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9)

"허..허억!! 제..제발 살려.."

퍼억!!

현석은 두려운 눈빛으로 애걸하던 대식파 조직원 중 마지막으로 남은 녀석의 머리통을 가차 없이 날려버렸다. 

"뭐야. 벌써 청소 끝난 거야?"

현석이 눈을 희번뜩 치뜨며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시선을 받은 상대편 조직원들은 기겁을 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1 대 수십. 현석이 그 스코어를 1 대 0으로 바꾸어버리는 데는 불과 몇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현석의 무력은 압도적인 것이었고, 지금 그의 주위로는 그 누구도 얼씬하려들지 않고 있었다. 

과거의 태현파 조직원들과 강재가 이끌고 온 남자들의 싸움이 시작된지도 어언 20여 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싸움의 양상은 강재의 부하들의 압도적 유리에서 현석과 17명의 과거 태현파 행동대장들의 활약으로 서서히 태현파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다들 30후반이 넘은데다 손을 씻은지 8년이 지났음에도 왕년의 실력은 어디 가지들 않았던 것이다. 

한편 잔혹한 광경이 펼쳐진 제3부두의 어느 컨테이너 뒷편, 한 명의 중년 남자가 떨리는 눈빛으로 싸움의 정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윤수. 태현의 의형이자 갈매기파의 보스. 그리고 길수와 우철을 함정에 빠트리는데 협력한 인물 중 하나인 남자였다.

"이 새꺄! 일로 안 와?!!"

현석의 고함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윤수에게로까지 들려왔다. 윤수는 그 고함소리가 마치 자신에게로 향한 것이기라도 한 듯 몸을 움찔 떨었다. 윤수의 눈에 비춰진 현석은 강재의 부하들을 무식한 힘으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의 주먹질에 수도 없이 많은 남자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져간다. 윤수가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명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일명 쓰리박이라 불리는 3형제 중 맏이. 그는 정확한 급소 가격으로 깔끔하게 상대를 처리하고 있었다. 윤수는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윤수. 태현 아우와 함께 했던 시절은 정말로 즐거웠었다. 이제는 적이 된 저들과도 정말로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적......"

어째서 적이 되어버린 것일까. 윤수는 괴로운 얼굴로 이마를 차가운 컨테이너 벽에 쿵, 쿵, 박았다. 적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자신 때문이다. 한국 건달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김형필의 야욕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해 그에게 무릎을 꿇었으니까.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형필파와 손잡은 대식파는 너무나도 손쉽게 부산에 나와바리를 넓혀갔고, 자신은 그에 점점 떠밀려 원래 자신의 텃밭이었던 해운대만 근근이 지키던 실정이었으니까.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하하..하......"

나지막이 웃음소리를 흘리는 윤수.

'어쩔 수 없었다고...?'

윤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김형필이 커졌다 하더라도 길수와 우철만큼은 끝까지 버텨내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댈 수 없었다. 길수와 우철이 태현 아우에게 아낌을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은 태현 아우에게 존중을 받았으니까. 정말로 별볼일 없던 자신을 태현 아우는 그렇게나 극진히 대우해주었으니까. 

벌써 20년은 지난 일이었다. 윤수는 태현이 명태파를 들어엎을 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윤수는 그 무렵 아직 풋내기 꼬붕이었던 태현의 가능성을 제법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그의 주먹 실력을 통해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었고, 자신의 나와바리를 서울로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세력이 필요했었다. 그때 때마침 태현과 연이 맞닿게 되었고, 명태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는 태현에게 부하 몇 명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도움이었다. 실제로 윤수의 도움은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태현은 윤수의 그 도움을 은혜로 생각하고 그 뒤로도 주욱 윤수를 극진히 대해준 것이다. 

'태현 아우에게 은혜를 입은 것은 오히려 나다...'

윤수는 괴로운 얼굴로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그랬는데......어째서 나는......'

"크흑..."

...이런 식으로 그를 배신한 것일까. 윤수는 자신의 선택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태현 아우가 은퇴했을 때 자신도 손을 씻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하지만 자신은 십여 년간 누렸던 부귀영화를 포기하지 못했었고, 결국에는 여기까지 왔다.

