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9)

타앙-!!

또 한명의 젊은 생명이 사라졌다. 진은 가쁜숨을 몰아쉬면서도 승리에 도취된듯 입가에 가는 웃음을 떠올리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큭큭큭. 정말로 아름다운 장면이야."

게임의 룰은 지극히 간단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맨손으로 싸움을 한다. 죽거나 정신을 잃거나 바닥에 쓰러져서 5초 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죽임 당한다. 진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급조된 이 게임의 이름을 약육강식이라고 불렀다. 

"강한자는 살아남고 약한자는 죽는다. 가장 원초적인 법칙이 실현되는 이 모습. 큭큭큭...정말로 아름다워. Next!"

진의 명령에 따라 벌써 두 번의 게임에서 살아남은 이 젊은 남자 앞으로 덜덜 떨며 걸어 나온 사람은 70은 넘어보이는 흰머리가 지긋한 노파였다. 진은 시익 웃으며 노파의 앞에 손바닥만한 칼을 던져주었다.

"그래도 암수의 구별은 해야겠지."

아까 분명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맨손으로 싸운다고 룰을 말했으면서 진이 갑자기 노파의 앞에 칼을 던져주자 젊은이는 당황한 음성으로 진에게 말했다.

"아,아까 분명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맨손으로 싸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은 시익 웃었다.

"이 지구를 만든 신에게 한곳에는 석유가 나게하고 다른 한곳에는 모래만 가득하게 할 권한조차 없겠나. 불평하지마라. 모든 섭리는 창조자 마음대로니까."

젊은이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푸욱-!!

그런데 그때 젊은이의 얼굴로 빨간 피가 튀어올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천천히 내려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 넣은 노파를 바라보았고, 서서히 쓰러졌다. 

"크하하하하하하핫!! 재미있어!! 크하하하하하하핫!! 아무리 늙어도 삶에 대한 욕구는 줄어들지 않는가보군! 크하하하하핫!!"

파티장 안으로 진의 광소가 가득 울려 퍼졌다.

짜악-!!

다시 유리의 얼굴에 빠알간 손자국이 나며 그녀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고개를 홱 돌려 현을 노려본 유리. 유리도 지지 않고 그의 얼굴에 뺨을 날렸다.

짜악-!!

이미 유리의 바지는 벗겨져 있었고 민소매 티도 너덜너덜해서 하안색 브래지어에 감싸인 유리의 탐스러운 젖가슴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현은 시익 웃으며 매서운 그녀의 손길에 터진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이년은 지금까지의 여자와는 달랐다. 처음엔 두려워하면서 연신 제 아빠를 부르며 도망치다가 자신이 덮치려고 하자 갑자기 표정이 돌변해서는 자신을 마구 때리며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은 화를 낼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이 한국여자에게 다시 손길을 내뻗어갔다. 

"더러운 새끼!! 이 손 안 치워?!!"

유리는 다시 자신의 티셔츠를 잡아 당기며 벗기려 하는 현의 손길에 반항하며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현은 그 모기에 물리는 것만도 못한 주먹질에 물러서지 않으며 결국 유리의 티셔츠를 찢어 벗기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리곤 한걸음 물러서서, 다리를 꼭 모은 채 가슴을 가리며 자신을 깜찍하게도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이 사신의 딸의 몸매를 천천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후후후. 멋지군. 보기 드문 몸매야.}

일단 온통 새하얗다. 그런데 그 새하얀 게 단순히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 마치 우유를 부어놓은듯이 뽀얀 맛이 있어서 정말 만지고 있으면 손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그런 피부다. 거기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정말로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앳된 느낌이 가시지 않은 얼굴과는 달리 몸매는 완전히 무르익어있었다. 탐스러운 모양새를 한 풍만한 가슴도 그렇지만 군살 하나 없이 쏙 들어간 잘록한 허리하며 그 아래로 이어지는 미려한 힙라인과 적당하게 살이 올라 있으면서도 늘씬하게 빠져있는 다리의 각선미는 군침을 삼키지 않고는 멀쩡하게 볼 수가 없을 정도다. 

