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애증
깜박 잠이 들었었는지도 몰랐다.
거의 동이 틀 무렵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든 듯 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이미 회사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진우는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떤 허탈하고 답답한 기분이 진우를 짓누르고 있었다.
"후 우..."
진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는 일,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지현이는 아마 학교에 갔을 것이다.
진우는 우선 회사에 전화를 걸어 늦는다고 알려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의 차가운 물줄기 아래 몸을 가져갔다.
"젠장..."
낮은 목소리로 그가 혼잣말을 했다.
진우는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밤의 일을..
그에게 날아와 맞은 바나나 하나가 주방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
진우가 놀라서 쳐다보니 지현이가 눈에는 눈물을 가득 글썽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어요... 흐 흐흑..."
지현이가 울면서 진우에게 소리쳤다.
지현이는 난생 처음 그에게 심하게 대들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저하고 약속을 그렇게..."
".................."
진우는 지현이의 거친 태도에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보다... 그 여자가... 더 중요하신 거예요..?"
"..........!"
'알아버렸구나..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언젠가는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어..'
진우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 내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자업자득이야..'
"미안해..."
진우는 짧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당신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 이렇게..."
"............"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 줘... 그 아이와 나는 이미 헤어졌었고.. 오늘 일도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것이었어.. 그것 뿐이야..."
진우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지현이를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가 그냥 대답 없이 울고만 있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주방을 나갔다.
등뒤에서 들리는 지현이의 나즈막히 흐느끼는 소리가 진우를 가슴 아프게 하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상처를 받은 그녀를 달래주어야 하나?
어떻게 그녀에게 용서를 빌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어야 하나?
아내는 지금 몹시 불안할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스스로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이겠지.
어떻게든 운신할 수 없는 딸의 몸.
아내로 남편에게 안길 수 없는 그런 몸을 가지고, 어쩌면 영영 남편을 잃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겠지.
그래서 아내는 저렇게 슬퍼하는 것이겠지.
그렇겠지.
진우는 갑갑한 심정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하면 이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현이의 영혼이 돌아오면?
하지만 그러면 아내와는 영영 헤어질 지도 모르는데.
진우는 그런 불확실성이 갑갑했다.
차라리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확실히 알 수 있었으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딸 지현이의 영혼은 죽은 것이어서 아내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지현이의 영혼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므로 아내는 결국 사라질 것이라거나, 어느 쪽이든지 결과를 알 수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게 마음을 먹고 아내의 영혼이 든 딸의 몸을 안던지, 아니면 아예 포기를 하던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 수 없는 그의 앞은 자욱한 안개가 낀 그런 갑갑한 현실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욕망만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마 아내도 지금 그럴 것이다.
욕망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나?
벌써 이런 현실이 횟수로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방에 웅크리고 앉아 그런 상념에 빠져있던 진우는 문득 지현이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를 살펴보기 위해 방을 나섰다.
지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갔는지 주방이나 거실에 없었다.
주방의 식탁에는 아직도 그의 생일상이 차갑게 식어버린 채 놓여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어린 몸을 가지고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음식들이었다.
진우는 그것을 보자 다시금 마음이 아팠다.
똑 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지현이는 그가 들어오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두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작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
진우가 지현이의 곁에 다가가 앉고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했다.
"손대지 마세요.."
지현이가 그의 손을 탁 쳐내며 거부를 했다.
그를 쳐다보는 지현이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미안해.. 이제 그만 진정해.."
"싫어요..."
"..........."
"제발 나가 주세요... 얼굴도 보기 싫단 말예요.."
지현이는 고개를 무릎에 다시 파묻고는 소리쳤다.
"후 우..."
그런 지현이를 보며 진우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지금은 그녀를 달랠 수 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그래... 그만 나갈게.. 나중에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잘 자..."
진우가 그녀의 방을 나올 때까지도 지현이는 고개를 파묻고만 있었다.
'그래.. 지금은 감정적이어서 달래기가 힘들 거야.. 곧 나아지겠지...'
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서먹서먹한 관계는 그 후에도 며칠이나 이어졌다.
진우가 그 날 늦게 퇴근을 했을 때도 지현이는 자기 방에 문을 잠그고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그가 노크를 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지현이는 식사만 차려주고는 학교 핑계를 대고 먼저 나가버렸다.
지현이는 그렇게 진우를 피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의 그 행복했던 아침이 꿈이었나 여겨질 정도로 그들의 집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어.. 도저히..'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진우는 점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의 마음속에 앙금이 남은 채 생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 시간만 보내다가는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타이밍을 놓쳐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더구나 다음 주 월요일에는 전시회 설비 셋팅 문제 때문에 4일 예정으로 싱가포르에 출장을 가야했다.
이런 상태의 지현이를 놔두고 외국에 출장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오늘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야기를 해야겠어...'
진우는 오전에 출근을 하면서 그렇게 생각을 했다.
"지현아.. 너 요즘 무슨 일이 있니..?"
"으응..? 아 아니야.. 왜..?"
지현이는 쉬는 시간에 자기 반으로 놀러온 미정이가 문득 이렇게 말을 하자 깜짝 놀라 당황했다.
