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듣기가 과히 나쁘지 않군. 그렇다면 자네는 영업직보다 내 곁에 일하는 것이 어떤가! 비서실 말이야.”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어떤 직책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모두 나가서 대기하고 있어. 인사과에서 발령을 낼 테니까.”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던 신입사원들이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했다. 사장실을 나온 사원들이 희희낙락하지만 준우는 긴장하여 표정이 굳어 있었다.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대진 컨설팅과 무관하지 않고, 간부급들의 친척이나 인척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준우는 사장의 추천에 의해서인지 비서실로 발령이 났다.
준우는 틈틈이 회사내부 사정과 장 사장의 내력, 그리고 개인 환경에 대해 파악하느라고 바뿐 일정을 보냈다. 그런데 열흘도 지나지 않아 사장실 운전기사가 병으로 입원하고 준우가 장 사장의 승용차 운전까지 도맡게 되었다. 아직 낯선 회사 분위기의 비서실 업무, 운전은 물론 개인적으로 회사와 장 사장의 사생활을 파악하는 그는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장 사장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지점이 있는 지방으로 출장을 했다. 그때마다 장 사장과 동행하며 승용차를 운전하고 때로는 외지에서 숙박을 해야 하는 그의 생활은 고달팠다. 이따금 골프장을 가는 장 사장의 승용차를 운전하는 경우도 있어서 개인적인 시간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가량이 지나고 나서 준우는 회사 분위기를 대충 파악하게 됐고, 장 사장의 개인 건강과 집안 환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당뇨와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는 장 사장은 재혼한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장 사장을 출퇴근 시키던 준우는 그의 아내와 큰딸을 만날 수 있었다.
장 사장과 재혼한 아내는 비서실에 근무했었다고 하는데 사십이 되지 않았고 무척 젊어 보였다. 큰 딸은 음대를 졸업하고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으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작은 딸만은 준우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식구였다. 그 외에도 장 사장의 집에는 나이 듬직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가정부와 집사로 일하고 있었다.
준우는 오래간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근을 하려고 회사를 나왔다. 장 인호 사장이 사업운영에 필요한 공직자들을 초대하고 이사진들과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준우는 친구들을 만나러 갈 작정이었다. 그가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회사 정문을 나서는데 뒤따라 나오던 누군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멈추어 서서 힐끔 쳐다보았다. 아가씨처럼 사복을 했지만 작은 가방을 등에 멘 모습으로 봐서 여고생 같았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서며 크고 까만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저, 혹시 민, 준, 우.......!?”
“아가씨는 누구........!?”
“맞구나. 준우 아저씨. 내가 사람 알아보는 눈썰미는 있어서.”
“나, 모르겠어요? 장 미라.”
“장 미라........!? 글쎄.......”
준우는 기억을 더듬어 그녀를 기억해 내려고 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크고 까만 눈망울이 깜박거렸다. 인형 같은 얼굴에 보조개를 드리운 미소, 아담한 키에 앙증맞은 엉덩이는 그가 어디선가 특별한 호기심을 가졌던 모습이었다.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인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으며 당돌하게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왜 모르냐는 표정이다.
“용인 정신병원에서 내가 차비 꿔 갔잖아요!”
“차비.......!? 아 벌써 오래전 일이라. 그런데 여긴 웬일로.......!?”
“그냥 볼 일 보러 왔어요.”
“학생 같아 보이는데,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아! 참 오늘은 꾼 돈을 값을 능력이 안 되는데.”
준우는 친구를 만날 생각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졸랑졸랑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는 예전에 느꼈던 것처럼 그녀가 귀엽기도 하지만 조금은 불량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은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는 뒤쫓아 오는 미라에게 미소를 보내며 안심시켰다.
“염려마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아뇨! 난 빚지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갚을게요. 아! 참, 아저씨 전번 주면 되겠네. 연락해서 갚을게요.”
“안 갚아도 된다니까.”
“아저씨 간첩예요!? 아니면 마누라 때문에 그래요? 보기에는 아직 결혼 안한 사람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저씨 군복 벗으니 더 멋있어졌다.”
“하하~! 자꾸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전화번호 주세요!”
“010- 717X- XXXX. 그럼, 잘 가라.”
“그냥 갈려고요.......!?”
미라는 휴대폰을 꺼내 준우가 부르는 전화번호를 입력하였다. 그는 회사 빌딩입구의 층계를 걸어 내려갔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회사에 드나들고 있는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한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준우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미라를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다니고 있는 직원들이 그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뭐, 또 할 말이 있니?”
“나, 나쁜 애 아녜요. 먼저 번에 고마운 인사치례는 해야지요. 자판기 커피 살 돈은 있어요.”
“하하~! 자판기 커피라고?”
“네. 왜, 시간이 없어요? 아니면 자판기 커피라서 싫어요?”
준우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명동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라서 친구들을 만날 시간은 넉넉했다. 미라가 준우는 팔을 잡아끄는 미라를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들은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서 자판기로 향해 갔다. 준우가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가 커피를 뽑아 들고 왔다.
“내 성의를 받아 줘서 고마워요. 아저씬 참 마음이 착하다.”
“자꾸 아저씨라고 불러야겠어?”
“그럼 오빠라고 해도 되죠?”
“편 한대로 해. 고등학교 졸업반이니?”
“어떻게 알았어요!”
“미라 얼굴에 써 있네. 학원에 갈 시간 인 것 같은데.”
“피 잇~!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다른 사람은 대학생으로도 보는데. 학원 같은 데는 구속받기 싫어서 안가요. 아저씨 그 건물에서 무슨 일해요?”
“그냥 사무원이지.”
