말을 듣고 있던 민정이 현서에게 물었다.
“저 선배 잘 아는 사이야?”
“아. 집안끼리 친해서 어렸을 때부터 가끔 봤어. 특히 몇 년 전, 미국 연수 갔을 때 오빠가 나 많이 챙겨줬었지?”
현서가 승욱을 향해 미소를 짓자 민정이 다시 물었다.
“저 선배도 그럼 재벌집 아들이냐?”
현서가 자기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운지 미소만 짓고 있지 진명이 나섰다.
“한명그룹 조기화 회장님 막내아들이야.”
“와우. 이거 완전 황태자님들만 모이셨군.”
진명은 거기서 자기는 빼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왠지 모르지만 이렇게 서로의 소개가 자연스럽게 되고 보니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묘한 열등감까지 든다.
진명이 침묵을 지키자 언변 좋은 승욱이 나섰다.
“가만 보니까 정수하고 현서 소개시키는 자리인 것 같은데, 정수는 나와 친한 친구이고 현서도 내가 잘 아는 사이니까 오늘은 내가 두 사람 확실하게 연결시켜주마. 마침 클럽에서 초희 만나기로 한 것도 있고 하니까 우리 전부 클럽으로 가서 오늘 한바탕 진하게 놀아보자.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하는 걸로 하고. 어때? 남녀 숫자도 딱 맞고 좋은데. 싫은 사람 있어?”
승욱의 말에 진명은 먼저 정수의 얼굴을 보았다.
‘......!’
싫어하는 표정이 아니다. 아니, 수 년 간 친구로 지내면서 진명은 정수가 이런 상기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다.
‘자식. 첫눈에 반해버렸구나.’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정수를 잘 알고 있는 진명은 그의 표정을 보고 한 눈에 모든 것을 짐작했다.
‘하긴. 나도 이렇게 마음이 쏠리는데 여자 경험 전혀 없는 네가 오죽 하겠냐.’
민정이 현서에게 말하는 소리가 진명의 귀에 들려왔다.
“현서야. 가자. 어차피 오늘은 나하고 놀기로 약속했잖아? 너. 대학 들어와서 한 번도 노는 자리에 가본 적 없지?”
“응. 그래. 오늘은 맘 먹고 나왔으니까 같이 가자.”
현서까지 동의하자 승욱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주 좋았어. 오늘은 멤버가 끝내주니까 끝까지 함 가보자.”
클럽으로 가는 데 차가 두 대여서 사람이 갈렸다. 승욱과 현서가 차를 가지고 왔는데 현서가 클럽의 위치를 몰라 진명이 그녀의 차에 같이 타기로 하고 승욱은 정수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
현서가 차에 오르자 민정이 타기 전에 진명이 먼저 조수석 문을 열고 그 자리에 탔다. 그러면서 민정이 뒷자리에 오르자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클럽 가는 길을 가르쳐줘야 하니까 앞에 타는 게 편할 거 같아. 민정이 괜찮지?”
“예.”
안전벨트를 맨 뒤 진명은 현서의 얼굴을 보았다.
‘아우. 옆모습도 죽이네.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예쁘게 생길 수가 있는 거냐?’
부드러우면서도 곧게 뻗어 있는 현서의 콧날을 보며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그래요?”
진명이 한숨을 쉬자 현서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향해 물었다.
“아니. 그 쪽 얼굴을 보니까 괜히 마음이 아프다.”
“어머. 왜요?”
“어쩌면 인간이 그렇게 생길 수가 있어? 혹시 외계인 아니야?”
“예?”
현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진명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 인생 그렇게 많이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현서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진명이 극찬을 하자 현서가 얼굴을 붉힌다. 그때 뒤에서 민정이 진명에게 말했다.
“현서 얼굴이 예쁜데 왜 선배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객관적으로 자격은 안 될지 몰라도 마음만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거든. 그래서 현서한테 어떤 식으로든 들이 대보려고 했는데 정수 때문에 곤란하게 됐잖아?”
“아하. 정수선배한테 꿀릴 거 같으니까?”
