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시대
비밀의 방
세탁물을 걷다가 잠시 멈추어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정원에는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 돌이 지난 아들과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은 생활이지만 짜증스럽다. 행복을 느낄 만도 한데, 결혼한 지 5년이 지나고 왠지 하루하루가 무료하기만 하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니 자꾸만 삶이라는 것이 허무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만해도 온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무지개 꿈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팽개치고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결혼 초에는 마치 내가 신데렐라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해 두해 흘러갈수록 나의 삶은 지쳐만 간다.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낳고부터 주부가 해야 할일은 늘어가는 반면에 가슴은 자꾸만 황폐해지는 것만 같다. 결혼 초에는 매일같이 내 몸을 발가벗겨 놓고 탐하던 남편의 사랑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그토록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하던 남편이 가정과 나에게 무관심해졌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부부관계도 뜸해지고 남편은 술에 취해 새벽녘이 되어서 귀가하는 날이 늘어갔다. 더욱이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부터 더욱 내 마음은 고독해진다.
남편의 뒤를 캐내기 시작한 나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결혼 전에도 남편을 흠모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서구적인 스타일로 이목구비도 뚜렷하지만 머리도 좋았다. 증권회사 펀드 매니저로 출발한 남편은 승승장구하여 중요간부직에 올라 있었다. 남편이 만나고 있는 여자는 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중에 나도 본적이 있는 회장 비서실 여직원과 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질투심과 배반감에 싸움도 자주했었다.
차츰 나는 스스로 울타리 속에 갇혀 몸부림쳤다. 스스로에게 탈피하기위한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가끔은 집안에 머물다가 폭발할 것 같아 쇼핑을 하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도 답답한 가슴은 마찬가지였다.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몇 불럭 떨어지지 않은 친정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나를 위로하는 말씀은 젊은 부부생활에서 남편이 한번쯤은 외도를 하는 것은 실수일수도 있으니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이 한 조각씩 잘라져 없어지는 것 같다.
요즈음은 남편이 귀가하는 날보다 외박하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과 다정하게 한 침대를 누워 본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제는 인내라는 이름의 기약 없는 기다림뿐이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정말로 묘한 것이다.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미움보다는 밤이 외롭고 남편의 손길이 그리워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간다. 사람에게는 의, 식, 주 말고도 성욕을 느끼고 싶은 본능이 있다.
여자는 감정적이고 감동에 약하다.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여자는 아니고 성기능 역할을 통해 여자로 길들여진다는 문구를 본 것 같다. 힘들고 외로워도 남편의 따뜻한 말과 손길에서 성적인 만족을 느끼면 남편의 잘못을 이해하며 용서하는 힘이 솟을 것 같다. 결혼 초에는 성감에 둔했으나 아이를 낳고나서 성감의 황홀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성욕에 관한 본능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남편은 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시간 속에 외로움을 묻어버려야 한다. 고독을 털어버리듯이 건조대에 널린 세탁물을 툴툴 털어낸다. 정원의 나뭇가지에 앉았던 들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간다. 멍울진 가슴을 쓸어 담듯이 세탁물을 바구니에 담아 현관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언니! 도희 언니~!”
누군가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며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돌린다. 대문의 쇠 창틀 사이로 바라보니 자그마한 키에 아담한 몸매를 지닌 같은 고향의 후배였다. 이삼일이 멀다 않고 찾아오더니 요즘에는 발걸음이 뜸하던 미영이었다. 나보다 세 살 어린 미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했기에 주부로서는 선배였다.
“언니 그동안 잘 있었어?”
대문을 열기 바쁘게 환한 표정으로 미영이 튀어 들어왔다. 고향에서부터 나를 친언니같이 따르는 미영은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경제력이 넉넉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나에 비해서 생활비가 모자라서 쩔쩔 매면서도 밝은 표정을 하는 미영이 부러웠다. 더욱이나 미영에게는 아직도 아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그동안 무슨 일 있었니? 미영이가 다녀간 지 한 달이 넘었구나! 전화도 안 받고.......”
“미안해, 언니! 아르바이트 나가느라고, 낮에는 집에 없었어.”
