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준우 씨! 아닙니까?”
“네 맞는데요. 어디신데요?”
“아! 여기 XX정신병원입니다. 민정아씨 보호자 되시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입니까?”
술기운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준우는 조금은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을 다신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 조금은 당황하는 상대방의 말에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병원으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이 밤중에........!? 왜 그러시는데요?”
준우는 술기운이 깨는 것 같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들고 있는 핸드폰을 고쳐 잡고 귀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상대방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정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민 정아 씨가 옥상에서 투신했습니다.”
“무슨 말.......!? 투신이라니요?”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여튼 XX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는데 생명이 위급한 상태이라고 보호자를 오라고 합니다.”
“그, 그럴 리가.......”
준우는 갑자기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아가 자살을 했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단 하나 남은 피붙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위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느껴졌다. 그는 ‘안 돼!’ 라는 혼잣말을 흘리며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수정이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오빠! 뭐해? 빨리 들어가.”
“정아가! 정아가.........”
수정은 귀신에 홀린 듯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준우를 의아스럽게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여동생 이름이 정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술기운으로 눈가가 발그스름한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무슨 말이야?”
“내 동생.......내 동생, 정아가! 위독해.........”
그 한마디를 뱉어놓고 준우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그의 여동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수정은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정의 곁을 떠나 클럽을 나온 그는 대로변으로 뛰어나갔다. 도로변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타려는 사람을 밀어내고 먼저 올라탔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준우는 안절부절 하였다. 택시가 병원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한 걸음에 달려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한 의료진들은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아는 이미 하얀 천에 덮여 병상에 누워있었다. 준우는 하얀 천을 벗겨내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정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죽어서도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준우는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정아의 손을 붙잡았다. 티 없이 맑고 명랑하던 정아는 행복의 의미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삶을 마친 정아를 생각하며 준우는 흐느껴 울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는 죽음인지도 모르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정아의 죽음은 준우에게 크나 큰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그가 해야 할 일들을 깊게 새겨 준 것이었다.
삼일 후에 준우는 어머니 산소가 있는 야산 기슭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이모의 산소 옆에 정아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에게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듯이 흰나비들이 주위를 날고 있고, 시야 멀리로는 북한강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그것은 여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들에게 고통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태양이 기울어가도 준우는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아가 괴로워 할 동안 너무나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멸감에 휩싸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여동생을 보살피지 못한 자책감이었다. 그 자책감은 가슴 속에 새겨져 있던 어머니와 이모의 죽음을 다시 일깨워 주는 불꽃이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덥던 여름의 끝에서 입추가 지나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진한 초록의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 밑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가롭게 움직인다. 서울에 인접한 성남의 대로는 차량들로 혼잡하였다. 차량들의 물결 속에 승용차 한 대가 대로변에 멈추어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진한갈색 선글라스를 낀 준우의 모습이었다.
승용차에 내려선 준우는 대로변의 건물들을 훑어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주변에 부유층의 저택들이 운집하고 있는 도로변에는 높고 낮은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남한산성 입구로 향하는 도로로서 특히 여러 개의 모텔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텔들 중에 정원까지 갖추어진 건물 벽에는 조각으로 ‘화이트 하우스’라는 간판이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도로변 건물 중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건물은 대형 슈퍼마켓이었다. 이미 여러 번 이곳을 다녀간 준우는 슈퍼마켓과 ‘화이트 하우스’의 간판을 걸린 모텔이 조 창식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모텔과 대형 슈퍼마켓을 살피던 준우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부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듯이 높게 세워진 저택의 담장이 골목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가서 저택이 즐비한 좌측 끝으로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공원으로 사용하는 동산 앞에는 아름드리 노송을 등지고 규모가 큰 이층 저택들이 웅크리고 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선 준우는 저택들 중에 정원이 들여다보이는 철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가 요즘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조 창식의 저택이었다. 골목안의 저택들을 눈여겨보면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범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일거일동이 CCTV를 비롯한 초 첨단 장비들의 감시를 받고 있다.