민정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진명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민정이 네가 나를 잘 모르는구나. 난 이 세상에서 누구한테 꿀린다거나, 그런 거 없는 사람이야. 다만 정수가 내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러는 거지. 민정이 너도 이제 좀 알겠지만 정수 그 녀석, 이제껏 여자하고 단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는 애야. 순진하기 이를 데 없이 그저 공부만 하던 녀석인데 오늘 그 자식 얼굴 보니까 현서한테 완전히 맛이 가서 멍, 해 있는데 그런 모습 여태 살면서 처음 보거든. 그러니 어쩌냐? 절친이 난생 처음으로 필 꽂힌 여자에게 내가 들이대면 그건 의리가 없는 거지. 더구나 오늘 이 자리는 민정이 네가 정수한테 현서 소개시켜주는 자리잖아? 그러니 내가 아무리 좋다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마음이 아프다는 거다. 됐냐?”
“호호. 그러고 보니까 선배, 의리 있고 사생활 깨끗하다고 소문 나 있던데 그 말이 맞나 보네.”
“야. 나 연예계 초짜야. 벌써부터 그런 소문이 돌 리가 없는데?”
“인터넷이 어떤 세상인데. 선배가 우리 대학 다니니까 나도 전부터 관심있게 드라마도 보고 인터넷 검색도 좀 해 봤었는데 소문이 괜찮게 났더라고. 섹시남으로 검색하면 항상 3순위 안에 들어 있는 데다, 그런 인기로 스캔들 일으키지 않고 모범적이고 성실하다고. 더구나 작년 올림픽에서 환상적인 경기 펼쳤잖아? 그때 한국사람치고 선배한테 감동 안 먹은 사람이 없었지.”
민정이 은근슬쩍 말을 놓았지만 진명은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자 그냥 넘어갔다.
“하하. 뭐든 열심히 하면 열매가 있기 마련이지. 민정이도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정수 다니는 과에 들어갔겠지.”
“뭐. 우리는 여자고등학교 다녔는데 학교가 좀 후졌어. 내가 전교 1등에 우리 현서가 2등. 항상 그렇게 유지했는데 현서가 그만 수능을 좀 놓쳐서 같은 대학엘 못 왔어.”
“승욱이는 기부금 내고 왔다던데. 현서도 그렇게 하지 그랬어?”
진명이 현서에게 묻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그런 거 싫어해요. 특히 정치로 나가신 뒤로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매사에 조심해야 하고. 나도 그냥 실력대로 지망해서 들어온 거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참. 얼굴만 아니라 마음씨도 바른 후배네. 아우. 남자가 이런 여잘 데려가려면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나야 하는 걸까?”
진명이 투덜거리자 민정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호호. 한 번 대쉬라도 해 보지 그래요? 어차피 우리 현서 아직 임자 없는 몸인데.”
민정의 말을 듣고 진명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현서를 보았다. 마침 그녀도 그를 보려고 고개를 돌린 상태라 두 사람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
짧은 순간이지만 현서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이자 진명은 심장이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한 감정이 솟아났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고 그녀가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진명의 가슴도 싸늘하게 식었다.
“아아. 안 할란다. 괜히 들이댔다가 거절당하면 그 내상이 엄청날 것 같아서 사양할게.”
민정이 소리내서 웃는다.
“호호호. 맞아. 나도 며칠 밤을 고민하다 진짜 큰 맘 먹고 정수 선배한테 사귀자고 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거든? 그때 상처가 꽤 크더라. 선배는 마음 잘 먹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오늘은 내가 파트너 해 줄 테니까 그걸로 위안 삼아라.”
“하하. 네가 왜 닭이냐. 그냥 꿩 대신 꿩이라고 해라. 나는 닭하고는 파트너 안 하거든.”
“호호. 선배. 말도 재밌게 잘 하네. 좋아. 오늘은 이 꿩이 선배 파트너다. 호호. 연예인하고 데이트 하는 나, 오늘 출세한 거야?”
“응. 출세한 거 맞아. 나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놈 아니거든.”
“흥. 나는 어떻고. 난 뭐 아무 남자하고나 어울리는 여잔 줄 알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꿩이라고 했잖아?”
“호호. 선배, 웃겼어.”