"흐으...크흑..."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윤수. 솔직히 정말로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태현 아우가 조금만...조금만 더 빨리. 어차피 저렇게 나타날 것, 조금만 더 빨리 돌아와주었더라면......

"......!"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싸움판을 쳐다보는 윤수의 눈에 자신과는 반대편 쪽의, 현석의 저 뒤쪽에서 사시미칼을 꺼내드는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보여왔다. 윤수는 설마하는 얼굴로 서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윤수의 발걸음과 거의 동시에, 마스크를 쓴 남자가 사시미를 두 손으로 꽉 잡고 현석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설마...!"

그것을 본 순간, 윤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현석 아우는 이쪽을 보고 있어서 마스크 남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윤수는 미친 듯이 현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현석과 윤수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마스크 남자와 현석의 거리도 급격히 줄어든다. 

"윤수...형님?"

자신을 향해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는 윤수의 존재를 현석이 깨달았다. 현석은 처음엔 반가운 얼굴이었다가 곧 어째서 그가 이런 곳에 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이어서는 윤수가 왜 저리 급박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런 현석을 향해 윤수가 기를 쓰고 외쳤다. 

"현석 아우! 피하게!!"

"예?"

어리둥절한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는 현석. 윤수에게로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현석은 자신을 향하는 칼날을 눈치 챌 여유가 없었다. 이제 윤수와 현석의 거리는 불과 3여 미터. 마스크 남자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비켜서란 말이야...!!"

외마디 고함소릴 내지르는 윤수. 현석은 당황한 얼굴로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푸욱...!!

"어, 어?"

윤수는 있는 힘껏 현석을 옆으로 밀쳤고, 몇 걸음 옆으로 밀려난 현석은 놀란 얼굴로 윤수를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왜 윤수 형님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지?

"이, 이런 씨발!!"

현석은 너무나 놀랐기에, 윤수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도망을 친 후에야 윤수의 가슴에 박혀있는 사시미를 볼 수 있었다. 

"......!"

급격히 커지는 현석의 눈동자. 서서히 윤수가 허물어진다. 

"혀, ...윤수 형님!"

현석은 소스라칠 듯이 놀란 얼굴로 급히 윤수를 부여잡았다. 

"크..으..윽...현석...아우, 윽...!"

윤수의 하얀 와이셔츠에 붉은 핏물이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이 정도였나? 난 너를 좀 더 높이 평가했다. 내 생각을 틀린 것으로 만들지 마라."

쉬싯, 퍼억!

"커헉!"

다시 강재의 머리가 돌아간다. 털썩, 거친 땅바닥에 널부러지는 강재. 제것이 아닌마냥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목을 힘겹게 돌려 태현을 올려다보는 강재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강재는 자신이 지금 귀신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어나라."

태현이 말했다. 강재는 마치 그 음성에 이끌리듯 흐느적, 흐느적 몸을 일으켰다. 태현은 가만히 강재를 응시하고 있었고, 강재는 마치 죽은 자의 그것을 바라보는 듯한 태현의 눈빛에 몸서리를 쳤다. 

"흐아악!!"

전신을 에워싸는 죽음의 느낌에 몸부림 치듯 태현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 강재. 수백만 번을 휘둘렀던 주먹은 몸에 완전히 녹아있었고, 두려움을 거부하는 발악은 아직도 여전히 강재의 주먹에 스피드를 실어주었다. 아까 전 태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주먹이었다. 그러나,

스스슷...

인영을 그리며 강재의 주먹을 스쳐지나친 태현은 어느새 강재의 뒷편에 서 있었다. 

꽈악...

태현은 강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커흑!"

강재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다는 것까지 완벽히 알고 있는 태현의 손길은 너무나도 쉽게 강재가 태현에게로 끌려가게 만들었다. 태현은 강재의 귓가에 대고 스산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널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퍽!

