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햇살이 버티칼을 타고 희미하게 비춰들어오는 고급스런 느낌의 사무실. 형필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심각한 얼굴로 책상 너머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 두 녀석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예. 형님. 이미 부산으로 수송할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음.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이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형필은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턱을 긁적이다 다시 물었다.
"김장군하곤 몇 시에 만날 시간을 잡아놓았나."
"예. 오후 1시, 연화정입니다."
"...그래, 그래. 큰 걸로 두 박스 정도 잘 포장해놓아라."
"예. 형님. ...아. 그리고."
"음?"
젊은 남자는 품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어 정중히 책상 위에 올려놓곤 형필 쪽으로 조금 밀어놓았다.
"어제 전화를 통해 정태현과 그의 딸이 조사했던 주소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곳이 주소입니다."
쪽지를 집어들어 거기에 적힌 주소를 한 번 훑어본 형필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입꼬리를 조금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외라는 비웃음을 머금고.
"흐-음? 이런 곳에 살고 있었군? 생각보다 좋은 동네는 아닌데? 뭐, 수고했다. 내가 지시할 때까지는 건드리지 말도록."
젊은 사내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형필은 담배를 피워물며 그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젊은 남자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취하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형필은 부하가 나가고 나자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천천히 버티칼의 틈새를 손가락으로 열어젓히는 형필. 그의 눈동자에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내가 비춰졌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후우~우......"
형필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입가로 담배 연기를 푸욱 뿜어내었다.
"이제...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형필의 눈동자에 억제되었던 야망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아앙, 팬티가 없어."
유리는 한숨을 포옥 내쉬곤 속옷을 넣어두는 서랍장을 닫곤 1층으로 내려갔다. 허벅지를 절반가량 감싸는 레이스 달린 하얀 스타킹에 무릎을 조금 못 덮는 하늘색 스커트. 위로는 어깨가 시원스레 드러나는 헐렁한 반팔티에 그 안으론 형광빛 노란색 민소매 티를 입었다. 누가 봐도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옷차림이었는데, 사실 유리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센스보다는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 그 자체에 넋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신경써서 옷을 입은 유리는 아름다웠다.
한편 1층 세탁실로 들어온 유리. 단순히 세탁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넓은 공간이었다. 여기서 빨래도 하고 바로 연결되는 베란다에는 ?은 옷가지들을 넌다. 유리는 베란다의 빨랫줄을 바라보았다.
"아이참."
하지만 옷가지는 하나도 널려있지 않았다. 빨래는 항상 아빠가 도맡아서 했는데 며칠간 정신이 없다보니 아빠가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리의 시선에 세탁실 구석으로 두 개의 양동이가 뿌연 비눗물이 꽉찬 채 놓여있는 모습이 잡혔다. 유리는 저게 뭘까 고개를 갸웃하며 양동이들로 다가갔다. 먼저 왼쪽에 놓인 양동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빼는 유리. 그녀의 손에는 아빠의 속옷이 들려있었다. 유리는 단지 젖은 빨랫감이었지만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아빠의 팬티를 조물락 거리다가 도로 양동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오른쪽에 놓인 양동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빼는 유리. 그녀의 손에는 이번엔 자신의 속옷이 들려있었다. 축축히 젖어 있는 조그만 팬티의 모습에 한숨을 포옥 내쉬는 유리. 그런데 그때, 뭔가를 눈치 챈 듯 유리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이거. 나랑 아빠 거 따로 ?고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유리는 기분 나쁜 얼굴로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정말로 기분 나쁘고 아빠에게 섭섭했다. 아니, 하긴 아빠가 자신을 대하는 행동을 보면 자신의 속옷도 더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치만.
"기분 나뻐. 씨이.."
유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물며 자신의 팬티를 왼쪽 양동이에 집어 던졌다. 팬티를 찾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유리는 곧바로 탁, 탁, 탁, 탁, 화난 발걸음으로 1층 욕실로 향했다.
"어디 두고봐. 복수할 거야."
1층 욕실에는 태현의 칫솔이 있었다. 아직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지 않은 유리는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빠의 칫솔을 잡곤 치약을 꾹 짜서 발라 입에 탑, 물어버렸다. 그리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며 아빠에게 말한다.
