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1)

7. Unstability ~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

~ 현재

오랫만의 캠퍼스. 졸업한것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자신의 나이가 30이라니... 참 실감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상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변한 것이 없었다. 그 거리, 학생들이 바글바글 다른 수업을 들으러 가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는 모습들, 젊음이란 좋은 때를 즐기며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들. 변한 것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상진은 자신의 과건물로 걷고 있었다.

3시 20분. 수업이 시작하는 시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끝나는 시간도 아닌지라 엘리베이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기다리는 학생들이 많으면 학생들을 위해 자신은 걸어서 올라가려고 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발은 쉴 수 있겠군...'

목적지는 6층이였지만, 기왕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하게 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특히나 현재로도 충분해보이는 문명의 이기를 더욱 더 빠르게 발전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반도체 산업에 종사중인 상진이였기에 기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히여겼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상진을 포함한 총 5명의 사람이 탑승했다. 공대 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여학생은 단 한명, 화장도 수수하고 얼굴에는 앳된 기가 남아있는것으로 보아 신입생처럼 보였다. 나머지 3명의 남학생들은 얼굴에 적당히 여유도 넘치는것이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처럼 보였다. 취업을 준비중인것인지 그들 중 일행으로 보이는 두명의 남자는 이번 상반기 인턴모집은 어떻느니 라는 식의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상진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기에는 이미 자신은 너무 늙어버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상진은 천천히 복도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마다 있는 계단식 대강의실... 그곳에 자신이 오늘 이곳에 오기로 한 목적이 있었다, 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미 강의실 내의 강의는 한창 진행중이였고, 강의를 진행중인 교수는 수업중에 지각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이 아니였지만, 들어오는 상진의 모습을 보고 살짝 웃어보이고는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학기에 물리전자라는 과목에서는 solid state electronic device라는 책을 썻죠. 즉, 우리가 본격적으로 semiconductor의 device적인 특성을 분석하기 전에 일반적인 고체들의 전기적인 특성을 분석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semiconductor라고 불리는 material들의 구조적인 특성, 그리고 미시세계에서의 uncertainty, 즉 불확실성과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전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레벨이 양자화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그 교수의 말을 들으며 상진은 자신이 처음 이 수업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처럼 교수의 영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말도 아닌, 마치 제 3세계의 언어를 말하는듯한 설명에 적응하지 못한 친구들을 많이 봐왔었기에, 그의 앞에 앉은 많은 학생들이 반쯤은 넋이 나가서 고개를 떨구고 조는 모습, 책상 아래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필기만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등을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굳이 이걸 이해할 필요도 없는데말이야...'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상진으로써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과 나름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이 수업의 내용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기초과목이라는 이름하에, 그리고 대학에서 많이 쓰이는 교재의 커리큘럼 순서대로 수업을 진행할 수 밖에 없기에 교수도 어쩔 수 없을 것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것이 대학 본연의 기능일수도 있었다. 순수하게 자연현상의 매커니즘과 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 어쩌면 요즘처럼 대학이 취업을 위한 양성기관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이 더 비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교수의 수업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상진은 강의실에서 먼저 빠져나와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교수의 방은 12층. 이렇게 매 수업시간마다 교수연구실과 강의실을 왔다갔다 하는것도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긴, 쉬운 일이 어디있겠는가. 그정도로 견디지 못하면 교수가 될 자격도 없겠지, 라는 생각을 하던 사이 교수가 상진을 불렀다.

"최군. 오랫만이네."

"그간 무고하셨나요 교수님."

"나야 뭐 그렇지.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교수가 자신의 방의 도어락을 해제하고 안으로 향했고, 상진은 그의 뒤를 따라서 그 안으로 향했다. 성찬현 교수... 상진의 대학 시절 우연히 들은 수업을 통해 인연을 쌓게된 교수였다. 딱히 그 교수와 트러블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혼을 한 이후 딱히 성교수의 얼굴을 보는것이 껄끄러웠기에 상진은 성교수와 문자나 전화로 연락은 해도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것이 그가 졸업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였다.

"자... 그럼..."

상진이 앉는 것을 보고, 교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고, 뭔가 집중하는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후, 성교수의 주위로 익숙한, 이제는 마치 시험 참가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듯한 어둠이 깔렸다.

"... 연락하셨을때 대충 짐작했습니다. 교수님도군요..."

"그러게말이야... 나도 꿈에서 최군의 목소리를 들었을때는 긴가민가했다네. 그래도 이걸 볼 수 있다니, 그 꿈이 그냥 꿈만은 아니였던게 사실이였구만... 일단 차라도 한잔 하세."