준우는 장 인호와 조창식이 어떻게 한 밤중에 침입했는지 살폈었다. 그는 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 위해 조 창식의 집으로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은밀하게 숨겨진 방법시스템이 문제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게 숨어들기는 쉽지 않았다. 저택 뒤로 돌아간 그는 아름드리나무 밑에 섰다. 조 창식의 저택 지붕으로 뻗어 있는 굵은 나뭇가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준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나무 가지를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가면 CCTV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준우는 이내 실망하였다. 지붕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가려하지만, 발각되지 않고 어떻게 잠겨있는 창문을 열고 들어 갈 것인가? 이 시간쯤이면 조 창식의 딸인 혜림과 은지는 집안에 없고 가정부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그는 저택 주변을 둘러보고 천천히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을 나선 준우는 슈퍼마켓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화이트 하우스’ 모텔로 걸음을 옮겼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여자들, 허벅지를 들어내며 짧은 옷을 걸친 여자들, 팔짱을 끼고 가는 젊음 연인들, 가방을 둘러멘 학생들, 제각기 제 삶에 바쁜 그들 모두가 그를 의심하거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텔 간판을 올려다보며 걷던 준우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마주하여 걸어오던 여인도 멈추어 섰다. 무릎 밑으로 찰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를 걸친 여인은 다름 아닌 황 은지였다. 그녀가 그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서며 놀라는 눈빛을 했다.
“준우 씨! 여기는 웬일로.......!?”
“은지........!”
은지는 자신의 동네에서 준우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이 의외라고 생각한 그녀는 쑥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혹시나 동네 사람들에게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을 보이게 될 것이 두려워서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조 창식의 주변을 살피던 준우도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해 조금은 당황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차 한 잔 할 수 있어?”
“.........응.”
망설이던 은지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옆 건물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혹시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지 스커트 자락을 추슬렀다. 준우가 음료수를 시키며 눈빛으로 그녀의 의향을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수를 탁자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며 음료수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은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준우의 여자가 된 후에 한 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아니 애써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가슴속에 살아 숨 쉬던 그에 대한 애정이 새롭게 살아났다. ‘그는 나를 여자로 만들어준 남자야!’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를 받아 드리고 황홀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준우가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만나서 반가워. 요즘 어떻게 지냈어?”
“그냥..........”
은지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잊어야 하는데, 왜 이러지? 준우 씨도 나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닌지, 그러나 문득 그녀는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의 가족을 헤치고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 남편일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다. 그가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두려운 예감을 느꼈다
예기치 않은 준우와의 만남에 반가웠던 은지는 돌연히 긴장하였다. 그가 남편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은 아닌지. 남편에 대한 그의 복수는 그녀가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고 또 다른 불행이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그날.......나를.........사랑한 게 아니었어?”
“무슨 말을........!?”
은지는 자신이 묻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준우의 표정을 빤히 바라봤다. 물론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의 또 다른 생각을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판단하는 그의 생각이 잘못이 아닌지 두려웠다. 아니 그녀는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그녀는 검게 드리워지는 의혹을 간직하고 있을 수 없었다.
“준우 씨가 말하던.......준우 씨 가족을 헤친 사람이.......내 남편이잖아?”
“...........”
준우는 대답하지 않고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은지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계획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태도는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었다. 그는 한쪽 팔로 머리를 짚고 음료수 잔을 빙빙 돌렸다. 마치 깊은 고뇌에 바진 것 같은 그의 모습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잖아?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은지는 결혼했지만, 남편은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그건 준우 씨와 관계없는 일이야. 내 말이.......사실이냐고?”
“은지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은지의 인생과 관계없는 일이고........”
“어쩌려고 그래........?”
준우는 여전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은지의 눈가에 이슬이 번졌다. 그는 결코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그의 가족에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남편에게 어떤 복수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두려웠다.
은지는 그렇다고 준우를 원망할 수도 없고 자신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 속 한편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남편에게 그가 복수를 해주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흠칫 놀랬다. 은지는 준우에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은지를 사랑했기에....... 행복했으면 좋겠어.”
“............”
준우가 커피숍을 나가고 은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취해야할 태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거의 의무적으로 살아가는 부부생활에서 그녀는 알 수 없는 예감을 남편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준우의 남편에 대한 원한은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십 여분 후, 조창식의 대문 앞에 방범 회사 마크가 달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돋보기안경을 착용한 남자는 무척 어눌한 표정으로 얼 띤 모습이었다. 장비가 든 손가방을 든 남자가 초인종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나이 듬직한 가정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구세요?”
“케이지 방범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 수리하러 왔습니다.”
“기다리쇼.”
모자 밑으로 들어난 남자는 민 준우가 변장한 모습이었다. 모니터의 액정화면에 나타난 가정부는 전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굳게 닫혔던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거침없이 정원을 가로 질러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예상대로 은지가 없는 집안에는 가정부 혼자였다. 나이가 많은 가정부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난 잘 모르지만, 무슨 고장이유?”
“네. 오류가 나면 본사에 신호가 옵니다. 살펴보고 수리하겠습니다.”
“그러쇼! 젊은 양반이 고생하는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