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어느 서늘한 날 밤.. 유혹.
다행히도 진우의 회사에서 추진하던 L전자의 해외전시회 전시영상 수주작업은 성공하였다.
그래서 9월말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제 작은 영상업체였던 진우의 회사로서는 위기 뒤에 큰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기에 회사에서는 어느 때보다 총력을 기울였다.
이번에 확실히 만들어야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의 자잘한 홍보영상이나 전시영상을 제작하던 일에서 벗어나 큰 대기업이 해외 무역전시회에서 상영할 주력상품의 홍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것이 잘 되면 보다 큰 프로젝트로 진출할 수 있고, 장차 진우의 희망인 공중파 CF나 방송프로 외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직원들이 열심히 움직였다.
10월 들어서 이 전시영상에 출연할 연기자들을 선정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외국인 연기자들의 경우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모델들을 에이전시를 통해 선정하였고, 국내 연기자들의 경우 상품의 지명도 때문에 전문 연기자들이 1~2명 주역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부 주연급들만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대부분의 배역들은 단가 문제 때문에 에이전시를 통해 모델이나 도우미들 중에서 선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클라이언트 측 임원 일부와 제작 스텝들, 그리고 출연할 연기자들이 회식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진우는 회식 자리에서도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의 과로로 아직 몸이 편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클라이언트들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장인 자신이 중간에 빠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2차 자리에서 그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후..."
그리고는 다시 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안에서 나오던 어떤 여자가 진우에게 부딪쳤다.
"어 어... 조심해요.."
"어머 죄송합니다.. 사장님.."
여자가 당황하여 머리를 크게 숙였다.
그리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룸으로 들어가려던 진우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왠지 낮이 익은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조명이 어두워서 분명치 않았고, 여자는 총총 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룸으로 돌아온 이후에 진우의 신경은 그 여자에게 쏠리게 되었다.
"누구지..?"
근처에 앉은 구성작가에게 그녀의 이름을 묻고 나서야 진우는 그녀에 대해 기억이 났다.
도우미 출신으로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된 단역 연기자였는데, 워낙 단역인지라 배우 선정에서 PD가 알아서 하고 그는 미처 관여하지 않았던 배역이었다.
나중에 PD가 뽑은 여러 후보들과 함께 서류와 사진만 받아 보았었는데, 그때도 왠지 모르게 낮이 익은 인상 때문에 그녀를 포함시켰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21살인가에 고교 졸업 후 도우미로만 2년 정도 경력이 있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떠들썩한 자리에서도 조용히 앉아있는 타입의 여자였다.
그래서 2차까지 오면서도 미처 저 여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었나 보다.
주연 연기자들과 외국인 모델들 사이에서 그저 주눅이 든 듯 구석에서 웅크려 있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자리에서 좀 튀어서라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애를 쓸텐데,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몸이 안 좋은지 결국 2차가 끝나기 얼마 전에 먼저 자리를 일어서야 했다.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역시나 그녀가 룸을 나가자 여기저기서 그녀를 탓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우였지만, 보통 그녀의 입장이라면 몸이 상하더라도 끝까지 남아서 분위기를 맞추어주려 했을 것이다.(비록 옳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이었다)
얼굴이나 몸매는 저 정도면 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런 처신이라면 과연 이 바닥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차는 그녀가 나간 얼마 후인 11시 반이 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일부 사람들은 3차를 가자고 움직였지만, 그도 몸이 더 이상 안될 것 같아 PD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밖으로 나오는데 어느덧 10월이라 밤바람이 서늘했다.
한참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차는 이미 회사에 놔두고 나왔었다.
진우가 택시를 타려고 큰길가에 나왔을 때였다.
저 앞의 건물 벽에 한 젊은 여자가 기대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였다.
"아니.. 아직도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하고 있나요?"
그가 묻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놀라며 진우 쪽을 쳐다보았다.
"어머.. 사장님..!"
"그래 속은 이제 괜찮아요?"
"아.. 예. 사실은 계속 속이 안 좋아서 차를 타지 못하고 쉬고 있었어요.."
그녀는 멋 적은 듯 웃으며 대답을 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저.. 이름이 민.. 주희씨였지요..?"
"예.. 주희예요. 민주희..."
이렇게 늦은 밤 길거리에서 어정쩡하게 두 사람은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우는 그녀를 유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2차 자리 내내 신경이 쓰였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주희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 미안해요.. 어딘지 낮이 익은 인상이라..."
진우는 왠지 뜨끔한 생각에 얼버무리며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사장님.. 어디까지 가세요?"
진우가 서늘한 밤거리에서 한동안 고생을 한 끝에 택시 한 대를 겨우 잡자, 주희가 갑작스레 그의 행선지를 물었다.
"예? 아.. 나는 양재동이요.. 참.. 그 쪽은 어디로 가세요..?"
진우가 사람들이 헤어질 때 늘 하는 인사처럼 별 생각 없이 주희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머 그러세요..! 저는 분당인데.. 그럼 같이 타고 가다.. 먼저 내리셔도 되겠네요.."
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동행을 요구해 왔다.
"아.. 그래..요? 그러죠.. 뭐.."
진우가 그런 갑작스런 제의에 약간 당황하면서도 어색한 표정을 띈 채 마지못해 동의를 하였다.
거절을 하면 그녀가 무안해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같이 택시에 오르고 나자 주희의 그런 행동이 왠지 직감적으로 이상했다.
그녀가 지금 자신과 한자리에 있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지 모른다고 뇌리를 스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진우는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설마..?'
같은 방향인 것이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을 유혹하려는 것일까?
진우는 일단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사실 이 계통에서 PD나 사장들이 출연하는 모델들을 건드린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특히 무명의 경우 크기 위해 성 상납이 당연시되는 풍토였지만, 진우는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이번에 작업을 맡은 김 PD처럼 대놓고 여자에게 추근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괜히 술김에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진우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그가 계속 모른척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목적지에 거의 가까워져서 진우가 지갑을 꺼내며 얼마 후 내려야 한다고 주희에게 인사를 하고 났을 때였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추어 서자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예..?"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저.. 사실은.. 집이 분당 아니에요.."
".........."
두 사람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우연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진우는 가만히 주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진우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낮 익은 눈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주희의 그 눈을 바라보면서 진우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왜 낮이 익은 인상인지? 그녀가 누구를 닮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내 수진을 닮았다.
진우는 주희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아내 수진을 처음 보았을 때와 너무도 흡사한 인상에 깜짝 놀랐었다.
그때의 수진도 지금의 주희와 비슷한 나이였으리라.
서류를 보고 주희를 선택했던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자 진우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윽고 어떤 힘에 이끌린 듯 고개를 돌려 기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저기.. 저 건물 앞에 세워주세요.."
그 건물은 5층 짜리 규모의 모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