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7)

준우는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진숙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으로 향했다. 눈빛을 반짝인 진숙이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며칠 후에는 준우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남편에게 말해서 그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들어 내놓고 남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문득 그에게 비서실장직에 대한 의향을 물어봤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여보! 민 비서를 실장 시킬 거예요?”

“아직 몰라!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냐.”

장 인호는 텔레비전 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로 아내의 말을 묵살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던지 독선적인 남편의 성격에 불만이었다. 그녀는 은근히 준우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자 했던 말이었다. 남편의 퉁명스런 말에 무안한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여보! 나, 차를 바꾸고 싶은데.”

“일 년도 안됐는데. 차를 왜 바꿔?”

“중형차라 다루기 불편해서 바꾸고 싶어요.”

“...........”

장 인호는 여전히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장한 체 묵묵부답이었다. 남편의 침묵은 어느 정도 긍정의 표시였다. 그녀는 슬그머니 남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민 비서! 차를 보니 골동품이던데, 내 차를 주고 나는 새 차로 구입할게요.”

“...........”

진숙의 말을 듣고 장 인호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민 준우에게 비서실장직을 맡길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기존의 임원들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요즘은 두뇌가 빠르고 활동력이 있는 젊은 세대를 간부로 운영하는 기업오너들이 많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진숙이 혼잣말처럼 종알거렸다.

“요즘 예쁜 차들이 많던데.........”

“알아서 해.”

장 인호는 귀찮다는 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진숙은 무척 기뻤다. 아니 준우가 좋아하는 표정을 상상하며 가슴이 벅찼다. 남자는 많은 욕구를 갖고 있지만, 여자는 욕구를 느끼는 단 하나의 남자에게 집착한다. 그녀는 점점 준우에게 사육당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섹스에 집착하는 그녀 스스로가 사육당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수진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진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진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수진은 엄연히 그녀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이차이도 많지 않은 수진은 그녀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그녀는 수진과 준우가 대화를 하는 모습만 보아도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거실 안을 둘러본 수진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 유리창 밖을 쳐다본 그녀는 정원에 잇는 준우를 발견한 것이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준우의 등 뒤로 다가서며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돌아보는 그에게 그녀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기서 뭐해! 들어가요.”

“음.......!”

왠지 긴장이 되는 준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수진은 도리어 밝은 미소를 띠며 그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들은 나란히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앉았던 장 인호와 진숙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특히 나란히 들어오는 그들을 바라보는 진숙의 눈빛에는 질투가 서려있었다.

수진이 준우의 팔을 잡고 소파로 걸어가 장 인호와 탁자를 마주보고 앉았다. 주춤거리던 준우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진숙의 시선을 의식했다. 장 인호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수진과 준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 수진이 장 인호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

“왜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있니?”

“네.”

“뭔데 말해봐라!”

“저, 결혼할래요.”

“뭐라고........!?”

장 인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딸이 결혼을 하겠다는 말에 그는 당황했다. ‘결혼이라고......!’ 아직도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딸의 말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음악공부에 전념하던 딸이 어느새 남자를 사귀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수진과 생모를 그리워하는 수정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느꼈다.

“넌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않았고, 바이올린니스트로 꼭 성공한다고 했잖아?”

“대학 졸업하고 결혼할 것이고, 결혼하고도 얼마든지 음악을 할 수 있어요.”

수진의 당찬 말을 듣고 있는 진숙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나이 차이가 적은 계모 입장에서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단지 수진과 준우 사이를 오해하고 있었던 진숙은 겸연쩍기도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진이 결혼한다면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숙은 남편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했다.

장 인호는 전혀 수진의 결혼에 대해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그는 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기에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딸이 결혼할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든지 생각해볼 여유가 필요했다.

“상대가 누군데 그러니?”

장 인호는 일단 딸이 결혼한다는 나자를 알고 싶었다. 그의 물음에 수진이 준우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한마디도 도와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준우는 결혼이 목적이 아니기에 그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수진이 묵묵히 탁자 위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무릎위에 손을 얹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준우 씨요.”

