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9)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판단 실수였다. 다행히 복도로 들어오는 그들을 먼저 발견해서 객실 안으로 숨긴 했지만 각 객실을 확실히 수색하는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총소리들을 들으니 초조해졌던 것이다. 1층 객실에는 창문이 없어서 도망칠 길도 없었다. 어디에 숨는다고 해도 총소리로 보아 아예 확인 이전에 총질부터 하는 모양이라 어떡할 도리가 없었다. 

타다다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다당-!!

이제 총소리는 바로 옆의 방에서 들려왔다. 태현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찰딱 달라붙어서 자신을 끌어안고만 있는 유리를 보곤 결심을 굳혔다. 

"유리야. 일단 욕실에 숨어있어."

"......혼자는 싫어."

태현의 눈에 비친 유리의 귀여운 얼굴에는 두려움 같은 건 조금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시 말했다.

"아빠도 금세 유리 옆으로 갈 테니까, 잠시만 숨어있어. 알겠지?"

"혼자는 싫어."

하지만 유리는 조금도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얼굴을 들어 아빠를 바라보는 유리.

"혼자 살기 싫어. 죽어야 된다면 아빠랑 같이 죽을래."

"유리야. 누가 죽는다고 그래. 그게 아니라 아빠는.."

"어차피 아빠가 없으면 나도 아빠 따라 죽을 거야. 근데 그러면 억울해. 아빠랑 같은 시간에 죽고 싶어. 아빠 옆에서 죽고 싶어."

유리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고통 따위는 떠올라있지 않았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걸까. 오히려 나중에 일이 꼬여 아빠와 떨어진다거나 자신만 살아남는 그런 상황을 겪을 바에야 지금 아빠 옆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가슴을 저미게 하는 유리의 말에 태현은 딸을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유리야...아빠...절대로 유리 혼자 놔두고 어디 가거나 하지 않아. 꼭 유리 옆으로 돌아올 테니까. 잠시만 여기 숨어 있어. 응...?"

그때 태현이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유리의 가냘픈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흐으..윽......"

소리죽인 유리의 흐느낌이 태현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싫어...흐윽...거짓말하지마...나..다 알아..흐흑, 아빠가...나만 살리고...죽을려구 그러는 거...흐으..윽......"

태현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옆방에서 들리던 총소리도 이제 멈췄다. 태현의 귓가에 이쪽 방으로 걸어오는 복면인들의 발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다급해진 태현은 일단 유리를 안은 채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쉬......"

눈물 범벅이 되어 있는 유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태현이 속삭였다. 유리는 일단 아빠와 같이 들어온 것이 안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를 다시 꼬옥 끌어안았다. 한편 유리를 끌어안은 채 벽에 옆으로 기대어 서서 욕실의 문을 등진 태현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타다다다다다당-!! 덜컥!

{옷장엔 없군.}

중국말이다. 태현은 등 뒤로 가있는 유리의 팔을 끌어내려 자신의 앞으로 모으게 하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연히 이대로 다 포기하고 죽을 생각은 없다. 발자국 소리를 세는 태현. 

'전부 여섯명.'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 명의 발자국 소리가 욕실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태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권총을 보았다. 44구경 매그넘탄이라면 욕실의 문을 뚫고 나가 충분히 복면인의 몸을 관통할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 리볼버 안에 들어있는 탄환이 다섯개라는 사실이었다.

'각오해야겠군.'

몸으로 때우면 한명정도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은 태현은 그들이 얼마의 간격을 두고 서있을지를 계산하며 천천히 셋을 세었다.

'하나...둘...'

치직...

{예. 아홉니다.}

그런데 태현이 셋을 세려는 순간, 밖에서 무전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은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지금 1층 객실을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 지하에는 없었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스(예)', '스'라고 하는걸 봐서 무슨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태현은 유리를 등 뒤에 세운 채 천천히 돌아서서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야. 현 대형이 부르신다. 모두 파티장으로 가!}

{예!}

어쩐 일인지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세었다.

