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9)

"우와..아......"

유리는 지현이 펴 놓은 커다란 007가방 안에 가득 들어있는 수많은 총들을 보곤 입을 딱 벌렸다.

"아무 거나 좋은 걸로 고르세요."

태현 역시 놀란 것은 유리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 많은 총기류를 승선할 때 어떻게 통과시켰는지 하는 의문은 둘째 치고, 그보다는 이 무거운 가방을 여자 혼자서 어떻게 옮겼을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가방도 컷고 총도 많았다.

'......혼자?'

"참. 그러고보니 동료가 한명 더 있다고 그러셨는데, 혹시 윤현준씨인가요?"

태현의 물음에 지현이 놀랍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아까 다같이 만났을 때 자신과 그가 아는 사이였다는 것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현은 '역시 그랬군.'하는 표정으로 다시 총 가방으로 시선을 돌리는 태현을 보며 의미있는 웃음을 지었다. 역시 괜히 암흑가를 평정한 남자가 아니다.

한편 곰곰히 가방 안을 살펴보던 유리가 잽싸게 저격총 하나를 꺼냈다.

"난 이거!"

올바른 자세로 앉으라는 그런 말은 어릴 때부터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똑바로 앉는 건 언제 익혔는지 침대에 허리를 곧게 편 채 앉아서 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총을 살펴보고 있던 유리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태현은 깜찍한 목소리로 제대로 들고 다닐 수도 없을 것 같은 총을 꺼내는 유리를 보곤 피식 웃고 말았다.

"안 돼. 유리는."

"치! 왜? 나도 싸우고 싶어."

금세 삐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태현은 말했다.

"그건 너무 커서 안 돼. 유리 넌 그냥 조심해서 아빠 뒤만 따라와."

유리가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따위의 행동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일어나는 결과의 무거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아쇠는 가볍게 당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태현은 당연하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유리는 볼을 부풀리며 일단 들고 있던 총이 무거워서 침대로 도로 내려놓고는 봐준다는 얼굴로 가방에서 44구경 매그넘 하나를 꺼내었다.

"알았어. 그럼 그냥 이걸루 할게."

사실 생긴건 무섭게 생겨서 방금 전 총이 더 좋았는데 정작 들어보니 너무 무거웠었다. 태현은 두손으로 권총을 꼭 잡고 얼굴로 당겨들어 자기가 생각하기에 그럴듯한 자세를 잡아보이는 유리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귀여워 보이는 건 참 귀여워 보여서 좋긴한데, 귀엽게 생겼다고 해서 총알이 비켜가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태현은 유리의 옆에 앉아서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빠한테 줘."

"왜? 아빠도 이게 마음에 들어?"

44구경 매그넘. 굳이 따지자면 얽힌 사연이 참 많기도 많은 총이었지만 어쨌든 이것과 관련된 기억들 중 즐거웠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기 위해서 썼던 것이니까. 태현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 위에 총을 내려놓은 유리에게 부드럽게 타이르는 음성으로 말했다.

"유리야. 총 같은 건 함부로 들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유리 네가 생각해봐도, 예를 들어 전쟁을 할 때 총을 안 든 적군보다는 총을 든 적군을 먼저 쏘겠지?"

"응...아무래도 그러겠지." 

태현은 유리가 금세 이해하자 빙긋 웃으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유리는 전혀 이해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아빠가 그거 하고 싶으면 난 이거 할게."

그러면서 꺼낸 것이 데져트 이글이라는 강력한 반동으로 악명 높은 권총이었다.

"윽, 무거워."

한손으로 꺼낼려다가 안 되겠는지 두손으로 꺼내어 자신 앞에 보이는 유리를 보며 태현은 고개를 절레 절레 가로저었다.

"알았어. 그럼 그냥 그건 아빠 주고, 유리가 이거 가져."

유리는 아빠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방금 그 커다란 총 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거도 무지하게 무거워서 사실 좀 난감했었다. 태현은 유리에게 총을 받아든 후 말했다.

"잠시만. 아빠가 이거 파워 더 세게 해서 줄게. 거기 가방 위쪽에 있는 총알들 좀 줄래?"

"응!"

파워를 더 세게 해서 준다는 아빠의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유리는 생글거리며 가방에서 탄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편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유리의 시선을 돌려놓는데 성공한 태현은 잽싸게 44구경 매그넘에서 총알들을 모조리 빼서 일단 호주머니 안에 넣어둔 뒤 유리를 불렀다.