“으 응! 그렇구나.”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은 대진의 본사 사옥이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회사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당돌하게 준우의 팔에 팔짱을 끼며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준우가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다. 커피 물을 바닥에 흘리고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그렇게 급하세요. 성격이 급하신가?”
“하하~! 글쎄.......! 회사 안에 아는 사람이 있니?”
“그런 거 묻지 말라니까요. 알면 다쳐요.”
“다친다고.......!? 하하~! 그러니 더 궁금해지네.”
준우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미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그녀의 의도가 의심스러우면서도 점점 관심이 깊어갔다. 그녀는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그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그녀는 짧은 스커트 밑으로 들어낸 종아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오빠! 멋있는데, 애인 있어요?”
“애인!? 하하~! 사랑하는 세상 사람이 다 애인이지.”
“피 잇~! 무슨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이만, 난 가봐야겠다.”
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넣었다. 지하철 탑승 승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가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뒤편에 다가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가 보조개를 드리운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었다.
“오빠, 꼭 다음에 봐요.”
“.........”
삼 십 여분 후, 준우는 명동의 음식점에서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느라고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의 앞자리에 앉은 이 정수는 학교에서 그와 성적이 일 이등을 다투던 친구로 대학 강사이고 옆에 있는 최 철민은 합기도를 같이 했던 친구인데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준우와 그들은 술이 조금 취한 상태였다. 학창시절 추억을 얘기하던 철민이 준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철민아! 너, 황 은지라고 알지?”
“왜 너를 쫓아다니던 XX여고에 다니던 애 있잖아. 너의 집 옆에서 살았고.”
“아! 기억나지.”
“은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어.”
“그래......!? 일찍 결혼했네.”
준우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추억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여자가 은지였다. 그를 성적인 욕구에 빠져 들게 했던 어머니가 냉랭해지고, 그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여자였다. 그는 극장과 공원 등을 데이트하며 풋풋한 체취를 느꼈던 그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철민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은지가 결혼한 남자가 스무 살이나 많단다. 그러니까 그 남자의 딸이 대학에 입학했다고 했으니 너무했지.”
“왜.......! 그런 결혼을 했지?”
“들리는 말에는 집안을 살리려고 그런 모양인데. 무슨 심청이도 아니고.”
“.........”
은지의 가정형편이 어려웠다는 것은 준우도 잘 알고 있었다. 식구들도 다섯 형제나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해서 생활을 유지 했다는 것도 준우는 알고 있었다. 정수가 술잔을 기울여 마시며 한 숨을 쉬고 한마디 거들었다.
“음......! 돈이란 삶에 수단인데.......목적이 되 버렸으니, 인간 세상은 말세야.”
“그런데 말이야. 준우야. 이 말을 해야 하는지..........”
철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준우를 빤히 쳐다보며 우물쭈물했다. 준우가 의아스런 눈빛으로 지그시 그를 마주 바라봤다. 철민은 정호를 한번 쳐다보면서 말을 해도 괜찮은지 생각을 했다. 준우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대가 되고 정호는 궁금한 눈치였다. 철민이 술잔을 들어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은지를 얼마 전에 만났었어. 그런데 은지가........”
“.........”
“준우, 너를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구나.”
“나를........!? 왜?”
“그건 나도 몰라. 혹시 만나면 전해 주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적어 주더구나.”
철민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뒤적거렸다. 그리고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준우에게 전달했다. 메모지를 받아든 준우는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은지가 왜 나를 만나려 할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그렇다고 잊을 수 없는 육체적인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혹시 결혼생활이 복잡하여 도움을 청하려는지. 준우는 도저히 은지가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은지에 대한 철민의 말이 준우를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업무에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은지에 대한 관심은 준우의 기억 속에 사라져갔다. 그는 어떻게든지 장 인호 사장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갈 기회만을 노렸다. 그는 차츰 장 사장의 사업에 대한 내막도 알게 되고 점점 그의 심복이 되어갔다.
준우는 승용차를 운전하고 장 사장과 같이 대전 지점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일로 다녀오는 길이라서 고속도로는 어두워졌고 몹시 피곤하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행렬을 이루는 밤길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그는 운전에 신경을 썼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장 사장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민비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면서?”
“네.”
“그럼 어디서 숙식을 하고 있나?”
“큰 아버님 댁에 있습니다.”
“거기서 나올 생각은 없나?”
“네.........!?”
갑작스런 장 사장의 질문에 준우는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무슨 의미로 묻는 것인지 몰라서였다. 준우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듯이 장사장이 말했다.
“내 말은 말이야. 아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있으면 서로 편할 거 같아서 그래.”
“.........!?”
“먼저 있던 김 기사도 우리 집에 같이 있었어. 먼저 김 기사가 사용하던 도 비어있거든. 어때 민비서 생각은?”
“글쎄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회장님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요!?”
“난 좋지. 서로 편하잖아. 잘 생각해보라 구. 괜찮으면 내가 마누라한테 말해 놓을 테니.”
“...........”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준우는 장 사장의 말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지 장 사장의 사생활에 접근하려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준우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장 사장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장 사장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장 사장도 준우가 심사숙고하게 생각 하는 줄 알고 더 묻지 않고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침묵과 자동차의 물결속애 준우는 승용차를 몰아 판교인터제인지를 통과하였다. 장 사장의 저택이 있는 약수동으로 가기위해 금호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장 사장이 침묵을 깨고 준우에게 물었다.
“어때, 생각해 봤나?”
“네.......!?”
“우리 집으로 들어오겠냐고?”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내일 당장 들어오도록 해.”
“내일 당장 요?”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뭐 뜸 들릴 필요 있나.”
“네........? 네,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