손을 붙잡고 반가워하는 미영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청바지 차림의 미영이 걸치고 있던 니트웨어를 훌렁 벗어 던지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주방에서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 들고 나갔다. 어깨띠기 티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는 미영의 모습은 가정주부 같지 않고 처녀처럼 활기차게 보였다.
“세월이 가도 너는 더 젊어지는 것 같다.”
“언니는!? 언니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나도 늙어간다오. 호호호.......언니 미모만 같았어도 내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미영이가 나를 추켜세우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이를 낳고 가정에만 있다 보니 살집이 올랐지만 결혼 전에는 각선미 넘치는 뛰어난 미모라고 칭송받았고 캠퍼스 퀸에 뽑힌 경험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영의 미모도 빠지지 않았다. 아담하게 작은 몸매이지만 처녀시절의 귀엽고 깜직한 미모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늙기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직도 미영이 네가 처녀인줄 알겠다. 그러니까 네 남편이 너를 변함없이 사랑하지.”
“사랑! 그게 뭐 중요한가. 먹고 살기 바쁜걸. 언니가 뻔히 알면서........그런데 민호는!?”
“응, 잠들었는데, 오늘은 오래자고 있네.”
미영이 갈증을 느꼈던 탓인지 음료수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유리컵을 탁자위에 내려놓은 미영이 거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심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정원을 내다봤다. 반바지 차림에 러닝셔츠만 걸친 청년이 건물 뒤에서 나왔다. 균형 잡힌 체격에 수려한 용모를 갖춘 청년이 수도꼭지를 틀더니 호스를 들어 정원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언니 저 사람은 누구야?”
“응, 뒷방에 세든 학생.”
집 뒤로 돌아가면 뒷골목으로 통하는 후문이 있었고 방이 있었다. 비록 작은 주방과 세면장을 사용하지만 원룸같이 넓게 사용할 수 있는 방이었다. 원래는 노인 부부가 살다가 나간 후 한동안 비어 있던 방이었다. 다시 세를 들인지는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학생!? 나이 들어 보이는데?”
“나이 어려. 체격이 다부져서 그렇지, 올해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야. 대전이 고향이래나! J대학 배구선수인데........이름이 장현우라고 하던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명한 선수래.”
남자들이 아름다운 여자에게 호감을 갖듯이 여자들도 시선을 끄는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장현우에 대한 말을 하면서도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워진다. 우리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호스로 물을 주던 장현우가 거실을 향해 돌아다보았다. 잠시였지만 우리들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장현우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서글서글하게 눈망울이 크고 눈썹이 짙어 여자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타입이었다. 체격은 다부지지만 다른 젊은 남학생들과는 달리 미소가 무척 선량하고 다정다감하게 보였다. 현우의 시선을 의식한 미영이 벗어놓았던 니트웨어를 들어난 어깨위에 걸쳤다.
“호호~! 젊은 남자가 집안에 있으니 언니가 젊어지겠다.”
“얘는......!? 젊은 남자라니. 아직 애들인데.”
“애들이라고!? 호호....... 보기 드문 호남 형인데........그래도 집안에서 젊고 잘 생긴 남자를 보는 것이 좋지. 든든하기도 하고.........”
“새침데기 미영이가 별 소릴 다 하는구나. 하나뿐인 남편 보고 사는 것도 힘들어........”
“하기야, 형부 인물도 보통은 아니니까.”
무관심한척 하지만 공연히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미영의 시선이 간지러웠다. 공연히 속마음이 들어나 보이고 미영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사실은 요즈음 남모르는 비밀이 생겼다. 남편 이외에 어느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도도하다는 나였다. 예전에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닌 장현우와는 나이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런데 그를 마주 할 때마다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를 나 자신도 모른다.