김이 모락모락나는 커피포트에 담긴 뜨거운 물을 자신의 컵에 부었다. 이내 상진이 잡고 있던 컵에는 티백을 중심으로 노란색 잉크같은 것이 퍼져나갔다.

"자네는 여전히 누룽지차를 좋아하는구만."

"취미가 쉽게 변하지 않더라구요."

"... 뭐... 그렇지..."

"저 사진속의 여자분이... 교수님의 아내분... 이신가보군요."

"허허, 그렇다네. 왜? 너무 어린가?"

"아... 하하... 아닙니다..."

교수의 이름판 옆에 있던 유리액자. 확실히 얼핏봐도 성교수의 아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나이터울이 있어보이는 여자였다. 성교수의 나이는 45세... 하지만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2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하... 뭘 그렇게 자세히보나? 내 아내는 이제 30이라네."

"히익... 대단하시네요. 15살 차이를..."

"뭐, 다 자네 덕분 아니겠는가. 하하하..."

"......"

상진은 성교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성교수와 상진의 관계는 사제관계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성적인 부분에서는 상진이 성교수의 스승같은 존재기도 했다. 옛날 이야기였지만... 성교수의 말에 옛날 일이 떠오르는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나저나 내 아내 예쁘지 않나? 이뢰뵈도 결혼하려고 꽤 애먹었다네."

확실히 성교수의 아내는 꽤 미인이였다. 적당히 도발적이면서도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상진은 자신의 아내만큼은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 얘기를 꺼낸다면 성교수가 팔불출이라며 자신을 놀려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성교수의 아내에 대한 칭찬을 했다. 과장하지 않더라도 성교수에게 어울릴만한 여자는 아니였기에...

"최군, 자네 아내가 몇살이랬지?"

"저랑 동갑입니다. 서른...."

"자네도 벌써 서른이구만. 엊그저께만 하더라도 파릇파릇한 젊은이로밖에 안보였는데말이야. 흠... 정말 그때는..."

"... 교수님... 다 지난 일입니다..."

"참참. 그렇지. 미안하네. 허허... 나도 결혼한 몸이고 자네도 결혼한 몸인데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구만."

성교수는 자신이 실언을 했다고 생각한듯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최군, 그 아스모데우스라는 악마에 대해 조사해봤나?"

"딱히 조사할 생각까지는... 그냥 인터넷에서 한번 검색해보고 말았습니다.."

"아스모데우스라는 악마는 많은 곳에서 등장한다네. 조로아스터교의 악마라는 말도 나오고, 성경에도 등장하지. 솔로몬의 72악마라고 들어봤나? 그 72 악마중에 서열 32위라고도 한다네. 심지어는 탈무드에도 등장하지. 단순히 악마라고 서술되는 경우도 있고, 정령이라고 서술되는 경우도 있고, 천사였다가 악마로 타락했다는 설도 있다네."

"... 잠깐, 저희 원래 시험에 든 남자들이... 72명이여지 않습니까. 혹시... 그거와 이 시험과 관련이 있는겁니까...?"

"글쎄, 그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네. 애시당초에 모든 전설이나 신화가 다 그런거 아닌가. 그것들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소설같은 개념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지. 왜, 그런말도 있지 않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판타지는 성경이라는 말. 하하하... 아무튼, 솔로몬의 72 악마와 어느정도 연관이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도 해봤다네. 하지만 어떤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어."

"....."

"아무튼 악마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정도가 확실한 사실이 되겠지. 그자, 아니... 그녀라고 해야하나? 헷갈리는구만. 아무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지..."

"...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왜 이런 시험을 견뎌내야하는지..."

"나도 그게 참 미스테릴세...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자네는 아는가? 내가 지금의 아내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성교수의 낙담한 표정속에서 상진은 성교수의 마음을 알것만 같았다. 아무리 교수라는 지위가 좋다고 하더라도, 15살이나 어린 아내와 결혼을 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것을 상진은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차이가 나질 않아도, 소위 궁합도 안본다는 4살차이라거나, 아니면 동갑내기간의 결혼이여도 결혼은 두 사람의 결혼이 아니라 두 집안의 결혼이라는 말이 있듯이 따져봐야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것은 상진이 직접 경험해봐서 아는 일이였다. 상진은 슬픔이 차오르는듯한 성교수의 얼굴을 보며 그가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 그래서 말입니다만, 제가 생각한것이 있습니다. 우리 12명의 시험자, 모두가 다른 여자를 안건드린다면, 12명 모두 무사히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쉽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교수님. 다들 결혼한 사이입니다. 그 사이에서 다른 여자를 차지한다는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다못해 강제적인 방법도 동원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분명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면 그게 충분히 먹혀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그 악마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부인을 얻어서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인들을 모두 차지해야할텐데, 이건 한번 시작하면 멈출수가 없는 방법입니다. 반대로 그냥 가만히 1년의 시간을 보낸다면, 이건 굳이 시작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소원이 들어지는 아주 편하고도 승산이 높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 그야 그렇지..."