'모두 여섯......'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모두 방에서 나가고 나자, 그제서야 태현은 긴장이 풀리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에 꼭 붙어있던 유리를 끌어안았다.

서서히 말라가던 카나코의 검붉은 핏자국에 아직 온기를 가지고 있는 붉은 핏물이 더해졌다. 힘겹게 움직여 카나코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현준의 손길. 눈 앞이 가물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보다. 그러고 보니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육체의 고통을 느낄 여유도 없을 만큼 지금 마음이 아파왔으니까. 

"미안..해......"

서글픈 음성이 현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복수......해주지 못했어......"

고개를 힘겹게 수그리는 현준.

"흐으..윽...미안..해...해줄 수...있는 게...함께..있어주는..것뿐이라서......미안해......"

서서히 카나코의 위로 현준의 지친 몸이 쓰러졌다. 뛰지 않는 그녀의 심장 고동소리를 느끼는 현준. 그의 눈도 서서히 감겼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애타는 음성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카나코...키미가...스키......혼또니...고코로까라...아이캇따......(......카나코...널...좋아해......정말...진심으로...사랑했다......)" 

서서히 현준의 숨소리가 잦아든다.

{앞으로 73분 남았습니다.}

2m는 넘을 법한 키에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는 백인 사내가 정중한 목소리로 진에게 보고했다. 진은 칵테일을 홀짝이곤 총을 들어 앞에서 덜덜 떨리는 눈으로 카드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 겨누며 말했다.

"패가 뭐지."

"투..투페어..."

타앙-!! 

가슴에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는 중년 사내를 보며 진은 입맛을 쩝, 다셨다.

"난 원페어야."

{완전 지 멋대로군. 큭큭큭...}

진의 패를 본 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은 피식 웃으며 보고를 했던 백인 사내를 불렀다.

{미키. 왕펑에게서 연락은?}

{40분 후에 약속한 지점에 도착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은 고개를 까닥하며 지시했다.

{저자들을 미리 갑판으로 옮겨놔라.}

진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미키는 미리 분류되어있던 백만장자들에게 다가가 서툰 한국말 솜씨로 말했다.

"일뤄선다. 뭐두. 다롸와라."

미키의 말에 대략 40명 가량의 남녀가 두려운 눈길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어디에나 왠만해서는 잘 겁을 먹지 않는 강심장이 있듯이 누군가의 외침이 파티장 안의 적막을 깨뜨리며 터져나왔다.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이 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아마도 중국말을 들을 줄 아는 남자인 모양이었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인 강한 인상의 남자였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가 한국말로 외친 덕분에 파티장 안에는 일대 혼란이 벌어져버렸다. 웅성웅성거리는 속에서 때때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2000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벌떡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피식 웃으며 일단 총을 들어 백만장자 무리속에서 앞으로 걸어나와있는 그 남자를 쐈다.

타앙-!!

"크윽...!"

"꺄악!! 여보...!!"

정확히 심장이 있는 부분에서 피를 뿜으며 그 남자는 털썩 쓰러졌고 뒤에서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그 남자의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남자를 끌어안았다. 아무튼 이 한 발의 총성으로 파티장 안의 소란은 일시에 잠잠해졌다. 진은 천천히 걸아나가 뒷쪽에 서있던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스무명을 헤아리는 복면인들이 열을 맞춰 진의 뒤에 착착착 2열 횡대로 서서 파티장 홀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진은 귀찮은 얼굴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 흠. 아, 아. 모두 잘 들어라. 반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지금 들은 말은 방금 전 남자가 우리의 대화를 엉뚱하게 이해한 것이며 우리의 목적은 지금 뒤쪽에 서있는자들을 상하이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이후에 여러분은 중국 당국에 의해서 한국으로 안전하게 귀송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진의 옆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하,하지만 이 카,카드놀이는 뭐,뭐냐!! 다,다,당신은 사..사,사람을 카드게임에서..져..졌다고 죽이지 아,않는가!!"