비어있던 뒷방에 장현우가 이사 와서 며칠 지나지 않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도 지난밤에 귀가하지 않은 남편 때문에 우울했었다. 잡념을 떨치려고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원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현관으로 들어오는 통로에 있는 향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항상 시선을 가로막던 나무였다. 향나무를 통로를 빗겨서 향나무를 옮겨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원으로 나오는데 거실에서 놀고 있던 민호가 쫓아 나왔다. 팔을 걷어 부치고 삽을 들었다.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외출했던 장현우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신의 방이 있는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멈추어 서서 땅을 파는 이유를 물었다. 향나무를 옮겨 심으려고 한다는 말에 현우 학생이 나섰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이 싫었지만 상의를 벗어던지고 나서는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삽을 건네주었다.
단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이었는데 삽을 건네주고 나니 막상 할 일을 빼앗긴 것 같았다. 현우 학생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들어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듬직하고 멋있게 보였다. 남편이 장현우 같은 모습으로 나를 도와 집안일을 한다면 행복 할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멀거니 관망하고 있기도 민망스러웠다. 향나무 뿌리 밑둥치가 들어나 보이기 시작하고 장현우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건조대에 널린 타월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타월을 건네받은 그가 삽질을 멈추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나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현우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윽한 눈빛을 느끼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현우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온 몸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새삼스럽게 내가 여자라는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정원 한구석에서 혼자 놀던 민호가 아장아장하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잘한 미소로 바라보던 장현우가 입을 열었다.
“민호가 엄마 닮아서 계집아이처럼 예쁜가 봐요. 아줌마는 아직도 처녀 같아요.”
“이제 살림하느라고 신경 안 써서.......!”
현우 학생의 말이 싫지 않았다. 이제 갓 입학한 대학생이라고 하지만 그도 남자였다. 오래간만에 듣는 칭송이 살갗으로 적시고 들어오는 것처럼 짜릿하였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남자의 말에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인다는 것이 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천한 태도라고 여겼다. 말꼬리를 흐리는 내 말에 그가 우물쭈물 하면서 다시 말했다.
“저기........저는 남자 형제뿐이라서 항상 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누님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아요.....?”
“괘, 괜찮겠지.......”
우물쭈물 대답을 하고나니 좀 더 또렷한 목소리로 승낙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나에게 남자 형제는 없었고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 하나뿐이었다. 누님이라고 불러주는 남자 동생이 생긴다는 느낌은 마치 남편이외의 남자와 연인관계라도 된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작스런 장현우의 제안을 특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억지 해석을 하려고 했다.
잠시 혼자만의 억측에 잠겨 바라보는데, 승낙을 얻은 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삽자루를 집어든 그가 옮겨 놓을 장소에 웅덩이를 파내기 시작했다. 멀거니 바라만보고 있기가 계면쩍었다. 장현우의 모습위에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잡념을 떨치려면 무엇인가 해야만 했다. 거실 유리창을 닦아야한다는 발상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해낸 발상에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젖은 걸레를 들고 거실 창문 앞으로 다가가서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의자를 창문 앞에 놓고 올라섰다. 의자가 뒤뚱거리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아직은 날씬하다고 생각하는 내 몸무게를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자만을 했다.
그러나 자만심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의자를 딛고 창틀에 올라서는 순간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창틀에 간신히 매달리며 겁 많은 아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를 흘리는 순간 내 몸이 공증에 떠받쳐졌다. 장현우의 손길에 내 몸의 균형이 지탱되고 있었다. 아마도 비명과 동시에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사태를 짐작컨대 그가 내 일거일동을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장현우가 관심 있게 보고 있지 않았으면 땅바닥에 나둥그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긴 한숨을 쉬고 안심하려다가 얼굴을 붉히며 도리어 붙잡아준 그를 향해 앙칼지게 내뱉었다.
“놔요!”
“놓으면 떨어질 텐데요!?”
