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55)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진명은 선수단에 끼어서 개최지로 갔다.

선수단 내에서만이 아니라 국민들 대부분이 진명에 대해 강력한 금메달 후보 중 하나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세희가 언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그를 알렸기 때문이었다.

진명의 두 친구도 그를 도왔다.

정수가 진명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승욱은 사람들까지 사서 ‘철각’ 이진명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아시안게임에 그가 어떤 경기를 치렀고 미국에서 중국 놈과 내기를 했던 일화까지 밝히며 진명의 존재를 알리는데 힘썼다.

올림픽 태권도 경기가 열리던 날.

진명은 첫 시합을 준비하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상대는 덴마크 출신의 선수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

첫 시합에서 비교적 약체를 만난 진명은 시합개시가 선언되자 상대를 향해 가볍게 발을 떼며 전진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약간의 긴장감이 전신을 사로잡는데, 지금 그는 몸과 마음 모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어 세상의 그 어떤 강적이 와도 두렵지 않을 만큼 전신에 힘이 넘쳐흘렀다. 더구나 이제 그의 나이 스무 살이다. 인생에서 가장 몸에 힘이 차오를 때고 유연성이나 반사신경 또한 극대화시킬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스무 살이란 나이가 주는 한 가지 흠이라면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인데 진명에겐 그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싸움에 능했던 데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경력이 있고 또 그의 가장 큰 강점인 담대함이 있다. 이런 큰 시합에 임할수록 긴장이나 겁에 질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즐기는 심정으로 시합에 임할 배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진명이었다.

상대는 덩치가 진명보다 더 컸다. 진명이 우승후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 얼굴이 소태를 씹은 듯 일그러져 있는데 그래도 진명이 다가가자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앞으로 쭉 뻗어온다.

상대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진명의 오른 발이 자동으로 올라가 옆차기를 했다. 단순한 옆차기에 불과했지만 그 속도가 빨라 상대는 당황하며 왼 쪽으로 피했다. 진명이 보자면 오른 쪽이다. 반대로 피하면 이어지는 왼 발 옆차기를 맞고 점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있어 안전하게 피하려고 한 것인데, 그가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 진명의 몸이 돌아가며 돌려차기가 상대에게 꽂혔다.

휙-

퍽-

상대의 몸통에 진명의 발이 정확하게 박히며 첫 점수를 따내자 진명은 가볍게 뒤로 물러섰다. 아직 시합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도 힘이 있을 텐데 무리하게 달려들다 역습이라도 당하면 곤란하다.

진명이 물러서자 점수를 잃은 상대가 공격을 시도해왔다.

휙-

발차기를 하며 상대가 위협하자 진명은 웃으며 뒤로 몸을 피했다. 대부분 체격이 큰 유럽 쪽 선수들은 이런 점이 좋았다. 머리를 굴리는 시합을 하기보다 분위기에 끌리는 시합을 많이 한다. 한 번 상승세를 타면 엄청난 파워를 발휘하지만 이렇게 점수를 뒤지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 상대하기가 편하다.

상대가 수비를 하면 진명도 쉽게 점수를 따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이렇게 상대가 공격일변도로 나오면 허점이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쉽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다. 더구나 진명과 상대는 실력에서 이미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황은 진명에게 더욱 유리하게 전개됐다.

휙-

상대가 옆차기를 하자 진명이 뒤로 물러났고 그가 계속 공격하자 진명은 코너까지 몰렸다. 진명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상대는 신이 나서 다시 한 번 옆차기를 했고 그 무리한 공격으로 인해 문호가 크게 열렸다.

‘......!’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진명이 그 호기를 놓칠 리가 없었다. 상대의 발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진명의 몸이 왼 쪽으로 돌며 오른 발이 앞으로 쭉 뻗어나가 상대의 빈 공간에 박혔다.

퍽-

“흐윽!”

공격을 하다 역습을 당해 충격이 컸을 것이다.

상대가 신음소릴 내며 뒤로 물러나자 진명이 갑자기 사자처럼 무섭게 돌진하며 돌려차기를 가했다.

