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39)

불의 노래29

“내 자네 가정환경은 대략 전해 들었네, 우리 여진이 쉽게 신변을 정리 할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건 알고 있나?”

“........................”

“그리고 사회 통념상 자네와 정상적으로 만남..을 이어갈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나?”

“...................”

“그래서 자네의 의중을 알고 싶어 보자고 했네..그래 자네의 생각을 한번 꺼내보게.”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있다. 풍기는 기품에서 느껴지듯 송회장의 언변은 화형을 조용히 그리고 무겁게 옥죄어 온다. 따라서 옆자리의 여진은 좌불안석이다. 어머니 송회장이 의도하는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하기에 화형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엄마..제발..”

“가만히 있거라..결국 네가 저지른 일이 아니냐, 어쩌면 화형군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일이야.”

“저..말씀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해보게 어쨌든 오늘 자리는 자네의 의견을 들어보는 자리이니.”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가 피해자라는 말씀은 당치 않습니다. 따님 여진씨는 불륜을 알고도 저지르는 그런 가벼운 성정이 아닙니다. 따님이니 잘 아시리라 여기고 다음 말씀으로 잇겠습니다. 진이와 린이가 저와 같은 학교,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성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사이기도 했습니다.”

“....알고 있네..여진이 이 아이에게 얘기 들었네.”

“친구의 어머니로 만난 여진씨와 이렇게 관계가 발전한 이유를 대라시면 저도 정확하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찌 지금의 저를 자각해 보니 이미 돌이키기가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책임을 따지자면 제게 있다고 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다만 저는 진심이란 걸 말씀드립니다. 여진씨도 같을 거라 믿고요..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세상에 내놓고 어쩌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여진씨나 진이나 린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흠..”

송회장은 진중하게 말하는 화형이 안타까웠다. 지금의 상황만 아니라면 진이나 진과 짝을 지워도 좋을 그건 인품을 가진 아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더욱 자세히 화형을 살피게 되는 송회장이다. 준수 하지만 평범한 인상을 주는 화형의 얼굴에 어렴풋이 익숙한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송회장이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

“엄마?..”

잠시 공상에 빠진 송회장은 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린다. 송회장의 머리에 떠오른 얼굴은 바로 여진의.. 바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생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주 닮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말투와 여진을 배려하며 자신을 당당히 내세우는 모습 그리고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끌리는 남자의 매력등이 몇 년의 세월이 더해지면 송회장 자신의 남자였던 여진의 생부와 동질의 느낌을 주리란 걸 송회장은 느낀 것이다.

이러니 여진이 화형에게 정신없이 빠져든 것이리라..그건 핏속에 흐르는 그리움의 표출이 유전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그럼 앞으론.. 어찌할 요량인가..”

송회장의 목소리가 잔잔히 떨려온다. 순간 화형을 여진에게서 떼어 놓기가 선뜻 내켜지지 않아졌다. 당초의 마음먹음이 변한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송회장도 정의치 못할 일이다.

그러니 차마 하나뿐인 딸 여진에게 모진 일을 강요하지 못하겠다. 지금의 사위인 강의원과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 애뜻한 딸이다. 지금만 같으면 그런 말도 안되는 정략결혼 따위는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송회장의 한 켠 마음이 아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여진씨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정의할 마땅한 단어를 찾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진씨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저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언부언 하며 변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의 이목이 저를 비난하고 그 어떤 불이익이 따라와도 저는 여진씨를 배신하거나 외롭게 하지 않을 겁니다.”

“................”

“.......고마워요..흑..엄마..제발..”

“그만..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네 앞에 선 사내가 아니냐..그렇게 여자가 나서는거아니다.”

“.....네.”

송회장은 큰소리로 말하지는 않지만 단호하게 말하는 화형에게서 남자의 품성을 느낄수 있었다. 딸 여진이 이토록 어린아이에게 푹 빠져버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예상을 했었다. 화형을 직접 만나보니 그 이유가 있었다. 여리고 풋풋한 외모는 모성애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단호하고 당당한 면은 여진이 기대어 의지할 수 있는 남성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고백을 했었다. 자신이 평생 처음으로 뜨겁도록 강한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화형이란 아이와 꼭 함께 하고 싶은 이유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섹스라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숨기지 않고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송회장은 살짝 호기심이 들었다. 중학생인 화형의 나이에 비추어 보자면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섹스의 테크닉이 그리 현란하거나 능수능란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외모를 보자면 곱상한 얼굴에 그리 몸집이 크지도 않다. 해서 판단하기에 성적 능력이 무슨 종마나 물개에 비유할 만큼 대단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그런 이유로 여진의 말에 쉽사리 공감이 가지 않는 송회장이다. 그러니 화형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아함의 눈빛이 섞일 수밖에 없다.

“흠..자네의 말은 내 알아 들었으니 그만 하기로 하고..여진이 너는 어떠냐.. 여기 이 아이와 결혼이라도 하려느냐?”

“...................”

“어머니..아니 엄마 저 사실대로 얘기할게요. 그러니 무조건 반대나 야단치지 마시고 우선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세요..화형도 마찬가지야..일단 내 말을 들어줘.”

“네..그럴게요 편하게 말해요..제게 부담을 가지지는 말아요.”

“고마워..화형.”