"유리야. 여기."

총알들도 종류가 여러가지라 일단 안에 있던 것들은 다 꺼내놓고 보던 유리는 태현이 건내는 권총을 기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받아들었다. 이걸로 자신도 아빠를 지켜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서 선장실로 가요."

그때 재미있다는 얼굴로 부녀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던 지현이 말했다. 태현은 유리가 건내준 탄환들을 대충 챙기는 척하며 도로 가방 안에 넣어버리곤 유리를 뒤에 세우고 지현을 따라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타아앙-!!

이제는 총소리가 울려도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단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소리 죽인 울음소리들이 더욱 서글퍼질 뿐. 

"Next."

남자의 말에 30대 사내의 시체가 끌려나갔다. 그리고 다음번 이 죽음의 게임 참가자는 다름 아닌 아까 유리와 좋은 대결을 펼쳤던 모델이었다.

"Lady."

그런데 두려움으로 덜덜 떨며, 자신을 빙긋이 웃는 얼굴로 쳐다보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에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를 불렀던 현준은 윙크를 찡긋 하며 앞으로 나섰다.

"살아나면 나중에 데이트 해줄 거죠?"

무슨 말인지 몰라 떨리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현준은 피식 웃더니 차례를 한번 건너뛰어 자신이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흥미로운 얼굴로 현준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손가락을 한번 튕겼고 현준의 앞으로 이제껏 단 한사람도 맛보지 못했던 칵테일이 놓여졌다. 현준은 칵테일 잔을 들어 남자에게 감사를 표해주고는 한모금 맛을 봤다.

"괜찮은데."

현준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 짓는 남자.

"난 Jin이라고 하는데. 이름이 뭐지?"

"블루잭."

현준은 겜블링을 할 때의 예명을 말하곤 금으로 도금되어있는 담배곽을 품에서 꺼내어 진에게 들어 보였다.

"한대 피워도 상관없지?"

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 타버린 시가를 바닥에 버리곤 새로운 시가를 피워 물었다. 사실 계속 반복되는 한번, 혹은 희생자의 운이 좋으면 두번이나 세번 정도의 게임과 그에 따라 이어지는 살인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그래서 지금 갑자기 나타난 이 한국인 청년은 무척이나 진의 흥미를 돋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문 현준은 하얀 연기를 테이블 위로 뿜어내며 말했다.

"룰렛은 재미 없으니까 포커로 게임을 바꾸는 건 어때?"

진은 시익 웃었다.

지현이 보기에 태현이 생각하는 권총의 사용법은 보편적인 일반 사람들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듯했다.

"커헉!!"

또 한명의 검은복면 사내가 권총 손잡이에 뒤통수가 찍혀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5층을 지나 6층. 모두 아홉명의 복면인을 쓰러뜨리고 선장실에 도착해서 단 20초 만에 세명의 복면인을 제압해버리는 태현의 신기스러운 실력은 지현의 얼굴에 경외감마저 떠오르게 만들었다.

유인 후 제압. 작전은 단순했지만 그 솜씨가 너무나 절묘했다. 그래서 그의 암묵적인 명령으로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은 단지 복면인들이 쏘는 총알의 방향에 유리가 서있지 않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빨리 구원 요청하세요."

복면인들을 한곳에 모아두며 태현이 그렇게 말했다.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통신 설비를 통해 한국 특전대에 구원 요청 메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유리야. 어디봐."

대충 복면인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태현이 유리를 다가오게 해서 그녀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 안 다쳤어?"

"으..응..."

유리는 자신을 향한 걱정이 가득한 아빠를 바라보며 기분 좋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의 표정을 본 태현은 걱정이 덜컥 든 얼굴로 재차 물었다.

"진짜 어디 안 다쳤어?"

유리는 입술을 한번 꾸욱 깨물더니 약간 화가 난 음성으로 말했다.

"아빠는 내가 어디 다쳤으면 좋겠어??"

"아,아냐. 미안해..자꾸 물어서."

급히 사과를 하는 태현. 유리의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아빠가 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아,아니..."

유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어서 태현은 당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유리는 그런 아빠를 보며 물기가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그러면 왜 그렇게 막 함부로 이 사람들이 총 쏘는 한 가운데 뛰어들고 그래? 내가 아빠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으,응?"

