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55)

‘......!’

눈을 뜬 진명은 방안 전체가 눈부신 햇살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를 눈으로 찾기 전에 손을 뻗어 보았다. 어제처럼 엄마가 자지를 만져주고 자신은 엄마의 가슴을 만지면서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엄마의 기척이 없다.

‘또 아침부터 목욕하나?’

진명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어? 엄마!”

눈을 돌려 보니 진명이 잤던 침대 말고 다른 침대에 엄마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훨씬 넘어 있다.

평소의 엄마라면 이 시간에 절대로 누워 있지 않는다. 더구나 어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진명은 갑자기 오싹, 한기가 몸 전체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방안에는 밤새 가동 된 히터로 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이 정체 모를 서늘함은 진명의 몸과 마음을 오들오들 떨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진명은 아주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로 갔다.

“엄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다 진명은 그녀의 곁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알약들과 약병 한 통을 발견했다.

‘......!’

그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지 중학교 1학년에 들 진명의 나이라면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진명은 엄마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

아주 평온한 모습이다. 아니, 약간 웃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을까?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으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진명은 손가락 하나를 그녀의 코 밑에 대 보았다.

‘......!’

역시 가느다란 숨결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명은 엄마의 목을 쓰다듬었다. 역시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이 차갑다.

진명은 엄마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마지막을 준비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은 상태로 엄마가 누워 있는데 그것을 훼손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머리가 멍해져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르던 진명은 약병 옆에서 편지 하나와 노란 봉투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투는 곁에 두고 진명은 편지를 들어 눈으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아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들을 두고 먼저 가려니까 조금 마음에 걸리는구나.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연은 여기까지란 생각에 아쉽지만 이제 작별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가는 엄마를 원망하진 말아다오. 구차한 모습으로 며칠을 더 사는 것보다 이렇게 행복하게 가는 게 엄마에겐 좋은 일이니까...... 중략......

아들. 항상 행복하게 살아야 돼... 그리고 이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이모에게 전화를 하렴. 이모가 오면 노란 봉투는 이모에게 주고, 이모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살기 바래.

01*-****-****)

그리 길지 않은 편지였지만 읽다보니 이제야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 진명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흑! 엄마!”

진명은 아주 서럽게 울었다. 방에 아무도 없어 자신의 감정 그대로를 숨기지 않고 모두 펑펑 쏟아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엄마가 이제 없어진 것이다.

이승에서는 이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실감이 진명을 지배하자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온 몸을 비틀며 흐느꼈다.

“엄마! 그래서 어제 그런 거야? 흑흑!”

어제 보였던 엄마의 이상한 모습들이 이제야 다 이해가 됐다. 한강을 보며 굵은 눈물을 흘리던 일, 이상하리만치 평소에 하지 않던 잔소리를 하던 일, 그리고 광란적이라 불릴 만큼 황홀했던 섹스까지...

한 시간을 울며 몸부림치던 진명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엄마의 휴대폰 수화기를 열었다.

“여보세요. 언니?”

벨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진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명이에요. 이진명.”

“진명이? 언니 아들?”

“예. 이모.”

“언니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서 진명이 말했다.

“엄만 지금 돌아가셨어요.”

“아!”

수화기 저편에서 짧고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어디니?”

“**호텔 1108호예요.”

“어디 가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라. 곧 갈게.”

“예.”

전화를 끊고 나서 20분이 채 안 돼서 벨이 울렸다.

딩동-

진명이 문 가까이 가서 물었다.

“누구세요?”

“진명이? 나 이모야.”

“아!”

진명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이모가 올 줄 몰랐던 것이다.

‘엄마가 그래서 이곳에 투숙한 거였어.’

엄마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우고 이모가 사는 집 근처 호텔에 숙박을 한 것이었다.

진명이 문을 열자 차가운 바깥바람과 함께 한 여자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의 외모를 보고 진명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

이모가 굉장한 미인이었던 것이다.

