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The Time ~ 그땐...
~ 현재
회사 일이라는 것이 바쁠때는 엄청 바빠서 정말 돈이고 뭐고 때려치고싶다는 충동을 하루에도 수십번이나 느낄때도 있는가 하면, 한가할때는 마음놓고 월급도둑질을 하며 넋놓고 시간보내는 말년병장과도 같은 것이다. 상진에게는 지난주까지가 엄청나게 바쁜 기간이였다면, 이번주부터는 굉장히 한가한 시간들이였다. 물론 언제라도 자신의 부서와는 전혀 맞지 않은 영업일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긴 했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따로 불려나갈 일이 없었다.
칼퇴근의 연속... 상진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꾼 꿈이 현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시험인지 뭔지를 이겨내고 아스모데우스에게 소원을 빈다면, 자신은 이런 여유로운 삶이 계속되는것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돈, 명예, 권력, 아니면 그 밖의 비현실적인 일들을 아스모데우스가 이뤄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런 소박한 꿈이 전부였다. 남자가 패기가 없다, 라며 남들은 비웃을지도 몰랐지만 남의 시선따위는 관계없었다. 단지, 이렇게 여유로운 삶속에 그의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것 같았다.
"오늘도 일찍오네?"
"참나... 그렇게 말하니까 꼭 왜이렇게 일찍오냐고 하는거같네?"
"치... 그럴리가... 저녁 안먹었지?"
"그러엄~ 당신이 해준 밥 먹고싶어서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거야. 큭큭..."
집에 들어온 상진을 미애가 활짝 웃으며 그는 신발을 벗고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싫지 않은 느낌이였지만 미애는 얄밉다는듯 상진의 가슴을 가볍게 치고는 그의 마이를 벗겨주고는 그것을 옷걸이에 걸었다.
"일단 씻구와. 특히 손... 요즘 미세먼지가 장난이 아니래."
"알았어 알았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먼지... 남자라서 그런지 상진은 그런 것들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밖에 나가지 않고 거의 집안일만 하는 미애가 오히려 그런 것들을 더욱 신경썼다. 어쩌면 그것 또한 미애가 타고난 현모양처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밤에는 마치 요부처럼 남자를 홀리는 재주가 있다면, 그야말로 남자들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일지도 몰랐지만, 신은 공평한듯 부부생활을 하는데 있어서의 미애는 그런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미애가 침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데에는 그것에 익숙치 않아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상진이 굳이 그런 점을 미애에게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상진의 애무가 조금 더 적극적이였다면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지만 상진도, 미애도 그런 것에 불만을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섹스는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물론 쾌락을 갈구하며 육체적인 욕망을 해소하는것도 좋다. 특히나 섹스로 인해 어떤 쾌락을 얻을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상진은 그래서 더더욱 미애와의 부부관계를 더욱 신경썻다. 자신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짐승이 되지 못하도록, 그녀 또한 과도한 쾌락을 추구하는 짐승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긴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에서 그들은 침대에서 기분좋은 땀을 흘렸고, 상진은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한숨을 내쉬는 미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풋...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당신이 나한테 처음 고백하던날..."
"갑자기 그땐 왜?"
"그냥... 그때는 이렇게 될지 상상도 못했었거든..."
"하긴... 그때 당신 반응은..."
그들은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며 그때의 풋풋했던 때를 떠올렸다...
~ 5년전.
전역. 남자들은 전역을 하면 여러가지를 꿈꾼다. 한심했던, 혹은 무기력했던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군대에서의 고난을 극복했던 것을 토대로 새로운 삶을 꿈꾸곤 했다. 혹은 2년동안 군대에서 쌓여있던 것들을 모조리 해소할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상진 또한 그런 보통의 남자들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남들에 비해 꽤나 늦게 온 군대... 하지만 늦게 온 만큼 군대에 오기 전에 정말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자부심같은것이 있었다. 단순히 많은 여자들을 만났던 것이 아니였다. 보통 남자들이 부러워할만한 많은 것들... 쓰리썸부터 시작해서 돌림빵, 여자친구 교환, SM 플레이 등...