민정이 소리 내 웃으며 뒷좌석에서 손을 길게 뻗어 진명의 어깨를 탁, 쳤다. 곁눈질을 하는데 현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두 사람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 이 여잘 웃게 한 것만도 어디냐?’
진명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클럽으로 가는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
클럽에 도착해보니 승욱과 정수는 이미 안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진명이 두 여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서에게 쏠렸다.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현서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진명이 그녀를 호위하듯 어깨를 가볍게 잡고 승욱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
현서를 보호하는 몸짓으로 잡았던 것이지만 그녀와 신체접촉을 하자 진명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이 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서 와. 여기 앉아라.”
승욱이 일어서서 자리를 내주자 현서와 민정이 나란히 앉았다.
진명은 민정의 옆에 앉았고 승욱이 정수에게 현서의 곁으로 가서 앉으라고 하자 정수도 사양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안녕. 사람들이 많네.”
막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한 여자가 바로 승욱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 여자에게 쏠렸다.
화려하고 요란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차림새와 달리 얼굴은 수수하고 어디서든 한 눈에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예쁜 여자였다.
“오. 초희 왔구나. 어서 와라. 아주 시간 잘 맞췄다.”
승욱이 여자를 반갑게 맞아 자신이 곁에 앉히자 진명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초희 왔구나. 오늘은 더 예쁘네. 화장 안 한 얼굴이 더 어울린다.”
여자가 진명을 보고 활짝 웃는다.
“오빠. 촬영장에서 본지 좀 됐지? 잘 지냈어?”
“응. 요즘 시간이 좀 남아서 밀린 운동 열심히 하고 있다.”
“하여간 범생이 아니랄까봐. 그래도 오늘은 파트너도 있고 괜찮네.”
진명이 웃으며 초희를 보는데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현서나 민정과 동갑이었지만 훨씬 세련되고 성숙해 보이는 것은 그녀가 아마도 고교1년 때부터 연기에 발을 들여놓아 연예계 쪽 물을 많이 먹은 때문일 것이다.
승욱이 초희를 정수와 두 여자에게 소개시켰다.
“어머. 오빠. 진짜로 잘 생겼다. 왜 연예계 쪽으로 진출 안 했지? 나오기만 하면 당장 주인공으로 뜨겠는데.”
초희가 정수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자 승욱이 쓴 웃음을 지으며 세 사람의 신상까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초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데 그녀도 많이 놀라는 표정이다.
“야아. 이거 내가 오늘 굉장한 사람들을 만났네.”
“자. 이제 지루한 소개가 모두 끝났으니까 우선 술부터 마셔볼까?”
승욱이 술을 시키고 주문한 술이 나오자 그들은 첫 잔을 건배했다.
“자. 이 정도 팀이 모이기도 힘든데, 우리 길게 한 번 가볼까?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승욱이 선창을 하자 다들 잔을 앞으로 내밀어 부딪쳤다.
진명은 맥주를 단번에 마시며 정수를 보았다.
‘......!’
정수도 맥주를 한 번에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진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옆에 있는 현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 역시 한 잔을 남김없이 다 마신다.
“하하. 한 명도 낙오가 없다니. 이거 오늘 예감이 좋은걸?”
승욱의 능숙한 주도로 술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무르익었다. 개인적으로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도 전체 건배가 여러 번 오고 갔고 진명 또한 오늘은 왠지 기분이 묘해서 사람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마셨다.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 파트너나 아니면 그 자리의 다른 멤버들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어 더욱 분위기가 뜨거웠다.
정수와 현서 역시 술자리가 처음인 것 같았는데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않았다.
“하하하. 진명아. 이 모임 아주 아름답지 않냐? 여기서 끝나면 너무 아쉬운데. 우리 어른들처럼 친목회나 하나 만들어서 여름에 어디 놀러갈까?”
“나야 좋은데 초희 너는 어때? 촬영이 겹치면 힘들지?”
진명이 묻자 초희가 요염한 눈빛으로 진명의 얼굴을 쳐다본다.
“오빠도 그건 마찬가지 아냐? 왠지 이 시트콤 끝나면 주인공인 나보다 오빠가 더 잘 나갈 것 같단 말야.”