현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둔 사람처럼 입술을 혀로 핥았다. 한편 유리는 완전히 구석으로 몰려 도망칠 길이 보이지 않자 침착하려 노력하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Where's your father?"

그런데 그때 중국인 남자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유리는 드디어 말이 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며 재빨리 말했다.

"My father? Why? Do you know who he is?"

현의 입가에 흥미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말을 할 줄 아는 장미꽃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다. 자신이 중국말을 하자 아예 아무런 대화도 시도조차하지 않던 그녀가 자신이 혹시나 해서 걸어보았던 영어에 저렇게 급히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니 오늘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기분까지 느끼게 되었다. 

"Course. I'm your father's friend."

현의 말에 유리가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You've got to be kidding me."

"Yeh, lie, of course."

현은 자신의 말에 얼굴을 화악 찌푸리는 유리를 보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유리는 불쾌한 얼굴로 현을 노려보았고 현은 혀를 낼름거리며 두 손을 들어 양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제 슬슬 먹어도 되는 거지? Huh?}

유리는 또 못 알아들을 말을 하는 중국인 남자를 보며 이를 사려물었다. 아까 아빠를 부르며 도망치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왜 항상 아빠에게 의지만 하려 하는 걸까. 아빠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나 노력하는데 자신은 왜 그런 아빠의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오히려 점점 더 많은 것을 아빠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걸까. 그래서 자신을 덮쳐오는 이 중국인 남자에게 격렬하게 반항했었다. 오늘 그런 일을 겪으며 어쩌면 좀 더 내면적으로 강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유리는 자신에게 손을 뻗쳐오기만 하면 이 남자의 면상에 날려버리려고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6층에 일곱, 5층 홀에 여섯, 카지노에 아홉.'

태현은 6층 파티장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살며시 열고 단 두 번 파티장을 보는 것으로 국제 강도들의 총 인원을 파악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녀석이 두목인가보군.'

아마도 시한폭탄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방법은 저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두목을 빼고 나면 한명당 최소한 한발씩 해도 탄창에 총알을 한번은 갈아 넣어야 한다. 

'한발당 두명 잡아야겠군.'

태현은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양손에 권총을 하나씩 잡아들었다. 

'할 수 있다 정태현. 기껏 해봐야 10년만이잖아. 충분히 맞출 거다. 빌어먹을 재수가 좋아서 1발3탕 될지 누가 아나. ...제기랄 이럴줄 알았으면 기관총 같은걸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그나마 손에 익어있는 이 녀석이 좋다. 하지만...제기랄! 망설이지 말자. ......젠장할 10년이 '기껏'은 아니잖아?'

태현은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크게 쉼호흡했다. 

'왜 이러냐 정태현. 이보다 더한 일도 수도 없이 헤쳐왔잖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태현은 숨을 깊게 한 번 내쉬었다 들이 마시곤 비상문을 확 열어젖히며 파티장 6층으로 뛰어들어가려했다. 

탁-!

그런데 하필이면 한 계절에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허억!"

마음의 긴장을 풀렸지만 다리의 긴장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현은 그만 문턱에 발끝이 걸려 앞으로 볼품 없이 넘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타닥, 탁, 탁, 주르르르...

덤으로 권총 하나도 놓쳤다. 호화 유람선이라 바닥이 하필이면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진 대리석이라 태현이 놓친 권총은 미끌려가 5층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제..젠장할!'

{누구냐!!}

당연히 6층에 있던 복면인들이 태현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현의 어리벙한 쇼는 거기까지였다. 넘어진 참에 아예 바닥에 납짝 엎드려 복면인들의 사격 각도를 최대한 없애버린 태현은 두 손으로 리볼버를 잡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복면인들을 정확히 조준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앞서 달려오던 네 명의 복면인이 정확히 왼쪽 가슴에 바람 구멍이 난 채 쓰러졌다. 그러자 그제서야 태현이 총을 들고 있음을 안 복면인들이 태현에게로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당-!!

'제기랄! 6층 일곱은 들어가자마자 해결해야 했는데!'

태현은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몸을 굴려 6층 복도에 놓여있는 커다란 관상용 관목 화분들 뒤로 숨음과 동시에 다시 한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타앙-!

다시 한 명의 복면인이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제 둘.'