남들은 함께 근무를 서면서, 혹은 담배를 피면서 여자들과 있었던 일들을 마치 영웅담 풀듯이 자랑을 했지만 상진은 묵묵히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기만 할뿐, 딱히 자랑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여자를 꼬셔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였기 때문에... 그렇기에 전역식을 마치고 고속버스에 탑승한 상진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번엔 어떤 여자를 만나서 그의 쌓였던 욕정을 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복학할때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일단 그는 알바를 시작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여자를 만나는것도 초기자금이 필요했다. 여자를 자신의 포로로 만들고 난 이후에는 어차피 돈을 쓸 필요가 없었지만 거기에 가기까지는 하다못해 밥값, 커피값, 짜잘한 데이트비용, 게다가 가장 중요한 모텔값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남자들이 데이트비용을 부담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초반에 투자만 해놓으면 그것보다 몇배로 여자들에게서 긁어낼 수 있다, 라는 자신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님은 그의 자취비용정도는 부담을 해줬다. 학생신분으로 대학 근처에 최대한 싼 자취방을 구하고, 근처에서 알바를 하는 것으로 돈을 모으면서 그는 여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의 눈에 차는 여자가 보이질 않았다. 물론 아무나 잡고 해소를 하는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전역하고나서의 첫 여자는 왠지 아무 여자나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친구와의 술자리... 그의 친구들은 벌써 전역한지 오래고 이미 대학생활에 적응해서 취업준비를 하는 놈들도 있었고, 전문대를 졸업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놈들도 있었다. 각자의 위치는 다르지만 그들은 오랫만의 만남을 술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이야~ 그나저나 상진이, 이놈은 어떻게 전역한지 얼마 안됬는데도 군인티가 안나냐?"
"풋... 이게 클라스라는거다 임마."
"클라스는 무슨... 그래. 아무튼 그래서... 요즘은 여자 안후리고 다니냐?"
"아직~"
"야, 빨리 나도 좀 여자 소개시켜줘봐. 이번엔 어디서 먹다 버린년 말고 좀 싱싱한 년으로다가."
남자들끼리의 대화라 그런지 어느새 그들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일종의 여자 공급책인 상진이 빨리 여자를 사귀고 그 친구들의 지인을 소개받길 원하는 눈치였다. 그것에 상진은 웃음을 짓고는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그들을 지나가는 한 여인이 있었다. 상진도, 그리고 상진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친구들도 모두 그 여자에 시선을 뺏겨버렸다. 시간이 멈춰버린듯한 기분...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 깨버린 것은 상진이였다.
"야, 저거 내꺼다."
"아... 시발놈. 죽이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안되냐?"
"꺼져. 내꺼야."
무슨 자신감인지 상진은 이미 그녀는 자신의 여자라는양 그들에게 말했고, 상진의 선전포고와 같은 말에 그들은 아쉬움이 가득한 탄식을 내뱉으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아무리 골키퍼가 있다고 골이 들어가지 않는것은 아니라지만, 상진의 레이더망에 걸린 여자는 이미 상진의 것이나 다름없다, 라는 것을 예전부터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 여자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그저 상진의 작업이 성공해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것을 받아먹어야겠다는 생각 뿐이였다.
"야, 나 작업간다."
"짜식... 화이팅이다 임마!"
응원해주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상진은 첫눈에 이여자다, 싶었던 여자와 그녀의 일행들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들의 일행은 그녀까지 포함해서 3명, 상진은 그녀의 옆자리가 비어있는것을 보고는 옳타꾸나,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 제가 이쪽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술이라고 한잔 사드릴까 하고..."
"우와~ 너무 잘생기셨다. 이름이 뭐에요?"
"최상진이라고 하고 여기 학교 이제 복학해요. 나이는 25살이구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녀의 일행들은 뜻하지 않은 남자가 다가와서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상진의 준수한 외모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유독 그의 옆에 앉아있는 그의 목표물이였던 여자만큼은 상진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옆에 앉는것이 불쾌하다는듯 자꾸만 그녀의 의자를 들어 최대한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얘, 이분이 너 마음에 들어한다잖니."