일단 유리가 왜 화가 났는지 대충은 짐작하겠다. 하지만 잘못한 게 있냐니.

커다란 눈망울이 원망을 가득 담아 노려본다.

찔끔 하는 아빠를 바라보며 유리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 괴롭히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렇게 막 함부로 싸우고 그러면 내가 어떤 기분이 들지는 생각 안 해봤어? 나...가슴이 너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꼬옥 깨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를 태현은 가슴 깊이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유리 생각도 안 해주고 그렇게 싸워서......"

하지만 유리는 아빠를 마주 끌어안아주지 않았다.

"......왜 총은 안 쏘는 거야?"

"그건......"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유리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더군다나 하필이면 지금 들고 있는 총이 데져트 이글이라 이걸로 사람을 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광경에 유리가 어떤 충격을 받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앞으론 쏴. 내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구."

아빠의 옷깃을 꼭 부여잡으며 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부드럽게 딸의 머리결을 쓰다듬는 태현. 

"알았어......"

그리고 태현의 나지막한 음성이 이어졌다.

"...유리야..아빠가 한쪽눈을 깜빡 거리면 두 눈을 꼭 감는 거야. 알았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유리. 마침 구원 요청을 끝낸 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유리야. 잠시만. 이거 좀 들고 있어줄래?"

유리는 지현의 부름에 아빠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곤 아빠의 부드럽게 미소지어주는 얼굴을 애타는 시선으로 한 번 올려다 보곤 지현에게로 다가갔다.

"예......"

유리는 들고 있던 권총을 옆의 선반에 올려 놓곤 지현이 내미는 권총을 받아들려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유리의 손목을 확 낚아 챈 지현이 유리를 뒤돌려 세워 목을 한 팔로 끌어 잡곤 유리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꺄악! 왜,왜그래요 언니!"

지현은 깜짝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태현에게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의 정태현도 여기까지군. 빨리 총 버려."

태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총, 버리라고 했어."

아까 확실하게 봐두었다. 그에게 있어서 3m가량의 거리는 바로 옆에 서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지현은 일부러 지금 그와의 거리를 5m이상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아..아빠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어찌할 줄 모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유리를 본 태현은 지현에게 손을 들며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하곤 천천히 바닥에 총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태현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현은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간 것에 만족스런 표정으로 태현에게 말했다.

"당신, 김형필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

흠짓 놀라는 태현을 보며 지현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당신. 당신에게 갔던 유길수와 지우철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지?" 

"......!!"

태현의 얼굴에 더욱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떠올랐다. 지현은 유리의 머리에 코를 묻어 그곳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내음을 한 번 맡곤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당신의 거절로 당신의 아우들과 당신, 그리고 이 귀여운 꼬마까지 다 죽게 되었으니까."

"무슨...말이냐."

지현의 입가엔 이미 승리자의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내 본명은 야마구치 카나코. 야마구치 타사부로의 딸이다."

태현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김..형필......"

한숨과도 같은 음성이 태현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태현은 서서히 노기가 서리는 눈빛을 들어 지현, 아니. 카나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국을 팔아넘긴 댓가로 김형필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지?"

"한국에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굳이 우리가 가져가진 않아. 거기다 우리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그는 홍콩을 가지게 되지."

태현의 입가에 고소가 머금어졌다.

"너희들은 중국마저 먹을 생각인가."

카나코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삼합회 정예 부대가 인천에 도착해 있을 거야. 곧 죽은 목숨들이 되겠지. 김형필과 야마구치구미는 굳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 유길수와 지우철이 대신 싸워줄 테니까."

태현은 이를 사려물었다.

"......채지현. 한국명을 내 아내의 이름으로 정한 것도 일부러 그런 것인가."

"그래야 당신에게 더 접근하기 쉬워질 테니까."

그때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유리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말이야? 언니는 국가비밀기관의 요원..."

"후후훗. 유리야." 

유리의 음성을 카나코의 웃음이 가로막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전부다 언니가 거짓말한 거야."

유리는 카나코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이지? 지금 아빠랑 나 놀리는 거지...?" 

너무나도 순진해서 더럽히는 재미를 톡톡히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은 유리를 보며 입가에 비소를 머금은 카나코는 유리 얼굴의 새하얀 살결을 핥으며 말했다.

