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화이트 하우스입니다.”
“나, 준우야.”
“네.......!?”
“나, 준우라고. 은지 맞아?”
은지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날 밤 이후로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웬일로 전화를 했을까? 그녀는 조금 긴장이 되어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신음소리처럼 낮은 목소리로 간단히 대답했다.
“응......!”
“XX호실 키를 종업원에게 맞기고 왔는데, 들어가 봐! 은지에게 전달하는 물건이 있으니.”
“........무슨?”
“가보면 알아. 잊어버렸던 은지 물건이니까. 행복하기 바랄게.”
은지는 준우가 갑자기 무슨 물건을 준다고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물어 볼 사이도 없이 그가 전화를 끊었다. 주춤거리던 그녀는 발길을 돌려 사무실에서 객실 키를 들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준우가 말하던 XX호실 방문을 열었다. 야간에는 종업원에게 맡기고 그녀가 없는 탓에 누가 호실에 묶었는지는 모른다.
룸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든 것이 정상대로 정리되어 있고 객이 묶었던 흔적은 없었다. 은지는 룸 안을 둘러보았다. 응접탁자 위에 놓인 검은 가방이 눈에 띠었다. 무슨 물건일가? 그녀는 소파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검은 비닐 팩이 들어 있었다. 비닐 팩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먼저 편지를 펼쳐 들었다.
[은지! 미안해. 은지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은지가 행복하기를 바랄게. 은지 남편에게 받은 것이지만, 원래 은지의 몫이었어. 비록 금전으로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돌려주는 거야. 언젠가는 은지의 행복한 모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해.------------시간의 문턱에서; 준우]
편지를 읽는 은지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편지를 내려놓고 비닐 팩을 열었다. 비닐 팩에 들어 있는 것은 오천 원 권의 돈다발들이었다. 돈이란 삶에 필요한 도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경제적인 욕구에 휩싸여 살아간다. 그녀가 돈을 조건으로 결혼한 것은 친정식구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친정식구를 위해 희생하고 남편과 결혼한 은지는 뒤늦게 후회하였다. 인생에 그녀가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준우였다. 그녀의 마음만은 준우의 여자가 되어 살아가는 심정이었다. 아니 그녀의 몸도 이미 준우의 여자였다. 그녀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무덥던 여름이 물러가고 정원에는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한가한 휴일을 맞이한 수진은 준우와 함께 정원에 나와 있었다. 정원 한쪽에는 뒤늦게 핀 장미송이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동안 수진은 준우와 애정을 느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들어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떨어진 단풍나무 낙엽을 집어든 준우가 수진을 힐끗 바라봤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슬며시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목뒤에 단풍나무 낙엽을 집어넣었다. 넋을 놓고 그녀가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 맛!”
“하하하........”
수진의 놀라는 표정에 준우가 폭소를 터트렸다. 벌레가 옷 속으로 들어 온줄 알았던 그녀가 눈을 하얗게 흘겼다. 그녀는 손을 뒤로 뻗어 단풍잎을 꺼냈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환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피해 정원을 맴돌았다. 약이 오른 그녀는 그를 붙잡으려고 그의 뒤를 쫓았다.
“가만 안둘 거야.”
“하하~!”
수진은 울상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도망을 하던 준우가 마지못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눈을 흘기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을 한 움큼 집어 들고 그의 목덜미에 넣으려고 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드잡이를 했다. 준우가 그녀의 양 어깨를 껴안듯이 붙잡았다.
“항복! 그만........”
“미워 죽겠어........!”
준우가 수진의 어깨를 붙잡고 토닥였다. 그녀가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상큼한 표정을 지은 그녀의 큰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이토록 스스럼없도록 변하게 만든 것은 모두 준우의 계획이었다. 그동안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들은 정원수 밑의 벤치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준우는 슬그머니 수진의 손을 잡았다. 가끔 출퇴근길에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면서 그들은 손을 잡는다거나 가벼운 스킨십 정도에는 익숙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는 현관 쪽을 바라보고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문득 준우는 요즘 연주회에 바쁜 그녀의 일정이 궁금했다.
“다음 주에는 뭐해?”
“아, 참! 다음 주에 준우 씨가 춘천까지 데리러 올수 없어요?”