"됐어."
"아... 그러지 마시구, 마음에 안들면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혹시 번호라도 알려주시면 나중에 밥이라도 한끼..."
"제가 왜요?"
그녀의 반응에 상진은 당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군대를 가기 전에도 그의 대쉬가 실패로 그친 적이 있긴 했었다. 이렇게 번호를 물어볼때 번호를 받지 못한적도 10번 중 1번정도는 있는 일이였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안들어도, 자신이 마음에 든다면서 접근하는 일 자체는 기분이 좋은 일이였고, 나중에 남자친구가 있다거나, 혹은 마음에 안든다는 말로 그의 대쉬를 거절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식의 반응은 처음이였기 때문이였다.
"얘! 미애야. 왜그래~ 번호정도는 줄 수 있잖아. 게다가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됐거든. 재수없어."
"아... 미애씨구나. 혹시 성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그쪽한테 왜 알려드려야하죠? 보아하니 친구분들이랑 오신거 같은데 가서 술이나 드세요."
"아... 그럼 딱 한잔만 마시고 갈게요. 하하..."
"참나. 어이없어. 얘, 우리 일어나자."
너무나도 차가운 반응... 나름 여자를 꼬시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던 상진이 한참을 굽히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너무나도 냉담했다. 그것은 상진의 자존심에는 너무나도 큰 상처였다. 그녀의 일행의 만류에도 미애는 끝끝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의 일행들은 상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미애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상진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그녀들의 자리로 넘어올때 가져온 술잔을 비우고는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설마... 천하의 최상진이 여자 번호 하나 못따온거냐?"
"아... 씨발... 좆같네 저년..."
"큭큭큭...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내가 이런날도 다보네."
친구들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상진은 묵묵히 술잔을 넘겼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자신의 좆이 없이는 죽고 못사는 그런 여자로 만들어버려야겠다, 라는 일종의 다짐같은것을 하면서...
또다시 일상이 시작되었고, 그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 그녀는 차츰 그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꽤나 큰 충격이였지만 미련을 가지기에는 그녀의 번호도, 그녀의 사는 곳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성도... 단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것은 그녀의 이름이라든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그녀의 너무나도 매력적인 몸매... 그녀를 더럽히는 상상을 하며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자위라는것을 한 상진은 그녀에 대한 미련을 묻고 다시 다른 여자를 물색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운명이였을까. 그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곧바로 향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렸다가 가기 위해 평소와 다른 길로 걸을때,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학원의 교사일을 하고 있는듯, 불이 꺼진 학원에서 동료 교사들 몇명과 함께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서 상진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라~ 또뵙네요. 하하... 예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누구세요?"
"아... 기억 못하시나? 최상진이라고 합니다. 전에 술집에서..."
"아. 어쩐지 기생오래비같이 생겼다 했더니, 그때 그 재수없게 와서 분위기 망치고 간 그분이셨구나."
아니, 세상에... 아무리 자신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더라도 보통 여자들은 이미지관리를 위해 저런 말까지는 안하는데,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상진은 화가 날 지경이였다. 심경같아서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고 근처 모텔로 들어가서 그녀의 보지를 마음껏 쑤시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지만 가까스로 그런 충동을 참고는 겉으로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하... 죄송했습니다. 그때는... 혹시 집에 가시는 길이세요?"
"그런데요?"
"혹시 집이 어디신지... 지하철 타고 가시나요?"
"제가 왜 그런거까지 그쪽한테 말해야하죠?"
"요즘 여자 혼자서 걷기에는 밤길이 위험하잖아요. 이것도 인연인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요 앞이 바로 지하철 역이거든요? 필요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그쪽이 제일 위험해보여요."
"아, 지하철 타시는거 맞구나. 하하... 그럼 제가 지하철역까지 바래다드릴게요."
"그러시든가."