"귀여워...후훗, 가지고 놀면 재밌겠어."

"내 딸을 건드리면."

그때 싸늘한 음성이 카나코의 몸을 움찔 떨리게 만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태현을 바라보는 카나코. 그녀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죽인다." 

카나코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김형필의 말이 떠올랐다. 화가 난 정태현의 눈은 절대로 똑바로 마주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카나코는 살기가 서려있는 태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피하며 애써 태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치 갑자기 공기가 무게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처럼 어깨를 뻐근하게 짓눌러오는 싸늘한 무게감 때문에 카나코의 음성은 조금 떨려서 흘러나왔다.

"어..찌되었건,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

"당신과!"

하지만 갑작스레 터져나온 태현의 음성은 카나코의 목소리를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지금 이 배를 점거한 국제 강도들은 한 패거리가 아니야."

갑작스런 태현의 음성에 움찔 놀랐던 카나코는 그의 말에 제법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날 이용해서 여기까지 와서 구원요청을 보냈으니까."

어느 정도 살기가 걷혀있었다. 그래서 카나코는 이제 다소 여유를 가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답이야. 하지만, 한물 간 싸움꾼이라길래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아직도 놀라운 실력이더군."

태현이 말했다.

"날 죽일 건가."

"물론. 그럴려고 당신에게 접근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까."

"국제 강도가 이 배를 점거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겠군."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한쪽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으로 눈을 몇 번 비벼서 들어간 것을 나오게 하는 태현을 보며 카나코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런 계획도 세울 수 있었던 것이잖아."

국제 강도가 들이닥친 유람선에서 총에 맞아 죽는 것은 특별히 따로 범인을 밝혀낼만한 죽음이 아니다. 살인자는 당연히 국제 강도들일 테니까. 유리가 두 눈을 꼬옥 감는 것을 본 태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타사부로의 왼쪽눈은 아직도 여전히 회복이 안 되었나."

카나코는 이를 사려물었다.

"덕분에. 아버님은 반드시 너의 왼쪽눈을 가져오라고 하시더군."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으니 조용히 죽어주지. 대신, 유리에게 마지막으로 줄 게 있다."

카나코는 유리의 머리에 총을 고쳐 대고 말했다.

"뭔데. 허튼짓하면 당신 딸은 바로 죽는 거야."

태현은 슬픈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뭔가를 꺼내어 펴보였다.

"오백원?"

어이없다는 얼굴로 태현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동전을 바라보는 카나코. 한편 그녀의 시선을 왼손으로 집중시켜 놓은 태현은 살며시 오른손을 뒤로 빼돌려 바지 뒷춤에 꼽아 놓았던 조그만 권총을 꺼내었다.

카나코가 무슨 엉뚱한 짓이냐는 표정으로 태현의 얼굴을 바라 본 순간, 태현은 카나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타앙-!!

"꺄악!"

유리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크하악..!!"

태현이 쏜 총알의 첫발은 방아쇠에 걸쳐져 있던 카나코의 손가락 겉부분을 스쳐 그녀의 머리카락을 뚫고 지나갔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총알은 유리의 목을 끌어잡고 있던 그녀의 팔과 유리가 서있는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서 보이는 카나코의 한쪽 다리에 각각 명중되었다.

총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의 신음소리를 흘리는 카나코를 시선에서 지우며 태현은 꼬옥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려는 유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야...!! 괜찮아...? 무서웠지...?"

사실 아까 유리가 건내준 탄환들을 도로 가방 안에 집어 넣을 때 두 사람 몰래 조그만 미니 권총 하나를 꺼내어 숨겨왔었다. 한 손으론 여전히 카나코에게 총을 겨눈 채 방금 전까지 차가운 총구가 맞닿아있던 유리의 관자놀이 부근을 어루만지는 태현. 그의 얼굴엔 지금 바로 전까지 꾹 눌러 참고 있었던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있었다. 냉정한척했지만 인생에 있어서 이런 건 몇 번 없었다고 생각될 만큼 조금 전 태현은 정말로 무서웠었다. 혹시 실수일지라도 이 여자가 유리에게 총을 쏴버리는 건 아닐까하고.

"아빠..아......"

태현은 가슴에서 느껴져 오는 딸의 음성에 간신히 마음을 놓으며 유리를 끌어 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흐윽..아빠아......"