"잘 보라구. 나쁜 짓을 해주지."
곧바로 치카치카 마구 양치질을 시작하는 유리.
'어때. 어때?'
마치 아빠를 괴롭히듯 심술이 가득한 얼굴로 유리는 그렇게 보통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깨끗히 이를 닦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흐음..."
이는 깨끗히 닦았지만 왠지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아. 팬티."
금세 자신의 기분이 개운치 않은 이유를 깨달은 유리는 어쩔까 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줄기 미소를 입가에 달며 아빠의 방으로 향했다. 아빠의 방으로 들어온 유리는 곧바로 아빠의 속옷이 있는 서랍장을 열어젓혔다. 빨래를 개는 것은 유리의 몫이었고, 그녀의 눈에는 곱고 단정하게 접혀있는 아빠의 팬티들이 들어왔다. 유리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주 철저히 복수해줄게, 아빠."
유리는 입고 있던 팬티를 벗곤 아빠의 사각 트렁크 팬티를 하나 꺼내어 걸쳤다.
"......"
그랬다. 걸쳤다는 말이 딱 맞았던 것이다.
"아이차암..."
날씬한 유리의 허리 탓에 팬티는 자꾸만 흘러내렸고, 유리는 엉덩이에 겨우 걸리는 팬티를 몇 번이나 잡아 올리다 결국엔 고개를 포옥 수그리며 포기를 했다. 아빠의 팬티를 벗어 도로 정성껏 접어 서랍장 안에 넣어둔 유리는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팬티를 징그럽단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어젯밤에 갈아입은 거니까."
유리는 마치 자신이 아빠에게 방금 나쁜 짓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는 체념어린 얼굴로 벗었던 팬티를 도로 입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불쌍한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띄우는 유리.
"참...! 팔찌."
유리는 태현에게서 받은 팔찌를 잘 때나 목욕을 할 때 외에는 언제나 차고 다녔다. 유리는 금세 생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태현은 시계를 힐끗거리며 컵을 닦고 있었다. 레스토랑 네잎클로버는 런치타임부터 문을 열었다. 지금 그가 이렇게 일부러 가게를 오픈할 준비를 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좀 있다 올 유리에게 오늘이 여느 날과 마찬가지인 날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벽시계를 쳐다보는 태현. 그런 그에게 현석이 넌지시 물었다.
"형님. 유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음. 그래. ...늦잠을 자는 걸까."
시계는 벌써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석이 걱정 말라는 얼굴로 태현에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집사람이 올 겁니다. 용우를 봐달라는 핑계를 대면 유리도 전혀 이상한 낌새는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닦던 컵을 놓아두곤 홀의 아무 의자에나 걸어가 걸터앉으며 담배를 한개피 피워문다. 현석은 재떨이를 가져다가 태현 앞의 테이블에 놓아두곤 다시 채소를 ?는 일을 계속했다.
"후우..우......"
태현은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가 아주 심하게 꼬인 기분... 물론 길수와 우철을 구하러 달려가는 것에 어떠한 망설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아우였고, 자신이 도움 요청을 거절한 것 때문에(물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태현은 두 아우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험한 꼴을 당해버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신의 거절을 통보받고 힘없이 돌아가던 두 아우의 축 늘어진 어깨가. 태현은 금강을 소개해주긴 했지만 그들에게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방도를 일러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그저 마음 속에 자신은 완전히 손을 씻었다, 그 세계와는 더 이상 상관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만 가득해서 마치 알아서들 하라는 듯 그렇게 무책임하게 두 아우를 그냥 보냈었다니. 자신이 좀 더 고심을 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면 두 아우는 김형필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현은 고개를 떨구며 담배를 깊이 깊이 빨아들였다. 하지만 마음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비단 두 아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리...'