얼음공주같은 차가운 말투에 상진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할뻔했지만, 가까스로 그것을 되삼키며 제멋대로 앞서나가는 그녀의 옆에서 이것저것 그녀의 환심을 살만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그에게 돌아오는것은 냉담한 반응 뿐이였다.
그 이후로 알바가 끝나면 그녀의 학원 앞에 다가가서 지하철역까지 걷는 것이 그의 일상이 되버렸다. 조금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하면 알거 없다느니, 꺼지라느니, 신고할 거라르니, 라는 식의 반응 뿐이였다. 상진도 왜 자신이 그런 반응을 하는 그녀에게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유일한 여성이였기 때문이였을까... 이정도면 거의 병 수준이라는 것을 상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의 그런 시간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기를 한달정도 되었을까, 드디어 그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발!!! 제발 좀 그만 따라오세요!! 다른 사람들이 다들 그쪽이 제 남자친구인줄 알잖아요!!"
하긴, 상진은 사실이야 어떻든 주위의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한달동안 빼지않고 지하철역까지 걷는것. 연인사이로 보는것이 정상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쉽게 포기할 상진이 아니였다. 상진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빨리 가자는듯 재촉하고 있었다.
"도대체 바라는게 뭔데요!! 왜 자꾸 귀찮게 하는건데요!!"
"그쪽이... 아니, 미애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딱 한번만 만나주세요. 딱 한번만. 만나보고 진짜 마음에 안드시면 정말로 귀찮게 안할게요."
"... 딱 한번만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제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마세요."
"네... 그럼 번호라도..."
"됐어요. 이렇게 된거, 그냥 오늘 술이나 한잔 해요. 괜찮죠?"
상진은 이게 왠 횡재냐 싶었다. 딱 한번이라고 하기에 평범하게 밥을 먹고 커피나 마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술이라니! 그녀를 잔뜩 취하게 만들고 모텔, 아니...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가서 그녀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 그는 그녀에게 분위기 좋은 술집이 있다고 하면서 앞장섰고, 그녀가 앞서 말한대로 그녀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서 술집으로 들어왔다.
"안주는 뭐로 하실래요?"
"아무거나요."
"술은 참이슬로... 괜찮죠?"
술과 안주가 나올때까지 계속해서 상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녀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채였다. 이윽고 술과 안주가 나오자 상진이 술병에 손을 대기가 무섭게 그녀는 소주병을 낚아채고는,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서로의 술잔을 부딪치는 행위는 사치나 다름없다는듯, 그대로 목구멍에 술을 넘겼다.
'진짜... 어떻게하면 저렇게 철벽일수가 있는거지...'
상진도 기가 막힐 노릇이였다. 아니,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어느정도 마음을 열어주는게 사람관계라는 것이였다. 아니, 보통 이정도까지 올거였다면 이전에 이미 그에게 따라오지 말라거나, 혹은 다른 지인들을 불러서라도 그가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보통이였다. 하지만 이 여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굉장히 애매모호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밀고당기기를 하고 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판단을 하는 근거는 오직 상진의 직감 뿐이였지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그녀는 연애고수같은것은 아니였다.
거의 술은 그녀가 혼자서 마시고 있었다. 두잔을 마셨을때부터 이미 그녀의 얼굴은 터질듯 붉어져있었고, 혀도 점점 꼬여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술을 벌컥벌컥 삼키고 있었고, 이미 그들의 테이블에는 빈 소주병이 3개나 있었다.
"여긔용~ 소중 1변망 더주쉐욘~"
"저기... 미애씨... 많이 취하신거같은데..."
"뭐~~~ 이 쒸~~~ 눼가 뫄쉴거궈던?"
어느새 인사불성이 되버린 그녀... 상진은 그녀가 술에 진탕 취하게 만드려는것이 목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그녀 스스로 만취상태가 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너 왜 자꾸만 날 귀찮게 하냐? 엉? 왜구러는데~?"
"미애씨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난 너 마음에 안들거든~? 꺼져버렸으면 좋겠어 이자식아~ 알아?"