퍽-

역시 옆구리에 일격이 들어갔고 상대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몸을 틀자 다시 옆차기를 가하며 또 점수, 그리고 상대가 두 팔로 몸통을 보호하기 위해 웅크리자 진명의 발이 그 위로 올라가 상대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퍽-

꽈당-

얼굴에 정확하고도 강한 일격을 맞은 상대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고 진명은 첫 시합에서 통쾌한 KO승을 올렸다.

승승장구.

진명은 매 시합마다 통쾌하게 경기를 이기며 결승에 진출했다.

주로 KO승을 거두고 이겼지만 간혹 판정승을 거두더라도 그것은 진명이 못해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KO를 당하지 않으려고 소극적으로 도망을 다니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진명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때면 가볍게 점수를 따내 이겼고 그런 시합은 무리하지 않아 힘을 비축할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진명이 결승에 오르자 한국에서도 금메달을 기대하며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진명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결승에 오르기까지 얻은 호쾌한 점수와 KO. 또 그것은 단 한 번도 상대에게 실점을 하지 않고 얻은 것이기에 그의 실력을 가히 짐작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항상 걸림돌이 있기 마련인지, 결승에 오른 상대도 만만치 않은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대는 프랑스 출신으로 이름은 장 카렘.

흑인이었는데 나이는 스물 셋이고 키가 190에 79kg이다. 진명이 182에 74kg인걸 감안하면 체격조건은 진명이 꽤 불리한 편이다. 더구나 상대는 다리가 길고 발차기에 능한 선수로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아 일찍 태권도를 배웠다. 그리고 올림픽에 참가한 후 지금까지 쭉 공격일변도로 상대를 제압하고 결승에 오른 것이다. 한 마디로 진명과 스타일이 비슷하고 체격조건은 진명보다 월등하다.

‘과연 이진명이 이 강적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을까?’

이것이 온 국민들의 진명에 대한 관심사였다.

진명과 장 카렘 모두 태권도란 종목이 올림픽에 채택된 이래 가장 호쾌한 경기를 펼치며 그야말로 진정 태권도가 왜 올림픽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명실상부하게 보여주었고 심지어 태권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대회위원들조차 두 사람의 경기를 보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까지 돌았다.

그렇게 결승전이 열리던 날.

진명은 마음을 굳게 먹고 시합장에 나갔다.

‘이 시합 하나에 내 모든 운명이 걸려있다.’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불운하게 시합에서 진다해도 세희가 방송에 출연도 시켜주고 뒤를 봐 준다 약속했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은 차이가 엄청나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금메달을 더욱 좋아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승을 해야만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순탄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시합장에서 본 장 카렘은 다리가 길고 얼굴이 검은 흑인이었는데 체형도 아주 잘 빠졌고 흑인 특유의 생고무처럼 탄력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난 할 수 있어.’

진명은 평소답지 않게 많이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심판이 부르자 진명은 시합장으로 나가며 다가오는 장의 얼굴을 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는 데 상대도 역시 긴장했는지 얼굴이 굳어 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보내온다.

‘......!’

그 웃음에 사심이 보이지 않아 진명도 상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시 후 시합이 개시되자 진명은 상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휘익-

사정권에 들기도 전에 장이 발차기를 하자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나며 발끝이 진명의 몸으로 곧장 날아들었다.

‘헛!’

장의 긴 다리에 맞을 뻔한 진명이 신속하게 다리를 뒤로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자신이 발을 뻗으면 닿지 않을 거리인데 다리가 긴 상대라 하마터면 점수를 줄 뻔했다.

진명이 물러나자 장이 앞으로 계속 전진하며 발차기를 시도했다.

휘익-

휙-

상대의 연속되는 발차기에 밀려 진명이 뒤로 후퇴하다 왼 발을 축으로 돌며 그대로 돌려차기를 했다.

퍽-

장의 몸통에 발이 닿자 희열을 느끼던 진명은 자신의 몸통에도 상대의 발이 닿았다 떨어지자 얼른 발을 회수하고 자세를 잡았다.