"제가 모으겠습니다. 다음 꿈을 꿀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성교수는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상진의 자신감으로 가득찬 표정을 확인했고,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가득채우던 수심이 사라지는것 같았다.

"자네는 자네 부인을 정말 사랑하나보구만..."

"당연한 말씀을요 교수님. 교수님께서도 사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것 같습니다."

"하하... 그야 그렇지..."

그렇게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며 계속해서 꿈의 내용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한 순간, 노크소리가 들렸고, 상진과 성교수는 둘 다 입을 막은채 교수의 제자로 보이는 학생이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했다. 악마의 말 그대로 그 학생은 어둠으로 가득한 그 공간을 들어오는데는 전혀 막힘이 없는듯했다. 물론, 소리는 듣지 못한것 같았지만...

"교수님. 이번에 쓸 논문에 대해 말씀드릴게 있는데..."

"아? 맞나. 그렇지. 하하... 내 정신좀 봐. 알았어. 내가 금방 내려갈테니, 아래에서 기다려."

"네, 교수님."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내려가는 학생. 그 학생을 보며 상진은 잠시 과거를 떠올리는듯 추억에 잠긴듯 했다.

"그나저나 교수님은 원래 여학생들만 받지 않았나요?"

"하하... 그건 다 옛말이지. 이제 우리 연구실은 진짜 공대답게 남학생밖에 없다네. 하하하... 덕분에 여자친구가 없는 놈들은 죽을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

성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가 겉으로는 아닌척해도 실제로는 지금도 학생들과 예전같은 유희를 즐겨오는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물론 교수의 아내가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 아내를 두고 그런 유희를 즐길리는 없었지만...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교수님.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참,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전화를 통해서 이야기하는거는 조심하기로 하세나. 물론 카톡이나 문자메시지, 이메일같은 경우도 말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네..."

교수가 자신을 부르는 말에 상진은 나가려다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상진에게 교수는 진지한 말투로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자네... 예전 활동은... 완전히 청산한건가?"

"... 네... 모두 과거의 일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일세... 자네가 실력발휘를 한다면 우리는 모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 뻔하니말일세..."

"... 이제 저에게는 저의 아내, 하나뿐입니다.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상진은 문을 닫고 나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성교수와 얼굴을 보고 만나기가 싫었던 것이였다. 성교수 탓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성교수의 얼굴을 보면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 없는 과거가... 죄책감이라는 감정, 그 감정때문이라도 자신의 아내인 미애에게 더욱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상진은 자신의 학교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꿈, 시험에 든지 2개월째

둥그렇게 모여서 서있는 나를 포함한 12명의 남자. 나는 그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함께 이 시험을 극복하자는 이야기. 내가 아스모데우스라는 악마의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스모데우스라는 악마와 그 옆에 서있는 프쉬케는 그저 내가 하는 행동을 재미있다는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애를써서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들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화목한 가정을 깨고 싶은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한 가정이 깨지는것을 원하시는 분들도 없을 것이구요."

"그래서 우리보고 뭘 어쩌라는 말이야?"

"뭘 어떻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자기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며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벌써 2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지 않습니까. 굳이 남의 아내를 건드릴 필요도 없는거고, 일부러 내 아내를 남에게 주기 위해서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지금처럼... 시간을 보내면 우리 모두의 소원이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동맹제안을 하는건가?"

"네! 바로 그거죠. 동맹. 어떻습니까?"

"... 그걸 저 악마가 허락하겠는가...?"

어쩌면 의구심섞인 그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 자신조차 만약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제안을 받았다면, 그 사람을 의심하는건 둘째치고 악마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것인지를 불안해했을 것이니... 나는 고개를 들어 말없이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복장은... 참 바라보는것만으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욱 눈에 힘을 주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아스모데우스는 그 특유의 교활한 웃음소리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호호호... 나는 너희들이 뭘 하든 도움을 줄 생각도 없고, 방해할 생각도 없어. 그냥 너희 마음가는대로 행동해."