진명의 시선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역시 엄마 가족의 유전인지,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하지만 엄마나 진명처럼 표가 나게 올라간 것은 아니어서 시원하고 맑은 눈이 약간 도도하게 보이면서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흠 잡을 데 없이 예쁜 이목과 날씬한 몸매, 그리고 피부도 맑아 이제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엄마와 3살 차이랬는데...’

엄마와 3살 차이면 이제 한 해가 더 지났으니 33세이다. 엄마는 작년에 35세일 때도 40정도로 보였으니까 엄마와 비교하면 15살 이상은 차이가 나 보인다.

진명이 놀라 이모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진명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언니 아들 맞네...”

한 동안 탐색하듯 진명을 보던 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침대에 누워 있는 선희의 모습이 보이자 선영이 그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언니. 이게 뭐야.”

어지러이 널려 있는 알약과 약병, 그리고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선희를 보고 선영은 그녀의 몸을 붙들며 통곡했다.

“흑흑. 언니! 이게 뭐야? 고작 이렇게 살다 죽으려고... 날 버리고 갔어? 엉엉엉.”

선영이 대성통곡을 하자 곁에서 보고 있는 진명의 눈에서도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처음 보는 이모에 대해 급격한 호감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엄마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자신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진명은 엄마의 죽음을 위해 울어줄 사람이 자기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이모에게 강한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다.

얼마나 울었을까...

선영이 고개를 들어 진명을 보았다. 진명 역시 계속 눈물을 흘린 탓에 얼굴 전체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이리 와.”

선영이 손짓하자 진명이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지 그녀가 진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오늘 처음 보는 이모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자 진명은 멈췄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흑흑. 이모.”

“그래. 마음껏 울어라. 오늘 같은 날 안 울면 언제 울겠니? 모진 사람 같으니라고. 어떻게 자식을 앞에 두고 자살을 할 수가 있어.”

“흑흑.”

진명은 울면서도 이모의 가슴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자 코로 그 좋은 냄새를 들이마셨다.

‘흐음.’

한 동안 진명을 품에 안고 있던 선영이 그를 밀어내자 진명은 그녀에게 말했다.

“엄마가 이모한테 주라고 맡긴 게 있어요.”

“그래?”

진명이 노란 봉투를 건네주자 선영은 그것을 개봉해 살폈다. 진명이 옆에서 보니까 통장 몇 개와 편지가 있었다.

선영은 통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선영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던 선영이 다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진명을 보았다.

“진명아. 이제 엄마 장례를 치러야 해.”

“예.”

진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영이 말했다.

“넌 어려서 잘 모를 테니까 이모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되지?”

“예.”

진명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자신은 이런 경우 뭘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이모가 다 알아서 해 준다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먼저 네 이모부한테 연락해야겠다.”

선영이 몇 군데 전화를 걸었고 그때부터 선희의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여기가 이모 사는 동네야.”

아파트 입구로 차가 진입하자 선영이 조수석에 앉은 진명에게 말한다.

“예.”

진명은 가볍게 대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아파트 건물 사이사이로 수목들이 우거져 있고 그 중앙엔 어린이 놀이터나 어른들 운동기구 등이 널려 있어, 도시라 삭막할 거란 진명의 생각을 처음부터 부정시키고 있다.

“내가 사는 시골보다 더 나무가 많네요.”

진명이 감탄하자 선영이 빙그레 웃는다.

“그렇지? 여긴 서울이라도 동쪽으로 조금 치우쳤고 공기도 괜찮은 편이야. 진명이 네가 살기엔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거다.”

“예.”

“그리고 이모가 전학 수속이랑 다 마쳤으니까 내일부턴 학교에도 갈 수 있어. 이제 개학한지 며칠 안 지났으니까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거야.”

“예.”

