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39)

불의 노래 44

송여진과 진의 말이 화형의 마음을 쿵하고 울렸다.

“당신이 어떻게....”

너무 놀라 화형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다. 여진과 단 둘만이 있을 때 쓰던 ‘당신’이란 밀어가 엉겁결에 튀어 나온 것이다.

“괜찮아요. 이젠 이 아이들도 당신과 나의 관계를 이해하기로 했으니.”

여진도 노골적인 표현을 쓰며 화형을 안심 시켰다. 린과 진도 이미 화형과 엄마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괜찮아. 이젠 편하게 말해도 돼. 대신 우리도 항상 생각해 주고.”

린은 진과 달리 화형을 순종적인 태도로 배려를 한다. 마치 집에 있는 재경 누나의 성격과 매우 흡사했다.

“어.. 그래 고마워. 저어∼ 여진 이래도 되는 거야? 당신 딸들이잖아. 어떻게....”

화형은 자신의 운명이 근친상간의 평행선 위에 올려 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이 대물림 되어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근친간의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됐다.

“지난번에 얘기를 했지만 회장님이신 예들의 할머니는 미혼모로 힘든 세파를 헤쳐 온 분이야. 어머니의 사생활을 내가 뭐라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가 적은 수는 아닌 걸로 알고 있어. 사랑에는 파격적으로 개방적인 분이지. 그래서 이런 해결 방안도 내려 주신 거고. 우린 그렇게 하기로 서로 이해를 했고.”

진의 눈에 활기 띤 생기가 감돌고 있다. 화형을 바라보는 눈빛에 점차 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에 관한한 이제 막 눈을 뜨는 시기가 아닌가. 근친의 사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는 숨길 수 없겠군. 더 이상 끌면 이들에 대한 기만이야.’

화형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야 함을 절감했다. 설사 이 들에게 돌을 맞는다 해도 그게 옳은 일이다.

“당신이 이렇게 까지 하니 나도 숨겨둔 비밀을 털어 놓지 않을 수 없어. 그냥 나와의 관계를 지금처럼 유지하면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 아이가 있어.”

화형이 성아의 얘기를 꺼내자 여진과 진 그리고 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 버렸다. 평소라면 농담으로 치부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었다.

“아....이라니? 그게 무슨....”

여진이 받은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그의 나이가 몇인데 벌써 아이가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여태 아무런 내색도 없었잖은가 말이다.

“일단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실망을 하 든 비난을 하 든 해. 뭐든 다 감수할 게.”

화형의 안색에 그늘이 지자 여진 모녀들도 조금은 진정을 했다. 워낙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닌가.

아이가 있다는 말은 배우자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게 그녀들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이다.

“알았어. 쉬운 얘기 아닌 거 짐작할 수 있어. 말해!”

그래도 가장 먼저 송여진이 평상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격앙된 쌍둥이와 현저히 대조적인 반응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여진이 화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크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

“진아 조금만. 화형의 말을 들은 후에 네 마음을 결정해도 늦지 않아. 시간은 많잖니.”

“알았어요.”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래도 한 발 물러서는 진아다. 옆의 린은 진의 손을 꼭 잡고 화형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해....”

아버지와 할머니의 애절한 사랑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해 나가는 화형의 얼굴엔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고뇌가 서려 있었다.

비록 금단의 사랑으로 근친상간의 굴레를 쓰고 있는 화형이지만 어찌 항상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으랴.

사회의 엄엄한 시선과 스스로의 자책은 그의 나이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임에 틀림없잖은가.

“....해서.... 엄마와 나는 성아를 낳기로 결정했고.... 얼마 후 난 예쁜 딸을 가진 부모가 되었어.”성아를 낳은 엄마 진숙의 얼굴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관계를 정립하고 보니 엄마의 애절한 심정이 새삼 사무쳐왔던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가 누나에게 들키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던 같아. 누나 수형이 엄마와 잠자리를 하는 안방의 문을 갑자기 열고 들어온 건 엄마가 성아를 가진지 막 4개월이 지났을 때야....”