처음 공방에서 서로 점수를 주고받았는데 진명은 이번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상대에게 점수를 내준 셈이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 놈이네.’

발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몸이 탄력 있어 쉽게 제압할 상대가 아니란 걸 느끼자 진명의 마음에 투지가 끓어올랐다.

자세를 안정시키고 나자 장이 또 공격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진명도 수비만 하지 않았다. 장이 공격하면 받아치고 또 먼저 상대를 몰아치기도 했다.

퍽-

퍼벅-

두 사람 다 공격을 선호하는 타입이라 물러설 줄 몰랐고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공방은 불을 뿜듯 치열해졌다.

진명도 처음엔 점수에 신경을 썼지만 상대가 강하게 나오자 타고난 투지가 그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나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서로의 몸통과 얼굴을 향해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고 그렇게 종반에 이르자 두 사람의 얼굴엔 비 오듯 땀이 쏟아져 그야말로 혈전을 방불케 했다.

선수들이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보는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관중석에서도 끊임없는 탄성과 응원소리가 터져 나오며 시합장은 열기로 끓어올랐다.

헉헉-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진명은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

장도 무척 지친 듯 입에서 하얀 김이 연신 뿜어져 나온다.

진명은 그 동안 쉬지 않고 체력을 단련했던 게 지금 큰 버팀목이 되고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평소에 연습을 게을리 했다면 지금 체력이 고갈 돼 바닥에 서 있을 힘도 없을 것이었다.

진명은 주춤 서는 자세로 다시 장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 동안의 피 튀기는 공방의 결과, 점수로는 자신이 약간 앞서가고 있기에 큰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진명이 다가가자 장이 이젠 뒤로 조금씩 물러서며 기회를 엿본다.

그 모습을 보고 진명은 상대가 자신보다 더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력이 거의 바닥난 데다 기술마저 나은 진명에게 무작정 달려들다간 점수도 더 잃고 시간이 종료돼버릴 게 뻔해서 한 방을 노리려는 장의 책략이 진명의 눈에 훤히 들어왔다.

진명도 상대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다리를 교차하며 몸을 풀었다. 난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을 테니 급하면 네가 와보라는 동작이었다.

진명이 갑자기 여유를 부리자 장이 당황한 듯 몸이 굳어졌다.

잠시 멈칫하던 장 카렘이 천천히 진명에게 다가왔다. 발차기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장이 진명에게 앞차기를 했다.

휘익-

하지만 초반에 비해 그의 동작이 매우 느려 진명은 여유 있게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진명이 피하자 장이 다시 몸을 틀며 옆차기를 한다. 그런데 그 동작이 조금 전보다 더 느리다.

‘......!’

마치 이렇게 허점이 많으니 어서 반격해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듯 보이는 상대의 동작에 진명은 순간 갈등했다. 지고 있는 상태라면 당연히 들어가서 강하게 옆차기 한 방 때리면 저렇게 지친 상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문호를 열고 상대를 유혹해서 상대가 공격해 들어오면 카운터를 날려 일격에 끝내려는 심산인 것이다.

싸움꾼이었던 진명이 상대의 의중을 모를 리 없었다.

‘어떻게 한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우승을 하면 그대로 끝이다.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격에 상대를 제압해서 통쾌하게 쓰러뜨린다면 점수로 이기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그러나 역습에 걸린다면...

갈등하고 있는 그를 향해 장이 또 한 번 무기력한 발차기를 해 왔다. 그리고 이번엔 더욱 큰 약점이 진명의 눈에 보였다.

순간, 진명의 입에서 장내가 떠나갈 듯 큰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앗!”

진명의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장의 몸 가까이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상대의 긴 발이 진명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진명의 발도 허공을 가르며 장의 명치 부근을 힘차게 내질렀다.