"그 말... 진심이지?"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나는, 우리 악마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 그래, 내가 생각한대로만 되면, 문제없이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나의 의견을 거절할만한 명분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동맹의 기운이 형성된 이 공간에서 섣불리 그 제안을 거절한다는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옆사람과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말소리가 많아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내 의견을 수용한다고 말하는것 같았다.

어둠이 걷히고 점점 밝아지자 나는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를 더욱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맞은편에 서있는 수철의 모습, 그리고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성교수의 모습... 그리고... 어? 설마... 저 사람은...? 그 사람도 내 얼굴을 확인했는지 나에게 가까이 오기 시작한다.

"아니, 자네... 설마 최대리 아닌가?"

"사... 사장님...!!!"

내가 어떻게 그 남자의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회사 사장인데... 소위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40세라는 나이에 국내 최고기업일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반도체회사로 손꼽히는 우리 회사의 사장이 된 우도혁 사장... 그도 이 시험에 참여하고 있었단말인가... 나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그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보니 반가워해야할지말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제가 더 일찍 알아뵜어야했는데..."

"아니야아니야. 내가 자네를 딱 한번밖에 보진 못했지만 자네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잊지 못하고 있었지. 어쩌면 이것도 인연인가보구만."

우사장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서 서있는 성교수를 바라보고는 나에게 마치 누구냐는듯 물었다.

"사장님. 이 분은 제 대학시절 은사님이십니다."

"하하, 최군의 사장님이신가보군요. 반갑습니다. 성찬현 교수라고 합니다."

"아아... 이런 성찬현 교수님이셨군요. 학계에서도 꽤나 유명해서 이름은 듣고 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뵙게되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사장님같은 훌륭한 분을 뵙게되서 영광입니다."

평소같았으면 겉치레 인사였겠지만, 이 꿈이라는, 그리고 시험이라는 특수한 환경때문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친근한 뭔가를 느끼는것만 같았다. 곧 성교수는 누군가를 부르더니 우리에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인사하시게나. 우리 처형의 남편이지."

"안녕하세요. 장현우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장그룹의 회장님이시구요. 저는 아버지에게 그냥 조그마한 자회사 하나 받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하... 우사장님 회사와는 몇번 거래할 일이 있어서 언제 한번 사장님과 연을 맺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기회가 생기게되서 영광입니다."

"하하, 반가워요. 그나저나 장그룹이라면 혹시...?"

"아마 그 혹시가 맞을겁니다. 하하... 물론 우사장님 회사와 비교하면 부끄럽지만요."

"아닙니다. 젊은 사장님이 능력이 좋아서 그 회사가 그렇게 성장했다고 들어서 저도 언제 한번 노하우좀 듣고 싶었습니다."

순식간에 내 주위에 모여든 4사람... 나, 수철, 성교수, 우사장, 장사장. 이렇게 5인은 순식간에 의기투합을 하고는 조만간에 한번 현실속에서 모임을 갖자고 말을 했다. 어쨋든 나는 수철, 성교수, 그리고 우사장과 아는 사이였고, 성교수의 경우는 장사장과 아는 사이였으니 우리 모두에게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사실 이 동맹제의를 하면서도 12명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몇명 되질 않아서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렇게 5명이나 모이고 나니 나름 자신감이 붙었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MMORPG에서 정규공격대를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지인들을 많이 확보해라, 라는 말이 있다. 어쩃든 그 집단이 추구하는 것이 이해관계에 얽혀있다면, 그 조직의 장이 조직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모임의 중심에서 수족처럼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였다. 물론 이 동맹의 경우 딱히 장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걸 우리 5명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그들도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부인을 탐할 필요 없이 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보니 서로의 얼굴을 아는것은 우리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였다. 형제사이로 보이는 두 남자가 있었고, 단골손님과 주인의 관계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12명이 남게 된 것도 우연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의, 꿈속에서의 의식이 사라져갔다...

~ 현재

상진의 기분은 최고였다. 우사장과의 꿈에서 만남 이후 상진의 부서, 그 중에서도 어떤 명령에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상진의 업무 부담은 크게 줄어들어있었다. 가끔 접대를 나가긴 해야했지만, 그 빈도수는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줄어들어있었고, 무엇보다 회사에서 그를 괴롭히던 김부장도 뭔가를 느꼈는지 이전과는 달리 도리어 그가 상진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불편했지만 어느새 상진은 그런 분위기에도 적응해서 오히려 그 상황 자체를 즐겼다.