“그래 어서 네 생각을 한 번 들어보자..”

송여진은 화형과 눈을 한 번 맞추고는 송회장을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듯 털어놓기 시작한다.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생각해 머릿속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했다. 자신의 입장과 어머니 송회장을 향한 원망과 애뜻함이 혼재된 복잡한 속내를 차분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진이 린이 친구로 만났죠..그저 아이들이 하도 말끝마다 화형을 입에 달길래 맛있는 밥이나 한번 먹여주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사무실로 부른 게 첫 만남이었어요.”

잠시 숨을 고른 여진은 화형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얼마 전의 기억이지만 벌써 수 년은 지난 듯 아련히 떠오른다. 그렇게 화형은 여진의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딸의 미소를 보게 된 송회장은 심장이 떨려 옴을 느낀다. 저런 미소를 여진에게서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희미하다. 쌍둥이들의 생부와 강제로 여진을 떼어 놓고 지금의 강의원과 결혼을 시키려 여진에게 패악과 드잡이를 펼친 그때 이후로는 아예 볼 수 없었던 딸의 고운 미소였다. 그러니 송회장의 가슴은 딸에 대한 미안함의 회한으로 가슴이 떨리고 또 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발을 삐끗 했어요..넘어지는 절 화형이 붙잡았지요..근데..그런데 화형의 손길이 마치 불덩이 같았어요..마치 달궈진 집게가 족쇄처럼 나를 채워 버린 거예요.”

“그랬어요?”

“응, 그랬어..”

“그 후론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어요.. 막무가내로 새벽 수영을 강요하듯 하자고 청했어요..그리곤 강습을 핑계로 화형에게 스킨쉽을..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아예 내 몸을 이..사람에게 던져 버린 거예요.. 그리곤 방학을 하고 바로 합..방을 했어요..”

간신히 말을 마치고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마는 여진이다. 어머니 송회장에게 속마음을 털어 넣으며 고민을 상담한지가 언제던가..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옛일이다.

그러나 화형의 일이기에 부끄러워도 참아가며 끝가지 말할 수 있었다. 사랑은 부끄러움도 여진은 뻔뻔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

“하아..네가 이제 아예 부끄러움도 염치도 모두 잃어 버렸구나..에미에게 그리 당당하다니.”

“죄송해요..”

“그래 어쩔 셈이냐..”

“...저.. 어쩔 생각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어차피 강서방..강의원이랑은 서로 포장일 뿐이잖아요.. 그 사람도 이미 밖에 외방 자식을 본 처지고 이미 집에 발길을 끊은지 오래에요..”

이미 딸의 가정형편은 자세히 알고 있는 송회장이다. 그 개도 안 물어갈 사위라는 인사는 가정을 포기하고 밖으로 겉 돈지 오래다. 딸아이는 모르지만 외방자식이 한 여자에게서만 본 것도 아니다. 남부끄럽게 씨앗기리 서로 앞자리를 탐해 활극에 가까운 난투극을 벌인 일도 진작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여진은 자기가 얘기를 해서 알고 있는 줄 알지만 송회장은 여진이 결혼하기 전부터 강의원에게 감시하는 사람을 붙였었다.

그 당시 가업이 대기업으로 발돋음 하려는 중요한 시기였다. 송회장은 너무도 귀하고 애뜻한 단 하나뿐인 자식이었지만 정략혼을 택했다. 그 결과가 산산조각난 사기그릇을 보자기에 싼듯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진의 고백을 듣는 송회장도 얹힌듯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리고 우린 결코 서로에게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에요.. 난 그저 화형의 그늘에 들어 있기만 하면 되요.. 화형은 그냥 자유롭게 살아가고 나는 그 그늘 한켠에서 자리잡고 쉴수 있으면 되요..”

“여진씨..그런.”

“하아.. 너 정녕 후회를 하지 않겠느냐?”

“.....................”

“그러면서 무슨...”

“방법이 이거밖엔 없으니까요...이혼하고 여기 화형과 결혼이라도 할까요? 안돼죠? 그렇지만 전 절대로 화형과 떨어질순 없어요..그것만은 바뀔 수 없어요..”

“..................”

두 눈에 인광이 번뜩이듯 강하게 나오는 여진을 보며 송회장은 현기증을 느꼈다. 여진은 이미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강제로 말려질 일도 아니겠지만 만일 자신이 개입한다면 어디러 어떻게 튈지 모르는 여진이다. 그 옛날 여리기만 하던 시절의 딸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 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이젠 그걸 인정하게 된 송회장이다.

“그러다 만일 진이나 린이가 여기 화형군에게 빠져버리면 어쩔테냐.. 에미와 딸은 꼭 닮는다고 하질 않느냐..네가 이리 정신없이 빠져드는걸 보면 그 아이들도 장담할 수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도 할 수없는 일이에요..”

“여진씨!!!...”

“너!!!......”

폭탄같은 여진의 선언에 세 사람모두 석고상이 되버린듯 굳어 버렸다. 가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다. 송회장은 비록 자신과 여진 그리고 쌍둥이들 모계로 이어지는 결손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으나, 그 근본은 세상 어디와도 비교해 뒤지지 않는 대단한 가문의 후예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근본이 흔들릴 만한 충격이 여진을 통해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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