동그랗게 눈을 치켜뜬 수진이 준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울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 중인 그녀는 서울시에서 초청한 중국 교향악단과 합동 연주회가 있어서 춘천으로 갈 계획이었다. 연습을 하기 위해 하루 전에 갈 때는 합창단 버스로 가지만 돌아올 때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움직였다.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춘천!?”
“네. 춘천에서 중국 교향악단 초청 연주회가 있어요. 합주연습하기 때문에 하룻밤은 거기 있을 거 같은데”
“그럼, 무슨 대가가 있지?”
“못 됐어! 꼭, 무슨 대가를 바래. 뭐가 필요한데요?”
“음........뭐가 필요할까!”
수진이 입술을 뽀로통하게 내밀었다. 짓궂은 표정을 한 준우는 그녀의 윤기 흐르는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눈을 흘겼다. 준우는 개구쟁이처럼 쑥스러운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응.......입술 정도라면........”
“정말 못 됐어. 엉큼하게.......”
수진이 준우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그러나 그녀보다 빠르게 그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꼼짝 못하게 껴안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식구들이 보고 있을 것 같아서 현관과 거실 창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햇빛에 반사되는 유리창 너머를 볼 수 없었다.
“하지 마. 식구들이 본단 말이야.”
“보면 어때. 죄짓는 것도 아니고........”
식구들을 의식한 준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햇빛에 반사되는 유리창 안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앉은 앞의 작은 연못에는 붉은 이어들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그는 연못에 작은 돌을 던졌다. 연못에 일어나는 파문에 잉어들이 쌍쌍이 되어 꼬리를 흔들며 도망쳤다.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수진 씨도 결혼할거 아냐! 이상형이 있어?”
“.........”
갑작스런 물음에 수진은 발끝으로 땅바닥의 흙을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이제까지 남자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굳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남자도 없었다. 지금 순간에 그녀 가슴에 감정의 불꽃을 일으키는 남자는 준우였다. 그녀는 바로 당신 같은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미 꽃송이를 만지며 엉뚱한 말로 대답을 회피하였다.
“여름이 지나니, 장미가 더 아름답네.”
“장미.......!? 요즘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뭔데요.......!?”
“음........! 내 앞에 있는 수진 씨!”
“피 잇~! 정말 여자들한테 상습적으로 그런 말 하나 봐.”
“아닌데.”
수진은 강한 어투로 말하는 준우를 힐끔 쳐다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여자는 자신을 칭찬하는 남자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하는 준우의 말은 모두 의도적이었다. 그는 그녀도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음 단계를 위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준우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애정 표현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분히 감상적이고 이지적인 여자들이 오히려 논리적인 남자보다는 카리스마와 포옹력 있는 남자를 선호한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준우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수진 씨, 눈 속에는 반짝이는 별이 담겨있어.”
“피 잇!”
“내가 수진 씨 눈동자 속에 별이 되고 싶어.”
“네! 무슨.........?”
무심하게 듣고 있던 수진이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녀는 준우의 말을 음미하면서 당황하였다. 그녀의 마음도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애정인가. 그녀는 가슴속에 느끼는 감정을 헤아려 본다. 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내가 수진 씨, 미래를 지켜주고 싶어.”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왜!? 우리 솔직해지자고. 수진 씨도 내가 싫지 않잖아.”
“그렇지만........! 우리가 알게 된지도 얼마 안 되고,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수진 씨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사랑을 원하잖아!”
“하지만, 아직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수진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정말 미래를 같이 할 남자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다만 자유롭게 연애하고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서 작은 연못 속의 잉어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실의 커튼 사이와 수정의 방 창문에 반짝이는 눈빛들이 있었다.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집에 들어온 수정은 늦도록 잠을 자다가 깨어 일어났다. 그녀는 무심코 창가로 다가서다가 벽 옆으로 몸을 숨겼다. 수진과 준우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모습이 아니고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이었다. 수정은 순간적으로 시샘이 났다. 아직 어린 나이의 그녀이지만 준우가 자신만의 오빠인 줄 알았다. 아니 그녀의 미음을 헤아려주는 남자였다,
거실 커튼 사이로 정원을 내다보는 눈동자는 고 진숙이었다. 그녀는 수정보다 먼저 준우와 수진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이 호스를 빼앗으려고 옥신각신하며 물세례를 받고도 정겨워 하는 표정, 때로는 준우에게 어깨를 껴안기면서도 거부하지 않는 수진의 모습에 진숙은 불같은 질투를 느꼈다. 아무리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은밀한 육체관계를 했던 사이지만 진숙 그녀도 여자였다.