“뭐라고.......!?”

“뭐.......!?”

장 인호의 놀라는 목소리와 동시에 진숙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스러운 눈빛을 했다. 수진의 짤막한 말이지만 장 인호는 또 한 번 놀라서 준우를 쳐다봤다. 장 인호로서는 너무나 예상하지 못했던 황당함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준우를 바라보는 장 인호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 집안에 있는 젊은 남녀로서 당연할 수도 있었다. 장 인호가 생각하기에는 준우만한 젊은이도 흔치 않았다. 하지만 장 인호는 생각할 여유가 필요했다.

“결혼을 그리 쉽게 생각할 수는 없어. 일단, 아버지는 찬성할 수 없다.”

“절대 안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장 인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숙이 악을 쓰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시뻘건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순진이 결혼상대로 준우를 말하는 순간 펄쩍 뛰어 일어날 뻔했다. 준우는 그녀와 육체관계를 하고 있는 남자이고,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여자의 직감인지 몰라도 그동안 그들 사이를 이상하게 보았던 자신의 판단이 옮았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수진의 말에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진숙은 새파랗게 질려 준우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밝힐 수없는 육체관계를 하고 있는 사이지만 진숙으로서는 준우가 배신한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들의 결혼을 용인할 수 없었다.

수진은 예기치 않게도 진숙이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수진이 생각하기에는 진숙이 그렇게 반대하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다. 수진은 아버지가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도록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수진은 진숙을 무시하듯이 입가에 조소를 흘리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아버지가 반대해도 준우 씨와 결혼할 거예요. 우리 나이에 부모 동의 없어도 결혼 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수진아! 조금만 더 생각해봐라. 젊으니까,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어. 하지만 후회하지는 말아야지. 다시 생각해 봐!”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장 인호는 단호하게 말하는 딸의 변화를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딸 수정은 다분히 감성적이고 여리지만 수진은 명석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어쩌면 냉정하게 보이기도 했던 수진의 변화에 낙심한 장 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 인호는 수진이 차분하게 생각해서 대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마디 했다. 

“넌, 현명하잖아! 왜, 그럴 수 없다고만 하니!?”

“난 이미 준우 씨, 여자니까요.”

“뭐라고, 그럼........!?”

장 인호는 수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진숙은 흠칫하며 자세를 고쳐 앉아서 남편과 수진, 그리고 준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수진의 당돌한 말에 장 인호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 인호는 낙심하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육체관계까지 했다는 딸의 결혼을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할 수.........”

“절대 안돼요!”

장 인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숙이 펄쩍 뛰었다.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일어난 진숙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준우는 진숙이 반대하고 나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진숙의 반대는 준우의 계획된 시나리오에 포함 된 것이었다. 수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허리에 양손을 짚으며 파랗게 질렸던 진숙이 장 인호의 팔을 잡아 당겼다.

“여보! 나 좀 잠간 봐요.”

“.........!?”

장 인호는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진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 인호도 천천히 진숙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진숙은 남편이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소리 나도록 닫고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침대위에 걸터앉은 장 인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고부고분하고 다소곳하던 아내가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숨을 몰아쉰 진숙이 앙칼지게 말했다.

“당신! 정신 있어요. 딸 인생을 망치려고 해요.”

“인생을 망치다니! 자식의 인생에 부모가 끼어 들 수 없어.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 말을 들어!?”

“수진 이를 어떻게 부모도 없는 민 비서에게 시집을 보내요. 근거도 없는 사람을.”

“당신이 관섭할 일이 아니야.”

“내가 관섭할 일이 아니라고요.......?”

진숙은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데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후처라고해도 수진의 엄마였다. 그런데 대놓고 무시하는 남편의 말은 그녀를 흥분시켰다. 일생을 주관적으로 살아온 장 인호 또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말에 대드는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눈을 치뜨고 노려보았다. 시근덕거리며 남편과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와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 집안에 필요 없으면 나갈게요. 나를 무시하고 수진 이를 결혼시키려면 이혼해요.” “왜 그래! 당신까지. 수진이가 결혼하면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차분히 여유를 두고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파랗게 질린 진숙이 이혼을 하자는 말에 장 인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 인호로서는 처음으로 아내 말에 자신의 고집을 꺾는 일이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화장대에 엎드렸다. 수진이 결혼하면 같이 살 것도 아니라는 남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준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준우의 가슴에 안겨 투정을 하고 싶었다.