“하하. 무슨 겸손의 말씀을.”
“호호. 나도 좋아. 이 멤버로 놀러 가면 아주 짜릿할 것 같은데?”
“정수와 현서가 문제로군.”
승욱의 말에 초희가 묻는다.
“왜? 둘 다 집도 엄청 부자라며?”
“하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정수는 집에서 모친이 워낙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어서 그 분 설득이 필요하고 현서는 더 문제지. 현서가 지금까지 그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 내가 모두 알고 있는데 아마 부모 허락 받기가 쉽지 않을 걸?”
그때 현서가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을 들어 승욱에게 말한다.
“나도 허락 한 번 받아 볼게요. 지금부터 노력하면 여름방학엔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와아. 이거 대사건이네. 안방공주께서 드디어 외출을 한 번 하시려나?”
“안방공주가 뭐냐?”
진명이 묻자 승욱이 웃으며 말했다.
“응. 우리끼리 현서를 두고 한 말이야. 현서 어렸을 때부터 그 부모님이 어찌나 애지중지 하시던지 문밖 출입도 잘 안 시키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에서 집까지 보디가드가 두세 명씩 붙어 다녔지. 그래서 우리가 그냥 별명으로 지어준 거야.”
진명이 현서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도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진명과 눈이 마주치자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보낸다.
‘......!’
진명이 그녀를 쏘아보듯 강한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부담스러운 듯 시선을 옆으로 살짝 비켜간다.
‘아으. 미치겠네. 뭐 저렇게 생긴 여자가 다 있지?’
진명은 술로 인해 사과처럼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더 예뻐 보이자 속이 타 자신도 모르게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맥주를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옆에 있던 민정이 안주 하나를 집어 진명의 입에 넣어준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지만 안주도 좀 먹어가면서 술 마셔요.”
“응. 땡큐.”
진명이 입을 벌려 안주를 받아먹었다.
“야. 저기는 벌써 진도 나간다. 초희 너는 뭐냐? 오빠하고 만난 지가 벌써 몇 번짼데 아직까지 저런 서비스 한 번 해주지도 않고 말이야. 서운하다.”
승욱이 큰 소리로 말하자 초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안주를 집어 그의 입에 바친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하하. 그래야지.”
두 커플이 닭살 행각을 벌였지만 정수와 현서는 그저 멀뚱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무르익던 술자리는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다. 술이 약한 정수가 더 이상 이기지 못하고 오바이트를 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진명이 화장실로 데려가서 잘 마무리는 했지만 현서도 그만 일어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진명 역시 취한 정수를 집에까지 데려다줘야 해서 술자리는 아쉽게 마감을 했다.
현서는 집에서 기사가 와서 민정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떴고 초희는 승욱이 데려다주기로 해 진명은 정수를 부축하고 택시를 잡았다.
딩동-
진명이 벨을 누르자 인터폰을 통해 말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세요?”
“아. 저 진명이에요. 정수하고 같이 왔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아.”
문이 열리고 정수 엄마가 모습을 드러내자 진명은 정수를 업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정수야.”
진명의 등에 업혀 정수가 들어오자 그녀가 사색이 되어 진명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야? 다친 거야? 아니. 이 술 냄새. 너희 술 마셨니?”
“예.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정수부터 눕혀야겠어요. 방문 좀 열어주세요.”
“아, 알았다.”
정수방 침대에 그를 눕히고 진명은 거실로 나왔다.
“후우. 자식. 몸은 가늘어도 키가 커서 그런지 꽤 무겁네. 어머니. 저 물 좀 주세요. 클럽에서부터 업고 왔더니 힘들어 죽겠네.”
“잠깐만 기다려라.”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그녀가 물잔을 내밀었다.
“어. 꿀물이네. 아우. 이제 좀 살겠네.”
진명이 물을 다 마시고 정수 엄마를 보았다.
‘......!’
놀란 얼굴이 섹시해 보인다.
‘역시 언제 봐도 예쁘단 말이야.’
선영과 동갑이라 이제 40살일 텐데 날씬하고 예쁜 얼굴을 보면 삼십 대로도 보이지 않는다.