주먹의 너클파트로 강재의 인중을 약간 비켜난 곳을 찍어버리는 태현. 의도적으로 태현이 급소를 피해서 쳤기에 강재는 간신히 의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강재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에는 이빨 두 개가 섞여 있었다. 

"가서.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라."

딱딱딱딱...

지금은 여름이고, 비록 비가 내리나 춥지 않은 날씨였다. 그럼에도 강재는 이빨을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무엇을 보게 될지를 말해라."

또다시 들려오는 그의 음성. 강재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웠다.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잘 들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정태현을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강재는 형필이 했던 말의 의미를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사신(死神). 강재는 이 남자가 왜 그리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강재의 뒷덜미를 곤두서게 만드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길수의 몫은 너에게 받겠다."

짧게 끝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통은 차라리 의식을 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우둑, 빠각, 빠드득...!!

뼈가 나가고, 부러지며, 으스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소리는 강재가 내지른 비명에 삽시간에 묻혀버렸다.

"크아..아아악......!!"

누구가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부두의 컨테이너는 벽을 만들고 있었고, 강재의 비명은 메아리를 만들며 모든 이의 움직임을 정지시킨다. 소란스럽던 부두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이곳의 모든 눈동자가 태현과 강재를 향했다. 

"아직 발목이 남았다."

싸늘한 목소리.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마치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함이 묻어나는 몸짓으로 앞으로 기어가던 강재의 움직임이 움찔 멈추었다. 어깨가 탈골되고 팔꿈치가 기형적으로 꺾여 팔이 너덜거리며, 옆구리에는 마치 조그만 혹이 난 것처럼 뒤틀린 갈비뼈가 살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강재의 이런 비참한 몰골을 응시하는 태현의 눈동자에는 티끌만큼의 동정심도 묻어있지 않았다. 동공이 떨어져 나갈듯이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서서히 태현을 돌아보는 강재. 태현의 발이 서서히 들렸다. 

콰직!!

"흐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강재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태현은 비뚤어진 강재의 발목에서 시선을 돌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우철이의 몫은 김형필에게 빚으로 남겨두겠다."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두 아우를 향해 돌렸다.

주룩, 주룩...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흐..윽......"

피묻은 손이 힘겹게 올라가 태현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빗물이 고인 땅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태현 아우...울지..말게..."

태현이 강재를 쓰러뜨린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태현은 강재를 들쳐업고 도망치는 상대편 조직원들을 굳이 뒤쫓지 않았고, 명일을 비롯한 몇 명의 간부가 길수와 우철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형니임...으흐..윽......"

털썩 무릎 꿇은 채 윤수를 품에 끌어안고 태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윤수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지어졌다.

"정말로...정말로 오랜만에 자네, 으윽..흐...자네의 얼굴을 보는구만......"

태현은 슬픔으로 일그린 얼굴을 그저 가로젓기만 할 뿐이다. 고통으로 가득한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윤수가 서글픈 음성으로 태현에게 말했다. 

"왜...왜 이제야...나타났는가..."

"형님...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태현은 고개를 푸욱 수그리며 가늘게 떨리는 어깨로 흐느꼈다. 그런 태현의 손을 윤수가 이미 다 사라진 힘을 겨우겨우 끌어모아 꽈악 잡았다. 

"자네가...사라진 이곳은...너무나 혼란스럽네..."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며 윤수를 바라보는 태현. 윤수가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자네가 있었을 때와는, ...너무..흐으...너무나 달라졌어. ...지금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네. 자네는 전쟁을 하지...않고도 우리가 공존할 수 있게...해주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공존이란 존재하지 않네. 후우, 으윽...흐...살아남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만 하네. ...자네는 약을 금지했었지만...지금은 뒷..골목에 마약 중독자가 넘쳐나네. 후우..후우..윽...흐...자네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자를...구제해주도록 했지만, ...지금의 건달들은 오히려 빚을 갚지 못한...사람의 장기를 훔쳐내고 있네. ...자네는 아우를 친동생..처럼..형님을..친형처럼 대했지만...지금 이곳에..의리란 사라졌네. 흐으, 흐으, 윽, 크..흐...자네는 야쿠자와, ...삼합회로부터 이땅을...지켜내었지만, 으...윽..으...김형필은 오히려 그들을 끌어..윽,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

"......"