타다다다다다다다당-!! 파바박, 콰창! 채쟁! 깽그랑!!

복면인들의 총질에 태현의 앞에 놓여있던 화분들이 박살이 났고, 태현은 지체없이 바로 옆의 전자오락실로 뛰어들어갔다. 오락실 유리는 코팅이 되어있었고 태현은 자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황하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복면인 두 명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산뜻하게 유리창을 뚫으며 날아간 44구경 매그넘탄은 곧바로 두 명의 복면인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태현은 복면인 두 명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며 동시에 재빨리 탄환 여덟발을 다시 탄창에 채워 넣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정태현 아직 죽지 않았어.'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일종의 쾌감이다. 승리는 곧 삶을,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 생존, 그 이상의 쾌감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 세계에 뛰어들고 나서의 앞 4년간의 시간을 제외하면 은퇴하기 1,2년 전까지는 매일 같이 이런 생활이었다. 제2차 세키가하라(야쿠자들끼리의 세력 싸움을 일컬어 당사자들 스스로 붙인 이름)를 제패한 야마구치구미와의 지겨운 전쟁. 사실 첫 4년 간을 제외하곤 주먹보단 총을 더 많이 썼었다. 

살과 살을 맞대는 주먹 싸움에는 인정이 실린다. 상대방과 손속을 섞는 가운데 상대방에 대한 존경도 생기고 배려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래서 영역을 넘겨받기 위한 죽기 직전까지의 일대일 싸움 이후엔 항상 그 사람과 우애가 돈독해졌다. 그런식으로 주먹을 나누며 사귄 절우만 해도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총은 다르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이기에 죽고 나면 끝이다. 그래서 싸움에 총이 끼어들면 오로지 죽음과 복수, 원수밖에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 아니면 죽음. 두 가지 선택 사항밖에 없는 단순한 흑백 싸움이기에 어떠한 쾌감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쟁에서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자아도취감. 지금 태현의 눈에는 살기라는 악귀가 떠올라있었다. 

태현은 장전을 하자마자 곧바로 오락실에서 뛰어나갔다. 그의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인 눈동자가 5층의 상황을 주인에게 인지시켜주었고, 태현은 일단 6층으로 뛰어올라오고 있는 복면인 여섯명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닌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멈춰서서 총구를 이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태현은 지체 없이 6층 난간에서 2m가량 떨어진 곳을 지나가는, 벽으로 이어지는 천장에서부터 비스듬하게 5층 홀의 분수대까지 연결되어있는 기다랗고 넓은 휘장으로 몸을 날렸다. 아까 미인대회를 위해 걸어졌던 것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처 철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편 미쳤다고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태현의 행동에 홀에 있던 사람들은 놀람의 목소리를 터트렸지만 태현은 한 수 더 떠버렸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휘장을 타고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5-6층 연결 계단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복면인들 중 네 명을 쓰러뜨려버렸던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사람이란 단순해서 절망의 순간에는 닥쳐진 절망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단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다른 절대적 힘을 가진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 마련이다. 지금 태현은 국제 강도들의 죽음의 위협에 떨고 있던 2000여명의 사람들의 그런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영웅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환호소리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태현은 분수대의 물을 충격흡수대 삼아 5층으로 내려섰다. 

첨벙-!

태현은 분수대 안으로 내려서자마자 재빨리 몸을 날려 분수대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당-!! 티딩, 탕, 포봉, 퐁! 퐁! 핑! 파방! 팡!

간발의 차이로 태현이 벗어나자마자 분수대에는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다. 

지금 기룡은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그런 복 받을 짓을 해놨길래 이런 영상을 캠코더로 담을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어쨌든 기룡은 정신 없이 영웅의 모습을 따라 캠코더를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영웅이어서 잘생긴 것인지 잘생겨서 영웅다워 보이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잘생긴 그 남자는 분수대 뒤로 몸을 숨기자마자 이어서 계단쪽을 향해 두 발을 쐈다. 기룡은 재빨리 계단을 비추었고 그의 캠코더에는 어김없이 정확히 복면인 두 명이 쓰러지는 영상이 담겼다. 이제 계단에는 한 명의 복면인도 서있지 못하게 되었다.

