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9)

"정태현씨! 방금 전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정말로 정태현씨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나요?"

"혹 언론에는 밝힐 수 없는 어떠한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것 아닙니까??"

다혈질 남자 패거리가 물러나자마자 기자들은 곧바로 카메라를 들이밀며 태현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가만히 취재진을 쳐다보는 태현. 그의 눈빛은 피로감에 젖어있었다. 

...칙!...치익...!......

천천히 담배를 한대 피워무는 태현.

"후우~우......"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들에게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태현의 모습에 질문세례를 마구 퍼붓던 기자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기자들의 얼굴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태현이 뿜어내는,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오오라에 위축된 것이었다. 태현은 눈썹을 긁적이곤 현석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현석아. 기자님들 나가신단다."

"예."

"소란 때문에 식사가 방해되었으니, 손님들께는 돈받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주방을 통해 뒷문으로 빠져나가버렸고, 현석은 손님을 대할 때의 그 싹싹함은 어디로 갔는지 과거 태현파 넘버2의 포스를 내뿜으며 양팔로 기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영업에 지장이 되니, 그만 물러나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거기에 서려있는 위압감은 아무리 간은 집에 놔두고 출근하는 기자들이라고 해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것이었다. 현석의 무지막지한 힘에 떠밀려, 그리고 그의 살 떨리는 위압감에 떠밀려 기자들은 주춤주춤 물러서다 뭉텅이로 레스토랑에서 추방당했다. 한편 뒷문으로 빠져나온 태현은 벽에 등을 천천히 기대며 담배 연기를 폐속 깊숙히 빨아들였다 한참을 길게 뿜어내었다. 기분이 왠지 엉망이었다. 태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 녀석들. 말했던 시간보다 늦게 오는 유리... 톡, 톡, 담뱃재를 털곤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아들이는 태현. 어느새 오랜만의 얼굴들을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은 사라져 있었고, 그는 오직 유리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리가 조금 전의 광경을 보지 못했으니. 태현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유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이라도 해볼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그때, 태현의 귓가로 가게 안에서 시끄러운 환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이뻐~!!>

태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담배를 튕겨버리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레스토랑 안은 시끌벅적하고 있었다. 태현의 눈에는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유리의 모습이 잡혔다. 순간 가슴이 덜컹하는 태현. 혹시 유리가 녀석들의 모습을 본 건 아닐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리의 얼굴은 밝았다.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던 유리는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곤 생긋 웃으며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유리는 아빠에게 다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근데 이 사람들 다 누구야?"

유리의 귀여운 미소와 사랑스런 인사에 '어, 다녀왔니?'하며 부드럽게 대답해준 태현은 그녀의 이어진 물음에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그러게......"

"흐응, 그래? 아빠도 모르는구나."

유리는 고개를 까닥이며 생긋 웃었다. 그러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아빠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근데 부탁할 거 있다는 게 뭐야?"

"아, 부탁?"

유리의 물음에 태현은 급히 현석에게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현석과 가희가 두 부녀에게로 다가온다. 유리는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저씨, 아줌마. 안녕."

"아..응. 그래."

"유리야 안녕~."

태현은 유리의 표정에서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뭔가 필요 이상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런 태현의 직감은 정확히 맞았다. 유리는 지금 억지로 쌩긋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을 보내고 혼자 가게로 들어왔던 유리. 처음엔 바글바글한 사람들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곧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 이 사람들이 전부 아빠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오늘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아무튼 저런 사람들이야 어찌되던 상관없다. 유리가 지금 미소를 억지로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얄미운 현석 아저씨와 가희 아줌마, 그리고 더 얄미운 아빠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부다 한통속이 되어서 자신에게 진실을 숨겨왔었다. 유리는 그게 너무 싫었다. 자신 같은 건 아빠의 과거를 알 자격도 없다는 것일까, 자신에겐 아빠를 이해해줄 이해심 같은 게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현석 아저씨는 자신의 기억에도 없는 오래 전부터 아빠의 동료였고, 가희 아줌마도 대략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쁜 사람들.'

유리는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아빠가 자신이 진실을 모르길 바란다면 철저히 모르는 척을 해주겠다. 하지만 유리는 그 대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빠가 모른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하루라도 빨리 아빠를 그런 세계에서 빼내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조금도 즐겁지 않지만 도로 어여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는 유리. 

"아, 저...부탁이 뭐냐하면 말이야."