진명은 할 말이 없었다. 엄마 장례도 이모가 화장을 한 뒤 납골당에 안치시키는 것으로 다 치르고 시골에서 이쪽으로 학교도 옮겨 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모와 함께 살러 그녀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음. 이모가 전에도 이모 가족에 대해 말했지?”

“예.”

진명은 이모 말고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먼저 이모부란 사람. 이름은 진병태.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했는데 회사 일이 바쁘다며 이모에게 전화로만 일을 지시하고 얼굴은 딱 한 번 보았었다. 이모와는 너무 나이 차가 많이 나 보이는 얼굴. 실제로도 이모와 띠동갑이라나, 45세라고 했는데 미남이지만 얼굴에 주름은 물론이고 머리카락도 절반 이상이 하얗게 세어 있어 오십이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음은 이모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진소미. 이제 초등학교 6학년생으로 진명보다 한 살이 어린 사촌동생이다. 하지만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네 이모부는 원래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이니까 별 걱정은 하지 않는데 소미가 조금 걱정이다.”

“......?”

진명이 말없이 선영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애가 어릴 땐 안 그러더니 지금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말을 잘 안 듣는다니까. 어려서부터 아빠가 워낙 예뻐해서 버릇이 없기도 하지만 요즘은 지 아빠 말도 안 들어. 집에서는 지가 왕이야.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설치고 다닌다니까? 며칠 전에 진명이 네 얘길 하니까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막 소리치고 반항하더라구. 그래서 조금 걱정이긴 한데, 그 애가 안 좋은 기색을 하더라도 진명이 네가 동생이라 생각하고 이해를 해주면 좋겠다.”

“알았어요.”

진명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아이라면 모르지만 어린 여자아이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 뭐 될 대로 되겠지. 지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거 아냐? 아니꼽더라도 참고 이해하고. 뭐 그러면 되겠지.’

진명은 타고난 천성대로 마음 편하게 생각해버렸다.

“여기야.”

선영이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명은 그 뒤를 따랐다.

“아. 진짜 좋다.”

진명이 거실을 둘러보며 탄성을 발하자 선영이 웃으며 묻는다.

“엄마랑 아파트에서 안 살았어?”

“그냥 좁은 방 하나에서 엄마랑 살았어요.”

“그래? 여긴 방이 4개야. 이리 와 봐. 이모가 설명 해 줄게.”

진명이 따르자 선영이 먼저 가장 큰 방 하나를 진명에게 보여준다.

“여기가 안방이야. 이모와 이모부가 쓰는 방이지.”

넓은 침대와 옷장, 화장대, 서랍장 등등 세간이 잔뜩 들어 차 있지만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안방이 넓었다.

“여긴 이모부가 사용하는 서재.”

“여긴 소미 방인데 애가 자기 방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니까 들어가진 말자.”

이렇게 방 세 개를 보여준 선영은 마지막으로 진명을 데리고 남은 하나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이 네가 쓸 방이다. 그 전에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했었는데 진명이가 온다니까 내가 좀 치우고 사용할 것들도 넣어뒀어. 자. 봐. 마음에 안 들면 이모한테 말 하고.”

“아니. 마음에 들어요.”

방안을 둘러본 진명은 놀라 고개를 저었다.

‘......!’

침대, 책상, 옷장, 책상 위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컴퓨터까지... 진명은 집에서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것들이 방안에 진열되어 있자 깜짝 놀라며 이모의 얼굴을 보았다.

“사실 난. 이런 거 없어도 되는데...”

“호호. 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만 준비했어. 부족한 것은 이번 주말에 이모랑 나가서 쇼핑하도록 하고 우선 불편한 대로 지내도록 해라.”

진명은 선영의 얼굴을 보았다.

‘......!’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씨도 너무 고와서 진명은 이 이모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자. 너도 짐 정리 좀 해야지. 다 하고 나오면 이모가 간식 좀 줄게.”

“예.”

진명이 짐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것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선영이 준비해 둔 과일을 내밀었다.

“어서 먹어.”

“예.”