애타는 하소연이었다. 태현의 눈에서는 슬픔으로 얼룩진 눈물만이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다. 윤수가 다시 한 번 태현의 손을 애타게 부여잡는다.

"왜...왜...이제야...나타났는가......"

빗물이 눈물을 씻어주었지만, 뭔가에 데인 듯이 뜨거운 눈동자는 떨어져 내리는 빗물보다 더 빨리...계속해서 눈물을 흘려내었고. 태현은 눈을 꽈악 감으며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리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윤수의 손을 그 위로 다시 꽈악 잡는다. 태현은 자꾸만 복받쳐 오르려 하는 속을 한숨을 내쉬어 진정시키며, 하지만 조금도 진정되지 않은 목메인 음성으로 윤수에게 말했다. 

"형님. 일단은 병원으로 가십시다. 일단 병원으로 가셔서 응급치료부터 받읍시다."

윤수의 고개가 희미하게 가로저어졌다.

"..말했...잖은가. 이미...늦었..어..."

"형니임!"

태현이 애타는 목소리로 답답한 속을 털어내었다. 하지만 윤수는 그저 미약한 미소만 입가에 지은 채 태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태현..아우. 물어볼 것이..예전부터...자네..에게, 물어볼..으윽, 으..것이 있었네..."

태현도 직감하고 있었다. 사시미는 급소에 정확히 박혀 있었고, 이미 윤수가 흘려낸 피의 양은 너무나 많았다. 시간이 촉박함을 느꼈을까, 태현이 다급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말씀하세요. 무엇이든 답해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서서히 윤수의 입이 열리고, 태현은 울먹이는 얼굴로 윤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는...어째서..나에게 그렇게..잘..해주었나. 난...자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흐으..윽...!"

윤수의 물음에 태현의 고개가 힘겹게 수그려졌다.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하는 태현. 윤수는 그런 태현의 손을 힘주어 잡음으로써 자신에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태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목이 너무나 메여와서,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으면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것 같다. 

"으..윽..."

그때 윤수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흘리고, 그 소리에 태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황망한 눈동자로 윤수를 바라보는 태현. 윤수는 그저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눈빛을 태현에게 간곡히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태현의 서글픔을 억누른 음성이 힘겹게...힘겹게 흘러나왔다. 

"처음..이었습니다. 저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흐윽, ...윤수 형님이 처음이었어요. ...으흐..으윽...천애고아로 태어나...아무런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던 절...처음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이...형님이세요......"

"...태현 아우......"

"...아버지. ...저에게 형님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흐윽, 형님...형님께서 저와 아내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다고..흔쾌히 허락해주셨을 때...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형님. ...형님은 애초부터..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실 필요가 없으셨어요. 그냥...그냥 건강하게 계시면...저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흐윽...!"

감정에 복받쳐 윤수를 와락 끌어안는 태현. 서글픈 울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어흐..윽...!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니요...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으흐흐흑......" 

8년만에 만났는데, 오랜 해후를 나눌 시간도 없이 다시 헤어져야만 한다. ...영원히. 태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태현에게, 이제 서서히 평온해져가는 윤수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그의 얼굴에서 더 이상 고통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고맙네. 자네를 만났던 것은...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태현을 바라보는 윤수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태현 아우...날..용서해주게......"

태현의 팔에 안겨있던 윤수의 머리가 천천히 옆으로 꺾였다. 

"...형님?"

태현이 믿을 수 없다는, 믿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급히 윤수를 흔들었다. 

"형님! ...형님? 형님!"

"......"

그러나 윤수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태현의 얼굴이 급격히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제발 좀 깨어나라는 듯이 윤수의 몸을 마구 흔드는 태현. 

"으흐흐흑...! 형님! 형님 제발..제발! 흐윽..."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게 청각이라고 했다. 물론 태현이 지금 그런 사실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태현은 아직 못다한 말들을 윤수에게 흐느끼며 시간에 쫓기듯 풀어놓았다.