현석이 입을 열었다. 유리는 고개를 까닥이며 궁금하단 표정을 지어주었고, 현석은 유리의 맑은 눈동자를 보니 왠지 가슴이 찔려서 슬그머니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하지만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자신을 외면해버린다. 그때 현명한 가희가 현석의 어려움을 눈치 채곤 짐짓 밝은 음성으로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미안한데...오늘 아줌마가 어디 외출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그런데, 우리 용우 좀 봐주면 안 될까?"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부탁한다는 게 그거야?"

유리는 가희에게 그렇게 되묻곤 태현을 쳐다보았다. 유리의 시선을 받은 태현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순간 움찔, 했다가 급히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말했다.

"어, 응. 미안해. 괜찮겠어?"

'수상해.'

유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며 방긋 웃었다.

"응. 알았어. 아줌마, 용우 걱정은 하지 말고 맘놓구 외출 갔다 오세요."

"어머~정말이니? 고마워라..."

"아..하하, 하하핫! 잘 됐군!"

기쁜 얼굴로 현석 아저씨를 쳐다보는 가희 아줌마. 아줌마에게 빙긋 웃어주곤 다행스런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는 현석 아저씨.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게 빤히 보이는 웃음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아빠.

"고마워 유리야."

정말로 수상했다. 겨우 용우 하나를 봐주는 것일 뿐인데 왜 세 사람이 몰려서 한마음으로 부탁을 해오는 걸까. 게다가 아까 봤던 검은 정장 사람들. 유리는 살며시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만히 가로젓는다.

"으으응~...아냐. 근데 아빠는?"

"어, 아빠? 아빠야 가게에서 계속 일해야지."

"그래? 흐응...그럼 아빠 오늘은 계속 가게에서 일하는 거야?"

태현은 눈짓만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물어오는 유리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에 차마 딸에게 눈을 맞춰줄 수 없는지 괜히 눈썹을 긁적이며 유리의 시선을 피했다. 

"아..응. 뭐, 그렇겠지."

"으응...그렇구나. 알겠어. 헤헤, 다행이야."

"으..응?"

태현은 의아한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았고, 유리는 방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귀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니...응...그냥 왠지 아빠가 딴데 안 가고 가게에 있는다니까 안심이 되어서. 헤헤, 이상하지? 여기가 배도 아니구, ...우린 벌써 집으로 돌아왔는데 말이야......"

"......!"

태현의 눈동자에 일순간 눈물이 스쳐지나갔다. 가슴이 아려온다. 이렇게 사랑스런 딸에게...이렇게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니 태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 도저히, 절대로 길수와 우철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니,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가야만 했다. 그것이 두 아우를 물리친 자신의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길수와 우철을 구해내어야만 했다. 지금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꼬옥 감싸 안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정심을 가장한 목소리로...하지만 딸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애타는 마음으로......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아무런 걱정도......"

따스한 아빠의 음성. 그래서 아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유리는 아빠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길수가 운영하는 강남의 한 대형 나이트클럽. 수일째 영업이 중단되어 있는 그곳의 입구는 수십 명의 검은 정장 차림 남자들이 홀에 이르기까지 부동자세로 늘어선 채 모시는 형님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고, S석에서는 태현을 중심으로 십수 명의 남자들이 정중한 자세로 서서 태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상이 현재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황이다."

8년만의 감격적인 해후는 빠르게 끝내고 태현은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정황들을 아우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형필이 녀석이 야심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혈질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태현은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현석이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들었지만 다혈질 남자가 손을 들어 그런 현석을 제지하며 자신이 직접 태현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칙..!... 

"쓰-읍...후우..우......"

희뿌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다혈질 남자를 조용히 부르는 태현. 

"...명일아."

"예, 형님."

형님의 부름에 다혈질 남자는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태현은 담배를 재떨이에 천천히 올려놓곤 그의 손을 꽈악 잡아주며 말했다.

"그때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나서 미안하다."

"......"

태현의 따뜻한 목소리에 명일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태현은 입을 꾸욱 다물며 단지 뜨거운 시선만으로 명일을 바라본다. 결국 명일의 고개가 푸욱 꺾였다. 그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말씀하지 마십시오..형님. 저희도 다..이해합니다. 단지...단지......"

털썩...!!

명일은 끝내 울음이 복받쳐 오르는지 입꼬리를 주욱 내린 채 무릎을 털썩 꿇으며 다리에 손을 올려 겨우 상체를 지탱하며 참을 수 없는 흐느낌을 터트렸다. 

