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9)

찰칵-쨀깍.

그런데 태현이 문을 여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태현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소리가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총이 장전되는 소리. 태현은 흠짓 놀라며 온 힘을 다해 달려가 침대 위에 주저 앉아 있는 유리를 끌어안고는 벽 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털썩-!

"크윽!"

누군가 문을 박차며 여는 소리, 유리가 떨어질 때 충격이 적도록 그녀를 자신의 위로 하고 태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 충격의 여파로 터져나온 태현의 신음 소리와...

타다다다다다다당-!! 파방 팡 팡 피빙~!

자동 소총이 불을 뿜는 소리가 방 안으로 터져나오며 불과 2초 전만 해도 유리가 넋을 잃고 앉아 있던 자리에 순식간에 수십발의 총알 자국이 났다.

"어,어...아,아빠. 무슨...소리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리도 그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 전만 해도 아빠와 자신이 있던 침대에 오리깃털이 날리는 모습이 비춰졌다.

"......!!"

두 눈망울이 화등잔만해지는 유리. 태현은 유리가 놀람에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그녀의 입을 막으며 숨죽여 말했다.

"쉬...조용히 해...아빠가 지켜줄테니까."

이 객실은 일단 방 문을 열면 약 2m가량 길이의 양 옆이 막힌 입구를 통과해야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구조다. 유리는 아빠의 숨죽인 음성에 경황 중에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아마도 자신의 순간 대처 능력을 보고 총을 쏜 사람(들)이 방 안 진입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유리를 벽에 붙여둔 채 천천히 일어났다. 유리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급히 태현의 손을 잡았지만 태현은 시선을 반대편 벽(입구 통로가 있는)에 고정시켜둔 채 유리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줌으로써 그녀에게 괜찮다는 말을 대신 해주곤 살금 살금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총을 소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서로 간의 거리를 0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다.

태현의 발달된 귀에 상대편의 발자국 소리가 지척으로 들려왔다.

'하나...둘...'

천천히 마음 속으로 카운트를 세는 태현. 도대체 이게 마른 하늘에 왠 날벼락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사건의 정황은 나중에 따지고, 지금은 자신과 유리를 향해 발포를 한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게 중요했다. 최소한 유리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 상대편은 몇 명일까?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분명 한명이다.

매우 짧은 시간, 태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셋!'

모든 계산을 머릿속으로 끝낸 태현이 셋을 센 순간, 유리의 눈에 총구의 끝이 보이고 아빠가 입구 옆에 벗어놓았던 슬리퍼 한쪽을 위로 차올리는 게 보였다.

타다다다다다당--!! 채쟁! 챙! 깽그랑~챙!!

그 순간 총구에서 불이 뿜어지고 공중에 뜬 슬리퍼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걸레가 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객실의 유리창 쪽으로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유리의 눈에서 몸을 한껏 숙인 태현이 입구의 통로 쪽으로 사라졌다.

"......!!"

총이 불을 뿜고 있는 곳으로 아빠가 뛰어들다니!!

유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한편 통로로 뛰어든 태현. 총을 쏘면 반드시 그 반동으로 총구가 점점 위를 향하게 된다. 그 때문에 태현이 일부러 상대를 자극시켜 총을 발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현의 눈에 한순간에 그의 눈 앞의 광경이 마치 사진이 찍히듯 인식되었다. 모두 네명. 이 녀석까지 합치면 다섯명. 태현은 깜짝 놀라는 검은색 작업복 차림에 검은색 복면을 쓴 사내의 오른쪽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중지는 눌려진 방아쇠 뒷편에 박혀서 방아쇠를 원위치 시켰다. 그리고 총성이 그친 바로 그 순간, 검은 복면의 무릎 뒷편을 차서 그의 균형을 무너뜨린 태현이 그 틈을 타 총을 뺏어들었다.

타다당-! 파바박!!

정확히 심장에 세방. 비명도 없다.

타다다다다다당---!!

찰나의 순간에 한 명을 쓰러뜨린 태현은 문 밖을 향해 총을 갈기며 방 안쪽으로 돌아왔다.