"형님..형님 감사합니다...! 우리 현석이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그렇게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흐윽, 죄송합니다 형님...형님이 그렇게 힘드신 것 몰라드려셔 죄송합니다..으흐..으윽...감사합니다 형님...절..절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언제나...언제나 제 편을 들어주셔서...저를 지지해주셔서...저의 의지가 되어주셔서...제가 형님을 필요로 할 때 언제나 같은 곳에 계셔주셔서...으흐흐흑..."

수많은 부하가 눈시울을 붉히며 지켜보는 가운데, 태현은 목놓아 울었다. 

"...형님...으흐..흐흐흑...형님...정말로...정말로..감사합니다...으흐흐흐..윽......"

지나가는 비였을까. 서서히 하늘이 개이며 먹구름을 헤치고 드러난 달빛이 고개 숙여 울고 있는 태현을 은색으로 물들였다. 

새벽의 검푸른빛 공기를 타고 하얀 담배 연기가 불투명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후우-우..."

담배가 피워올리던 연기는 태현의 입술이 뱉어낸 뽀얀 바람에 산산히 흩어졌다. 현석의 처갓집 대문 앞. 태현이 본주인에게 페라리를 돌려줬기에 그곳에는 태현의 차인 하얀색 아반떼가 세워져 있었다. 태현은 지금 아반떼의 본네트에 엉덩이를 기댄 채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줄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이제는 좀 가라앉았지만 태현의 눈은 아직도 부어있었고, 그것은 옆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있는 현석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태현. 그렇게나 많이 울었음에도 또다시 태현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런 태현의 눈동자를 바라본 현석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형님. ...죄송합니다."

현석의 말에 아우를 흘깃 바라본 태현이 눈에서 눈물을 지우며 씁쓸한 웃음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해라 현석아. 내가 헤아리기 시작한 때부터도 벌써 열세 번째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 윤수 형님은 나에게도 형님이었지만, 너에게도 형님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또 한 번의 현석의 사과에 태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뒤로 꺾어 미명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가늘게 내뱉은 연기로 하늘을 뿌옇게 가린다.

"...담배는 왜 끊은 거냐."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들려온 태현의 물음에 현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쑥쓰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집사람이 끊으라고..해서 말입니다."

태현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떠올랐다. 태현은 빙긋 웃으며 현석을 쳐다보았고, 현석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아우를 보며 태현은 장난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해야 할 말은 죄송하다가 아니라 고맙다야."

"...예?"

"제수씨 같이 좋은 사람, 나 아니면 네가 무슨 수로 만났겠냐."

"아...하핫, 고맙습니다. 형님."

현석도 농담조의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태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다시 끊어졌다. 

"...형님."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남자의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고 가로등도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현석의 부름에도 태현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태현의 시선은 그저 계속해서 점점 또렷한 파란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만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내고 싶다."

"......"

조용한 태현의 음성에 뭔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열렸던 현석의 입술이 도로 꾹 닫혔다. '쓰읍, 후-.' 담배를 빨아들였다 내뱉는 태현. 그는 뒷말을 잇지 않았고, 그래서 두 남자의 대화는 다시 끊어져버렸다.

툭...

필터에 닿을 때까지 담배를 다 태운 태현은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곤 신발 끝으로 문질러 남은 불똥을 껐다. 두 손으로 본네트를 짚으며 몸을 뒤로 기울여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현. 그의 입술에서 한숨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현석은 그저 태현의 옆을 지키며 묵묵히 서있을 뿐이다. 태현은 엄지 손톱으로 눈썹을 몇 번 긁적이곤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10시에 부산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다른 조직에 이 사실을 알려라."

현석은 태현이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부산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는 윤수의 빈소가 마련되어있고, 길수와 우철을 태현은 서울로 데려오지 않았다. 현석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예. 형님."

피곤에 물든 태현의 얼굴은 10년은 더 늙어보이는 듯했다. 다시 하나의 담배를 입술에 무는 태현. 

...칙..!...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숙인 채 담배에 불을 붙이는 태현의 눈동자는 희미한 서글픔으로 물들어있었다. 