"으흐흑...기다렸습니다...! 형님이...형님이 불러주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명일의 모습에 다른 건달들도 하나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태현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명일의 어깨를 힘껏 잡아주었다. 명일의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그의 사납던 얼굴은 애처롭게 바뀐 채 눈물 범벅이 되어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을 저 정도밖에 데리고 오지 못해서...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을 될 수 있는한 끌어모으려고 했지만...연락을 끊고 지낸 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태현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너도 손 씻은지 오래되었는데 그래도 날 위해서 저렇게나 많이 데리고 와주다니 고마울 뿐이다."

태현의 다정한 목소리에 명일은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닫으며 몇 번이나 광대뼈를 움찔거리다 결국 고개를 푹 수그려버렸다. 태현은 명일의 등을 턱턱 두드려주곤 다른 건달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영식이 철상이 상백이 성수."

태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이름이 불린 남자들은 울음을 겨우겨우 참는 얼굴로 허리를 깊숙히 숙인다. 

"...재준이 도식이 달영이......" 

하나하나 허리를 꺾어내리는 한시대를 풍미했던 주먹들. 태현은 모두 열여섯 명의 이름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우의 이름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현석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허리를 푹 숙이는 현석. 태현은 따뜻한 음성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형님...!!!"

한목소리로 뜨겁게 외치는 건달들. 태현은 명일의 어깨를 토닥여 일으키며 말했다. 어느새 태현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앞으로 2시간 40분 남았다. 가자."

"예, 형님!"

발걸음을 옮기는 태현. 그의 뒤로 18명의 주먹들이 뒤따른다. 몽글몽글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며, 태현이 내버려둔 재떨이 속 담배는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유리는 정말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쌔근쌔근 잠이 든 용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한 번 커튼을 살짝 젖혀 창문 밖을 내려다보는 유리. 골목길 모퉁이에는 가희 아줌마가 몸을 숨긴 채 빼꼼히 집의 대문을 감시하고 있었다. 유리의 눈동자가 살며시 가늘어졌다. 

'여보...너무..늦게 오지 마세요......'

자신과 같이 레스토랑을 나서며 현석 아저씨를 바라보던 가희 아줌마의 애틋한 눈빛이 생생히 기억났다. 유리는 그 눈빛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아빠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이었으니까. 게다가 아줌마는 자신과 용우를 데리고 아줌마의 친정으로 왔다. 유리는 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은 도망치게 하고 불을 뿜는 총구 앞으로 뛰어들던 아빠. 자신보곤 화장실로 숨으라고 하면서 자기는 테러범쪽으로 가려고 했던 아빠. 자신은 창고에 안전하게 숨어있게 하고 혼자서 위험한 곳으로 가버렸던 아빠. ...아빠는 항상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면 반드시 자신은 안전한 곳에 숨겨놓으려고 한다. 유리는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너무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가희 아줌마는 어디 외출할 데가 있다더니 저렇게 숨어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유리는 분명히 오늘 아빠와 현석 아저씨가 무슨 일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입술을 꼬옥 씹어물며 핸드폰을 꺼내었다. 

두근, 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제발 받길......'

유리는 레스토랑으로 전화했다. 잠시간 신호음이 들리고, 

"아빠..."

계속해서 신호음만 들려왔다. 한참동안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대고 있다 결국 서서히 팔을 늘어뜨리는 유리.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잠시 쉼호흡을 했다. 

'그렇지 않을 거야. 설마...난 겨우 오늘..아빠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설마 내가 그렇게나 운이 없는 애는 아닐 거야. 시험 칠 때도 모르는 걸 찍으면 항상 70프로는 맞았잖아?'

유리는 잠시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곤 핸드폰의 1번을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삐비비비빅, 삐비비비빅...>

부앙~드륵, 빠아아아아앙......

속도계는 이미 시속 220을 넘고 있었다. 

"형님. 전화왔습니다."

태현이 운전하고 있는 페라리 안에는 현석도 같이 타고 있었다. 

"대신 좀 받아라."

옛날에야 운전하면서 오만 짓을 다 했지만, 태현은 지난 수년간 유리를 뒤에 태우고 다닐 때의 습관이 몸에 베어버려 이제는 운전할 때는 운전에만 집중을 했다.

"예. 실례하겠습니다."