파박-

퍽-

먼저 옆구리에 강한 타격을 받았지만 뒤이어 진명의 온 체중이 실린 옆차기가 장의 몸통에 정면으로 꽂혔다. 그리고 진명이 비틀거리며 착지하는 순간 장의 기다란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

진명이 통쾌하게 상대를 KO시킨 것이다.

“우와!”

“아아아.”

“대한민국! 만세!”

한국의 응원단 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지며 진명의 결승전 KO승을 축하했다.

진명은 관중석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준 뒤 쓰러진 상대에게 가서 그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진명이 장을 일으켜 세우자 그가 진명의 몸을 끌어안고 잘 싸웠다는 표현을 했다. 진명도 장도 후회 없는 명승부를 펼쳤고 실력이 더 나은 진명의 확실한 승리로 귀결이 되어 상대도 진심으로 승복한 것이다.

시상대에 서서 태극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진명은 그 동안 고생하며 연습했던 것을 이제부터 보상 받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국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기쁨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제부터 그에게 굴러들어올 돈에 진명은 더욱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미리 찍어둔 CF가 적절하게 방송이 될 것이고 진명과 한명그룹의 주가를 동시에 높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최상의 플레이를 펼친 만큼 세희도 여러 가지 구상해 놓은 좋은 계획들을 전부 다 시행해 줄 것이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딸 진영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 진명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진영아.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곧 간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진명은 공항에서부터 자신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에 모인 기자들은 물론 팬클럽까지 조성돼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이것 참. 이모하고 소미도 왔을 텐데...’

“진명아. 잘 왔다. 자식.”

팬클럽 회장인 승욱이 그의 어깨를 안고 축하해주자 진명도 승욱을 같이 안고 기자들의 물음에 성심껏 대답을 했다.

간단한 인터뷰를 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며 가족을 찾던 그의 눈에 선영과 소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선영의 품에 안긴 딸 진영의 모습도...

“진영아.”

진명이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에게로 갔다.

“이모! 소미야. 진영아.”

진명이 그들을 부르며 다가가 선영과 소미의 몸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오빠!”

소미가 그의 몸을 안으며 울먹였다.

“진짜 장하다. 고생 많았지.”

진명이 두 여자와 인사를 나누고 진영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진영아! 잘 있었어?”

진영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에게 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래그래. 진명아. 한 번 안아줘라. 애가 오랜만에 보니까 어쩔 줄을 모르네.”

선영이 진영을 넘겨주자 진명이 딸을 품에 안았다.

“...빠!”

진영이 그의 얼굴을 만지며 입에서 말소리를 내자 진명이 놀라 딸의 얼굴을 보았다.

“말을 하네?”

선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처음으로 말을 뗐어.”

진영이 진명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다시 분명하게 말을 한다.

“...빠!”

앞의 말은 명확하지 않지만 뒷말은 분명하다. 진명은 딸이 너무 기특해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아이고. 우리 이쁜 진영이.”

‘그래. 맞다. 내가 네 아빠이기도 하고 오빠이기도 하지. 그래서 앞말은 하지 않는 거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진명은 그들과 함께 공항주차장으로 갔다.

딸을 안고 진명이 뒷좌석에 타자 소미도 그 옆으로 바짝 붙었다.

“소미야. 오빠 불편하게... 조수석에 타지.”

선영이 시동을 걸며 말하자 소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오빠하고 같이 옆에 탈래.”

“좁잖아?”

“하하. 괜찮아 이모. 이제 곧 새 차도 뽑을 수 있을 거야. 이모는 무슨 차 갖고 싶어?”

진명의 말에 선영이 즉시 대답한다.

“난 상관없어. 차 쓸 일이 얼마나 있나 뭐.”

“호호. 엄마. 오빠한테 좋은 차 사달라고 그래. 나 대학 가면 운전면허 따서 엄마하고 번갈아가며 차 몰고 싶은데 차가 너무 후지면 좀 그렇잖아?”

소미가 참견하자 진명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 예쁜 동생. 수능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는 잘 돼?”

“응. 오빠 다니는 대학은 꿈도 못 꾸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무난할 거 같아.”