"으..응..."

유리는 눈앞이 빨갛게 변한 것을 느꼈다. 벌써 아침인 걸까. 어제는 새벽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안절부절 못했었다. 죽을 만큼 아프다고 했는데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두지 말라고 화를 내며 말했는데도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기에, 유리는 지금 눈꺼풀을 뜨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다. 정신은 몽롱하고, 눈앞은 빨갛게 밝아져서 잠을 방해한다. 마치 햇빛을 막으려는 듯이 이불을 끄집어 올리는 유리. 

"......?"

그런데 그런 유리의 손길이 도중에 서서히 정지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왔기 때문이었다. 따스하고...부드럽다. 너무나도 상냥한 손길......

유리는 서서히 눈을 떴다. 시야를 방해하는 따가운 햇빛에 아미를 찌푸리는 유리. 

"아빠...?"

그러나 대답 없는 손길은 그저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만 쓸어넘겨줄 뿐이다. 유리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지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은 그런 유리의 손을 가만히 치우곤 그녀의 눈을 도로 살며시 감겨주었다. 

"...좀 더 자렴...아직 일곱시밖에 안 됐어."

익숙한 목소리.

"아빠...!"

유리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햇빛 때문에 아미는 찌푸린 채 벌떡 몸을 일으켜 태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며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어 햇빛을 피한다. 그런 유리를 태현의 너른 팔이 꼬옥 감싸 안는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린 채 한품에 쏙 들어오는 딸의 온기를 느끼는 태현.

"잘 있었어? 아픈데는 괜찮아졌니...?"

아빠의 상냥한 음성을 들으며 유리는 천천히 아빠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햇빛에 익숙해져서 아빠의 모습이 똑바로 보인다. 유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어물며 아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태현은 유리가 갑자기 눈꼬리를 올리자 금세 당황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고, 유리는 잠시동안 아빠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아빠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편 태현은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는 유리의 모습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멍하니 앉아 유리의 시선에 온몸을 샅샅이 조사당했다. 

"......어제 어디 갔다왔어?"

아빠의 몸에서 어떤 상처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점점 눈동자를 걱정으로 물들였던 유리가 다소간의 안도섞인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태현은 마음 속의 모든 것을 그 투명함에 비춰버릴 듯한 유리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자 괜히 뭔가가 찔려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좀...누구 만나고 왔어."

"그래?"

자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바라보지 못하는 아빠를 애틋함을 숨긴 눈동자에 차가움을 실으며 바라보는 유리. 태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유리의 목소리에 그제야 슬며시 시선을 움직여 유리를 바라보았다. 

"......!"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눈동자는 너무나 싸늘하다. 그렇게 태현이 유리의 시선에 얼어붙었을 때, 유리가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어?"

"아..저어, 유리야..."

"나 죽을 만큼 아프다고 했잖아."

태현은 기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미안해..."

기운 없는 목소리. 유리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왠지 안타깝게 느껴져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거짓말이었어."

"응...?"

유리는 입술을 꼭 씹어물며 아빠를 쳐다봤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프다고 한 거...거짓말이었어.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했던 거였어."

"유리야......"

태현이 살며시 유리의 볼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아빠의 그런 부드러운 손길에도 유리는 아빠에게 어여쁜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픈 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근데, 차라리 몸이 아팠으면 좋았을 뻔했어."

"......?"

"마음이 아픈 것보다 몸이 아픈 게 차라리 더 나으니까."

"유리야..."

애달픈 음성으로 딸을 꼬옥 끌어안는 태현. 유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아빠의 등을 꼭 끌어잡았다. 

"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 않아...?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야...?"

유리의 간절한 음성에 태현은 두 눈을 꽈악 내려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아니야. 세상에서 유리를 제일 사랑해...아빠에게 유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그러면...그러면 나와 함께 있어줘...날 혼자 두지 말아줘..."

유리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간청에 태현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대신 그의 눈동자는 급격히 눈물로 얼룩졌다. 태현은 그저 한참동안 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로 쓰다듬어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