안방 문이 닫혔어도 장 인호와 진숙의 목소리는 거실에서도 들렸다. 소파에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준우와 진숙의 마음은 각각 달랐다. 준우는 이미 진숙이 거칠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부모까지 들먹거릴 줄은 몰랐다. 수진 또한 진숙의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서 준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 그의 손을 잡아서 위로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헐벗은 가로수 밑에 떨어진 낙엽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태양이 감추어진 회색빛의 하늘은 첫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준우는 고층의 오피스텔 건물 입구를 나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걸어 나오던 중년 남자가 손바닥을 부비며 말했다.

“대진에 계셔서 잘 아시겠지만. 잘 선택하신 겁니다.”

“괜찮기는 한데.........”

준우는 입구에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장 인호의 집에서 나올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거주할 곳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준공한지 일 년도 되지 않은 10층 오피스건물은 애초에 주거용으로 건축된 것이었다. 나무랄 데 없이 정결하고 인테리어나 시스템이 최신식 시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관리비가 비싼 편이었다.

그와 같이 있는 중년남자는 건물 관리 사무실의 김 과장이었다. 김 과장은 그가 대진 컨설팅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내일부터 입주해서 사용해도 불편하지 않도록 해 놓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려야지요. 저희 오피스 홍보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김 과장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준우가 내미는 손을 덥석 잡고 악수를 했다. 김 과장과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그는 다시 건물을 올려다보며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피스 건물의 상층부에는 돌출문자로 ‘Sun Shine'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도심지에 있는 오피스이지만 주변에는 중소기업의 사무실들이 있어 조용하고 아늑하였다.

주차장은 건물 뒤편에 있었다. 준우는 느티나무와 활엽수가 정열하고 있는 건물 옆의 도로를 지나 주차장으로 들어가 승용차에 올라앉았다. 그의 승용차는 진숙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이다. 진숙은 그와 육체관계까지 했던 수진이 결혼하겠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도 그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승용차 열쇠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준우는 승용차의 시동을 걸어놓고 잠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수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그와 결혼하겠다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장 인호는 딸의 결혼에 대해 진숙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에게 관심 없는 수정은 여고졸업을 앞두고도 여전히 밖으로 떠돌고 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정이 알고 있는지 준우는 알 수 없으나 조금은 눈치 채고 있으리라고 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살얼음을 딛고 있는 그의 심정이었다. 다음 계획을 실행하는 시간동안에 그는 진숙이나 수진, 그리고 수전과의 사이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모든 계획이 중도에 무너지면 그는 장 인호의 집에서 나와 다른 계획을 세워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피스를 구입한 것이다.

승용차의 앞 유리창에 여인의 눈썹 같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져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드디어 겨울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에는 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함께 성탄 축하노래가 울려 퍼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가 저물어 갈 것이다. 굳은 신념으로 정면을 응시한 그는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대로로 진입하려던 준우는 신호등의 정지 신호를 보고 승용차를 멈추었다. 그의 뒤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좌측방향의 차선으로 들어서며 급정거를 했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그는 흠칫 놀랬다. 그녀는 다름이 아닌 혜림이었다. 시선을 외면했던 그는 다시 검은 색 승용차를 쳐다봤다.

“.........!”

왠지 침통해 보이는 그녀는 분명히 조 창식의 딸이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검은 안경을 착용하고 있는 남자는 조 창식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그녀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시선이 준우를 향했다. 윤곽이 또렷한 미모를 지닌 그녀의 눈빛에는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전혀 알 수없는 침입자에게 강간을 당한 혜림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조 창식은 모든 것을 숨기고 약혼자 이 정민과 결혼하라고 하였다. 한 동안 고통스러웠던 그녀도 아버지의 말을 받아 드릴 수박에 없었다. 세상에는 순결을 잃고도 얼마든지 처녀로 결혼해서 잘사는 여자들이 많았다.