“하하. 그것도 어디냐? 소미가 그 동안 열심히 했나보구나.”

“당연하지. 오빠가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는데 나라고 놀기만 하면 오빠 볼 낯이 없잖아?”

소미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오자 그의 품속에 있던 진영이 언니의 뺨을 쓰다듬는다.

“호호. 우리 진영이. 진짜 귀엽다니까. 어쩜 애가 이렇게 순할까?”

소미가 진영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다 갑자기 진명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내가 오빠 아기 하나 낳아줄까?”

“......!”

진명이 소미에게서 황급히 얼굴을 떼고 선영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귓속말이라 선영이 들을 리가 없지만 진명은 소미에게 조심하라는 눈치를 줬다.

‘소미야. 내가 너까지는 힘들어서 안 된다.’

진명은 선영과 진영은 끝까지 책임 질 거지만 소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아직 자신의 영향력 밑에 있다지만 소미는 이제 곧 성인이 될 것이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사촌오빠 그늘 밑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원한다면 같이 있을 거지만 그것은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 좋을 수가 없다.

“우리 진영이처럼 예쁜 아기라면 하나 낳고 싶은데...”

소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진명은 모른 척하고 선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모. 그 동안 집에는 별 일 없었지?”

“응. 진명이 네가 없어서 많이 쓸쓸했지만 다른 것은 괜찮았어.”

“오빠!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오빠가 금메달 따니까 바로 그날부터 TV선전에 나오더라. 사람은 올림픽에 가 있는데 어떻게 광고에 바로 나올 수가 있는지, 진짜 신기하더라.”

소미의 말에 진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미리 찍어 놓은 거야. 이렇게 될 줄 이 오빠가 알고 있었거든.”

“진짜 오빠 대단해. 나 오빠가 자랑스러워서 우리 반 애들한테 자랑했거든? 지금 반에서 내가 인기 짱이야. 오빠 한 번만 소개시켜달라고 친구들이 줄을 섰다니까.”

“그건 안 되겠는데? 나 앞으로 엄청 바빠질 것 같은데 아무리 소미 네가 부탁해도 네 친구랑 만나는 것은 힘들 거야.”

진명이 웃으며 말하자 소미가 갑자기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쪽쪽쪽-

“우리 오빠. 예뻐 죽겠어.”

가만 놔두면 소미가 입술에까지 키스를 할 태세여서 진명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약간 밀었다.

“소미야.”

진명이 선영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는 전혀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저 웃으며 운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딸 진영이 소미가 하는 대로 따라서 진명의 뺨에 입술을 비벼댔다.

“어머. 얘 좀 봐. 이 언니가 하는 고대로 따라서 하네. 아유. 요 깜찍한 것. 예뻐 죽겠다니까.”

소미가 진영의 뺨을 손으로 문지르자 진영이 소미에게로 가고 싶은지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래. 언니한테 오고 싶어?”

소미가 진영을 받아들고 품에 안아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진명은 말 할 수 없는 행복감과 함께 갑자기 죽은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 이 자리에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더 없이 만족한 기분 가운데 딱 한 가지, 엄마에 대한 아쉬움이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애잔하게 적셔왔다.

집에 돌아 온 뒤 진명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세희가 짜 놓은 각본대로 TV에 출연을 하는데 CF는 물론이고 각종 인터뷰나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을 하게 되었다. 물론 세희가 엄선해서 골라준 프로에만 나갔고 몸을 헤프게 굴리지도 않았다.

그렇게만 해도 진명은 몸이 두세 개가 되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고 이번 올림픽에서 태권도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은 그의 얼굴을 전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런 와중에 딸 진영의 돌잔치가 있었고 소미가 수능을 치렀다.

12월이 되자 그토록 바빴던 진명의 스케줄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모처럼 하루일정이 모두 비어 진명은 가족과 쇼핑을 하기 위해 아파트를 나섰다.

가까운 대형마트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누군 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명아!”

낯선 목소리 같은데 이상하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진명의 몸이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움찔, 떨렸다.