진명은 사양하지 않고 과일을 먹었다.

그가 과일을 다 먹자 선영이 말했다.

“진명아. 네 엄마가 너한테 남긴 돈이 조금 있어.”

진명이 별 관심 없이 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네 앞으로 통장 몇 개를 만들었는데 다 합쳐보니까 이천 만 원 정도 되던데... 언니가 그 돈으로 장례도 치르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어. 네 엄마가 남긴 돈은 한 푼도 건들지 않았으니까 네 생각을 듣고 싶다. 어떻게 할래?”

“이모가 알아서 해요. 난 상관 없으니까.”

그러자 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넌 아직 어리니까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모가 그 돈을 맡아둘 게. 우량주식을 사든, 펀드에 넣어두든, 이모부한테 조언을 얻어서 내가 잘 맡았다가 네가 성인이 되면 그때 돌려주마.”

“알았어요.”

선영이 문득 시계를 보았다.

“이 아이가 올 때가 됐는데...”

선영이 중얼거리자 진명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도 소미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때 현관 문 밖에서 삑삑, 소리가 나더니 곧장 문이 열리고 한 여자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미야. 과외는 잘 했어?”

선영이 반갑게 부르며 말했지만 여자애는 엄마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진명의 얼굴을 보았다. 진명도 될 수 있으면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웃는 낯으로 그녀를 보았다.

‘예쁘다!’

처음 여자애를 보고 느낀 진명의 속마음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선명한 이목구비, 그리고 서양여자처럼 새하얀 피부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이 들게 했다. 다만 옥에 티라면 눈꼬리가 진명처럼 약간 올라갔는데 정도가 심하지 않아 흠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여자애는 진명의 마음과 다른 것 같다.

진명의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선영에게 소리친다.

“난 몰라.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낯 선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면 어떡하라구.”

“소미야. 낯 선 사람이 아니라 오빠야. 엄마가 얘기 했잖아.”

“겨우 3일 전에? 엄마 맘대로 그러면 안 되지. 이 집에서 엄마만 사는 것도 아니고 아빠랑 내 생각도 해 줘야 되잖아?”

소미의 말에 선영의 안색이 싹, 변했다.

“뭐야? 이게 사춘기라고 봐 줬더니 기어오르고 있어? 그렇게 정 싫으면 네가 나가. 요즘 너 하는 꼴 보기도 지쳤으니까 네가 나가서 살란 말야. 알았어?”

생각보다 엄마가 강하게 나오자 소미의 안색이 변하며 한 풀 꺾인다.

“그게 아니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엄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사촌오빠가 생겼고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어? 미리 말이라도 해 줬으면 그러진 않았잖아?”

“그래. 그것은 사정이 급하게 됐으니까 그런 거야. 이 오빠한테는 세상 전부였던 엄마가 돌아가셨어. 엄마 죽은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네가 마음 상하게 그러면 안 되잖아? 좀 이해해 줘야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씨. 몰라.”

소미가 짜증을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게 정말? 오늘은 나도 도저히 못 참겠다.”

선영이 소미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진명의 귀에 들려왔다. 순간 진명은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 밖으로 나가봤자 갈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소미의 방에서 두 모녀가 함께 나왔다.

선영이 뭐라 설득했는지 소미가 진명의 앞에 섰다.

“자 이제 정식으로 인사해라.”

선영의 말에 진명이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 이진명이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러자 소미가 딴청을 피우며 툭 내뱉었다.

“진소미야.”

소미의 불손한 태도에 선영이 인상을 쓰며 또 한 마디 하려 하자 진명이 얼른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시골에서 살다 와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진명이 손을 거두며 말하자 소미가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짜증난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시골 살면 다 그렇게 촌스러워?”

“왜?”

“머리가 그게 뭐야? 완전 촌스러움의 극치네.”

“아아! 이거?”

진명이 자신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고 말했다.