자신의 가슴을 꼬옥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유리. 이 아이에게 총을 겨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 여자는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다. 태현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카나코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하군. 일곱판이나 연속으로 스트레이트 플러쉬 아니면 포커라니."

진의 말에 현준은 으쓱하며 새로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그때 검은 복면 사내 하나가 진에게 다가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케시가 당한 것같습니다.}

{Y조는?}

{일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나머지 대원들이 객실을 수색 중에 있습니다.}

현준은 중국어로 말하는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끈 채 담배만 뻐끔거리며 하릴없이 자신의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카드들을 담배곽으로 쳐서 한곳으로 모아 놓기 시작했다. 별 표정의 변화 없이 현준이 모은 카드를 탁탁 튕기는 것을 쳐다보며 진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신이냐?}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타앙-!! 타앙-!! 타앙-!!

6층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진은 시익 웃으며 옆에 앉아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현을 바라보았고 그는 벌써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아호.}

진의 부름에 뒤쪽에 서있던 체구가 좋은 복면인 하나가 다가왔다.

{현을 따라가라.}

{존명.}

보고하러 온 복면인에게서 기관단총을 뺏어든 현이 벌써 저만치 달려가버렸고, 진의 명령을 받은 아호라는 사내와 그의 대원 열두명이 현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가 날 이용했듯이 나도 널 이용했다. 혼자서 싸움과 유리를 지키는 것을 둘 다 하는 건 좀 힘들었으니까."

"언제..부터 눈치 챈 거지..."

카나코의 힘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유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카나코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 유리가 먼저 카나코를 볼려는 몸짓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아빠의 가슴을 온 힘껏 끌어안고 있을 뿐.

"난 치밀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아니, 세울 줄도 모르지. 하지만 직감만은 상당히 정확했다. 당신이 여자로서 보기 드문 운동 능력으로 4층 객실로 들어왔을 때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런 능력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당신과 만났을 일은 없을 테니까."

"후후..크..으윽...후후...내가 내 무덤을 판 꼴이로군."

카나코는 살이 찢어지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태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남자의 척살 명령을 받았을 때, 괜히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들었지. 후후..크..윽...후후후...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더군. 당신이 간단하게 제압..해..버린 그 녀석들은 우리 야마구치구미의 일급..격투가들이었어."

태현은 굳은 얼굴로 카나코에게 말했다.

"그들이 정말로 일급 격투가들이었다면, 너희 야쿠자들이 한국 건달계을 삼키는 건 아직 30년은 이르다."

"...벌써 눈치 챈 건가...후훗, ......하긴 어찌보면 너무..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었지..."

카나코의 말은 단지 일본이 한국에 원하는 것은 김형필의 협력뿐이라는 자신의 말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속일 수가 없는 남자다.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형필도 한국은 온전히 자신에게 주겠다는 너희의 약속을 곧이 곧대로 들은 것은 아닐 거다. 누가 봐도 중국을 삼킨 너희들이 한국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으니까." 

"......"

태현은 입술을 씹어물며 시선을 피하는 카나코를 잠시 바라보곤 이어서 말했다.

"급소는 피해서 쏘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유리를 데리고 선장실에서 나가려했다. 

"죽여줘."

그때, 뒤에서 카나코의 음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유리를 앞에 세우고 카나코를 등진 채 말했다.

"네가 불쌍해서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헛웃음이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의 딸과 알고 지낸 사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죽이지 않는 건가."

"......"

"이대로 야마구치구미에 돌아가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할복밖에 없게 된다."

"어째서요?!"

그때, 아무런 말 없이 아빠에게 꼭 붙어서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유리가 홱 돌아서서 카나코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그런 삶을 사는 거예요? 어째서...어째서 언니 자신의 인생을 살려하지 않는 거냐구요!"

카나코는 가만히 유리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행복감에 폭 싸여 자라온 것을 저 어여쁜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삶. 주워져와서, 양녀로 받아들여졌고, 어릴 때부터 오로지 고달픈 훈련만을 거듭해왔던 인생. 자신은 단 한차례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저 아이는 평생에 걸쳐서 받으며 살아간다. 저리도 쉽게 아버지에게 포옹을 받을 수 있다니...... 

"난......"