진명이 돌아보니 마르고 키가 큰 남자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야?”

소미가 의아한 듯 묻는데 남자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의 얼굴을 보던 진명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 무심하게 남자를 보던 선영도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다.

“둘 다 왜 그래?”

소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에 서 있는 추레한 차림의 중년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진명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감탄사를 발한다.

“맞긴 맞는 거 같은데 정말 너무 많이 변했구나. 키도 크고 얼굴은 탤런트 뺨치게 잘생겼네. 허허. 내 아들 맞긴 한 거야? 처제를 보니까 확실하긴 한 거 같은데 정말 몰라보게 변했다. 처제. 그 동안 잘 살았죠? 얼굴이 하나도 안 상하고 옛날 그대로네.”

남자가 선영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말을 거는데 선영은 얼굴이 굳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모. 나 이 사람하고 잠깐 다녀 올 테니까 이모는 그대로 쇼핑하고 집으로 들어가라.”

“응.”

선영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자 진명은 따뜻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고 먼저 가.”

진영을 품에 안은 선영이 소미와 함께 사라지자 진명이 그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뒤따르자 진명은 아파트 공터로 그를 데려갔다.

‘......!’

마침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진명은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휘익-

갑자기 진명의 발이 올라가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으윽!”

남자가 두 손으로 차인 쪽을 감싸자 진명의 발이 더 높이 올라가더니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강타했다.

퍽-

“아이고.”

남자가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자 진명은 그의 몸 가까이 다가가 말없이 그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퍽- 퍼벅- 퍽- 퍼벅-

주먹과 발을 사용해 진명은 끊임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남자를 때렸다.

“우윽! 윽!”

진명은 때리고 남자는 맞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남자가 맞으면서도 전혀 반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리는 그것 한 가지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수 분 동안 남자를 때리다 진명이 갑자기 멈췄다.

“씨팔놈! 더럽게 뻔뻔하고 나쁜 새끼.”

욕을 하던 그가 남자에게 물었다.

“너. 엄마가 어떻게 죽은 줄 아냐?”

“엄마가... 죽었니?”

남자가 떨리는 소리로 되묻자 진명이 담담하게 말을 했다.

“너. 편지 한 장 안 남기고 그렇게 떠난 뒤로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

“......!”

“나 먹여 살리려고 엄마가 그 궂은 식당 일 하는 것은 그런다 치자. 날마다 외로워서 담배는 골초가 됐고 술이 없으면 잠을 잘 못 이루며 살았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 피를 토하고 쓰러졌지. 병원 가니까 폐암 말기라고 손을 쓸 수도 없다더라. 그 정도 되려면 뭔가 증상이 있었을 텐데 왜 병원 한 번 오지 않았냐고 의사가 오히려 엄말 나무랐지.”

‘......!’

언제부터인지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치료하면서 고통 받는 엄말 나 혼자 지켜봤어. 그러다 안 되니까 집에 와서 마지막을 준비하는데...... 변기에 엄마가 피를 쏟을 때마다 그것을 보는 내 심정이 어쨌는 줄 알아? 정말 그때 당신 있었으면 내 손에 죽었을 거야. 엄마는 끝까지 내 생각한다고 마지막은 약을 먹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엄마가 약을 먹고 죽어 있더라. 그때 숨이 끊어진 엄말 보고 내가 무슨 생각 했나면... 당신이 이 세상 어디로 숨었든지 찾아서 죽여버리려고 했어. 어차피 그때 나는 돌봐줄 사람 아무도 없는 고아였으니까. 그런데 이모가 날 찾아와서 거둬줬어. 이모한테 감사해라.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당신은 죽고 나는 감방에 갔을 테니까.”

“흑흑!”

남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목을 놓아 통곡했다.

“엉엉엉. 선희야. 내가 네 앞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나쁜 놈은 이렇게 살아 있고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왜 먼저 갔니? 죽을 놈은 난데. 흑흑. 진짜 나란 놈은 용서 받을 가치도 없어. 진명아. 날 더 때려라. 난 맞아 죽어도 싼 놈이야. 인간 쓰레기야. 흑흑.”