현석은 조심스런 손길로 태현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곤 염려스런 표정을 짓는 현석.

"형님. 유리입니다."

"......"

태현은 곤란한 얼굴로 눈썹을 긁적이곤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현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석은 휴대폰을 폴더를 열어 태현의 손 위에 올려주었고, 태현은 '드륵' 기어를 1단 내리고 전화를 받았다.

"응~유리니?"

<...아. 아빠......>

태현은 일부러 상냥한 목소리를 내었다.

"응~그래. 왜 전화했니?"

<아빠...나 너무 아파...어디야...? 가게에 전화하니까 안 받던데......>

가녀린 유리의 음성에 태현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았다.

"어, 어디니? 지금 누구랑 같이 있어?"

<지금...가희 아줌마...할머니 집이야......>

태현의 유리의 말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금 전에는 혹시나 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너무나 놀랬었다. 태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아빠가 지금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가희 아줌마한테 약 좀 사달라고 하고 쉬고 있어. 알았지?"

<......>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태현은 아프다는 유리에게 이렇게 밖에 말해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안타까웠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현에게 유리의 냉랭하게 돌변한 음성이 들려온다.

<가희 아줌마 외출했잖아. 아빠도 알고 있지 않아?>

"......!!"

'실수했다...!'

태현은 속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아참, 그..그랬지? 근데 유리야 어쩌지? 아빠 조금 멀리 있는데, 할머니한테 말해볼래? 많이 아파?"

<......죽을 만큼 아파.>

유리의 화난 음성에 태현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에게,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유리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말했었지? 아빠가 죽으면 나도 따라서 죽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혼자 두지마. ...삑, 뚜...뚜...뚜...>

유리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태현은 혼란스런 기분으로 휴대폰 폴더를 서서히 닫았다. 마치 유리의 말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죽을 만큼 아파.'

'내가 말했었지? 아빠가 죽으면 나도 따라서 죽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혼자 두지마.'

태현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얼룩졌다. 유리는 죽을 만큼 아프다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태현은 마음 같아서는 핸들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유리에게로 가서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태현의 눈에 도로 표지판이 비춰진다. <부산 287km> 

부아앙~드륵, 빠아아아앙......

태현은 이를 꽉 사려물며 악셀을 힘껏 밟았다.

'금세 갈게...아빠 금세 갈 테니까...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유리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며 먹구름이 태양빛을 가린다.

"형님. 애들 전부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형필은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부 몇 명이냐."

"고윤수의 갈매기파까지 합쳐서 전부 287명 입니다."

"음...그래. 수고했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는 형필. 그런 형필에게 젊은 남자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저..형님. 김장군께 제공받은 물건으로 애들을 무장시킬까요?"

형필은 피식 웃었다.

"내가 김장군과 친분을 트는 것은 고작 조폭 몇 마리 죽이자고 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굳이 총을 개입시켜서 경찰을 자극시킬 필요는 없다. 아니. 정태현을 자극시킬 필요가 없다. 녀석의 신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녀석이 총을 잡게 만들어서는 안 돼. 총을 든 그는 말 그대로 사신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젊은 남자는 실례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형필은 그런 젊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내가 지시한대로 실수 없이 잘 해야한다. 정태현만 노리되, 무슨 일이 있어도 유길수와 지우철을 내주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최소한 그 두 녀석은 그분께 선물로 드려야하니까. ...그리고. 잘 들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정태현을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의원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에 한 번 만나자고 하십니다."

형필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선거 자금이 많이 딸리는 모양이로군. 알겠다. 최대한 빠른 날짜를 잡아놓아라."

"예. 알겠습니다."

"나가봐."

형필은 젊은 남자가 나가고 나자 한숨을 천천히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정말로 시작되었군......"

형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대로 지지 않는 싸움이......'

얼굴에서 손이 서서히 치워지자, 숨겨져 있던 비릿한 웃음이 드러났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산항 제3부두. 마치 미로와 같이 늘어서 있는 화물 컨테이너는 부두를 외부와 완벽히 차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 가장 깊숙한 곳에, 백여 명의 남자들이 들어섰다. 

"길수..와 우철이...?"

일정치 않게 세워져 있는 가로등은 부두의 어두움을 밝히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현도 저 멀리 마치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의자에 묶여있는 길수와 우철을 바라보았다. 태현의 주먹이 꽈악 쥐인다. 

"김형필! 나와라!!"

태현이 버럭 고함질렀다. 