자신은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 세계에 인생의 대부분을 몸담았었고, 죽음 따윈 두려워하지 않게 된지 오래이니까. 하지만 유리는 아니었다. 그 아이만큼은 지켜져야 했다. 이런 더러운 세계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했다. 그런데, 자신은 또다시 스스로를 그 세계와 연결지으려 오늘 부산으로 떠난다. 바로 그것 때문에 태현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길수와 우철. 두 아우를 결코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유리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이미 아내를 잃어본 경험이 있는 태현은 자신이 유리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자신이 없었다. 8년 전 아내보다 부하를 택했던 자신. 죽이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운 그때의 자신이 현재의 시간에 또다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삐비비비빅, 삐비비비빅...>
그런데 상념에 잠겨있는 태현의 정신을 일깨우며 그의 바지 속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태현은 움찔,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을 바지 호주머니에서 깨내었다. 발신자를 보니 유리다. 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유리니?"
<응, 아빠. 뭐해?>
"아빠야 가게 열 준비하고 있지. 유리는? 언제 올 거니?"
<아..저, 응...그런데 어쩌지? 나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는데.>
태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신의 심정으로는 유리가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었으면 하는데, 그렇지만 또 유리가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려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유리가 친구들이랑 만나서 재미있게 놀고 기분 전환도 했으면 좋겠으니까. 태현은 표정과는 달리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 그럴래? 하핫. 그래 재미있게 놀다와. 그런데...언제까지 놀 거야?"
<글쎄. 모르겠어, 확실히는.>
태현은 유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뾰루퉁해진 것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그런 건 젖혀두고, 진지한 마음을 감추려 노력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아. 저..그런데 유리야. 아빠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데 미안하지만 늦어도 3시 반까지 가게로 와주지 않을래?"
<부탁? 정말? 무슨 부탁인데?>
유리의 음성은 금세 즐거워졌다. 태현은 어쩔까 하다가 전화보다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거짓말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대답을 회피했다.
"응...그건 있다가 말해줄게."
<치이, 궁금한데. 무슨 부탁이야? 어려운 부탁?>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래...응...알았어. 3시 반까지 거기루 갈게.>
"응~있다봐 유리야."
<앙~사랑해 아빠.>
"응. 아빠두..."
탁...
사랑스런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닫은 태현. 딸의 애교에 잠시 즐거운 표정이었던 태현의 얼굴은 하지만 금세 도로 어두워졌다. 이런 저런 걱정이 가득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저, 저기. 사인 좀 해주세요!"
"네?"
유리는 당혹스런 얼굴로 자신에게 수첩을 펴드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벌써 3시. 유리는 친구들과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다함께 아이쇼핑도 하고 맛있는 파스타도 사먹고, 베스킨로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참동안 수다도 떨었다. 게다가 친구들은 일부러 자신에게 인터넷에 나도는 동영상 같은 얘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으며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굳이 자신이 배에서의 일을 기억해내지 않게 해주려는 친구들의 고마운 마음에 유리는 정말로 기뻤고 친구들이 다시 한 번 너무나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와중에도 유리는 한 번씩 곤혹스러움을 느꼈는데, 그건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쇼핑샵 창밖에서 저 가방 예쁘다 같은 말을 하며 구경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 자신들 주위를 빙 둘러쌌고, 식사를 할 때에도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을 힐끗 거렸다. 게다가 사진촬영 기능이 있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나 폰카로 찍어대는지. 급기야 이제는 사인 요청까지 나왔다.
"죄송해요. 저 별로 연예인 같은 사람 아니니까..."
유리는 고개를 꾸벅하며 사인 요청을 거절했다. 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지가 유리의 팔을 이끌며 어느새 몰려있는 사람들의 틈새를 뚫고 자리를 옮겼고, 같이 놀던 다른 세 명의 소녀들도 앞장을 서서 길을 터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사람들 무리를 빠져나와 친구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유리. 그녀는 고개를 포옥 수그리며 친구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나 때문에......"
"아냐~아냐~~."
윤지가 급히 손사래를 치며 유리의 사과를 받아주었고, 다른 친구들도 웃는 얼굴로 유리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런데 그때, 유리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유리는 혹시나 아빠일까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빠?"
<아, 안녕하세요. 정유리양 되세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유리는 실망감이 들었지만 웃는 얼굴로 손짓으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옆으로 조금 걸어가서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아~~반갑습니다. 저는 TM엔터테인먼트 인사실장 하종구라고 해요. 우리 유리양, 잠시 통화할 시간 되세요?>
유리는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왜 '우리' 유리양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왜 자꾸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 분명히 거절을 했었는데. 게다가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괜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래서 유리는 똑부러진 목소리로 하종구란 남자한테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유리양. 말씀하세요.>
"어제도 TM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제가 분명히 거절을 했었거든요?"
