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둘만의 비밀
딸아이의 학교 문제도 있고 진우도 더 이상 직장을 비울 수가 없어, 아이를 강릉의 병원에 놔두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처가와 상의를 하여 서울의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때 이미 두 사람은 남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사이가 되었다.
"저.. 여보.. 아무래도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야겠어.. 남들이 알면 부녀간에 미쳤다는 소리 밖에.."
서울로 오는 차안에서 진우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그래야 하겠지요.. 일단 겉으로는 부녀지간으로 해야겠죠.."
진우는 그 날 이후 딸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게 되었다.
정말로 딸아이의 몸에 있는 영혼은 지현이가 아니고 아내 수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진우는 지현으로부터 들은 그 말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아직 반신반의를 했었다.
어떻게 아내의 혼이 딸아이의 몸에 들어갔다는 그런 황당한 소리를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이제 그런 의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할지라도,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현이를 간병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강릉의 시립도서관을 찾아가 관련 서적을 뒤적여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령과학 등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책들을 통해서 그는 '빙의'라는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육체를 상실한 인간이나 동물의 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와서 그의 두뇌를 점령하여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을 시키는 것을 '빙의현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실제로 그런 일을 겪은 사례들이 전세계에 걸쳐 무수히 존재하며,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지현이가 주장하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진우는 왠지 묘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어쩌면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 날 지현이가 한 이야기들을 설명하려면 이런 경우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정말 아내 수진의 혼이 딸아이의 몸에 들어온 것이라면, 그렇다면 딸 지현이의 영혼은 어떻게 된 것일까?
책들에는 `빙의'란 일반적으로 타인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들어온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지현이의 영혼도 그녀의 몸 속 어딘가에 살아있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러다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에서 사라지면 지현이의 영혼은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그러나 기존의 책들만으로는 속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진우는 전문가들에게 직접 상담을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분이 노출되었을 경우 딸아이가 당할 곤란을 고려하여 고민하다가, 인터넷에 개설된 `심령과학 연구회'란 단체의 홈페이지에 자신의 상황을 익명으로 상담하였다.
그곳은 관련 학자들이 모인 학술단체로 초자연현상에 대한 웹진도 준비중인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진우의 경험에 상당한 관심을 표했다.
그들에 의하면 지현이의 현상은 `빙의'가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서로 애착심이 크고 파장이 맞는 가족들간에 빙의가 잘 발생한다고 했다.
아마도 사고 당시 엄마의 딸에 대한 원념이 죽은 엄마가 빙의를 한 요인이 되었을 거라 그들은 분석했다.
그러나 딸의 영혼이 살아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은 판단을 유보했다.
왜냐하면 일시적으로 빙의가 되어 두 사람의 혼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에 맞는 신체적, 심리적 행동양식을 보여주는데 반하여(일반적으로 귀신에 들렸다는), 지현이는 초기 실어증에 걸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지현이의 영혼은 사고 당시 죽었고, 대신 그 몸을 엄마의 영혼이 차지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그들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야기만 들어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직접 아이를 보고 싶다고 `심령과학 연구회' 측에서 제의를 했다.
그러나 진우는 그럴 경우 자칫 지현이가 대중의 호기심에 노출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제의를 거절하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미 그 정도로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이제 딸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믿을 수 있었다.
아직 지현이의 영혼이 죽었는지? 아니면 깊숙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내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확신이었다.
이전 같으면 코웃음을 치며 무시할 이야기였지만, 아내를 잃은 슬픔에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까?
그런 자신의 희망이 반영된 것일지는 모르지만, 진우는 이제 그 사실을 믿게 된 것이다.
남들은 그런 자신을 알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현이의 영혼은 정말 죽은 것일까? 혹시 몸 안에서 느껴지는 것 없어..?"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역시 지현이의 혼은 죽은 걸까? ..... 하지만 만약에 살아서 혼이 돌아온다면.. 그 때는 당신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글쎄요..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분간.. 그런 것 생각하지 않기로 해요.."
"그래... 그러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하지만 둘이 그렇게 동의했다고 해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우선 호칭의 문제가 있었다.
일단, 진우는 그녀에게 그냥 `지현'이라는 딸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사실 처음에는 남들 앞에서는 `지현', 그들끼리는 `수진'이나 `여보'라고 부르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람이다 보니 실수가 많아서, 그만 얼떨결에 처남 앞에서 `수진'이라고 불러버리고 만 일이 생겼다.
진우는 "드디어 매부도 슬픔에 실성을 했구나!"라는 서글픈 표정의 처남을 보면서 정말이지 "아차!" 싶었다.