장현우가 난처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창틀에 매달린 나는 곤혹스러웠다. 내 몸을 부축하고 있는 그의 한손은 티셔츠 사이로 허리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젊은 남자의 따스한 체온이 전달되었다. 그에게서 전달되는 감촉은 온 몸이 나른해지는 감각에 빠져들게 하였다.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엉덩이를 받친 장현우 손가락이 문제였다. 엉덩이를 받친 손가락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있었다. 내 몸무게를 지탱하느라고 허벅지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점점 음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허벅지 사이로 몰린 신경은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의아스럽게 올려다보던 장현우는 뒤늦게 내가 곤혹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아챘다. 얼굴이 붉어진 현우가 나를 끌어내려 안았다. 현우의 듬직한 가슴에 안기고 소녀처럼 부끄러웠다. 젊은 남자의 땀이 베인 체취에 마취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손길에 옷을 벗겨져 알몸으로 들어난 것 같은 느낌이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잠재되었다가 살아난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인 요구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서 탈출을 시도하려고 나는 변하고 있었다. 남편의 무관심과 외도에 대해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한다는 미덕에서 탈피하려한다. 정신과 병원을 찾아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현실을 도피해서 잠재된 본능에 위로를 받으려 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진단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포기했다. 부정도 긍정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결론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갈등한다. 누가 만들어준 원인이 아니고 내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이성과 본능의 회오리 속에 빠져들었다. 이성과 사회적 윤리를 앞세우면서 불씨처럼 피어오르는 본능에 지배당하려 한다. 현우가 바라보는 시선을 즐긴다. 아니 그가 여자로 느끼도록 노력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곤 한다. 이제는 습관처럼 외박을 하는 남편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평소에 잘하지 않던 화장을 하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 올 것 같은 장현우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 올리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래서인지 미영에게 현우에 관한 얘기는 비밀스러운 것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혹시나 현우에 대한 감정이 들어나는 말을 실수로 하지나 않는 것인지 두려웠다. 잠시였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잠이 들었던 민호가 깨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민호를 발견한 미영의 얼굴에 가득 미소가 번진다.
“우리 민호, 자고 일어났구나!”
“이모!”
눈을 부비며 나온 민호가 팔을 벌린 미영에게 안긴다. 아기가 없는 미영이 민호를 끔찍이 사랑하기에 민호도 그녀를 좋아했다. 미영이 손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것으로 짐작되는 과자를 꺼내 민호에게 주었다.
여자들이 모이면 접시가 엎어졌다 젖혀지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미영과 나사이도 마찬 가지였다. 시댁에 관한 얘기와 친정 식구이야기들을 하소연하듯이 쏟아내고 남편에 대한 불만과 나아가서는 부부간의 잠자리에 관해서도 서슴없이 끄집어낸다.
“요즘도 형부 집에 안 들어오나?”
“그렇지 뭐.”
남편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미영에게 주눅이 드는 것 같다. 비록 경제적인 능력이 약하지만 아직도 미영의 남편은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결혼 초기나 마찬가지로 미영은 거의 매일같이 부부관계를 하다시피 한다고 한다. 미영은 남편의 요구에 따라 벌거벗고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고 했다.
“언니가 외로워서 어떡해! 형부가 생활비는 제때에 내놓기는 하는 거야?”
“민호 아빠가 돈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게 해. 통장과 증권을 나에게 맡기고 있으니까. 생활비까지 문제가 되면 살기 힘들어.”
주고받던 대화를 멈추고 거실 창문을 바라봤다. 환한 미소를 띤 장현우의 모습이다. 그가 서글서글한 눈동자로 거실 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없이 거실 창문턱에 민호가 가지고 놀다가 정원에 놓아둔 장난감을 올려놓았다. 유달리 장현우가 미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다.
장현우가 사라지고 다시 미영과 대화를 시작했다. 중요한 일들도 아닌데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넋두리들을 늘어놓았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고 지루함을 느끼는데 미영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지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눈동자에 습기를 먹으면서 말했다.
“언니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뭘, 시댁에서 나 몰라라 하는 것 때문에?”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그이가 사업하다가 진 부채 있잖아.......”
“응, 네가 많이 갚았다면서?”
“죽을힘을 다해서 갚고 있어. 팔천만원이 남았었는데, 이제 이천만원 남았어. 하지만 상환기일이 한 달뿐이 안 남아서 밤에 잠도 안와.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갚을 능력은 없고 남편이 신용불량자가 되면 어떡해. 내가 고통스러워 할 가봐 말은 안하지만, 그이는 술만 취하면 잠꼬대처럼 죽어버린다고 하는데 미치겠어.”