"제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시는지..."
"야 이 새끼야~ 나 처녀야! 처녀라구!! 처녀라구 무시하냐~?"
갑작스럽게 자신을 처녀라고 외쳐대는 그녀때문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모아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그녀의 발언에 상진은 쪽팔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싶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그녀의 몸이 테이블로 고꾸라졌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있던 그릇들 몇개는 엎어져서 그녀의 옷을 더럽혔고, 심지어 소주잔은 바닥으로 떨어져서 유리조각이 되버리고 말았다. 상진은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소주를 가져온 종업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는 허겁지겁 계산을 하고 그 술집을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도 고역이였다. 이정도일줄이야... 한가지 다행이라면 다행인것은 부축하기위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에 닿았고, 그녀는 술에 너무 취해서인지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물론 주위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데는 제약이 있었지만,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이야... 진짜 죽이는데 이년... 좀있다 봐라. 맛있게 시식해주지.'
가까스로 그녀를 부축한채 자취방에 도착한 후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가슴이 한번 위아래로 출렁이며 마치 상진에게 어서 먹어달라고 재촉하는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다리까지 벌려져있어서 치마를 걷어올리고 스타킹을 조금만 찢어도 곧바로 그녀의 보지를 거침없이 농락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상진은 입맛을 다시며 문이 잠겼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서 그녀의 옷 단추를 벗기려고 한 순간...
"우엑~~~~~"
그녀는 뱉어내서는 안되는 것을 그에게 배어내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의 라운드티를 손으로 끌어당겼고, 그의 가슴과 옷 사이를 마치 변기라도 되는것마냥 그곳에 그녀의 토사물을 토해냈다.
".........."
아 씨바, 할말을 잃었다, 라는 인터넷의 유행어에 딱 맞는 상황이였다. 그녀가 뱉어낸 따스한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그 불쾌한 물질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것만 같았다. 상진은 울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도저히 원래 그가 하려고 했던 행동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속으로 욕을 한바가지 내뱉으며 그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고, 그녀의 토사물로 얼룩진 셔츠와 팬티, 심지어 바지까지 바닥에 내려놓고 빨래를 하면서 자신의 짜증을 해소했다.
한참을 씻고 나온 상진은 그의 침대에 곤히 잠들어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범하고 싶은 욕구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그녀가 내일 일어나면 오늘 일을 기억할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하얀 셔츠에 묻어있는 오버히트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갈아입히고 싶었지만... 차마 갈아입히질 못했다. 옷을 벗긴다면 아까의 그 욕구가 다시 솟아오를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토록 그녀를 향한 욕정을 홀로 풀어오던 그였건만, 지금의 그는 그녀를 맛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서랍을 뒤적거리며 내일 그녀가 일어났을때 그녀가 입을만한 셔츠를 찾았다. 사이즈가 다르지만... 이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생각...
'싫어도 어쩔거야. 저거 입고 그대로 집에 가는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다음날 미애는 죽고싶은 심경이였다.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상진이라는 남자가 그동안 너무나도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와 단 둘이 술집에 갔을때도 짜증이 났고, 홧김에 자신의 주량을 한참 넘어서 계속해서 들이켰던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걸, 눈을 떠보니 생전 처음보는 광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 피곤함...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다행히 입고 온 그대로... 다만 어깨쪽에 얼룩... 아... 또 토했나... 라는 생각...
머리가 깨질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계속 누워있을수만은 없는 일이였다. 씻고 싶다... 하지만 여기는 어디지? 그녀의 시선에 문득 책상 위에 잘 개어진 셔츠 한장과 쪽지가 보였다.
- 그러니까 술 적당히 드셨어야죠.
허락 안받고 핸드폰에 제 번호 저장한건 어제 술값 대신입니다.
최상진, 으로 저장해놨어요. 연락 주세요.
일이 있어서 일어나시는거 못보고 먼저 나갑니다.
아 참, 화장실에 일회용 칫솔 사놨으니까 그거 쓰시구요.