<......예?>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의아함이 물든다. 유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고, 그녀의 귓가에 당황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저, 유리양. 죄송한데 저희가 유리양께 전화드리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잠시 어제의 통화를 생각하다가 곧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자꾸 전화를 해서 결국 자기네들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겠지. 유리가 다시 한 번 픽업 제의를 거절하려는 말을 하려 할 때, 하종구의 목소리가 먼저 유리에게 들려왔다.
<아~네. 음, 우리 유리양. 사실은 아무튼 그렇게 되세요. 그리고 저희가 오늘 이렇게 유리양께 전화를 드리게 된 것은, 사실. 우리 유리양 지금 아주 유명하신 거 아시죠? 하하. 저희 TM엔터네인먼트도 여러모로 유리양의 끼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요. 사실 이런 기회가 많지는 않으세요. 아아~나쁜 의미로 받아들이지 마시구요. 그만큼 저희는 유리양의 포텐셜을 주목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유리양께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하려구 해요. 물론 아버님께도 말씀 드려야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리양 본인의 의사이니까요. 하하, 이거 말이 길었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TM엔터네인먼트는 우리 유리양이 연예계로 나가는데 뒷받침이 되고 싶어요. 유리양, 스타가 되고 싶으시죠? T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하면..>
유리는 몇 번이나 말을 끊으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 남자가 도저히 말할 기회를 주지 않자 한숨을 폭 내쉬곤 단번에 똑바른 목소리로 하종구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저기요. 저는 별로 연예인 같은 거 되고 싶은 생각 없거든요?"
<아...네?>
애써 당황감을 숨기는 목소리. 유리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강조해서 말했다.
"저는, 연예인이든 스타든, 그런 거 될 생각 조금도 없다구요."
<...아아...네. 아, 우리 유리양께서 물론 두려운 마음을 가지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세요. 하지만......>
유리는 도무지 말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하종구란 남자 때문에 아미를 찌푸리며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우리 유리양, 우리 유리양. 내가 왜 당신한테 '우리' 유리라고 불려야 돼? 아저씨, 나랑 친해?'
...그렇게 말은 하고 싶은 유리이지만, 금세 깨끗하게 포기했던 어제 그 사람과는 달리 이번 TM사람은 정말로 끈질겼다. 그때 가만히 유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지가 결국 대뜸 유리에게서 휴대폰을 뺏어들곤 짧막하고 짜증섞인 목소리로 휴대폰 너머를 향해 말했다.
"저기요. 됐거든요? 끊어요."
탁.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었다.
"자. 요것아."
유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휴대폰을 내미는 윤지에게 헤헤거리며 웃었다.
"고마워."
"고맙긴 뭘."
"유리야. 너 근데 방금 TM에서 전화왔던 거였어?"
그때 유리의 친구 중 선영이란 이름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가 유리에게 물었다.
"응."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영은 부러운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았다.
"하아~좋겠다. 나는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졌는데."
유리는 장래의 꿈이 가수인 친구의 볼을 장난스레 잡으며 말했다.
"으휴~뭘 부러워 해? 선영이 네가 얼마나 예쁘고 노래 잘 부르는데. 다음 번에는 꼭 붙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히잉~정말 그럴까?"
"그러엄. 포기만 하지 않으면 못 이룰 꿈은 없어."
유리의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서 결국엔 아빠의 연인이 되었으니까. 한편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랄까, 유리의 말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선영은 잠시 감동을 받은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다 곧 냉큼 유리에게 와락 안겼다.
"역쉬이~우리 유리 공주님밖에 없어."
"더워어~~."
유리는 잠시만이지만 그렇게 친구랑 같이 장난을 쳤다. 그때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흐뭇한 얼굴로 두 친구를 바라보고 있던 윤지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유리에게 물었다.
"참, 근데 너 3시 반까지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리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해..."
친구들과 헤어져야 된다는 생각에 금세 풀이 죽는 유리.
"아휴 또 사과한다. 우린 괜찮다니까."
윤지는 그러며 다른 친구들에게 눈치를 주면서 말했다.