“우리 엄마가 몇 개월 전에 폐암선고를 받았거든. 그때부터 엄마 간호하느라 머리 자를 시간이 없었어. 그래서 그런 거지, 평소에는 단정하게 하고 다니는데...”

선영이 얼른 말을 받았다.

“거 봐라. 오빠가 이렇게 효자야. 너, 이 엄마가 암에 걸려 죽게 생겼다면 이 오빠처럼 머리 손질도 안 하고 시중 들 수 있어?”

“엄마는? 내가 엄마 아프면 간호도 안 하는 그런 나쁜 앤 줄 알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아무튼 오빠가 그런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네가 좀 이해해라. 그리고 진명이 너 내일부터 학교 나가려면 휴대폰이 필요할 거야. 네 엄마 휴대폰은 너무 낡아서 내가 폐기처분했으니까 지금 사러 가자.”

“휴대폰이요?”

진명이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소미가 먼저 나섰다.

“엄마. 나도. 휴대폰 바꿔주라.”

언제 짜증을 부렸냐는 듯 아양을 떠는 소미의 얼굴을 보며 선영이 혀를 찼다.

“쯧쯧. 애가 이렇게 철이 없어요. 너 휴대폰 바꾼 지 1년도 안 지났어. 아무리 못 써도 2년은 써야지.”

“아잉. 지금 것은 디자인도 후지고 성능도 떨어진단 말이야. 새로 나온 것 하나만 사주면 좋겠는데.”

“됐다. 내 년에 한 번 생각해 보자.”

“내년? 지금이 3월인데 내년까지 언제 기다려?”

“이게? 내년에도 생각해본다는 거지 바꿔준단 말이 아냐.”

“씨이.”

소미의 입이 댓발은 나오는데 얼굴이 예쁘니까 진명의 눈엔 그것도 귀여워 보였다.

“진명아. 가자.”

“예.”

진명이 웃으며 선영의 뒤에 서자 소미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넌 집에 있어.”

“아니. 그냥 구경이라도 할래.”

구경만 한다는데 말릴 수는 없어 선영은 진명과 소미를 데리고 휴대폰 판매점으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의 시원한 소리에 소미가 제일 먼저 달려가 진열대에 놓인 휴대폰을 감상한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이건 기능이......”

진명은 자신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점원에게 묻는 소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돈이 있으면 자기라도 소미가 원하는 걸 사주고 싶었다.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하자 선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저기요. 그 애는 살 거 아니니까 이쪽으로 와서 설명 좀 해 주세요.”

“예. 고객님.”

점원이 다가오자 선영이 진명에게 물었다.

“뭘 살래? 네가 원하는 거 골라 봐.”

그러자 진명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거나 다 살 수 있어요?”

“그래. 비싼 것도 괜찮으니까 골라. 이모가 우리 조카 처음 사주는 건데 이 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저. 그러면 소미가 원하는 것 하나만 사줘요.”

“뭐?”

소미도 의외였는지 진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나 여태까지 휴대폰 써 본 적도 없고 그다지 필요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소미가 원하는 휴대폰을 사서 그건 소미에게 주고 지금 소미가 쓰고 있는 휴대폰을 내가 쓰면 되잖아요? 그러면 둘 다 만족하고 좋을 것 같은데. 이모. 그렇게 해요.”

진명이 선영의 손을 잡고 조르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저 여우 같은 것이 결국은 지 갖고 싶은 거 챙기고 말았네.”

선영은 값을 지불하면서도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았고 소미는 반대로 시종 웃음을 지으며 새 휴대폰에 뭔 가를 눌러댔다.

“자. 소미 넌 먼저 들어가고 진명이 넌 나랑 미용실에 가자.”

휴대폰 가게를 나와 선영이 진명과 함께 미용실에 들렀다. 진명이 의자에 앉자 선영이 담당 미용사에게 말했다.

“이 아이 중학생인데 예쁘게 머리 잘 깎아 주세요.”

선영의 말에 미용사가 웃으며 말한다.