...나와라...와라...와라......

태현의 고함소리가 메아리를 만들며 부두의 정적을 일거에 깨트렸다. 메아리가 사라지자 다시 침묵에 잠기는 부두. 그리고, 하나둘 제각각 손에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든 남자들이 태현들의 주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복하고 있었군요."

컨테이너 벽 너머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남자들을 보며 현석이 이를 사려물며 말했다. 태현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백여 명의 태현파 조직원들은 3배에 가까운 남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는 태현. 그러다 그의 눈에 자신쪽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한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태현의 시선은 젊은 남자에게로 고정되었다. 

'저 녀석이다.'

태현은 단번에 저 젊은 남자가 이들을 통솔하고 있음을 눈치 채었다. 나이는 대략 20대 중후반. 180정도의 키에 잘 벼려진 검을 한자루 세워놓으면 저리 보일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도강재라고 합니다."

젊은 남자가 태현으로부터 대략 15m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먼저 입술을 열었다. 태현은 아무 말 없이 도강재라 자기를 소개한 젊은 남자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제가 모시는 분께서 한때 신세를 지셨던 분에 대한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예우입니다." 

젊은 남자가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편다. 서서히 들리는 그의 눈빛은 삽시간에 바뀌어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태현은 눈동자로 진득한 살기를 피워내는 강재를 보며 그가 간단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 

"김형필은 오지 않았나?"

"그분은 그리 한가하신 분이 아니다."

하긴 그 약삭빠른 녀석이 굳이 이런 곳까지 올 리가 없다. 태현은 씁쓸한 얼굴로 피식 웃었고, 강재는 정장 마이의 옷깃을 한 번 턱, 잡아내려 선을 정리하곤 말했다.

"긴말하지 않겠다. 바로 시작하지."

강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현에게로 짓쳐 달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되어 태현들을 포위하고 있던 3백여 명의 남자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와아아아아...!!!

순식간에 뒤엉키는 4백여 명의 남자들. 한편 태현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강재를 응시하며 자세를 잡곤 어깨를 가볍게 한 번 털어 긴장을 떨쳐내었다.

쉬싯!!

칼이 휘둘러지는 파공성이 찰나의 순간에 터져나왔다. 

"?!"

태현은 눈빛으로 쫓기도 어려울 만큼 경악스런 스피드의 강재의 주먹을 허리를 필사적으로 뒤틀어 가까스로 피해내었다. 

"......"

자신의 주먹을 피해낸 태현을 수초간 물끄러미 쳐다보는 강재. 태현은 강재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제법이군.' 내지는 '듣던 대로 꽤 하는 걸.'과 같은 말. 이건 주먹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뱉을 법한 그런 말이었다. 그러나 강재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해오지 않는다. 심지어 저 남자에게서는 실력 있는 주먹이라면 누구든 눈빛에서 뿜어내는 자신감 같은 것 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오로지 자신을 쓰러뜨리겠다는 의지. 그것 하나만 강재에게서 느껴질 뿐이었다. 

'차원이 다른 주먹이다.'

태현은 직감했다. 자신이 상대해본 주먹들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고 생각했던 그 현이란 이름의 중국인 남자보다도 한수, 어쩌면 두수 내지 세수 높은 상대다. 태현은 서서히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초점이 강재의 눈으로 집중되는 태현의 눈동자. 그러나 태현이 모든 집중력을 다 끌어올리기도 전에, 강재의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O!!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 태현은 고개를 옆으로 꺾어 그 주먹을 피하며 강재의 겨드랑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퍼벅!!

두 개의 강타음이 거진 동시에 터져나왔다. 강재는 내뻗었던 주먹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팔꿈치로 태현의 등을 내려찍었고, 태현은 강재의 복부에 주먹을 꼿아넣었다.

"큭!"

신음을 터트린 건 태현이었다. 강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태현은 강재의 복부에 꼿아넣었던 주먹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 녀석 배에다가 철판을 대놓은 건가?'

물론 그렇지 않았다. 태현도 단지 너무나 딴딴한 강재의 복부에 그렇게 흘러가듯 한 번 생각했을 뿐이었다. 

"g...!"

강재가 짧은 파열음을 내뱉으며 태현에게 잽을 날렸다. 태현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강재의 잽을 피해내며 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얼굴을 가드하는 자세, 어깨의 긴장 정도, 불필요한 움직임이 전혀 없는 스탭.