끼어든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다음 차례의 카드게임 참가자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해야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목소리는 듣고 있는 사람이 안쓰럽게 느낄 정도로 떨려나왔다. 진은 천천히 그 남자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후후후. 앞으로 차례가 수십, 수백번은 남은 저 사람들이 당신을 동정해줄 것 같나?"

진의 말에 말을 꺼냈던 30대 남자는 다급한 눈길로 파티장의 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것은 자신의 애타는 눈길을 피하는 같은 나라 사람들의 매정한 모습밖에 없었다. 이미 가만히만 있으면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죽음을 무릅쓰며 이 남자 편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젠장...젠장할!! 빌어먹을...안 돼...! 씨발 난 죽기 싫어...! 이 씨바아아아아알!!!"

고함을 버럭 버럭 지르던 그는 파티장 안에 다시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삿대질하며 마구 외쳤다.

"씨발! 그러고도 같은 나라 사람이야?! 엉?! 씨발 한민족 좋아하네, 씨발!! 개한민국 만세다 이 개새끼들아!! 지금 같은 나라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가 있냐!! 이 씨발!!"

처음엔 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이 30대 남자의 눈길을 피하던 사람들이 그의 험한 말이 점점 이어짐에 따라 서서히 인상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직접 소리내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자기도 이쪽 입장되면 가만히 있을 거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언은 다 끝났나."

그때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으려하는 그 남자에게 진이 말했다. 유언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남자는 진을 바라보았고 진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자,자,잠깐!! 나,난 아직 카드도 안 했는데!!"

그러나 진의 총구는 그의 입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내뱉는걸 허락하지 않았다.

타앙-!!

바닥을 서서히 피로 물들이는 남자의 시체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진이 말했다.

"조잘조잘. 네 입이 네 수명을 단축시켰다. Next!" 

1층에서 지하까지는 더 이상 한명의 복면인도 만나지 않았다. 지하1층은 창고로 쓰이고 다시 그 다음부터는 객실이나 유흥시설, 그리고 제일 낮은 층에는 기관실이 위치되어있다. 태현은 유리를 데리고 지하1층으로 갔다. 비상문을 열자마자 바로 하늘을 찌를듯이 높은 천장까지 온갖 가방들이 빼곡히 메우며 창고에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 노란빛을 비추는 백열등이 달려있었지만 창고가 워낙에 넓어서 주위는 다소 어두웠다. 태현은 서늘하고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 숨어있자. 조금 있으면 우리 나라에서 특전대가 올 테니까."

"응......"

유리는 얌전하게 대답하며 태현의 허리만 끌어안고 있었다. 태현은 서늘한 공기에 유리가 추울까봐 그녀의 팔을 쓸어주며 커다란 그물로 가려져서 마치 하나의 벽을 만들고 있는 가방더미로 걸어가서 기대어 앉았다. 유리 역시 아빠 옆에 꼭 붙어 앉았다. 

"아빠."

"응?"

"나...궁금한 게 있는데......"

태현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유리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물어봐."

"......아빠는..."

"응."

"......"

태현은 무엇을 물으려고 그러는지 망설이는 유리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거나 물어봐."

잠시 뜸을 들이던 유리. 결국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첫머리가 전혀 다른 물음이었다.

"특전대는 정말루 우릴 구하러 올까?"

태현도 유리가 결국 궁금한걸 삼킨 것을 알았지만 모른척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오겠지. 거의 다와갈껄?"

태현은 유리를 끌어안으며 따스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줄게."

아빠의 말에 유리는 푸훗,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현석 아저씨한테 만들어 달라구 하겠다. 아빠가 만든 건 너무 싱거워~."

유리의 웃음 섞인 말에 태현은 장난스럽게 딸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요녀석! 짜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에헤헤~."