남자가 통곡을 해도 진명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씨팔놈.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 하네. 그러면서 왜 내 앞에 나타난 건데? 내가 이제 성공한 거 같으니까 어떻게 구걸이라도 해 보려고 나타난 거지? 안 봐도 뻔하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아니. 내가 무슨 염치로 그런 생각을 하겠냐?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까 생각나는 건 자식밖에 없더라. 그래서 얼굴 한 번만 보고 싶어서 와 본 거야. 그리고 이렇게 온 것도 많이 망설이다 온 거지, 그냥 온 것은 아니야. 믿어줘. 아무리 파렴치한이라고 자식 잘 돼서 한 푼이라도 뜯어볼 생각으로 온 것은 절대로 아니니까. 이제 얼굴 봤으니까 가 볼게. 잘 살아라.”

남자가 몸을 돌리고 힘없이 걸어가자 진명은 입술을 깨물고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

아들 만난다고 아마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온 것 같은데 점퍼나 바지 등이 전부 싸구려다.

‘니기미. 가족 버리고 도망갔으면 잘 살기나 했어야지, 진짜 최악이네.’

진명이 남자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자 남자가 그를 보며 말한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봐라. 아까 보니까 가족들끼리 어디 가는 거 같던데.”

“밥 먹었어?”

진명이 엉뚱한 말을 하자 남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든다.

“아니. 요즘은 아침 겸 점심으로 때우니까... 아직 식전이다.”

“가자. 내가 밥 살게.”

“진명아.”

남자, 이종성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난... 삼겹살에다 소주 한 잔만 하면 딱 좋겠는데.”

“알았어. 맛있게 잘하는데 있으니까 그리 가자.”

“난 괜찮은데...”

남자가 말은 사양하면서도 얼른 진명의 뒤를 따랐다.

고기가 익자 종성이 잔에 소주를 따르더니 맛있게 한 잔을 삼켰다.

“카아. 좋다. 인생 살다보니까 이런 날도 오는구나. 아들하고 술잔을 마주할 때도 다 있고.”

진명이 인상을 쓰며 말한다.

“아들이란 말 하지 마. 난 아직 인정 하지 않았으니까.”

“아, 알았어. 미안하다. 자격도 없는 놈이 또 주책을 부렸구나. 그나저나 너 진짜로 대단하다. 어렸을 때 내가 싸움질 하는 법은 가르쳤지만 이렇게 태권도 세계 챔피언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나, 너 처음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 따는 거 보고 내 눈을 의심했었다니까? 분명 내 아들... 참. 미안하다. 하여튼 네 장한 모습을 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내가 금메달을 땄어도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거야. 그날 내가 너무 기뻐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는 거 아니냐. 하하.”

진명은 부어터진 얼굴로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와 같이 지냈던 어린 시절은 나쁘지 않았었다. 학교 갔다 오면 항상 제일 먼저 자신을 맞아주는 사람이 바로 그였고 친구들하고 싸움이 붙었다는 말을 들으면 관심있게 들으며 싸움에 지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사실 진명의 어렸을 때 싸움기술은 모두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처음 술을 마실 때는 자작이었지만 나중에는 잔이 비면 진명이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얼큰하게 취한 술로 종성의 얼굴이 붉어지자 진명이 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아시안 게임 끝나고 바로 올 것이지, 왜 지금 온 거야?”

“응. 그땐 교도소에 있었거든.”

종성이 멋쩍은 듯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교도서까지 갔어?”

진명이 인상을 쓰며 묻자 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내가 잘못해서 간 거 아니야. 같이 동업을 하던 놈한테 사기를 당해서 알거지가 됐는데 얼마나 분하던지 나도 모르게 그 놈한테 손을 댔는데, 그것이 그만 너무 크게 다쳐가지고 형을 좀 살았지.”

“정말 골고루 하고 다녔구나.”

“그 동안 인생 공부 많이 했다.”