“어떡하니.......?”
“언니한테 먼저 빌려간 돈도 못 갚았는데.......”
“그건 염려하지 마. 사람이 살다보면 형편이 필 날도 있겠지.”
눈물을 글썽이는 미영이 정말 측은하였다. 큰돈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주 돈을 빌려가고 되돌려 주기를 거듭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빌려간 백만 원은 아직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영이 한숨을 내쉬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언니한테 할 말은 아닌데.......언니가 어떻게 이천만원만 유통해 주면 안 될까? 언니 은혜는 잊지 않고 버는 대로 갚을게........”
“글쎄.........!? 그렇게 큰 금액은 나도.......! 한번 알아볼게.”
미영이 그동안 찾아오지 않다가 방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해도 선뜻 답변할 수는 없었다. 마치, 하지 못할 말을 간신히 꺼내놓은 것처럼 크게 한숨을 쉬고 있던 미영이 늦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을 보이던 그녀는 전화를 기다리겠다면서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고 해도 뿌리치고 돌아간 미영이 걱정도 되었지만 그녀가 무심코 흘린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형부를 대신해서 세 들어 사는 현우학생이 언니를 도와주면 좋겠다는 말과 그렇다고 젊은 남자에게 빠져들지는 말라는 농담이었다.
혹시 미영은 내가 장현우를 남자로 느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남편에게서 멀어지는 내 머릿속에는 현우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밤이 외롭고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추해 보였다. 여자는 누구나 창녀기질이 있다는 말이 가장 인간적인 말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녁식사를 차려놓고 몇 수저 뜨다말고 설거지를 했다.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의 손길이 그리워 뒤척인다. 많이 배워 학식이 높고 재산이 많아도 고독으로 이르는 병을 이기지는 못한다. 벌떡 일어나 민호의 천사 같이 잠든 얼굴을 내려다본다. 어린 아들이지만 민호도 나이 들면 남자 구실을 하려고 할 것이다. 너만은 여자를 외롭게 하지 말라고 중얼거린다.
고통스러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누군가를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다. 마음속에는 용광로같이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 나를 변하게 한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몽유병 환자처럼 정원으로 뛰쳐나간다. 밤바람이라도 쏘이니까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다.
나의 행동은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고 반란이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집 뒤를 향해 가고 있다. 발자국 소리를 죽여 전등불이 켜진 현우학생의 방 창문 앞으로 다가선다. 나를 생각하느라고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라고 당치도 않은 추측을 한다. 고개를 저어 도리에 어긋난 나의 행동을 질책한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현관문 앞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가슴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불길에 휩싸인다. 설령 젊은 남자의 품에 안겨 성교를 하고 황홀함을 느낀다고 해도 인간의 본능일 뿐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는 숨겨진 남녀 간의 비밀스러운 정사가 얼마든지 많을 것 같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또 다시 집 뒤로 향한다.
집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담 밑에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흠칫 놀라서 바라보니 검은 그림자의 하복부에서 담벼락을 향해 은색의 물줄기가 뻗치고 있다. 화장실도 있건만 현우가 담을 향해 소변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복부에 불끈 솟은 그림자는 남성의 심벌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몸을 돌리려 하는데 이미 늦었다.
“누님! 늦은 밤에 웬일에요?”
남성미 넘치는 굵직한 목소리가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제압한다. 현우에게 나의 인격을 무시당하면 슬퍼질 것이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헛기침을 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현우가 나를 향해 뚫어지게 바라본다. 창문으로 비치는 불빛에 벗어부친 상체의 잘 발달된 근육이 들어나 보인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되도록 어른스럽게 말한다.
“아! 현우 학생.........강아지가 뛰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네......!?”
물론 강아지커녕 쥐새끼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선다. 반문하는 현우를 뒤로하고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여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린다. 거실로 들어서며 도둑질 한 여자처럼 긴 한숨을 내쉰다. 거실에 걸린 내 모습을 보고 스스로 바보라고 뇌까린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잠옷을 걸친 모습을 현우가 보았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