모든 것을 잊고 리듬체조 국가 대표 선발에만 전념하려던 혜림은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당연히 있어야할 생리가 없었다. 한 달, 두 달 훈련을 하면서 점점 식사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해졌다. 그녀는 마지못해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그리고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며 절망감에 젖었다.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진 혜림은 약혼자를 볼 면목도 없었다. 어쩔 수없이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녀의 말에 조 창식도 큰 충격을 받았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고민하던 조 창식은 딸에게 일단 낙태를 시키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 든 생명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진 조 창식이 딸을 강압적으로 산부인과로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혜림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가 순결을 짓밟고 생명을 잉태시켰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저지른 죄의 대가로 희생양이 된 것이다. 냉혹한 현실은 그녀를 참혹한 절망의 늪 속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녀가 타고 있는 승용차 뒤편에 또 다른 승용차가 뒤따라와서 멈추었다.

조 창식의 승용차 뒤편에 멈춘 흰색 승용차 안에는 혜림의 약혼자 이 정민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정민은 그녀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구를 들어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그녀가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연락도 뜸하기에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면 너무 성급하게 그녀를 소유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실수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민은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려고 혜림이 훈련하는 장소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한동안 훈련을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그녀의 집이 있는 성남으로 가던 중 혜림이 타고 있는 장 인호의 차를 발견한 것이다. 장 인호의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뒤쫓아 가서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고 장 인호는 신경질적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앞 차를 추월해 나간 그는 조수석에 앉은 딸을 힐끔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딸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여자들은 모두 경제력 있는 남자들의 소모품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아직까지 여자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그의 아내 황 은지가 어린나이에도 그의 후처가 된 이유는 오직 돈의 위력이었다.

조 창식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와 예약을 했었다. 거칠게 승용차를 몰고 간 그는 산부인과 병원 주차장에 세웠다. 우악스럽게 핸드브레이크를 당긴 그는 우악스럽게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다리를 절며 조수석을 가지만 혜림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는 딸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뭐해? 빨리 내려!”

“...........”

혜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 딸이 내리기를 기다렸던 조 창식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차에서 내렸다. 장 인호는 절뚝거리며 앞서서 산부인과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는 발자국을 세듯이 걸어오는 딸을 바라보며 문을 열고 기다렸다. 그녀가 산부인과 입구로 들어가고 유리문이 닫혔다.

조 창식과 혜림은 모르지만 길 건너편에 주차한 흰색 승용차의 운전석에서는 미간을 찌푸린 이 정민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주보이는 산부인과 병원간판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한 민호. 그 이름은 그의 아버지와 조 창식과 잘 어울리는 의사였기에 그도 안면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다.

결혼을 앞둔 이 정민은 결코 혜림과 육체관계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로 깊은 스킨십을 했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아버지와 산부인과에 들어가는 모습이 석연치 않았다. 결혼 전에 건강을 체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약혼녀가 병이라도 생긴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운전석에서 혜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정민은 지루했다. 벌써 그들이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삼십 여분이 지나고 병원 입구에 장차 장인이 될 조 창식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얼른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멈추었다. 다리를 저는 조 창식이 그녀를 부축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는 어색한 걸음걸이로 승용차로 다가갔다. 조 창식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승용차에 태웠다. 불길한 예감이든 정민은 그들이 승용차에 올라 주차장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 창식의 승용차가 사라지고 이 정민은 그때서야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횡단보도에서 잠시 신호등을 기다리던 그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갔다. 그가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가니 정결함을 느끼게 하는 하얀 실내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대기실에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배가 부른 임신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임신부들 중에는 나이 지긋한 여자도 있고 임신한 사유가 궁금할 정도로 처녀처럼 앳된 여자도 있었다. 간호사가 접수대로 다가서는 그를 의아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저.......! 한 민호 원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말씀드리면 잘 아실 겁니다.”