"우리가 너네 레스토랑까지 데려다 줄게."
"정말?"
아직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리가 생긋 웃으며 윤지에게 되물었고, 윤지도 다른 친구들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헤헤~고마워."
배시시 웃으며 윤지에게 팔짱을 끼는 유리. 아무튼 유리는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네잎클로버로 향했다.
한편 같은 시간. 태현은 유리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었다.
"저..저어...악수 한 번만..."
태현은 예쁘장한 젊은 처녀가 부끄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어오자 이건 뭐 손님이라 거절을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빙긋 웃는 얼굴로 젊은 처녀에게 악수를 해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찰칵, 위잉...하는 사진을 찍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디카라는 소형 카메라를 손님들 중 상당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꺄악~~."
처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친구들 쪽으로 뛰어가버린다. 태현은 난감한 얼굴로 현석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단순한 현석이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면서 자신에게 좋겠다는 놀림 비슷한 웃음을 날리며 주문받은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갔다. 태현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홀에 가득한. 아니, 가게 바깥까지 바글바글한 손님들을 보며 앞이 막막해오는 것을 느꼈다. 사건의 시작은 미약했다. 런치타임 첫손님으로 유리 또래의 여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왔었다. 소녀들은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주문을 했는데, 그러다 누군가 한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았다. 그러며 그 유명한 사신 아저씨가 아니냐며 악수를 청했었다.
"휴우~~..."
그때 자신이 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해버렸는지. 괜히 유리 생각도 나고 해서 소녀와 악수를 나눠줘버렸던 것이다. 소녀들은 그때부터 급히 여기저기로 문자나 전화를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 어, 하는 사이 소문은 퍼지고 퍼져 결국에는 이렇듯 발을 뺄 수도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져버린 것이다. 그나마 가희가 와주어서 일은 그럭저럭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태현은 쉴새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악수를 청해오거나 심지어는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해오는 손님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신 아찌. 나 업어줘."
'이 일을 어찌해야 좋나.'
태현은 속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래. 그래."
태현은 좋게 좋게 웃는 얼굴로 남자 꼬마애를 업어주었다.
"어머~얘두 참. 죄송해요, 호호홋."
아이 엄마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왠지 저 여자가 자기 아들한테 시킨 것 같다. 태현은 아이 엄마가 왜 그리 얄밉게 보이는지 몰랐다. 여하튼 그렇게 시간은 쉬지도 않고 흘러갔고, 네잎클로버는 개점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며 날개 돗힌 듯 음식을 팔아제꼈다.
"현석아."
당연한 일이지만 손님들이 레스토랑으로 찾아온 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유명한 사신을 실제로 한 번 보기 위함이었고, 결국 손님들을 상대하다 지쳐버린 태현은 피곤한 얼굴로 현석에게 백기를 들었다.
사실 태현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까지나 팔려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태현은 인터넷의 파급력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태현과 유리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현재 태현의 이미지는 대한민국에서 영웅, 그 자체였다. 뜨거웠던 지난 6월 이후, 소위 월드컵 후유증을 앓고 있던 사람들의 뭔가에 열광하길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태현은 완벽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틀 전 방영된 퀸 엘리자베스 호 특집방송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불을 붙였었다.
어쨌든 태현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현석에게 들어보였고, 현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긋하게 피고 오십시오."
"그래. 금세 오마. 제수씨, 미안합니다."
"어머, 아니에요. 후훗, 천천히 다녀오세요."
태현은 남편의 옆에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있는 가희에게 피곤한 웃음을 지어주곤 레스토랑 뒷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이 꼬이려고 해도 아주 제대로 꼬이려는지 그런 태현의 발걸음을 홀에서 들려온 소란스런 소음이 붙잡았다.
"정태현씨! 정태현씨 되시죠??"
태현은 주방까지 밀고 들어오는 일단의 사람들 무리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일단 그들을 주방에서 밀고 나갔다. 새롭게 추가된 손님은 다름 아닌 각종 매스컴 기자들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보험회사가 제일 빠르고 그 다음이 매스컴이라더니 언제 소문을 들었는지 이제는 매스컴까지 찾아와버린 것이었다.
"정태현씨! 이곳은 정태현씨의 레스토랑입니까?"