'올해 퓰리처상은 내꺼다.'

기룡의 목은 연신 마른침을 꿀꺽 꿀꺽 삼켰다. 

한편 테러범 두목의 외침이 터져나온 것은 그때였다.

"멈춰라!! {아호! 사격중지해!} 누군지 정체를 밝히시오!!"

태현은 이제 홀에는 복면인이 한명도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하며 중국말을 섞어서 말하는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역시 저자가 두목이다. 태현은 두 발밖에 남아있지 않는 탄창에 총알을 채워넣으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에게 알려줄 만큼 싸구려 이름은 아니다! 살고 싶다면 총을 버려라!!"

"무엇을 원하나!!"

당연히 두목 남자는 태현의 말에 따라 순순히 총을 내려놓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태현은 여기서 이대로 시한폭탄의 시간을 정지시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지는 둘째치고 폭탄이 설치되어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이 걱정되어 대답을 망설였다. 

"헉...헉...헉...헉......"

현은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숨이 찰 때까지 싸운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그의 숨이 차오를 때까지 버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지금 여자 하나를 상대로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현은 머리카락도 온통 헝클어져 있고 입가에서는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데다 몸 곳곳에 멍이 들어있음에도 전혀 눈빛이 죽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신의 딸을 어떤 의미로는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물론 자신은 주먹질은 커녕 뺨도 별로 날리지 않았지만, 그건 곧 먹을 음식에 침을 뱉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의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끈질기다. 사실 몇 번이나 아예 쓰러뜨려서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준 다음에 따먹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왠지 이 여자에게 그런 방법을 쓰는 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이러는 것도 은근히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어쨌든 한 마디로 지금 현은, 재미있었다. 

현은 숨가쁘게 오르내리는 유리의 가슴의 울렁임을 보더니 다시 입주위를 핥으며 유리를 와락 끌어안으려 몸을 날려갔다.

퍼억-!

그러나 이번에도 유리의 펀치가 현의 얼굴에 작렬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자꾸 맞다보니 정말로 아프게 되어버려 현이 얼굴을 옆으로 비틀었고, 유리는 벗길 속셈인지 자신의 브래지어를 잡고 있는 현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크악!!"

깨물리는 건 처음이라 현은 비명을 지르며 강아지를 떨쳐내듯이 손을 마구 흔들어 유리를 떼어내었다. 다시 몇 걸음 물러나는 현을 노려보며 유리는 씩씩거렸고 현은 이를 드러내며 시익 웃었다. 정말로 재미있다. 현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보물을 건졌다는 생각에 얼굴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띄웠다. 앞으로 몇 달간은 심심하지 않겠다. 

{큭큭큭큭......}

이런년일수록 길들여놓으면 가지고 노는 맛이 있다. 현은 사신의 딸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유리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 중국인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꼈다. 무슨 정신병자 같다. 여자에 환장한 미친놈 같았다. 유리는 안 와도 정말 심하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빠에게 정말로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아빠가 무슨 일을 당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치직, {현! 지금 파티장에 사신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중국인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무전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무전기를 꺼내어 뭐라고 중국말로 얘기했다.

{그래?! 지금 바로 갈게! 선물도 있다고. 후후후.}

<{상황이 안 좋아! 갑판으로 가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고 5층 파티장 뒷문으로 조용히 지원 들어와! 알겠나?!}> 

유리는 무슨 무전인지 정신을 온통 무전기에 팔고 있는 남자에게서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 급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지를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현은 유리가 도망치기 시작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뒤따라 달려가면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치직, {지금 대원들이...젠장! 아무튼 빨리와!} ...멈춰라!! {아호! 사격중지...} >

현은 점점 소리가 멀어지다가 무전이 끊겨버리자 인상을 확 구기며 저만치 달아나고 있는 유리의 뒤를 냉랭하게 변한 얼굴로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태현은 가만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테러범들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한다는 미적지끈한 발상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태현이 역시 예정대로 강행돌파를 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대답이 늦어지자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협상을 제안한다!"

태현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피어올랐다. 태현은 살짝 고개를 들어 복면인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저 녀석들에게 지원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태현은 아까 갑판으로 38명의 인질을 데리고 가던 열다섯의 복면인들을 떠올리며 총을 고쳐잡았다. 그때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

"물론 이쪽에서는 전부 무기를 해체하겠다! 그러니.." 