'복싱을 배운 녀석이군.'

그것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태현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마치 주먹을 날리려는 듯 어깨를 움찔 떨어서 태현이 허리를 옆으로 꺾게 만든 강재는 그대로 태현의 무릎 뒷편을 걷어차서 태현이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날아오는 강재의 펀치.

퍼억...!!

클린 히트였다. 태현의 얼굴은 피를 뿜어내며 옆으로 꺾였다. 곧바로 몸을 뒤틀어 훤히 드러난 태현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돌려차는 강재.

푹...!!

마치 칼이 박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커헉...! 큭...!"

태현은 가까스로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태현은 가슴을 몇 번 매만지곤 혀로 이를 훑어 핏물을 '투!' 뱉어내었다. 강재는 전설의 주먹을 상대로 이렇게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면서도 조금도 표정의 변화를 만들지 않았다. 태현은 눈썹을 긁적인다. 

'귀찮은 스타일이야.'

자신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태현은 싸움 그 자체를 즐겼다. 서로의 강함을 겨루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저 사내는 다르다. 목적을 위해서 싸운다. 따라서 저런 스타일의 상대는 도발도 할 수 없고 다른 그 어떤 유형의 파이터보다 빈틈을 찾아내기 어렵다. 

"하...!"

태현은 피식 웃었다.

"재밌군." 

태현의 이 말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강재가 곧바로 주먹을 날려왔다. 태현의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있었다. 

파악...!

허리를 급격하게 숙이는 태현의 머리 바로 위로 바람에 떠밀려 떠오르는 태현의 머리칼을 튕겨내며 강재의 주먹이 스쳐지나갔다. 태현은 그대로 강재의 품에 뛰어들곤 곧바로 이어지는 연결동작으로 허리를 힘껏 튕겨 팔꿈치로 강재의 턱을 올려쳐버렸다. 강재의 머리가 뒤로 세차게 꺾여나가고, 태현은 팔꿈치를 올려친 회전력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해 한바퀴를 돌아버리며 팍, 원스탭을 밟음과 동시에 강재의 허리에 회전력과 체중을 동반한 주먹을 쑤셔넣었다. 

푸욱!!

"허억...!!"

강재의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태현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강재의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곤 급격히 아래로 당겨내렸다. 그러면서 무릎을 올려찬다. 태현은 강재의 얼굴을 무릎에 찍으려는 심산이었지만, 그러나 강재는 두 팔로 안면을 가드해서 태현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공격을 실패한 태현에게 생긴 틈을 강재는 놓치지 않았다.

파라락, 퍼억!

강재는 공격을 막은 그 자세 그대로 다리를 걸어 태현을 넘어뜨리며 주먹을 세차게 내뻗어 태현의 명치를 강타한 것이다. 

"?...!"

태현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태현에게 현석의 외침이 들려왔다. 

"형님! 길수와 우철이가!!"

태현은 현석의 외침에 흠칫 떨리는 눈으로 길수와 우철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길수와 우철은 몇 사람의 남자들에 의해 어디론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퍼억!!

그 틈을 강재가 놓칠 리 없었다. 강재의 발길질에 태현의 허리가 기형적으로 꺾어졌다. 

"헉, 허억...!"

태현은 순간 갈비뼈가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도 없이 다시 강재의 주먹이 날아온다. 그때, 강재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런 개호로새끼가!!"

현석이었다. 현석은 주먹을 날리는 강재의 뒷덜미를 움켜쥐며 뒤로 확 잡아당겼다. 현석의 무지막지한 힘에 강재는 2미터나 뒤로 날아가버렸다. 

"형님! 저 녀석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태현은 현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끊어지는 것만 같은 허리를 부여잡으며 길수와 우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멈춰 새꺄!"

태현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노랑머리 양아치의 각목질을 무릎을 굽혀 피함과 동시에 녀석의 목을 꽉 움켜쥐고 뒤로 잡아당겨밀어 뒤에서 쇠파이프를 날려오는 녀석의 공격에 방패로 사용했다.

까앙~!

역전 만루홈런의 시원스런 타격음이 울려퍼지며 노랑머리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태현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길수와 우철을 향해 달려간다.

"길수야! 우철아!"

두 아우를 향해 달려가는 태현은 모습은 마치 쓰레기 더미를 밀어버리는 불도저 같았다. 길수와 우철까지 앞으로 20여 미터. 태현이 지나간 길 뒤로는 십수 명의 남자들이 뒹굴고 있었다. 한편 강재를 상대하는 현석은 상당한 고전을 하고 있었다. 