집에 가실때 옷은 책상에 있는거 입고 가세요.
P.S. 처녀는 지켜드렸습니다. 원망하지 마세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제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어제 술을 마셨을때처럼 시뻘개졌다. 그 남자에게 내가 무슨 짓을... 이란 생각... 앞으로도 그가 귀찮게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대해야하나, 라는 걱정에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낮에 들어가서 어제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면 어떻게 하냐느니, 라면서 미애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구박을 했고, 그 구박에 친구의 집에서 잤다는 변명을 하며 그녀는 출근을 했다. 하루종일 숙취에 시달려 괴로웠지만, 그것보다도 무서운것은 그녀가 퇴근할때 또 전처럼 상진이 그녀를 기다릴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였다.
퇴근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오늘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 하지만 왜 그가 오지 않았지, 라는 걱정. 다치기라고 했나? 아니면 어제 그녀가 보인 모습때문에 질린건가?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수도 있다, 라는 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녀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아쉬움...
'그나저나 옷 돌려줘야되는데...'
그녀의 손에는 가방과 별개로 다른 한 손에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아침에 그의 집에서 나올때 입고 나왔었던 그의 셔츠... 세탁을 해서 돌려줘야하는게 도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오늘 만날 수 있을거란 생각에 곱게 접어서 가져왔는데... 그녀는 상진에게 연락을 해야하나 고민하며 수십번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차마 그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생각을 접고 그녀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학원 입구에서 지하철 역까지 정말 오랫만에 혼자 걷는것같은 느낌. 전에는 귀찮아서 그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그녀는 아쉬웠다. 쓸쓸하기도 했고...
'풋... 하여튼... 진짜 웃긴 남자였어...'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던지는 변태적인 시선이 마음에 안들어서 남자를 멀리했던 그녀였다. 몇번 사귀던 남자들도 결국에 그녀에게 원한 것은 섹스였고, 섹스는 속물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였기에 그들이 그녀에게 몸을 원할때마다 망설임없이 차버렸던 그녀였다. 사실 딱히 좋아서 사귀었던거도 아니였기 때문에 쉽게 차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진심으로 그 남자를 사랑했다면... 부끄럽긴 해도 섹스까지도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 그녀는 왜 그의 앞에서 굳이 그런 부끄러운 말들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남자는 얼마든지 자신을 범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몸을 건드리지 않은 것일까.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던 사이 그녀는 어느새 지하철역으로 도착했고, 고개를 숙이며 걷던 그녀는 앞의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의 등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어....?"
"하하... 안녕하세요. 어제, 아니... 오늘 잘 들어가셨나보네요."
"여... 여긴... 어떻게..."
"오늘은 조금 새롭게 집까지 바래다드리려구요. 괜찮으시죠?"
"... 언제는 제 허락받고 따라왔나요?"
미애의 허락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절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 하지만 상진은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듯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저... 이거... 옷이요..."
"아, 그거는 선물로 드릴게요. 집에서 가끔 저 생각나실때 입으세요."
"...... 누... 누가 당신같은 남자를 생각.... 한다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미애를 보며 상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거리고 있었다. 미애는 정말 못말린다고 생각하고는 집에가서 버릴거라고 호통을 치며 그에게 옷을 줄 것을 포기했다. 전과 다른점이 있다면, 전에는 지하철에 바래다줄때까지 쉬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대며 귀찮게 하던 상진이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옆에서, 그것도 너무 가까이 있지도 않은채 서서 가만히 있다는 점이였다. 미애는 몇번이고 그에게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까 했지만, 자꾸만 어제의 일이 떠올라서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그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귀에 조그만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처.녀."
"머... 머요...?"
발끈한 미애, 하지만 상진은 그녀의 반응에도 모르는척 하면서 지하철 벽을 주시했고, 미애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애가 내리는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미애가 먼저 내리고 상진이 그녀의 뒤를 뒤따라갔다. 미애는 상진이 도대체 언제까지 따라오려는 생각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웃으면서 말을 했다.
"저, 스토커같은 사람 아니에요. 여기까지 바래다드릴게요."