타앙-! 타앙-! 타앙-!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태현이 벌떡 일어서서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세 명의 복면인 가슴에 바람구멍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다시 몸을 숨긴 태현의 귓가로 당황어린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비겁하다! 이쪽에서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나!!"

태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내 협상 방식이거든."

태현은 엄호물이 될만한 소파라든지 도박기기 뒤로 급히 몸을 숨기는 여섯명의 테러분자를 힐끗 보고는 외쳤다.

"당신에게 비겁을 논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된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배분해줄 용의가 있다!"

태현은 똥줄이 타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테러범 두목의 말에 피식 웃었다.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일단 3000만 달러를 이 자리에서 주고 상하이로 도착하고 나면 추가로 3500만 달러를 주겠다! 좋은 조건이지 않는가!"

3000만 달러? 보자...1달러에 대충 1000원이라고 치면 10달러에 1만원 100달러에 10만원 1000달러에...10...아, 100만원..인가?

원래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3000만 달러가 한국돈으로 얼마인지 계산을 잘 못하겠다. 태현은 어쨌든 쓸데없는 계산은 집어 치우고 테러범 두목에게 대답했다.

"지하 창고에 설치된걸 해체시켜라! 이것이 내 요구다!"

"그렇게는 못한다!"

'하...뭐라고?'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테러범 두목의 거절에 태현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저씨...!"

그런데 그때 태현의 귓가에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뒤로 돌아보았고, 거기엔 열두어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요...! 6층에서 떨어진 거예요...!"

주르르르르......

그러면서 그 아이가 밀어서 준 것은 아까 6층에서 놓쳤던 권총이었다. 태현은 싱긋 웃으며 그 아이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해주곤 그 아이가 밀어준 권총을 쉬고 있던 나머지 한 손으로 잡아들었다. 그때 다시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당신에게 우리측으로 돌아서는 것을 제안한다!"

태현의 눈동자가 한순간 움직여 다섯명의 복면인과 그들의 두목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난 다음의 태현의 움직임엔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타앙-! 타앙-!

벌떡 일어서서 왼손의 총으론 슬롯머신 옆으로 뛰어나와있는 한 복면인의 팔을, 오른손의 총으론 블랙잭바(bar) 뒤에 숨어있는 테러범 두목을 노려 그의 바로 뒤편에 매달려있는 둥그런 등을 쏘아 맞춘 태현. 

"크아악...!!"

타앙-! 타앙-! 타앙-!

다시 태현의 양 총구가 불을 뿜었고, 피가 터져나오는 팔을 움켜쥐며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만 복면인의 머리에 그대로 바람 구멍이 뚫리고 말았고 태현에게 총을 발포하기 위해서 숨어있던 장소에서 뛰쳐나오던 복면인 두명은 똑같이 가슴을 탄환에 관통 당하며 쓰러졌다. 

우와아아아아~~!!! 짝짝짝짝~휘이익~!! 짝짝짝짝-!!

이제 카지노쪽에 남아있는 테러분자는 두목을 포함하여 세 명밖에 없었다. 파티장의 홀에서는 그 동안 자신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복면인들이 맥을 못추며 쓰러져가는 모습에 승객들의 박수와 환호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테러범 두목은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일어났다.

"하..항복! 항복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대한독립만세라도 된 것 같다. 결국 떨리는 음성으로 흘러나온, 마치 악마와 같이 느껴졌던 테러범 두목의 항복 선언에 파티장 안의 모든 승객들은 일시에 환호를 터트렸다. 부둥켜 안고 우는가 하면 폴짝 폴짝 뛰며 기뻐하고 이제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면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는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 틈을 헤쳐 태현은 천천히 카지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직, {..어..우와아아!!!..야?! 어디야?!}>

현은 시끄러운 환호소리를 뚫으며 들려오는 진의 신경질적인 무전에 짜증이 치민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파티장 뒷문 바로 앞이야. 이제 들어간다.}