퍼억!!

"큭...!"

복부를 부여잡으며 뒤로 몇걸음 물러서는 현석. 지금 저 자식이 칼로 쑤시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강재는 곧바로 현석의 허벅지 옆부분을 구두 앞발로 찍어 찼다. 

푹!

다시 한 번 칼이 쑤셔지고, 현석은 그 고통을 이를 악물며 참아내었다. 현석은 태현과 같은 스피드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태현마저 넘어서는 맷집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허벅지 옆을 제대로 맞으면 일시적으로 다리가 마비되며 쓰러지게 된다. 많은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강재에게 독이 되었다. 강재는 현석과 같은 맷집을 가진 상대를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꽉, 쿠웅!

강재의 머리를 두 손아귀 안에 완전히 감싸버린 현석은 그대로 필살기인 머리박치기를 강재에게 먹여주었다. 두개골이 갈라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나고, 강재의 다리는 일순간 풀려버린다. 현석은 허물어지는 강재 때문에 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이를 드러내며 다시 한 번 강재의 이마로 머리를 날려갔다. 그러나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강재는 아예 모든 체중을 현석에게 내맡겨버린 채 현석의 두 손을 꽉 잡고 허리를 올려튕겨 다리를 위로 쭉뻗어 쇄도하는 현석의 턱에 카운터 킥을 먹여버린 것이다. 

"허...헉...!"

턱이 부숴질 듯 흔들린 현석은 거구를 가누지 못하며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때, 이제서야 강재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식파! 이 녀석을 맡는다!"

강재의 명령에 일단의 무리들이 싸우고 있던 상대를 내팽게 치고 현석에게로 달려들었다. 강재는 현석을 내버려두고 재빨리 태현을 뒤쫓아 갔다. 한편 그때, 길수와 우철을 끌고 가던 남자들의 의식을 빼앗아버린 태현은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얼굴로 두 아우를 묶고 있는 줄을 풀어주고 있었다. 

"길수야! 우철아! 정신 차려라...! 정신 좀 차려줘..."

약하게 움직이는 가슴만 아니면 죽었다고 생각이 들 만큼 몸에서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으며 자신이 움직이는 대로 그저 흐느적거리는 두 아우. 태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크흑...미안해......"

아우들을 향한 미안함과 근심으로 태현의 눈동자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태현에게, 강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을 건드리지 마라."

"......!"

태현의 손길이 움찔 멈췄다. 서서히 강재쪽으로 돌아서는 태현. 강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두 녀석은 오야붕께로 보낼 선물이다."

태현의 눈동자는 급격히 눈물을 지워냈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왜 굳이 길수와 우철이냐. 왜 이 녀석들을 건드린 것이지?"

"나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너는 기억하고 있겠지."

의문을 담은 눈빛을 강재에게로 향하며 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9년 전. 오야붕을 네 녀석에게로 끌고간 건 저 두 녀석이었다. 그 때문에 오야붕께서는 네 녀석에게 왼쪽 눈을 잃으셨지."

"......"

태현의 이가 잇몸을 헐려버릴 듯이 악 물어졌다. 태현의 눈에는 진득한 살기가 피어오른다.

"오야붕? 야마구치 타사부로를 말하는 것인가."

"......"

강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현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얼굴로 강재에게 다그쳤다.

"네 녀석이 모신다는 놈은 김형필 아니냐?!"

"그렇다. 난 형필 형님을 섬긴다."

"......!"

태현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알겠군. 오야붕이라고? 다른 조직의 보스를 오야붕이라고 부르진 않겠지. 그러니까, 김형필은 지금 야마구치 타사부로의 밑에 있단 말이냐?"

"지금?"

강재는 조소를 지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후우-우......"

태현은 두 눈을 감으며 숨을 깊이 내쉬었다. 서서히 뜨이는 태현의 눈동자. 강재의 앞에 드러난 태현의 눈동자는 이글거리는 살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만약 살아서 야마구치 타사부로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전해라. 그때 네놈에게 죽임당했던 내 아우의 빚을 아직 다 받지 못했다고. 다음 번엔 네놈의 오른쪽 눈과 양쪽 귀라고 말이야." 

"......"

강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현도 강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강재는 태현의 진정한 주먹을 상대하게 되었다. 분노한 태현의 주먹은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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