"퀸 엘리자베스 호에서 무사귀국 후 달라지신 점이 있다면요?"
"오후 1시경 방송된 청와대 대변인의 퀸 엘리자베스 호 관련 브리핑 보셨습니까?"
"대통령 표창자에 선정된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태현은 정신 없이 밀어 닥치는 질문 세례와 끊임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방송 카메라의 모습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사람들은 새롭게 나타난 구경거리에 자신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쌌고, 태현은 결국 미어 터지는 인파에 밀려 점점 뒤로 물러나다가 주방 안으로까지 도로 들어서버렸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태현은 일단 다른 건 다 접어두고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해 현석을 보며 재빨리 가스레인지로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태현의 마음을 알아 챈 현석이 하던 요리를 중지하며 가스레인지를 모두 끄고 혼잡한 와중에 위험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전부 치워놓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간. 이곳의 그 누구도 (태현을 보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밖 골목으로는 경차부터 외제 스포츠카, 고급 세단에 이르기까지 수십 대의 각양 각색의 차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여하튼 앞으로 더 이상 번질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졌다고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 태현은 한치 앞을 일을 예상하지 못하며 좋게 좋게 기자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영업 중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답변을 드릴 테니 일단 지금은 가게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정태현씨! 테러범들에게 사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셨는데요! 그 연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아, 그러니까 지금은.."
"따님이신 정유리양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정태현씨!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영상에서 보여준 사격 실력은 어디에서.."
"국민들이 정태현씨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기자들은 도무지 태현의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오히려 태현은 점점 밀고 들어오는 인파 때문에 뒤로 한발자국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건 뭐하는 새끼들이야!!!!"
청천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좌중을 일거에 입다물게 만들었다.
"비켜! 뭐야 이것들은!!"
이건 또 대낮부터 어떤 녀석이 행패를 부리는 건지. 태현은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를 뚫고 태현의 앞으로 서서히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태현은 점점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얼굴에 어째서 놀람이나 두려움이 어리는 것인지 의아한 얼굴로, 마지막으로 방송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옆으로 물러서는 카메라맨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 앞으로 만들어진 길의 끝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
흠칫 떨리는 태현의 눈동자.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남자는 170cm가량의 키에 평범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백 머리를 올빽 스타일로 쓸어넘기고 꽃무늬 실크 셔츠에 하얀 바지, 하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반 가량 될까, 번뜩이는 눈동자가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마에 다혈질이라고 써붙인 듯한 용모의 남자였다.
"아..."
태현의 놀랐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진다. 그리고 방금 전 단 두 번의 고함으로 태현도 어찌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단숨에 잠재워버린 남자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금세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입꼬리를 주욱 내리는 남자. 그의 뒤로는 대부분이 30후반에서 40초반인 남자들 십수여 명이 다혈질 남자와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으며 태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레스토랑 밖으로는 검은 정장 일색의 젊은 남자들 수십 명이 열과 행을 맞춰 주르르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완전한 적막에 감싸인 네잎클로버. 그렇게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혈질 남자의 눈물 섞인 음성이 터져나오며 침묵을 깨트렸다.
"크흑, 형님...!!"
털썩...!!
무릎을 땅에 찧으며 고개를 깊숙히 숙이는 남자.
"형님...!!!"
남자의 목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된 듯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십수 명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털썩 꿇으며 태현에게 깊숙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레스토랑 밖의 70여 명을 헤아리는 검은 정장 사내들은 양팔을 아래로 쭉 내리며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다시 한 번 터져나오는 형님 콜.
"형님......!!!"
레스토랑은 다시 침묵으로 휩싸였다.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혈질 사내에게로 다가가는 태현. 그런데 너무나 오랜만의 재회에 빠져 있는 그런 태현의 정신을 어떤 기자의 외침이 깨트렸다.
"야! 찍어! 빨리 카메라 돌려!!"
태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카메라맨들은 황급히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최적의 위치에서 영상을 필름으로 담아내기 시작했고, 태현은 그제야 자신이 현재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깨달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이다......'
한편 그때, 주방 뒤쪽에 남편과 함께 서 있던 가희가 태현의 바로 전 표정과 마찬가지로 감개무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현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아...!!"