정민은 명함을 꺼내 간호사에게 주었다. 간호사가 받아든 명함과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때 다른 간호사가 정민과 대화하는 간호사의 팔을 잡아당기며 업무상의 얘기를 주고받았다. 짜증이 난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기다렸다. 동료와 얘기를 마친 간호사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원장님이 진료중이신데, 말씀 드릴게요.”

“네.........”

간호사가 돌아서서 원장실로 향해갔다. 정민의 시선은 하얀 가운을 걸친 간호사가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향했다. 그는 좌우로 흔들리는 간호사의 둔부가 매우 고결하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둔부를 감추고 있는 하얀 가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부인과 간호사라는 의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역겨움을 느꼈다.

정민의 시선이 접수대 안에 있는 다른 간호사를 향했다.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간호사가 다리를 꼬고 서서 허벅지 사이를 손으로 긁는 것이다. 그는 문득 간호사들이 처녀들인 것 같지만 병원을 나서면 남자들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는 탕녀처럼 변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환자들의 은밀한 부분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환자들의 몸속을 습관처럼 들여다보는 간호사들이 아닌가. 정민은 간호사들이 자신의 성기능을 마치 유희의 대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들은 자신의 자궁이 단지 남자들의 성기를 받아드려 희열을 느끼고 임신이 되면 거침없이 제거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씁쓸함을 느낀 그가 외면을 하는데 원장실로 들어갔던 간호사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손님! 원장님이 들어오시래요.”

정민은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장실로 걸어갔다. 머리가 벗겨진 한 민호 원장이 책상위의 진료기록부를 내려다보며 볼펜을 극적가리고 있었다. 정민은 문득 원장이 번들거리는 머리를 여자의 사타구니에 밀어 넣고 여자의 성기를 더듬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개를 든 한 원장이 환한 웃음을 흘렸다.

“아! 정민 군! 축하해! 언제 결혼할 거야?”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웬일로.....!? 아! 약혼녀 때문에 걱정돼서 왔군. 또 한 번 축하해!”

“네........!?”

“건강한 아기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

“장인 될 창식 이는 말하지 말라지만, 아마 나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럴 거야! 손자인지, 손녀인지 모르지만, 부모님도 무척 좋아하실 거야. 자넨 재주도 좋고 효자야. 결혼 전에 부모님에게 손자를 안겨주고.........” 

“...............!?”

한 원장의 말이 두서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민은 정신이 아득했다. ‘그녀가 임신을 했다니.......!?’ 그가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동안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서 있다가 원장실을 나왔다. 그는 한 원장에게 어떻게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산부인과 병원을 나섰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는 휘황찬란한 성탄 장식과 그리스마스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준우는 연말을 맞이하여 하루를 마감하는 업무로 늦도록 마치고 회사를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비서로서가 아니라, 비서실장으로 발령받아 내일 할 일을 체크하고 감독 지시할 업무를 새롭게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 인호는 새해가 되기 전에 인사발령을 단행했다. 그리고 결국 준우를 비서실장으로 발령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준우가 자신의 승용차를 운전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아내가 이혼도 불사하며 반대하는 딸의 결혼 결정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겠다는 딸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는 그는 아내와 이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점점 나이는 늙어가고 병이 깊어가는 자신을 느끼는 그는 어떤 방안도 세울 수가 없었다.

성탄을 맞이한 사람들은 즐거운 시간이지만 새로운 직책을 맡은 준우에게는 바뿐 하루였다. 그러나 장 인호 사장이 영업과장의 승용차로 기업 오너들의 연말 모임에 참석했기에 준우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회사를 나섰다. 승용차에 올라 탄 그는 갑자기 어디로 가야하는지 망설였다.

조명등과 샹들리에가 눈부신 거리에는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했다. 물론 그는 아직 진숙이나 수진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수진은 성탄 축하 연주회에 참석중이고 한동안 서먹서먹한 진숙은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핸드브레이크를 잡아 내리려는데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액정화면의 발신인이 수진임을 알고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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