배시시 웃는 유리의 얼굴. 태현은 왠지 유리의 웃는 얼굴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여기에서 시간을 조금만 더 보내고 나면 특전대가 와서 구출해 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맘 편한 생각을 하며 웃음 짓는 얼굴로 유리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태현의 눈에 저쪽 반대편 벽 구석에서 빨간불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태현. 뭔가 화재 센서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유리야. 잠시만."

태현은 몸을 일으켜 반대편 벽쪽으로 걸어갔다.

"아빠, 왜?"

유리도 태현의 뒤를 꼭 붙어 따라왔다. 

워낙 창고가 넓어 단지 빨간불만 조그맣게 깜빡거리던 게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태현의 눈에 점점 더 그가 본 것의 정체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간불 아래서 조그맣게 시간을 표시하는 부분의 초가 정확히 1초씩 줄어드는 것을 본 순간 태현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빠!"

뭘 봤는지 깜짝 놀라며 달려가는 아빠를 부르며 유리도 급히 뒤따라갔다.

"왜? 뭐야? 이게......"

유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벽 아래부분에 붙어있는 비디오 테이프만한 크기의 검은색 조그만 상자였는데 위쪽에는 동그란 빨간불이 점멸되고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69:37]이라는 빨간 숫자가 조그맣게 점등되어 있었다. 거기다 37이라는 숫자는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1씩 줄어들고 있었다. 

"아빠......?"

무엇을 생각하는지 초조한 눈빛을 좌우로 움직이는 아빠를 유리가 불렀다. 태현은 유리의 부름에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야......"

"응..."

유리도 답답했다. 아빠가 이렇게 뭔가를 갈등할 때 자신이 현답을 말해줄 수 없는 게 너무나 억울했다. 다음말을 재촉하는 유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태현은 하지만 다시 시선을 '그것'으로 돌렸다. 태현의 입가에서 짧은 탄식과도 같은 한숨소리가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도대체...그 녀석들 어쩔 작정인거지......"

"아빠...이게..뭐야?"

유리도 서서히 직감하고 있었다. 시간이 줄어드는 조그만 상자. 태현은 대답을 망설였고 유리는 말을 이어갔다.

"폭탄..이야? 시한폭탄?"

태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옷깃을 꼬옥 부여잡는 유리의 손길을 느끼며 태현은 정말 애가 타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기껏 그 죽을 고비를 넘겨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안전하다 싶게 되었다고 생각했더니만 이번엔 폭탄이다. 거기다 분명히 여기 하나만 설치되어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폭탄의 옆으로 옮겨가던 태현의 눈에 하얀가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다가가 하얀가루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 맛을 본 태현. 

'......여러가지 하는군.'

마약이다. 

태현은 눈을 감으며 잠시 동안 가만히 생각을 했다. 그리곤 천천히 돌아서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아빠...잠시만 어디 좀 갔다 올게. 그러니까 여기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어쩔...려구 그래?"

{이봐. 진. 왕펑 녀석 선물은 잘 챙겨놨어?}

진은 패가 영 시원치 않은지 눈썹을 긁적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지하 창고에 잘 모셔놨으니까 걱정마.}

{이제 슬슬 꺼내놔야할 시간 아니야?} 

{글쎄...천천히 해도 상관없지 않나...?}

그런데 건성으로 그렇게 대답하던 진은 갑자기 왜 현이 그런 말을 꺼내었는지 알겠다는듯이 시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사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거야?}

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미키 녀석이 대원들 데리고 갔으니까 별 수 있나. 아호라도 여길 지키게 해야지. 아무튼 왕펑 녀석 선물은 내가 챙겨놓을 테니까 넌 카드나 열심히 하라고.} 

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하진마. 어디까지나 선물로 가져온 거니까.}

{그러지.}

"......없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구명보트의 수급 여부를 확인하러 다녔던 태현의 눈에 절망감이 감돌았다. 태현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배의 후미에 위치한 구명보트 탑승 장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 하나의 구명보트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초호화 유람선에 구명보트가 없다는 건 당연히 말이 안 되고, 아마도 국제 강도들이 무슨 속셈인지 구명보트를 모두 없애버린 것 같았다. 