현의 목소리에는 겨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이런 다급한 목소리가 나오게 되게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동료의 무능력에 대한 질책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무전기를 타고 다시 진의 신경질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제기랄! 빨리 들어와!} ...하..항복! 항복이...>

서서히 멀어지는 진의 한국말.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현은 진의 무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티장에서 터져나오는 엄청난 환호소리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곤 뒤에 서있던 미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넌 옆문으로 진입해라.}

{예, 현 대형!}

미키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하곤 뒤에 늘어서있던 부하들 반을 잘라 다섯명을 데리고 재빨리 복도 저 앞쪽으로 달려갔다. 현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자신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혀 흐느적거리며 끌려오던 유리를 파티장 문을 박차고 엶과 동시에 안으로 집어 던져버렸다. 

풀썩-!

유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굉음에 휩싸여 있는 파티장은 새로운 손님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못했고, 그래서 현은 총구를 천장으로 향하고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타앙-타앙-타앙-타앙-타앙-타아앙!!

현의 총소리가 끝맺기 무섭게 저 앞쪽의 파티장 옆문으로는 미키를 위시한 복면인 다섯명이 들어와 천장을 향해 위협사격을 갈겼다.

타다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다당-!!

해방의 순간이 오기가 무섭게 다시 복면인들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더니 파티장 안은 언제 그랬냐는듯 곧 일시에 침묵에 잠기게 되었다. 현은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유리를 잡아 일으키며 총구를 저 앞쪽의 사신에게로 겨누며 외쳤다.

{사신!!} 

갑작스러운 복면인들의 등장에 전잖이 당황하며 엄호물이 될 만한 것을 찾던 태현은 삽시간에 적막으로 휩싸인 파티장의 그 쥐죽은 듯한 공기를 헤치며 터져나온 어떤이의 외침에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태현의 눈이 흠짓 커졌다. 그의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에 자크가 반쯤 올려진 반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윗도리는 벗겨져서 속옷차림만 하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비춰졌다.

똑......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유리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얇은 턱선을 타고 내려가 방울져서 떨어졌다.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있고 푹 꺽여진 머리는 유리가 살아있다기 보다는 죽어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여쁜 몸의 곳곳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방금전 뭐라고 중국말로 외친 남자가 허리를 부여잡고있지 않다면 벌써 넘어져 쓰러졌을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저 몸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현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Drop your weapon!!"

현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태현은 알아듣지 못했다. 

태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축 늘어져있는 딸을 향하는 아빠의 애탄 부름이 흘러나간다. 

"유리야...?"

꼼짝도 하지 않는 유리.

현의 외침이 다시 터져나왔다.

"I said, drop your weapon!"

"아가리 닥쳐!!"

자꾸만 이상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중국인 남자에게 고함을 버럭 지른 태현. 하지만 저 중국인 남자에게 터트린 분노가 지속되기엔 태현의 눈동자에 떠올라있는 유리의 존재가 너무 컸다.

"...유리야. ......유리야...?"

한걸음 한걸음 유리에게로 다가가며 태현이 애타는 음성으로 딸을 불렀다. 그의 붉어진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이 줄기를 만들며 떨어져 내렸다. 어째서 곧바로 지하 창고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째서 쓰잘데 없는 영웅 심리로...맞다. 이건 영웅 심리였다. 정말 병신 쓰레기 같은 영웅 심리였다. 

혹시 저 예쁜 살결에 상처라도 날까 어릴 땐 칼도 함부로 못쥐게 했는데, 그렇게나 아끼면서 애지중지 키워왔는데 도대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지금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유리를 바라보는 태현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겨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아..빠...?"

그런데 죽은 듯이 있던 유리에게서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서히 들리는 유리의 얼굴. 피가 말라붙어 있는 그녀의 예쁜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흐으..윽...아빠아...왜...왜에...이제야...나 구하러..온 거야아......"

그동안 두려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아빠가 구해주러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며 싸우면서 느꼈던 그 서러움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까 창고에서 도망치고 난 다음 잡혔을 때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앞이 아득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잠시 잃었던 것 같았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고나니 맞기라도 한 듯이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손길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유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아픈 건 싫지만 그래도 아빠가 저렇게 걱정해주니 왠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흐윽...아빠아......"