오늘은 접대가 없어서 일찍 퇴근하는 날. 그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날아가다가시피 가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미애를 끌어안았다. 처음엔 상진이 오자마자 자신을 안는것보다는 요즘들어 그가 이렇게 일찍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더욱 믿기지 않았던 미애였지만, 이제는 적응된듯 상진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는 그와 입술을 맞췄다. 그들은 뭔가에 홀린듯 서로의 입술을 계속 핥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채 침실로 향했다.

아직 씻지도 않은 상진이였지만 미애는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진의 몸을 더듬던 미애는 그의 가슴을 밀쳤다. 상진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고, 미애가 위에서 상진을 덮치는 모양새로 그에게 다시 입술을 맞추려고 한 순간... 미애의 입술은 상진의 입술이 아닌 애꿎은 배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잠들어버린 그녀...

'뭐지 이건...?'

자극적인 섹스를 즐겨하지 않던 그들 부부에게 있어서는 오늘처럼 미애가 애타게 상진의 입술을 갈구하는것이 최고의 유혹과도 같았고, 상진에게 있어서는 그 자체로도 너무나 흥분되는 상황이였기에 아쉬웠다. 이래놓고서는 왜 갑자기 잠든단 말인가. 그때, 갑작스럽게 상진의 주위에 어둠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뭔가... 아니... 그녀... 아니.... 악마...

"호호호... 내가 방해한건 아닌지 모르겠네."

"... 네 짓이야?"

"응. 잠깐 너랑 할얘기가 있어서 잠좀 재웠어."

상진은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아내인 미애에게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닌가, 혹시라도 일시적으로 잠든게 아니라 영원히 잠들었다거나, 아니면 미애를 볼모로 뭔가 이상한 짓을 시키려는것이 아닌지, 온갖 불안한 생각이 상진의 머리를 괴롭혔다. 상진의 얼굴 표정을 보며 아스모데우스는 그의 생각을 읽은듯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마. 내가 사라지고나면 네 아내는 자신이 잠든것도 모르고 아까 하던 일을 계속 할테니까. 후후... 뭐, 네가 부탁만 한다면 너희 부부가 섹스를 하는 광경을 지켜봐줄수도 있어."

"... 그딴 부탁 안한다..."

"차갑기는... 훗."

"그나저나 여긴 왜온거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이제 한달에 한번씩 너희들 개인적으로 한번씩 찾아간다고. 그 날이 오늘, 여기 였을뿐."

상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이 악마라는 하는 일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없을까, 라는 생각. 하긴... 생각해보면 무조건 나쁜것만은 아닌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우사장과의 안면이 트이고, 그래서 최근들어 그의 업무는 거의 없다시피했고, 매일같이 일찍 퇴근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후후... 네 녀석의 자지는 인간 남자들 치고는 상당한거같군. 맛보고 싶어지는데?"

".... 네년꺼 아니야."

"왜~~ 나 이뢰뵈도 처녀라고."

"안믿거든? 그리고 니가 처녀이든 아니든 관계없어. 관심없다. 너한텐."

"아흥~~ 그 신경도 안쓴다는 말투가 날 너무 흥분하게 만들어. 어때? 우리 한번 사고칠까? 어차피 네 아내는 네가 내 처녀를 뺏어갔다는걸 죽어도 알 일은 없을거야. 물론 네 시험에 지장을 주는 것도 없을테고."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그소리? 대악마라고 불리는 위~대~한~ 아스모데우스 치고는 꽤나 한가하나보네."

상진은 진심으로 아스모데우스를 비꼬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그의 말투에 너무나도 진하게 묻어나왔다. 만약 사람이 듣는다면, 듣는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기분이 나빠하기는 커녕 오히려 즐겁다는듯 한번 웃어보이고는 침대에 누워 잠든 미애의 옆에 앉아 그녀의 몸을 쓸어내렸다.

"내 아내한테 손대지마!!"

"괜찮아 괜찮아. 나한테는 네 부인을 만지는거지면 너의 부인한테는 내가 만지는걸로 느껴지지 않거든. 지금의 나는 실체이기도 하지만, 실체가 아니니까."

"헛소리 하지 말고 떨어져!"

"알았어~ 네 부인 보지 한번만 빨아보궁~ 인간 보지 맛은 어떤지 궁금하네. 호호호..."

"진짜!!!"