커튼 자락을 붙들고 있는 진숙의 손이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준우와의 정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윤리나 도의적인 이성에서 벗어나서 단순했다. 단지 그의 우람한 남성이 몸속을 가득 채웠을 때의 황홀한 희열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한창 성욕에 무르익은 그녀에게 준우와의 정사는 마약과 같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으로 준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고,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고 다시 그의 여자가 될 시간도 없었다.
거실 창문을 내다보는 진숙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어났다. ‘안 돼! 내 눈앞에서 너희들은 다정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혼잣말을 뇌까린 그녀는 부리나케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소리가 나도록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요란한 현관 문 소리를 듣고 준우와 수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문으로 나온 진숙은 빗자루를 집어 들고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쓸어 붙였다. 이미 강릉댁이 청소를 끝내서 깨끗한 바닥이었다. 수진은 물건을 훔치다가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일어나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준우의 표정은 달랐다. 진숙과 준우는 식구들이 알아서는 안 될 육체관계를 맺은 사이였다. 그것은 준우의 계획 일부이기도 했다.
어정쩡하게 일어선 준우는 어떤 태도를 해야 할는지 잠시 망설였다. 곁눈질을 하는 진숙의 태도는 분명히 질투였다. 일찍 닥친 상황이지만 준우는 진숙과 수진 사이에 질투를 유발 시킬 계획이었다. 그는 진숙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회피하거나 변명할 필요는 없다고 준우는 판단했다.
수진이 먼저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준우는 천천히 걸어가며 기지개를 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는 진숙이 힐끗 쳐다보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의식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거실로 들어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피식 하고 희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일찍 두 여자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수정이 당돌하게도 준우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방문 을 열고 서서 그에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준우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녀는 왠지 잔뜩 토라진 표정이었다. 짧은 반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그녀는 도전적으로 허리에 팔을 짚은 자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빠! 그러는 거 싫어.”
“뭘.......!?”
“언니한테 다정하게 하는 모습 싫다고!”
“같은 집에 사는 식구니까........”
준우는 비로소 수정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계획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조금은 곤혹스러웠다. 어린 나이지만 그녀도 분명히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수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말투를 흘렸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는 뒷집을 짚고 벽에 기대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싫단 말이야. 언니가 좋아?”
“미라 언니잖아! 한 집안에서 어떡하니?”
“피 잇~!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미라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수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준우는 토라진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고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통통 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준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준우의 머릿속에는 토라진 수정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어리다고 했던 그녀의 자태에서 상큼하고도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를 느낄 수 있었다. 준우는 스스로의 감정을 되새겨 보았다. 수정을 여자로 대한 적이 있었던가. 물론 당돌하게 입맞춤을 해오는 그녀의 입술을 순간적인 감정으로 접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세상을 달리한 여동생 정아를 대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 짙었다. 그는 애써 수정에 대한 묘한 감정을 지우려고 했다.
진숙은 준우의 무표정한 모습에 더욱 애가 탔다. 설마 순간적인 충동적인 육체관계였다고 해도 눈길 한 번 안주고 외면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준우의 눈치를 살폈다. 남편이 들어오고 식구들이 식탁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준우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평상시 식사가 끝나면 오래지 않아 장 인호는 당뇨와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이내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조 창식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 창식은 장 인호를 피붙이 가족보다도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창식은 평소에도 인호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의논했었다. 곧 결혼해야할 혜림이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창식에게 들은 장 인호는 왠지 꺼림칙했다. 스타킹으로 복면하는 것이나, 밤중에 침입하여 강간하고 거금의 돈을 요구한 점은 그가 폭력조직원 시절에 사용했던 수법이기도 했다.
장 인호는 창식의 말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함을 지우려고 고개를 저으며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고치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직도 처녀같이 탄력 있는 아내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물론 나이 차이가 많은 아내의 선정적인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 창식의 딸이 강간 당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성욕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