“이제 엄마랑 나 버리고 도망간 이유나 말해봐.”

‘......!’

종성이 괴로운 듯, 한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술을 단번에 비우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 동안 세상 살면서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생각해보니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네 엄마 유선희뿐이었어. 그때는 왜 그걸 몰랐는지, 이렇게 쓰라린 경험을 해 보고야 그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 처음엔 정말 좋았어. 네가 태어나니까 가족간에 유대감도 더욱 굳어지고 한 평생 그렇게 살 거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까 사는 게 지겨워지더라고. 그렇게 좋아했던 아내도 이젠 더 이상 예뻐 보이지가 않는 거야. 아랫배는 나오고 여자로서의 매력도 점점 사라지는데 그때 한 여잘 알게 됐어. 뭐. 알기 쉽게 말해서 바람을 피운 거지.”

종성이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애기를 하자 진명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네 엄마한테 육체적으로 싫증이 나 있던 차에 그 여자는 매력이 있어 보이더라고. 그 여자 집도 제법 괜찮게 살았고. 그래서 그 여자가 날 꼬시길래 집에서 돈을 가져오게 한 뒤 서울로 도망갔어. 그때만 해도 젊어서인지 여자가 서울로 가자고 하니까 귀가 솔깃해지며 거절을 못하겠더라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을 버리고 그 여자랑 서울로 튀었지.”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어?”

진명의 말에 종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몰골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꼴을 봐라. 조강지처하고 자식까지 버린 놈이 잘 되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진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성이 말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몇 번 쓴 잔을 마시고 너하고 선희 생각이 간절하게 나더라. 그래서 거기에 한 번 찾아 간 적도 있었어.”

진명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 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사정을 모르고... 뭐 나도 백 번 빌어도 얼굴을 나타낼 입장이 아니고... 그저 먼 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했던 거라 그만 포기하고 말았지.”

말을 하면서 종성이 술을 마신 것이 두 병을 넘고 세 병째가 되자 술이 취해 말투가 어눌해졌다.

“이제 그만 마셔라.”

진명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놓았다.

“그래. 소주 세 병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 좀 취한다.”

종성이 일어서며 몸을 비틀거리자 진명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몸을 부축했다.

“허허.”

진명이 몸을 부축하자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돈을 계산하고 진명은 종성을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택시를 탔다.

그가 사는 곳은 고시원 좁은 방이었고 방에 데려가자 그가 그대로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사는 게 이래서 대접할 것도 없다.”

“됐고, 나 이만 갈 거야.”

“진명아. 엄마 납골당에 안치시켰다며. 언제 시간 되면 나 좀 데려갈래?”

“언제?”

“나야 시간 많으니까 내일이라도 좋지.”

“내일은 안 되고 내가 시간 되면 연락할게. 휴대폰은 있어?”

“응.”

“번호 불러 봐. 내가 연락 할 테니까. 그리고 다시는 이모집에 오지 마. 이모가 당신 싫어하니까.”

“알았다. 선영이는 정말 멋있게 변했더라. 어렸을 때도 예쁜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이 더 멋있더라고. 후우. 처음 볼 때부터 걔가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언니가 그렇게 됐으니까 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걱정 하지 마라. 너 체면 깎이는 일도 안 할 거고 귀찮게도 안 할 거야. 다만 이렇게라도 한 번씩 만나서 얘기할 수 있으면 나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알았어. 술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그만 자라.”

“응.”

남자가 자리에 눕자 바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진명은 곁에 앉아서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

원래 잘생긴 얼굴인데 진명에게 엄청나게 맞고 부어있다. 또 세파에 찌든 탓인지 군데군데 주름도 많이 졌다.

‘그래도 급소는 피해서 때렸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지만 조금 전 얼굴을 보았을 때 왠지 미움보다 반가움이 앞섰던 것은 핏줄 때문일까? 그래서 진명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렸다. 그를 용서할 구실을 주기 위해서.

‘후우우!’

뜻 모를 한숨을 내 쉬던 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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