"아빠-!!"

그러자 커다란 눈망울에 이슬을 맺히운 유리가 와락 달려와 태현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태현은 그런 유리를 마주 끌어안아줄 여유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깥의 네명의 검은 복면들도 쓰러뜨려야겠지만 차마 유리에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10초. 10초 후엔 들어닥친다.'

"아빠 괜찮아? 괜찮아 아빠??"

유리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지금 자신과 아빠가 어떤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에는 미처 관심을 돌릴 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저 지금은 방금 불을 뿜고 있는 총구를 향해 뛰어든 아빠가 걱정이 되어 죽을 것만 같을 뿐이다.

'어떡하지? 일단 유리를 숨기고 저 녀석들 처리할까?'

하지만 태현의 귀에는 그런 유리의 음성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10초. 복면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방 안으로 진입을 시도할 때까지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기껏해야 10초, 아니. 이젠 7,8초 정도 밖에 안 될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태현의 눈동자에 방금 총질로 향해 박살이 난 객실의 커다란 유리창이 들어왔다.

'여기가 아마 5층일 거다. 하지만 기억에 의하면 이 배는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면적이 줄어드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여기서 뛰어내린다 해도 4층...'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현은 급히 유리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유리야. 아빠가 셋을 세면 저쪽 밖으로 뛰어내려. 알겠지?"

"어..아,아빠는? 아빠는??"

"아빠도 유리랑 같이 뛰어내릴 거야. 우리 유리 할 수 있지?"

물론 자신은 저 녀석들로부터 유리의 방패가 되어 준 다음에 뛰어내리겠지만. 

"으,응."

아빠만 같이 있어준다면, 아빠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뭐가 걱정이 될까.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그런 유리에게 부드럽게 웃음지어준 다음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둘......"

불과 1~2분 전, 오로지 자신의 유일한 걱정은 충격에 빠져있는 유리를 달래는 것이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은 유리의 목숨을 지켜줘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겨우 100여초 뒤인 지금은 그 일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이렇듯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어찌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혹시 이게 유람선의 어떤 고약한 이벤트가 아닐까 하는 꿈같은 착각도 들었다.

"...셋-! 지금이야!!"

태현의 외침과 동시에 유리는 힘껏 달려가 침대로 뛰어 올랐다. 그녀는 침대의 반동을 이용해 창 밖으로 뛰어내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왠걸. 자신과 같이 뛰어내리겠다는 아빠가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뛰는 게 아닌가?! 

타다다다다다다-------!!

귀청이 떠나갈 듯이 울리는 총소리에 화들짝 놀란 유리가 고개를 돌리니 문 밖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아빠?!"

타다다다다다당---!!

온 객실이 떠나갈 듯이 울리는 총소리를 뚫고 들려온 딸의 목소리. 태현은 유리를 시선에 담으며 급히 고함질렀다.

"뭐해! 빨리 뛰어내려!"

타다다다당---!!

"하,하지만 아빠는??"

이 바보같은 기집애! 생각 없이 남 걱정 하는 것은 꼭 쟤 엄마를 빼닮았다.

타다다다다다다...탁...탁...

아불싸!!

등골에 식은땀이 주욱 흘렀다.

총알이 다 떨어졌음을 안 순간, 태현은 지체없이 총을 버려버리며 유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힘껏 침대 위로 뛰어 올랐다. 

부녀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그런데 유리를 들쳐 안으며 침대의 반동을 이용해 창 밖으로 몸을 날리던 태현의 귀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당--!!

30발 중 1발만 맞춘다고 해도 자동 소총이기 때문에 그 30발이 총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

"크윽!!"

허리가 화끈거린다. 시원한 밤공기가 그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허리를 식혀주는 것도 찰나. 이번엔 추락의 충격과 동시에 발바닥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져왔다. 침대에 떨어져 있던 유리 조각이 발바닥에 꼽혔다가 떨어질 때 더욱 확실하게 박힌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유리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태현의 머리는 그런 고통을 인식할 겨를도 없었다.