“아유. 중학생인데 체격이 좋네. 몇 학년?”

“1학년이요.”

“1학년? 아우. 체격만 보면 고등학생인줄 알겠네. 키가 몇이야?”

“저번 초등학교 때 170이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170은 넘어 보이는데? 아무튼 머리가 많이 길었다. 학생은 머리를 조금 짧게 하고 다니는 게 더 얼굴하고 어울릴 텐데. 내가 예쁘게 잘라줄게.”

그 동안 머리 손질을 전혀 안한 탓인지 미용사가 진명의 머리를 다듬는 시간이 꽤 길어졌다.

“자. 샴푸하자.”

진명이 머리를 감고 다시 의자에 앉자 미용사가 마무리를 하고 선영에게 말했다.

“다 됐습니다. 와서 보세요.”

선영이 와서 보더니 감탄사를 발한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조카 한 인물 나네.”

“호호. 그렇죠? 제가 특별히 정성들였어요.”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진명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이발한 모습 중에 지금이 가장 괜찮아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꽤 미남이긴 하네.’

저번에 지수가 자신보고 잘생겼다는 말을 했을 땐 그저 예의로 그러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머리 스타일을 하고 보니 자신의 얼굴형과 잘 어울려서 꽤나 단정하고 스마트하게 보였다.

미용사가 한 마디 더 거든다.

“학생은 윤곽이 뚜렷하고 인상이 강하게 보이니까 이렇게 옆머리를 짧게 하고 앞머리를 약간 길어 위로 올리면 전체적으로 얼굴과 잘 조화를 이루고 또 강한 인상이 지적인 이미지로 바뀌면서 굉장히 어울리는 거야.”

선영도 한 마디 했다.

“이렇게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데 그토록 길게 놔두었으니. 이제부턴 항상 이런 스타일로 머릴 자르면 되겠네. 아무튼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자를 거니까 잘 부탁해요.”

“예. 그러시면 제가 잘 해 드리겠습니다.”

선영이 활짝 웃으며 비용을 지불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진명은 그녀에게 큰 감동을 받고 말았다.

엄마를 빼고 누가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었는가? 아니, 엄마도 평소엔 이렇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다.

물론 이모는 돈이 많고 엄마는 돈에 항상 쪼들렸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위해 뭔가 해 주려는 이모의 모습을 보고 진명은 그녀를 평생 좋아하고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엄마처럼, 아니, 엄마보다 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며 선영이 즐거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른다.

그녀를 뒤따라가던 진명은 걸음을 빨리 해 그녀의 곁에 붙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이모의 손을 잡았다.

선영이 돌아보다 진명과 두 눈이 마주쳤다.

“이모.”

“응?”

진명이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호호. 그래? 나도 조카가 생겨 기쁘다.”

“나. 이모가 엄마만큼 좋은 거 같아요.”

“정말?”

선영이 웃으며 진명을 보자 진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 앞으로 어른 되면 돈도 많이 벌고 능력 있는 사람이 돼서 이모한테 보답할 게요.”

“그렇게 안 해도 돼. 이모가 너한테 뭘 바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그래도. 나중에 이모가 나이 들면 나하고 같이 살아요.”

“호호. 정말이야? 우리 진명이 그러고 보니까 아주 사교성이 좋네. 어쩌면 이렇게 기분 좋은 말만 골라서 하니?”

“난 진심을 말하는 건데. 이모니까 거짓말 하지 않고 마음에 있는 말 그대로 하는 건데...”

“그래. 알았어. 우리 조카가 있어 든든하다. 앞으로 이모가 늙고 병들면 우리 진명이가 책임 진다 이거지?”

“예.”

“좋아. 나 오늘 기분이 너무 좋은데. 저녁은 맛있는 걸로 차려야겠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선영은 진명과 소미를 두고 저녁 장을 봐 온다며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 소미와 둘만 남자 진명은 왠지 어색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를 소미가 불렀다.