"그냥... 요즘에 좀 우울해하는 것도 같고... 그리고 약간... "
"약간..? 뭐..."
"약간... 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이니..?"
"그래...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무슨 걱정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 해.."
"아 아냐.. 그냥 요즘 좀 몸이 안 좋은 가봐..."
지현이가 약간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런 지현이를 보고 미정이가 말을 이었다.
"너.. 마치 실연을 당한 사람같이 보여..."
"뭐어..! 어머.. 얘는.. 그럴 리가 없잖아..."
"풋... 하긴 그렇다. 넌 지금 사귀는 남자애도 없는데..."
지현이는 정색을 하며 부인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를 감정이 느껴졌다.
"하 아..."
친구가 자기 반으로 돌아가고 나자 지현이는 조용히 한숨이 나왔다.
오늘 집에 가서의 일이 벌써부터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월요일에 일 때문에 싱가포르에 한 4~5일 출장을 가.. 그러니 가기 전에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이것이 오늘 아침 아빠가 출근을 하면서 남긴 말씀이었다.
지현이는 사실 그 날밤의 일 이후에 아빠를 마주보기 싫어서 그 동안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빠가 미워서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 날의 자기 행동이 왠지 부끄럽기도 해서였다.
그렇게 아빠에게 거칠게 대든 적은 그 날이 난생 처음이었었다.
그랬는데..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오늘이 토요일이람...'
수업이 끝나도 일찍 집에 가기가 두려웠다.
지현이는 요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되돌아보았다.
지현이로서는 이런 감정들은 처음이었다.
이 낮선 감정, 알 수 없는 마음, 미움? 사랑? 아니 애증?
아빠에게는 전혀 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감정들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약속이 버림받았다는 것만은 그 이유가 아니리라.
14살의 어린 소녀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드는 주체못할 감정, 어떤 안타까움, 슬픔.
진우는 이미 그녀에게 아빠 이상의 또 다른 존재로 다가서고 있던 것이었다.
비록 지현이의 어린 마음이 그 실체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지현이는 아빠와 마주 서고 이야기를 하기가 두려웠다.
지금 자기의 마음속도 알 수가 없었기에..
토요일이라 수업은 일찍 끝이 났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과후에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강남역 쪽으로 나가서 타워레코드에서 음반을 뒤적이기도 하고, 별로 보고싶은 마음이 없어도 극장에 혼자 들어가 영화를 보기도 했다.
미정이와 같이 다니면 좋았겠지만, 자기가 이러는 것을 알면 걱정을 할까봐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도 여전히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던 지현이는 집 근처의 PC방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었다.
그녀가 PC방을 나온 것은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너무 늦었다 싶어서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가니 이미 아빠가 퇴근해 계셨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달려나오신 것을 보니 지현이가 늦어서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었다.
"토요일인데... 늦었네..."
평소 같았으면 늦는다고 뭐라 이야기를 들었을 시간이고, 아빠가 무척 걱정을 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화를 내지 않으려 자제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 오늘이 아니더라도 그 날 이후, 요 며칠 아빠가 지현이를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네... 늦어서 죄송해요..."
지현이는 짧게 대답을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일부러 냉정한 듯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빠를 마주보기가 두려워서였다.
진우가 이야기를 하자고 다시 지현이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그녀가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간지 한참 뒤인 11시쯤이었다.
그것은 지현이가 방에서 나와주기를 기다렸지만 도저히 나올 기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도 미리 언질을 주었건만, 지현이는 이야기를 할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토요일인데도 저녁 늦게 귀가를 해서 저녁 내내 진우를 걱정하게 만들었고, 귀가를 해서도 거실에는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진우는 안되겠다 싶어 다시 지현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지금.. 이야기 좀 하자..."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혹시 잠이 든 것이 아닐까 해서 살며시 문고리를 돌려보니 의외로 잠겨있지 않았다.
진우가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현이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선 진우를 되돌아보았다.
아직 잘 생각은 없는 듯 잠옷 대신에 가벼운 반 팔 셔츠와 치마로 갈아입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야기 좀 하자... 아침에 미리 이야기했었지..?"
"저는 지금도 할 말이 없어요..."
"아직도 많이 화 난 거니..? 그래 당연히 쉽게 화가 풀리기는 힘들겠지..."
진우가 지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화를 풀어 줘..."
"저...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이제 화 안내요..."
지현이가 고개를 돌려 애써 진우를 외면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 주세요.. 저 혼자 있고 싶어요.."
"아니야.. 말은 그냥 그렇게 해도.. 사실은 아직도 화가 나 있잖아..."
"................"
"당신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우리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서로 이야기도 제대로 안 하면서..."
지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미안해.. 정말 사과할게..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정말이야.. 그 날은.."
지현이는 아빠를 마주보기 두려워 외면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아빠에 대한 감정.
지금 아빠가 자신의 눈을 마주보게 되면 이런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채실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실 지금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랐다.