"후우......"

담배가 피고 싶다.

만약 구명보트가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구명보트를 찾아본 명분은 승객들이 탈출할 만큼 충분한 구명보트가 확보되어있나를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있어야 할 장소에 구명보트가 없는 것을 보며 점점 들었던 그 생각은 차라리 자신이 구명보트를 찾기 시작한 진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감? 아니다. 지금 이 기분은 그런 게 아니다. 

......자책감.

유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래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나 몰라라하고 유리와 자신만 살려고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애써 자신이 이 상황에서 승객들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겠나라고 생각해보는 자위 따윈 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을 과거의 변명 거리로 삼는 비겁한 짓거리 따윈 할 마음 없다.

태현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엔 서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이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고 있다.

"유리한테..보여주면 좋아할 텐데......"

태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결단을 내려야한다. 이대로 하염없이 특전대를 기다릴지, 아니면 미친척하고 국제 강도들과 싸워서 폭탄을 해체하게 만들지. 

담배를 더도 말고 딱 한대만 피워봤으면...그러면 정말로 머리가 잘 돌아갈 것 같다.

유리는 아빠가 숨어있어라고 했던 곳에서 나와 아빠와 같이 앉아있던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무릎을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 죽은 듯이 앉아있었다. 아빠는 자신과 탈출할 구명보트를 알아보고 오겠다고 그랬다. 하지만 특전대가 금세 올 테니 구명보트를 탈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 뭐하러 구명보트 찾아보러 간 거야?'

유리는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생각했다.

'혹시 특전대가 저 폭탄이 터지기 전에 안 도착하면 어쩌지...? 그러면 아빠랑 나 둘이서만 도망쳐야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에 유리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그런 잡념들을 떨쳐버렸다. 아빠가 분명히 말했다. 특전대가 금세 올 것이라고.

"아빠......"

유리의 곁으로 외로운 음성이 흘러나갔다. 특전대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특전대보다도 아빠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때 유리의 귓가에 창고의 비상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활짝 웃었다가 금세 일부러 삐진 얼굴을 하며 아빠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말할 생각으로 창고로 들어온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왠걸, 들어온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이상한 처음보는 남자였다. 깜짝 놀란 유리는 급히 바로 뒤편의 가방더미 뒤로 숨었다. 

{제기랄. 어디에 놔뒀는지 묻는걸 깜박했군.}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였는데 중국말 비슷한 낯설은 말로 말했다. 유리는 콩딱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 가방 틈새 사이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빌어먹을. 사신 녀석이 빨리 안 나타나니까 이렇게 지겨워진 거잖아. 제길. 그 녀석과 붙어볼 절호의 기회인데......}

뭔가를 찾는지 가방더미들을 퍽퍽 차서 무너뜨리며 자꾸만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 남자를 보며 유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나 이쪽으로 오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긴장이 된다. 그런데 유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그 남자가 유리쪽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유리는 깜짝 놀라며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만 보았고, 그 남자는 잠시 이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손가락을 탁 튕기며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곳 옆으로 갔다.

{미키 녀석이 왕펑 선물 옆쪽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그랬지.}

반대편쪽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유리. 그 남자는 폭탄의 옆쪽에 쌓여있던 가방더미들을 헤치더니 서류가방같이 생긴 가방을 꺼내어 열었다. 