“잠깐만.”

“왜?”

진명이 쳐다보자 소미가 처음 볼 때와 달리 그의 얼굴과 몸 전체를 찬찬히 살폈다.

“뭐. 머리가 그러니까 봐줄만 하네. 오빠, 키가 몇이야?”

“작년에 170이었어. 올 해는 안 재봤으니까 잘 모르고. 아마 172정도 될 거 같은데.”

“키는 크네. 무슨 운동 같은 거 했어?”

소미가 심문하듯 물었지만 진명은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 고분고분 대답했다.

“운동은 한 거 없고 그냥 싸움만 좀 했지.”

“싸움 잘해?”

“우리 학교에서 주먹으로는 날 이길 놈이 없었으니까. 전교 짱이었어.”

“정말?”

소미가 새삼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오빠.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어?”

“부탁?”

진명은 소미가 자기에게 부탁을 해 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응.”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당연히 들어주지.”

“사실 우리 반에 김찬명이라고 싸움 잘하는 놈이 있거든. 그런데 그 놈이 자꾸 날 괴롭히는 거야.”

“소미 너를?”

진명이 관심을 보이자 소미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응. 그 전에는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됐는데 처음 보자마자 계속 날 집적대는 거야.”

“왜?”

“그냥 내가 예쁘니까 사귀자고.”

“자식이. 보는 눈은 있어갖고 소미 네가 엄청 예쁘다는 것은 아는구나.”

“내가 예뻐?”

소미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진명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 처음 보고 서울 여자애들은 다 이렇게 하얗고 예쁜가, 생각했다.”

“뭐. 다 그런 것은 아니지. 그러니까 오빠 눈에도 내가 예쁘게 보인단 말이지?”

예쁘다는 말은 여자라면 누구나 듣기 좋아하는 말이다. 진명은 입으로 나오는 말에 아낄 것이 없어 마음껏 칭찬해 주었다.

“예쁜 정도가 아니지. 난 여태까지 살면서 소미 너처럼 피부 깨끗하고 예쁜 얼굴은 처음 보았다.”

진명이 이렇게 극찬을 하자 소미의 얼굴이 환해졌다.

“뭐. 나보다 더 예쁜 애도 없는 건 아니지만 찾아보기 힘들긴 하지.”

턱을 세우며 거만하게 말하다 소미가 본론을 생각해내고 다시 물었다.

“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 됐지만 앞으로 그 자식이 날 계속 괴롭힐 것 같은데 오빠가 그 놈을 손 좀 봐 줄 수 있을까?”

“뭐. 손 봐주는 거 어렵지 않은데 넌 그 녀석한테 조금의 호감도 없어?”

“말이라고? 오빠도 한 번 보면 알겠지만 그 새끼 진짜 못 생겼어. 공부도 못하는 데다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놈이 얼굴은 진짜 더럽게 생겨갖고 감히 나에게 들이댄다니까. 얼굴이라도 좀 생겼으면 내가 말을 안 해. 정말 자존심이 상해서...”

소미가 말을 하다 열이 받았는지 씩씩거린다.

“알았다. 내일 당장이라도 자리를 마련해서 그 놈하고 대면시켜라. 내가 해결해 줄게.”

“정말이지? 괜히 오빠한테 부탁했다가 그 놈한테 오빠가 지면 나만 개망신인데... 진짜 잘 할 수 있겠어?”

“야. 같은 학년도 아니고 1년 후배잖아? 내가 아무리 시골출신이라지만 지진 않을 거다. 혹시 지더라도 내가 뒷심이 좀 있거든. 어떡하든지 네 문제는 해결해 줄 테니까 오빠한테 맡겨 둬.”

“좋았어. 그럼 오빠만 믿는다?”

“응.”

소미가 밝은 표정이 되어 자기 방으로 가자 진명도 기분 좋게 웃었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소미와도 그다지 껄끄럽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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