‘현서는 이 나이가 되면 어떨까?’
아마도 정수 엄마보다 더 예쁠 것 같다. 정수 엄마가 아무리 이십 대로 돌아간다 해도 현서만큼 예쁠 것 같지는 않다. 뭐랄까. 현서는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귀한 집에서 자란 고귀한 품격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물론 정수 엄마가 천박하게 아름답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이 때문인지, 뭔가 현서와 비교하면 미적인 부분이나 품격에서 조금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여자 모두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미모를 갖고 있다.
“진명이 너도 술 좀 마신 것 같은데? 둘 다 술 안 좋아하잖아? 오늘 정수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진명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차분하게 말씀 드릴 테니까.”
진명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그녀가 앉자 진명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늘 정수한테 일이 있긴 했는데 안 좋은 일은 아니고 무척 좋은 일이 생겼어요.”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저토록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니?”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정수가 드디어 여자친구를 사귈 것 같아요.”
“뭐?”
정수 엄마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진명을 바라보는데 그 얼굴에 나타난 것이 결코 즐거운 표정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진명은 속으로 생각한 것이 맞아 떨어지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모처럼 시간이 나서 정수한테 놀러 갔는데 정수가 어떤 여자랑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평소 정수답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같은 과 후배라는데 걔가 자기 고등학교 친구를 소개시켜준다고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우리 정수는 그런 거 싫어하는 아인데.”
“나도 잘 알죠. 그런데 그 후배라는 아이가 워낙 자신을 하더라구요. 자기 친구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는 이 지구상에 없을 거라고.”
“뭐? 걔도 웃긴다. 우리나라같이 좁은 땅에서 무슨...”
“왜요? 나 처음 어머니 봤을 때도 그렇게 느꼈는데.”
“나?”
그녀가 자신의 몸을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진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 지금껏 어머니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호호. 진명이 네가 나를 너무 띄워준다. 나같이 나이 든 여자를...”
“무슨 말이세요? 어머닌 지금도 이십 대로 보이는데.”
“야야. 그만 해라. 낯 간지럽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진명의 말이 싫지 않은 듯 처음 정수 얘기로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많이 펴졌다.
“진짜라니까 내 말을 안 믿네. 아무튼 잠시 기다리니까 그 후배가 소개시켜준다던 여자가 왔는데요. 정말...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어머니 말고 처음이었어요. 더구나 이제 대학1학년 새내기답게 어찌나 풋풋하고 예쁘던지, 정수 녀석 얼굴 보니까 완전히 넋이 나가 있더라구요. 정수가 그 여자한테 한 눈에 반해버렸어요.”
“그럼 그 여자애하고 지금까지 술 마시다 왔다는 거야?”
정수 엄마의 안색이 다시 굳어진다.
“예. 그렇죠. 나는 그 후배라는 애하고 파트너 해주고 승욱이까지 합세해서 어울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평소 같았으면 나와 정수 모두 한두 잔 정도 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묘하게 술 마시는 분위기로 됐고 정수도 사양을 않고 마시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으음.”
진명이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뭔가 믿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그런 표정이다.
‘후후. 정수만 바라보고 살다가 이런 꼴을 봤으니 배신감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진명은 속으로 웃다가 갑자기 손으로 머리를 잡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으음.”
진명이 고개를 숙이며 신음하자 정수 엄마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진명아. 왜그래?”
“아. 나도 정수가 술 마시는 것 때문에 걱정 돼서 계속 신경을 썼더니 이제야 긴장이 풀어지나 봐요. 좀 어지럽네.”
정수 때문이라 하자 그녀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약 좀 줄까? 그런데 무슨 약을 줘야 할 지 모르겠네.”
“아니요.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좋아질 거예요.”
말을 하면서 진명이 그녀의 몸에 얼굴을 살며시 기댔다.
‘......!’
무게가 확연하게 느껴질 만큼 진명이 그녀의 몸에 얼굴을 기대도 그녀가 가만있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토록 고고하게 행동하더니. 이런 날도 있구나.’
진명은 그녀의 몸에 자신의 얼굴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희열을 느꼈다.