애처로운 유리의 음성.

이곳이 어디인지. 저 많은 사람들은 다 누구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단지 아빠의 저 품에 꼬옥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무서운 것 꾹 참고 나중에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게 끝까지 싸운 것을 하소연해서 '힘들었지..'라고 부드럽게 말해주는 아빠의 따스한 음성을 듣고 싶었다.

딸의 애타는 부름에 유리 이외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태현은 유리를 끌어안으려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아 멈춰져버렸다.

{멈춰라!!}

현의 총구가 유리의 머리에 닿였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태현. 또다시 저 차가운 쇳구멍이 유리의 머리에 닿는 것을 보니 몸서리가 처졌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총을 떨어뜨리며 물기가 스며들어있는 눈빛으로 현을 응시하며 천천히 자신의 웃옷을 벗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이 허리 부근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런닝셔츠 하나로 가려진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태현은 자신이 벗은 반팔 셔츠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제..딸에게..."

유리의 모습을 보니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서 말을 이어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태현은 이를 꽉 물어 울먹임을 참아내곤 다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제..딸이 이것으로..몸을 가릴 수 있게..해주십시오..."

현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사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은 미키에게 고개를 까딱, 했고 미키는 곧바로 태현에게 달려가 그의 옆에 떨어져있던 권총 두 자루를 주워들어 분수대 안으로 던져 넣고는 태현에게서 반팔 셔츠를 받아들어 가지고 왔다. 현은 그걸 유리에게 대충 걸쳐주었고 유리는 아빠의 이런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나에게 한 대 맞을 때마다 네 딸의 발가락 하나씩을 자른다."

진이 현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2000여명의 승객들을 홀 뒤쪽으로 빽빽하게 밀어놓아 장소를 마련하고 자신의 앞에 태현을 세운 현. 그가 다시 말했다.

{네가 날 넘어뜨리면 네 딸의 다리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죄 값을 대신하겠다.}

태현과 현의 사이에 서있던 진이 곧바로 통역을 했다.

"네가 날 넘어뜨리는데 성공하면 네 딸의 다리를 하나 자르는 것으로 봐주겠다."

계속해서 끔찍한 말을 하는 진의 목소리에 승객들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가 날 이기면, 네 딸의 한쪽 발목을 자르는 것으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죄 값을 대신하겠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뉘앙스로 '이기면'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현의 목소리를 진이 다시 조금 바꾸어 통역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네가 날 이기면 네 딸의 발목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봐주겠다." 

굳은 얼굴로 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태현. 그의 귓가로 이어진 현의 말이 들려왔다.

{네가 날 죽이면. 네 딸은 더 이상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무사히 보내주겠다.}

"네가 날 죽이면 네 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태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한 대도 맞지 않고 널 죽이면 되는 것이군."

진이 태현의 말을 현에게 통역해주었고 현은 시익 웃었다. 현은 그리곤 유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질 경우에 넌 내가 보는 앞에서 네 딸을 배 밑에 깔아야 될 거다.}

현의 말에 진은 큭큭거리며 웃더니 다소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통역을 기다리는 태현에게 재밌겠다는 얼굴로 말해주었다.

"현이 말하길, 당신이 지면 당신은 저 아가씨와 섹스를 해야 된다는군. 큭큭큭, 근친상간 말이야. 큭큭큭큭..."

"......!!"

깜짝 놀란 태현이 서서히 얼굴을 굳히며 이를 사려물었다.

"죽여버리겠다."

진은 통역하지 않았다. 그는 카지노로 돌아가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태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복면인들에게 잡혀서 자신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를 담자마자 태현의 눈동자는 그 냉랭한 빛깔을 지워버리며 애틋한 물기를 떠올렸다. 다행히도 묶여있던 손은 풀렸고 셔츠의 단추도 채워졌다. 태현은 자신의 눈빛을 놓치기 싫어 어여쁜 눈망울에 더욱 눈물을 글썽이는 유리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시작할까?}

천천히 자세를 잡는 현을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안 태현은 자신도 서서히 주먹을 끌어쥐었다. 두 남자의 떨어진 거리는 약 3m. 태현의 눈동자가 서서히 물기를 지워내며 차갑게 굳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