겨우 그럭저럭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그는 이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습관을 들이기 위하여 그들끼리도 진우는 `수진' 대신 `지현'이라는 딸 이름으로 부르고, 수진이도 `여보' 대신에 `아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당신을 아빠라고 부르니 좀 이상하네요.."
그녀가 살짝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주변에서 혹시라도 알면 큰일 날 테니까.. 작은 실수도 할 수 없어.."
진우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아직 어린 딸아이의 입에서 딸의 목소리로 `여보', `당신'이라 불려지는 것에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리고 입원으로 인해 학교에 많이 빠지게 되었지만, 학교 문제도 남아 있었다.
만약에 지현이의 영혼이 살아있어서 중간에 돌아온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단 아내가 클 때까지는 적어도 10년간 딸 지현이로서 교육을 마쳐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아니 교육뿐만 아니라 어쩌면 평생을 딸로서 인생을 살아야할지 모른다.
두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떻게 하지..?"
"일단은 학교는 지현이로 마쳐야겠죠.."
"잘 해낼 수 있겠어?"
"괜찮아요. 잘할 수 있어요. 평소에 지현이 학교생활 이야기 많이 들었고, 친구들도 다 아는 걸요."
"그 그래..?"
눈앞의 여자아이는 이제 그에게 있어 딸이자 아내인 지현이가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기묘한 부녀이자 부부지간이 시작되었다.
지현이는 집인 양재동에서 비교적 가까운 영동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켰다.
다행이 경과가 좋아 새학기가 시작될 즈음에는 퇴원을 해 통원치료로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현이의 퇴원 날 진우는 그녀를 집안에 데리고 들어오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그 날 평범하게 집을 나선 가족 두 사람 중 한 명만이 이제서야 겨우 돌아온 것이다.
진우는 지현이가 피곤해 하는 것 같아 안방의 침대에 눕혔다.
일단, 부부니까 방은 같이 쓰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사고로 엄마를 잃은 어린 딸과 아빠이니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현이를 눕혀 안정을 시킨 뒤, 진우는 혼자서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고 후 왠지 내키지 않아 그동안 한번도 들어오지 않은 방이었다.
먼지가 좀 쌓인 방에는 이제 어쩌면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딸아이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딸아이의 침대, 책상, 가방, 많은 책들, 그리고 아이가 아끼던 인형, 그렇게 이어지던 그의 시선은 문득 열쇠로 잠겨져 있는 일기장에 멈추어 섰다.
그는 열어볼 수 없겠지만, 그 속에는 딸아이의 많은 추억이 담겨있을 것이다.
딸아이는 꿈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일기장은 일기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은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독서광이었던 아이의 취미나 글 솜씨,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로의 꿈은 역시 작가지망생이었던 수진이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리라.
국문과를 나온 수진이가 자신 때문에 꿈을 접고, 맞벌이를 위해 취직한 것이 안타까웠던 진우는 그래서 더욱 딸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갑자기 서글픔이 복받치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흐흑... 지 지현아..."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을 때, 진우의 뒤에서 자그마한 몸이 따듯하게 안겨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현이.. 아니 아내였다.
그녀도 진우의 등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죽여 자그맣게 울먹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후.
이제는 아주 몸이 작아진 아내를 안고 그는 딸아이의 방을 나왔다.
한참을 울던 그녀도 어느덧 피곤함에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진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딸아이인 지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육신 속에는 믿기 힘들게도 아내인 수진이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아내로서의 수진이가 아닌, 사실은 아내이지만 사람들에게 딸로서 보여지는 지현이가 되어 있었다.
이 작은 머리 속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이렇게 뒤바뀌어진 운명을 어떻게 감당해내고 있을까?
이 어린아이의 몸이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불편할 텐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지현이를 품에 꼭 안아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풋풋한 어린아이의 젖내가 풍겨 나왔다.
순간 진우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 어린아이가 딸인 지현이가 아닐까?
이 속에는 정말 아내인 수진이가 들어있는 것일까?
그는 이미 지금 안고있는 지현이의 영혼이 아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영혼이 사라졌다는 딸아이의 따듯한 육신을 안고있는 진우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지현이가 퇴원을 하고도 한동안 진우는 이런 저런 일 처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현이가 다시 학교에 등교를 하고, 사고 보상 문제가 합의되고, 밀린 직장 일에서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게되자, 그는 곧 크나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현재 그에게 있어 딸인가? 아내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딸의 육체를 가졌지만, 아내의 영혼을 가졌다.