상진이 소리치자 아스모데우스는 장난이였다는듯 혀를 빼곰 내밀고는 미애를 만지던 손을 떼내었다. 아스모데우스가 미애에게서 떨어져나가기가 무섭게 상진은 잠든 미애의 몸을 이불로 덮어주고는 그녀의 몸을 지키려는듯 아스모데우스와 미애의 사이에 앉았다.

"호호... 그걸로 가려질거라고 생각해? 난 원하는 순간마다 너의 아내의 알몸을 볼 수 있어. 그녀가 샤워할때, 너랑 섹스를 할때, 호호... 섹스할때의 네 아내는 정말 대단하던데? 쾌락에 몸을 맡기지 않고 절제할대로 절제하며너도 느낄만큼은 다 느껴. 정말 대단한 여자야."

칭찬인지 성희롱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 아스모데우스를 상진은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 표정을 보자 아스모데우스는 알겠다는듯 사과의 표시로 손바닥을 한번 보이고는 말을 했다.

"오늘 너를 찾아온건, 네가 제안한 동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야."

"... 왜? 문제될건 없다고 네가 말했었잖아."

"그거야 그렇지. 내쪽에서 문제가 될건 없어. 나는 오히려 널 걱정해서 말해주는거야."

"무슨..."

"너는 내가 너희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이 시험에 들게 한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그리고 과거에 너처럼 동맹을 제안한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해? 훗... 웃기지도 않아.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야."

"......"

상진은 아스모데우스가 제발 지껄이지 말고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주 단순한 생각이지. 너희 말이 맞아. 애시당초에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평소처럼 생활을 하는것. 너희 부인들과의 생활에만 만족하는것. 평소처럼만 행동한다면 너희들은 모두 무사히 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과연 말처럼 쉬울까? 과거의 인간들은, 특히나 그 동맹을 제안한 인간들은 대부분 제안한 인간이 가장 먼저 그 동맹을 깨뜨리고 남의 부인들을 탐하기 시작했지. 후후..."

"난 다르다..."

"정말 넌 다르다고 생각해?"

"난 달라! 난 내 부인만을 사랑해!"

"정말 그럴까? 내가 네 과거를 조금 읽어봤는데말이야... 정말 흥미롭더군. 정말 대단해. 과거에도 너처럼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유혹한 남자는 없었어."

"... 지난 일이다..."

"정말? 그게 지난 일일까? 인간인 네가, 그 과거를 단순히 과거로 묻어둘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네 부인. 네가 사랑한다던 네 부인... 너의 과거를 어느정도나 알지?"

"...."

"네 부인이 네 과거를 알게 되었을때의 표정이 궁금하군. 호호호..."

"서... 설마... 너... 미애한테 그걸 말할 생각이냐?"

"아니~ 내가 왜 그걸 말하겠어. 호호... 약속하지. 절대로 나는 말하지 않아. 애시당초에 너의 부인은 날 볼수도 없어. 내 말을 들을수도 없고."

"시덥지않게 내 마음을 흔들 생각이라면 소용없다고 말해주지."

"좋아. 대단해. 지켜보겠어. 후후... 하지만 내 충고를 잘 들어주는게 좋을거야. 넌 정말로 이 동맹을 유지하는게 너한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악마답군.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놀면서 인간을 유혹하는건..."

"인간다운 표현이지. 진실을 말해주는데도 진실을 거절하는건. 후후... 뭐 좋아. 아무튼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네가 시험을 탈락하게되도 네 영혼만은 소멸시키지 않고 내가 가지도록 하지. 어때? 고맙지?"

"헛소리. 내가 시험에 탈락할 일은 없을거야. 내 영혼이 소멸될 일도, 내 영혼이 너의 것이 될 일도 없어."

"하아~ 흥분되~~ 알았어. 나중에 내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후회하는 일이 없길 바래. 그럼 안녕~~"

어둠이 사라지고, 잠들었던 미애는 언제 잠들었다는듯 상진을 껴안았다. 원래같았으면 상진도 당장이라도 미애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원치않는 불청객으로 인해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여보, 나 씻고올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 안씻어도 되는데..."

"그냥... 오늘은 씻고 싶어서 그래. 이해해줄거지?"

"치... 알았어. 나 밥이나 준비할래..."

"삐졌어?"

"... 흥...!!"

"미안해 여보. 대신... 오늘 밤... 기대해. 후후..."

"하여튼... 실망시키기만 해봐..."

상진은 토라진듯, 하지만 얼굴을 붉힌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물줄기에 기분이 좋을만도 했지만, 왠지모를 불쾌감이 영 사라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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