그 동안 진명이 봐 온 정수 엄마는 정수에게는 모든 것을 희생했고 그를 대하는 표정도 항상 따뜻할 뿐 아니라 어떨 땐 하인이 주인을 섬기듯 정수를 그렇게 대할 때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수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수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차갑고 도도하게 행동했고 그것은 진명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진명이 정수와 가장 친한 친구라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았지만 지금까지 진명에게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이나 살가운 태도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진명이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체중을 실어 기대고 있는 데도 밀어내지 않고 가만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명은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마치 머리가 아파서 그런 것처럼 좌우로 비비다 조금 그녀 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얼굴이 살짝 미끄러지며 뺨에 그녀의 볼록 솟아오른 가슴선이 느껴졌다.
‘......!’
정수 엄마의 몸이 흠칫, 굳어지자 진명은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지금 이 정도도 정수 때문에 그녀의 마음상태가 혼란해서 시도해 본 것이지,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으음. 이제 좀 괜찮네.”
진명이 얼굴을 떼고 정수 엄마를 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방송이다 뭐다 꽤 피곤했었는데 오늘 안 마시던 술까지 마시다보니까 괜히 어머니한테 어리광을 부렸네.”
“아니. 괜찮아. 진명이도 내 아들이나 마찬가진데. 나도 해 봐서 알지만 방송 일이 무척 고단할 거야.”
진명이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머니도 방송 일 해 봤어요?”
“응. 어렸을 때 한두 번 해 봤었지. 고2때던가? 길거리에서 캐스팅 돼가지고 호기심에 몇 번 했었는데 금방 그만 뒀어.”
“왜요? 재미 없었어요? 나는 이쪽 일이 꽤 재미있던데.”
“아니. 그런 사정이 있었어.”
진명은 더 물어보려다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하기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정수를 일찍 낳았으니까 아마도 정수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그녀의 나이가 지금 마흔이니까 정수를 낳았을 때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이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수를 임신한 시기는 고3 무렵이다.
정수 엄마가 화제를 바꾸려고 진명에게 말했다.
“너 드라마 나오는 거 보면 연기가 아주 좋더라. 분명 처음 해 보는 것일 텐데 표정이나 자세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 몇 년은 연기한 사람처럼 보여.”
“그래요? 하긴 감독님도 그런 말씀 가끔 해 주시던데.”
“그런데 너무 자주 알몸을 보이는 거 아니니? 아무리 상체만이라고 해도 나이도 어린 애를 너무 노출시키는 것 같아서 좀 그렇더라. 뭐 어쩌면 진명이가 내 자식 같아서 더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모르지.”
“하하. 원래 대본은 그렇지 않은데 감독님이 내 몸에 상품가치가 있다면서 그런 장면을 일부러 더 넣은 거예요. 그건 그렇고 어머니가 날 많이 생각해주시는구나. 난 항상 나한테 조금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서 어머니가 날 그토록 생각해주는 지도 몰랐네.”
“그것은 내가 원래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라 그래.”
“정수한테는 엄청 다정하시잖아요.”
“응. 그 아이는 내 생명이나 마찬가지니까 어쩔 수가 없지. 정수 빼놓고는 그래도 나한테 진명이가 가장 가깝고 대하기도 편한데 네가 날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다음부터는 좀 더 신경 써야겠다.”
“하하. 오늘 정말 기분 좋은 데요? 어머니하고 이런 속 깊은 얘기도 나누고. 사실 어머니가 너무 예뻐서 말도 제대로 붙이기 힘든 점도 많았어요.”
“호호. 녀석. 난 네가 이렇게 말주변이 좋은 줄 미처 몰랐다.”
“하하하.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이만 가 봐야할 것 같아요. 정수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정수처럼 착하고 엄마 말 잘 듣는 애도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아무튼 고맙다. 정수한테 진명이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그녀가 진명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
그녀가 먼저 이렇게 신체접촉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진명은 기분이 좋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만 가 볼게요. 혹시 정수한테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면 저한테 전화 주세요. 정수 일이라면 언제든지 달려올 게요.”
“알았다. 잘 가라.”
정수 엄마의 마지막 말을 들을 때는 어쩐지 다정함까지 느껴져 진명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