가희의 속삭임에 번뜩 정신을 차린 현석은 부랴부랴 태현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이거 번짓수가 틀리셨나본데요. 누구십니까?"
"......?"
현석의 말에 다혈질 남자는 서서히 얼굴을 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물을 쓱쓱 닦곤 현석을 쳐다보았다.
"현석.."
"저는 선생님 처. 음. 뵙습니다만. 생판 모르는 남의 가게에 와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현석은 빠릿빠릿 눈에 힘을 주며 그렇게 말했고, 그제야 현석의 눈치를 알아들은 다혈질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급히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아, 어..."
당황스런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는 다혈질 남자.
"여, 여기가 아닌게벼."
"형님...!!!"
파르르 떨리는 유리의 눈동자.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정장 차림 남자들이 레스토랑을 향해 조폭물 영화에서나 봤던 자세로 인사를 한다. 유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유, 유리야. 저 사람들...누구야?"
윤지가 당황한 음성으로 물어온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윤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말...정말이었던 거야......?'
눈망울에 이슬을 한껏 떠올리며 입술을 꼬옥 깨무는 유리. 충격을 받은 듯 커다랗게 뜨인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멍하니 정장 남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하아..흑..."
가는 한숨을 내쉬다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지 고개를 폭 숙이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 유리. 이런 유리의 모습에 다른 친구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유리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며 일단은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리는 그런 친구들의 상냥한 손길조차 느낄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랬었다. 사실일 거라 예상했지만, 그리고 비록 그게 정말로 사실일지라 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유리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것이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실이었다니. 정말로 아빠가...
"으흐..으윽..."
...조직 폭력배였었다니. 왜 하필 자신은 다른 때도 아니고 바로 이 시간, 지금...이곳에 온 것일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다. 아니, 적어도 확신할 수 없는 그 상태로 있었으면 조금은 나았겠지. 도대체 어째서 자신은 부정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버린 것일까.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유리를 친구들은 당황한 얼굴로 달래기 바빴고, 유리는 윤지의 좁다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동안 울었을까, 길을 막고 서 있는 유리들에게 클락션 소리가 울려왔다.
빵빵!!
아직도 유리는 윤지의 품에 안겨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윤지들은 유리를 이끌고 담벼락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들 옆으로 수십 대의 차들이 줄맞춰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태현 형님은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으셨......>
차창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 어째서일까, 하필이면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리의 곁을 스쳐지나갈 때 그런 말을 해버렸다.
"......!"
그리고 그것이 결정타였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버리는지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유리. 그런 그녀를 윤지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끌어안는다. 유리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윤지의 품에 얼굴을 꼬옥 묻었다. 한편 유리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클락션을 빵빵거린 차 안. 다혈질 남자는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잠시 입에서 떨어뜨리며 조수석에 타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기 왔던 기자 애들 전부 개인신상 조사하고. 수첩, 카메라 테이프, 필름. 다 압수해라."
"예. 형님."
다혈질 남자는 다시 담배를 입술로 씹어물며 몸을 돌려 서서히 멀어지는 레스토랑을 시선에 두었다. 그의 눈시울이 금세 또다시 붉어진다. 한편 다시 유리의 시점.
"유리야아...괜찮아...?"
자신들 때문에 크게 울지 않으려고 울음을 꾹꾹 눌러참으면서도 그 흐느낌에서 너무나 서글픔이 느껴져 오는 유리에게, 윤지도 어느새 울먹이는 얼굴이 되어 그렇게 애타게 물었다.
"끅, 흐윽, 흐으..으윽..."
하지만 유리는 그저 윤지의 품을 눈물로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아파...가슴이 너무 아파와......'
아빠의 정체를 정말로 알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기대.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려 했던, 기대. 아니...믿음. 아빠가 지금은 그런 세계와 완전히 떨어져 있을 거라는 믿음. 유리는 아빠에 대한 그런 믿음이 철저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배신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파온다. 아빠가 너무나 걱정되니까. 아직도 저런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아빠가 너무나, 견딜 수 없이 걱정이 되니까.
유리는 자신이 방금 전 그런 장면을 목격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빠를 저런 나쁜 사람들 무리 속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신을 에워싸는 불안감. 유리는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무서운 예감이 엄습하는 것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