"......"
"아쉬우면 집까지 바래다드릴까요?"
"돼... 됐어요!!"
"하하... 아무튼 즐거웠습니다. 내일 뵈요."
내일 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의 말이 얄밉게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왠지모를 설레임... 그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어제의 일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어제 일은..."
"괜찮아요. 저 생각보다 쿨한 남자에요. 특히나 처녀분한테는~"
"그... 그말.... 다... 다시 한번만 더... 더하면....!!"
"더하면요?"
"... 끄... 끝이에요!!"
"네? 저희가 뭐 끝낼만한 관계였나요?"
상진의 약올리는듯한 말에 미애는 얼굴이 빨개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채... 책임져요!!!!"
~ 다시, 현재.
"큭큭큭... 그때 당신... 정말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치... 부끄럽게..."
상진도, 미애도, 그들이 처음 만나서 사귀게 된 순간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있었다. 그의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애도,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하고 싶었던 상진도, 그렇게 사귀게 된 이후 2년간의 연애. 그리고 결혼까지... 정말 아름다운 시간들이였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귀는 내내 상진이 하도 미애를 처녀라고 놀려댔기에, 미애는 몇번이고 상진의 가슴을 때렸지만, 그가 그녀를 처녀라고 놀려댔던것은 어쩌면 그들이 결혼할때까지 그녀의 처녀를 지켜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나... 당신 못만났으면... 평생 처녀였을지도 몰라... 후훗..."
"나도... 당신을 못만났으면 평생 사랑이란걸 모르고 살았을걸?"
미애도, 상진도,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하며 우수에 젖은 눈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맞췄다....
~ 악마
"프쉬케. 인간들의 책중에 제일 재미있는게 뭐야?"
아스모데우스의 물음에 도서관 같은 곳에서 프쉬케는 한 쪽으로 걸어가고는 책을 하나 꺼냈다.
"아무래도 역시 인간의 역사에 대해 써놓은 책이 가장 흥미로운것 같습니다."
"으음~ 그래. 우리에게 인간의 역사라는건 정말 흥미롭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거니까."
원형 유리테이블에 앉아 그녀의 음란한 나체를 모조리 드러내며 앉아있는 아스모데우스에게 프쉬케는 책을 가지고 다가가 앉았다.
"역사, 기본적으로는 인간들의 기억을 기록한 것이지. 프쉬케, 왜 우리에게는 역사라는게 없는건지 알아?"
"...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봐. 프쉬케, 너는 네가 태어나던때를 기억해?"
"예.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후후... 인간은 그렇지 못해. 인간들의 기억은 잊혀지고, 덧씌워지고, 왜곡되기 마련이거든. 그런 인간들의 기억을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게 역사지. 자신들의 기억을 기록해서 후세에 물려주는 형태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쭈욱 이어지기를 원했던거야."
"그렇군요..."
"하지만... 인간들의 기억이란건 말이지... 인간을 닮아서 참 간사해. 그들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들은 반드시 승리를 해야하지. 패배자들의 기억은 기록되지도 않고, 관심조차 받지 않아. 오히려 승리자들에 의해 패배자들의 기억은 철저히 왜곡되고 말지. 뭐, 그런것들 있잖아. 멸망당하기 전의 왕조들은 다들 타락하고, 부패하고, 죽어 마땅한 놈들이였다는 그런 뻔한 전개."
"하긴... 그런것 같습니다..."
"더 중요한게 뭔지 알아? 승리자들의 기억 또한 그들 멋대로 날조한다는거야. 승리감에 취해서 그들이 영웅이였다고 과도하게 과장하지. 아니, 그것은 과정이 아닐지도 몰라. 단순히 착각하는거에 불과할지도 모르거든.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은 너무나도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불완전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서 그런거야.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잊고 싶은 것은 잊어버려."
"이해는... 됩니다만..."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그들이 잊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모든걸 잊을 수 있을까?"
"그 말씀은..."
"후훗... 차차 알게 될거야. 내 말의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