누나인 수형이 화형의 여자가 되겠다고 억지를 썼던 때를 말하자 세모녀의 얼굴에서 동시에 질투의 빛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녀들은 화형의 말에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아주 창백해진 얼굴로 늦은 귀가를 한 날이었지....”

아버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세모녀는 급기야 눈물을 비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재경 내게는 고모이자 누나인 그녀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눈을 감았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어. 아니 안했다고 해야 맞는 말이지 왜냐하면.... 난 아버지의 심정을 너무 잘 알게 되어 버렸거든....”

“아∼ 정말 화형 당신이란 사람은....”

송여진은 어쩌면 기구하달 화형의 가정사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처지도 별잔 그녀들에 비해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 엄마완 왜 그런 거야? 막말로 바람을 피운 거야?”

“진이 화형을 다그쳤다. 자신과 동생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목을 매는 화형이 자신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니 절로 앞이 캄캄해졌다.

“바람? 이런 마음을 바람이라고 말할 수 있나?”화형은 잠시 숨을 고르고 송여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진의 얼굴엔 굵은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여진을 처음 봤을 때 난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어. 그 순간 떨리는 몸을 진정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만 바라보는 여자들이 넷이나 있는데.... 여진에게만 여진만 보면 까맣게 잊어. 그래서 난 더 할 말이 없어. 이런 내 감정을 너희가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다만 여진에 대한 내 감정은 나도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야.”

길고 긴 화형의 넋두리가 끝을 맺었다. 처음엔 분노가 가득했던 진이의 표정이 이젠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혼재 되어있었다.

“난 이렇게 살아. 그런데 진이 린이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것도 여진과의 관계를 알고 인정한다는 데 내가 여기서 더 나아갈 수는 없었어. 미안해.”

“미안! 아니 너 미안할 필요 없어.”

이젠 여진과의 관계도 끝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린 화형도 작은 물방울을 눈에서 떨굴 때였다.

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화형의 말을 자르고 있었다.

“엄마, 엄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이대로 화형을 포기할 수 없어. 엄마는 포기할 수 있어?”여진과 진, 린은 이미 화형을 공유하기로 한 마당이다. 그런 결정을 하가까지 그녀들의 가슴앓이가 어찌 만만했겠는가.

“난.... 난 어찌해야 할지.”

여진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문제라면 진과 린의 그늘에 묻혀 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밝혀진 대로라면 딸들의 처지가 참으로 애처로워 질 것이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다.

“엄마 우리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나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게 있어. 결혼이나 혼인신고 같은 제도의 문제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사랑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거. 그래서 우리 모두 화형과 함께 하자고 한 거잖아.”

화형과 여진 그리고 진이 갈등하는 그 사이에서 한 발 벗어난 것처럼 있었던 린이 화형과의 관계를 지속하자고 나섰다.

“우린 이미 계산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 엄마! 진!”

잔잔히 곱씹는 린의 말은 그녀들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그녀들은 결코 화형은 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새삼 자각했다.

여진과 진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진은 여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여진의 몸을 빌어서 태어난 친 딸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 진, 엄마는 그렇게라도 화형과 함께 하고 싶어. 흑....”

참고 참았던 눈물이 여진의 눈에서 떨어져 내렸다. 화형도 진도 쉽게 여진의 눈물을 닦아 줄 수가 없었다.

“....하아∼ 엄마도 나도.... 이젠 멈출 수 없어. 끝까지 가보자 화형!”드디어 진이 결심을 했다.

“....고..고마워 진아.”

진의 결심에 안도한 사람은 오히려 여진이었다. 진이 어떻게 나올지 가슴 졸이며 그녀의 입만 바라본 여진이다.

“화형....들었지? 우린 멈추지 않아.”

린이 여진과 진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뒤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린, 진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따를게 다만 한 가지 할머님의 허락은 받아야 해. 나머진 그 후에 결정하자.”

화형은 이걸로 모든 걸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야 송여진의 마음이 편할 것 같기 때문이다. 딸들의 일로 그녀의 마음에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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