카나코의 입술에서 애달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저 아이가 매일마다 느끼는 행복을,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야 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행복감만을 느끼는 그런 하루를. 단 한 번만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어릴 때..아침에 눈을 뜨면...다른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하루 종일 받았고...나이가 들어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어디의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

"......"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나코는 그런 유리를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유리가 너무 부러워. 그러니까...앞으로도 계속 계속 행복하게 살아줘. 언니를 대신 해서라도. 어디에 있든지...언니는 널 떠올리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거 같아......"

"왜...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마치 금방 죽을 사람 같은 말을 하는 카나코에게 유리가 두려움이 섞인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카나코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미소만을 지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이들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답지 않게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렇게도 많은 말을 했었다. 

자신이 죽고나면 딸이 어떤 짓을 당할지 그가 걱정하게 만들기 위해 유리를 그런 짓궂은 말로 놀렸다. 그리고, 그랬기에 태현이 자신에게 총을 쏘았을 때 마음속으로 기뻐했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어여쁜 소녀를 죽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이렇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딸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뿜는 총구들 앞으로 뛰어들고, 그런 아빠를 보곤 비명을 지르며 뒤쫓아 달려가는 소녀. 이들 부녀를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은 이들의 사랑을 깨뜨릴 자격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고.

"......누군가 오고 있어."

그때 카나코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태현 역시 들었다. 

"아빠...?"

유리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자신을 끌어당겨 문에서 떨어지는 아빠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창문을 깨고 나가세요."

"......" 

태현은 굳은 얼굴로 카나코를 한 번 바라보더니 옆의 선반에 올려져 있는 44구경 매그넘을 집어 탄창을 열고 호주머니 안에서 탄환을 꺼내어 채워 넣었다. 

"총알...없었던 거야?"

유리의 말에 태현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선장실 정면의 창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태현과 몸을 일으켜 앉은 카나코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나코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태현을 마주보았고, 태현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볼 수가 없어서 암흑으로 물들어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했을 겁니다."

카나코는 아무런 대답 없이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태현의 권총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타앙-!! 타앙-!! 타앙-!!

세발의 매그넘탄이 선장실 정면의 창문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유리도 이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어지러운 군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태현은 유리를 감싸 들어 안고 구멍이 난 창문으로 달려가려했다. 하지만 유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태현의 발을 멈추었다.

"자,잠깐만! 언니는! 언니는?!"

카나코는 자신을 다급한 얼굴로 바라보는 유리에게 살며시 미소지어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그녀의 권총이 들려있었다. 태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껏 달려가 선장실 밖의 암흑으로 물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싫어어-!! 언니이......!!"

서서히 멀어지는 유리의 음성을 들으며 카나코는 마치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행복하게 살아야해 바보 아가씨. 내 몫까지......"

이제 군화들 소리가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카나코의 눈빛이 바뀌었다. 

푸슝-!! 푸슝-!!

카나코의 한발 앞선 공격에 대책 없이 뛰어들어온 두명의 복면인이 정확히 이마 한 가운데에 구멍이 난 채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그러나 카나코가 쓰러뜨릴 수 있었던 복면인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선장실 밖에서 복면인들이 총만 안으로 들이민 채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타닥, 탁...

"흐윽......"

카나코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몇 발을 맞은 걸까. 그녀의 옷은 붉은빛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털썩......

바닥으로 힘없이 카나코가 떨어져 내렸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챙그랑-!! 채쟁, 핑, 타다다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총소리들과 창문이 깨어지는 소리, 선장실 안의 기재들이 부서지는 소리들이 점점 아득해져온다. 카나코의 아름다운 얼굴을 타고 가느란 눈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애달픈 슬픔을 담고 있는 그녀의 가냘픈 음성이 시끄러운 총성을 타고 힘겹게 흘러나왔다.

"......오토상...혼또니...아타시노 코토...아이시테루......?(......아버지...정말루...나...사랑했어......?)"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그녀의 시선 앞으로 아버지 야마구치 타사부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두웠다. 밤이었을까. 발목에서 따뜻한 느낌이 느껴져 왔다. 낮에 훈련을 하다 발목을 약간 접질렸었다. 조금 내려가 있는 이불을 아버지가 목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곤 다시 물수건을 뜨거운 물에 담근 뒤 꼭 짜곤 부어있는 발목에 올리고 살며시 꾸욱 눌러주었다. 따뜻했다. ......발목보다 가슴이 더......

두 눈을 감은 카나코의 얼굴에는 아련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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