그 동안 아빠의 상황을 이해하려고도 했지만, 아직 아빠에 대한 실망감과 서운함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현이의 마음속에는 이런 아빠에 대한 애증과 함께 또 하나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 진우가 다시 지현이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너무 이기적인 말이겠지만.. 그 아이 일은 좀 용서를 해줘..."
지현이는 깜짝 놀라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가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지금.. 이런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 아이도 불쌍한 아이이고... 또 이제는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거야..."
아빠가 말을 이었다.
'아... 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여자 편을 드시는 거야..? 아빠가..?'
순간, 지현이는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또 하나의 감정을 자각했다.
그것은... '질투'였다.
그리고 진우의 그 무심코 한 발언은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여자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마음 속 깊이에서 솟구친 갑작스런 질투심에 그만 반항을 하듯 내뱉고 말았다.
"싫어요.. 그럴 수 없어요..."
지현이의 두 눈은 다시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지현이의 태도가 생각보다 완강해 보이자 진우는 정말이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주희의 이야기를 거론한 것이 경솔했다고 깨달았다.
하지만 지현이가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그 동안의 속내를 모르는 진우로서는 아내가 좀 너무 한다 싶었던지 조금씩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우도 답답한지 조금 언성이 높아졌다.
"정말.. 당신 왜 이래..? 어린애 같이.. 몸이 아이라고 해도 당신은 어른이잖아.. 그런데 이건 마치 사춘기 여자애가 반항을 하는 것 같잖아.. 아니면 그 사이에 정말 몸 따라서 어린애라도 되어버린 거야..?"
그러나..
"아...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 그래요.. 나는 어린애예요... 그래서.. 아무런 아내 노릇도 못하고.. 그저.. 그러니 다른 여자에게나 가세요..."
지현이가 울먹이며 이야기를 하자 진우는 "아차..!" 싶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 만 것이다.
"아... 미 미안해.. 나는 그저.. 그러니까..."
그러나 이미 상황은 악화되었다.
지현이는 울먹이며 침대로 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며 돌아누웠다.
"나가세요.. 말하고싶지 않아요.. 저 그만 잘 거예요..."
마음을 풀어주고자 위로하러 들어온 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슬프게 만든 것이다.
"젠장..."
진우는 자꾸 일이 꼬여가자 이런 상황에 속으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일을 저지르고 싶었다.
설령 나중에 딸아이의 영혼이 돌아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하여도, 무시하고 당장 아내를 안고 싶었다.
안 그러면 당장 그와 아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분노, 욕망, 자신에 대한 저주가 그의 정신을 탈색시키며 지배하기 시작했다.
진우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서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그의 몸이 움직였다.
진우는 지현이를 침대에서 일으켜 앉히고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잡고는 벽에 밀어 부쳤다.
"아앗...."
순간 지현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진우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현이에게 소리쳤다.
"나도 힘들어... "
"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겨우 참고 있어.. 그 동안 꿈속에서는 수십 번이나 당신을 범했었어.."
"......!"
"겨우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그 아이 때문이었어... 안 그랬으면 난 당신을.. 아니 지현이.. 우리 딸의 몸을..."
"..........."
진우는 지현이에게 거칠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에게 화를 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자신이 지금 아내에게 화를 낼 자격이나 있기를 한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주희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것 때문에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지난 이야기야... 예전에 헤어졌다구..."
진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모르겠어..."
"아... 흐흑.. 흑.."
지현이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빠의 거친 행동에 너무 놀라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어깨를 꽉 쥔 아빠의 억센 손이 너무 아파서도 아니었다.
지현이가 우는 것은 단지 마음이 아파서였다.
'미 미안해요... 흐 흐흑... '
지금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고 슬픈 것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저런 모습을 하지 않으시게 지켜 드리겠다고 그때 지현이가 다짐했던 바로 그런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의 저 고뇌, 울분의 원인은 모두 지현이 자신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신 때문이었다.
그때 자신이 어린 마음에 그런 철없는 거짓말만 시작하지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그냥 평범한 아빠와 딸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 그런데.. 나는.. 아빠한테... '
고개를 숙인 지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빠.. 미안해요..'
그러나 이 말은 소리내어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 나는 이제 아빠에게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 아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시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지현이의 마음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우는 지현이가 울기 시작하자 비로소 흥분했던 감정을 조금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세게 지현이의 어깨를 쥐고 있음을 알고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미 미안해..."
지현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팠지..? 저.. 그리고.. 아까 그런 소리해서 미안해..."
"..........."
"당신도 힘들다는 것 알아..."
"........."
"그나저나.. 나.. 나도 꼴이 참 우습게 되었군... 허.. 결국 바람 핀 놈이 더 화를 내다니..."
진우는 자조적인 쓴웃음을 보이며 쓸쓸히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지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사랑해..."
".......!"
지현이의 어깨가 순간 작게 떨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흘렀다.
"이젠 참을 수가 없어..."
진우가 이야기를 하며 지현이의 한쪽 어깨를 잡고있던 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손은 위로 올라와 살며시 지현이의 목덜미를 쥐었다.
진우가 약간 긴장을 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당신을 안고 싶어..."
그리고 진우가 살며시 키스를 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