물론 지금은 영혼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아내로서 인정을 했지만, 몸은 분명히 아직 어린 딸의 육체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영유할 수 없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그들은 부녀지간으로 살아야 하지만, 집안에서도 둘의 부부생활은 사실상 힘들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되려면 성생활이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아내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어린 딸의 몸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딸의 영혼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에 아내와 성관계를 가진 후 딸의 영혼이 되돌아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그때 그들이 아빠가 딸의 몸을 범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우는 한동안 이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일이 처리되고 안정을 찾자 바로 부부간의 성생활 문제가 난제로 돌출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아내 쪽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진우가 먼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막상 아직 어린아이의 육체를 가진 그녀를 보면 언제 영혼이 돌아올지 모르는 어린 딸의 몸이라는 자각이 들어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런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섹스는 무리이겠지..'
더구나 덜컥 임신이라도 해버리면 그야말로 큰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린 지현이로 살아가야 하는 아내로서는 정말 곤란한 것이다.
아마 아내도 이런 생각 때문에 아예 성생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지 몰랐다.
결국 진우는 속으로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큰 일을 겪은 후인데 그녀를 놔두고 외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4월 들어 지루하게 끌줄 알았던 운송회사와의 사고보상문제가 급진전하면서 비교적 원만하게 타결이 되었다.
사고유가족대책협의회가 선임한 변호사가 유능하였는지 유가족들로서는 만족할만한 액수로 타결되었다.
여기에 보험금 등 이런저런 것들로 진우에게는 상당한 액수가 들어왔다.
그는 그 돈들과 이전부터 준비해오던 자금들을 모아, 그동안 다니던 프로덕션을 그만두고 독립하여 홍보영상 프로덕션을 차렸다.
이것은 이전부터 그가 계획했던 것이고, 아내와 딸의 바램이기도 했다.
당초 예정보다 훨씬 독립이 앞당겨진 것이지만, 그는 이 보상금이 불행했던 사고가 그를 위해 남겨준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의 회사에는 전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PD와 부하직원들이 같이 따라와 주었다.
진우는 이렇게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사고의 슬픔을 잊으려 노력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슬픔에 젖은 겨울과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한 진우는 문득 집 앞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현이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듯 재잘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꺄르르 웃고 있었다.
"지현아.."
진우가 지현이를 불렀다.
"어.. 지현아.. 너희 아빠이시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저씨.."
친구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했다.
물론 지현이도 반갑게 달려와 안겼다.
"아빠..."
"으응.. 그래.."
"잘 가 얘들아.."
"응.. 지현아.. 내일 꼭 놀러와.."
현관문을 들어서며 진우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응.. 내일 현주네 집에 놀러가기로 했거든.."
활짝 웃는 지현이를 보며 진우는 문득 아내가 정말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몸에 맞는 말투에 적응하기 힘든 듯 상당히 어색했던 태도와는 달리, 불과 몇 달이 지난 지금은 누가 보아도 어린아이의 행동과 말투 그대로였다.
정말이지 놀라운 적응이 아닐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개운치 않음이 느껴졌다.
"정말 요즘 당신을 보면 지현이가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져.."
진우가 가볍게 웃으며 슬쩍 이야기하자 지현이는 약간 당황한 듯 멈칫거리다가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 어머.. 왜요?"
"정말 당신 말투나 모든 것이 아이 같다니까.."
"그 것은.. 저는 정말 애를 써서 적응하는 거라구요.. 자연스럽게 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말 자연스러운 걸..?"
"그 그래서 싫어요? 그냥.. 나.. ...... 앞으로 긍정적으로 살기로 했을 뿐 인 걸요.. 어차피 이렇게 된 것을.. 처음에는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그냥 인생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 인생의 주인인 지현이가 돌아오면 미안하지 않게 훌륭하게 살아야지 하구요... 나.. 꼭 작가가 될 거예요.."
진우는 순간 그녀의 그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아.. 그 그래.. 미안해..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리고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렸다.
그러자 지현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려는 듯 진우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요.. 아빠.. 자꾸만 나를 `당신',`여보'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안돼요.. 그러면 습관을 들이기로 한 것 안 되잖아.. 피.. 처음 습관들이자고 한 건 자기면서.. 나는 이렇게 아빠라고 부르면 노력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상하지만..."
지현이의 말 그대로였다.
밖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집에서도 지현이라고 불러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그러나 이 작은 몸 속에 아내가 들어있다 생각하면 자꾸만 `당신'이라 부르게 된다.
"하지만.. 당신을 지현이라 부르면 아무래도 아내라는 느낌이 안 들고 딸이라고 생각되는 걸.. 지금 당신은 지현이의 모습 그대로이니.. 하지만.. 노력을 해야겠지.. 그래.. "
진우는 지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는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과연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고 있었다.
어차피 아내는 그녀의 말대로 딸 지현이로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현재 부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