{큭큭큭. 미키 녀석, 눈이 쾡하다 했더니 벌써 한 번 빨았구만.}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궁금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유리는 그 남자가 가방 안에서 샤프만한 크기의 투명한 통을 꺼내어 손바닥에 탁탁탁탁 뭔가를 털어 놓는걸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남자는 그러더니 손바닥에 늘어놓은 뭔가를 코로 스치듯이 훑어서 한 번에 다 빨아들였다. 고개를 젖힌 채 몸을 부르르 떠는 남자를 보며 유리는 방금 저 남자가 뭘 마셨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안전한 곳에 있으니 두려움보다는 신기함이 앞섰다.

'우와...마약은 저렇게 먹는 거구나...입으로 먹는 게 아니었어......'

그 남자는 한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니 가방을 가지고 비상문쪽으로 걸어갔다. 유리는 잔뜩 긴장한 채로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이 철컹,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으휴...아빠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유리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비좁은 가방더미들 사이에서 나왔다. 

{큭큭큭. Bingo~.}

"......!!"

문쪽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쪽을 바라본 유리. 그곳에는 나간줄로만 알았던 방금 전 그 남자가 시익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현은 확실히 하기로 했다. 카나코의 방으로 가서 또하나의 44구경 매그넘을 챙겨서 두개의 리볼버에 탄환을 다 채워 넣은 후 보조 탄환들도 확실하게 챙겨온 태현. 그는 아무도 없이 자동항법장치의 명령에 따라 혼자서 움직이고 있는 조타장치를 보며 선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 앞으로 카나코와 윤현준이 쓰러져 죽어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현은 예상치 못했던 현준의 죽음이 놀랍고 안타까웠지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줄 만큼 지금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태현은 한국 특전대에 구원 도착 예정이 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통신장치로 걸어갔다. 그런데 통신장치는 파란불을 깜빡거리며 통신요청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태현은 이어셋을 끼며 통신요청을 수락했다.

"......예!"

<치직...여기,는 치직,한,국 특전공수대다! 신..치직,을 밝혀라!>

시끄러운 무전 잡음 소리와 함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은 급히 소리를 죽여 재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아직 인질로 잡히지 않은 승객입니다. 특전대의 구원은 언제 도착 예정입니까?"

<치직,칙...구원..치직,지연될..치직,같다! 지금..치직,칙,..국 영해..안으로,치직,...해서 중국 당국에,치직,..조를 요청 중! 치직,칙...>

"지연?! 이봐! 들리나? 지금 이 배엔 폭탄이 설치되어있다! 지연이 되면 승객 전원이 위험.."

<...시간 후,치직,..착 예정! 반복한다! 치직..세시간 후, 치직, 도착 예정! 치직, 치지지......>

"뭐? 세시..이봐!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이 배는 폭발한다! 그때까지 빨리 폭탄처리반을 보내지 않으면...!"

뚜..뚜..뚜..뚜..뚜..뚜......

다급한 태현의 음성은 매정하게 울려오는 신호음에 끊어졌다. 

"제길......"

태현은 이어셋을 벗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44구경 매그넘을 보았다. 일단 유리가 지하에 안전하게 숨어있으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최악은 최악이다. 

"후우우......"

한숨을 내쉬는 태현. 가만히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마음의 결정을 내리던 그가 곧 서서히 눈을 떳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태현의 음성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제대로 맞출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송기룡. 그는 올해로 딱 서른이 된 프로 사진사였다.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을 때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이상한 궤변을 일상의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그였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특별히 캠코더를 준비해서 일생에 다시 없을 경험과 풍경들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윙......

그래서 지금 그의 가슴은 미칠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테러범들의 실제 모습을 영상으로 담을 수 있다니. 미친척하고 서른살 여름휴가 기념으로 이 비싼 배에 타길 정말로 잘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꼭 맞게 들려 소매 안으로 감추어진 채 파티장 안의 영상을 몰래 녹화하고 있던 기룡의 소형 캠코더에 몇 분 전부터 새로운 게임을 즐기고 있는 테러범 두목의 모습이 잡혔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두 명의 젊은 남자 중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에게 총구를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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