뛰어내린 곳은 4층의 지붕이었다. 태현의 눈에 1.5m너비의 하얀색 철판 지붕이 저 멀리 검푸른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있는 모양이 들어왔다.

"아빠 괜찮아??"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리의 예쁜 눈망울에 기특하게도 이슬이 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널 위해 죽어도 좋아. ...아니, 너 대신 아빠가 죽어줄게.'

유리의 어여쁜 얼굴이 가슴 시리도록 사랑스럽다. 태현은 이를 악물며 유리를 들쳐 안은 그대로 암흑으로 짙게 물든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는 총소리.

타다다다다당-----!! 티딩! 팅! 팅!

"꺄악! 아빠 저 사람들이!!"

유리도 보고 말았다. 검은색 복면인들이 자신들을 향해 사정없이 총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지만 다행히 하늘이 사력을 다해 뛴 태현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4층의 지붕은 배를 빙글 돌게 만들어져 있는지 그 끝의 옆으로 다시 긴 햐얀색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태현은 죽어라고 코너를 틀며 총알들을 피했고, 거의 기적에 가깝게 더 이상의 총알은 맞지 않은 채 숨을 헉헉거리며 벽에 기대어 설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유리를 바닥에 내려 놓은 태현.

"헉...헉...헉...헉......"

"아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딸을 돌아다보았다.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대며 서있는 자신을 유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나만 생각해서......"

태현은 피식 웃으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헉...헉...이게 뭐가 미안할 일이야...유리가, 아빠를 안고..후우...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리는 고개를 도리질 했다.

"그게 아니라...아까 전에...그런 말한 거......"

태현은 점차 숨이 골라지는 것을 느끼며 유리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냐...오히려 아빠가 미안해..유리 마음은 생각도 안 해주고..."

아빠의 말에 유리는 눈물이 왈칵 솟아 오르려는걸 느꼈다. 도대체 아빠는 어떻게 말만 하면 이렇게 자신을 감동시켜버리는걸까. 그래서 더욱 아빠에게 자신이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들고...

한편 태현은 옆구리가 칼로 도려낸 듯이 아파오는 고통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괜히 유리에게 자신이 총에 맞았다는 것을 알게 해서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살 속에 총알이 박혀있는 고통은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기에 참고 있을 만했다. 양 발바닥을 슬쩍 들어보니 다행히도 달리다가 유리조각은 빠진 듯 했고, 출혈의 정도도 그닥 심하진 않았다.

태현은 아까 전의 그 충격에서 유리가 많이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울먹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유리야. 그 사람들이 따라올지 모르니까 일단 밑에층으로 내려가자. 알겠지?"

고개를 주억이는 유리.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리는 거야?"

"...응."

태현은 유리를 데리고 지붕의 끝에 가 섰다.

"자. 하나, 둘~셋!"

그런데 유리와 손을 꼭 맞잡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린 순간. 태현의 귀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소음기가 달린 총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공중에 뜬 발을 도로 물릴 수는 없는 일. 그저 속으로 욕을 늘어놓을 수밖에.

'제기랄. 되는 게 없군.'

하필이면 소리가 들려온 곳이 유리 쪽이었기 때문에 태현은 일단 유리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탁-탁!

3층 지붕으로 둘이 동시에 착지한 순간, 태현은 유리를 뒤로 쓰러뜨리며 총소리와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꺄앗!"

갑작스런 아빠의 행동에 유리가 놀라는 소리와 동시에 태현의 눈이 놀람으로 흠짓 커졌다.

"......?!"

"앗!! 여기서 뭐하.."

푸슝!! 푸슝!!

"일단 빨리 따라와요!!"

그 누군가는 놀랍게도 다름아닌 채지현이었다.

"어..언니??"

당황스럽기는 태현이나 유리나 마찬가지. 지현은 4층의 어떤 객실 쪽을 향해 계속 총을 쏘아대었다. 태현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일단 지현보다 앞서 유리를 이끌고 가 3층 지붕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뒤따라 온 지현은 다급한 음성으로 두 부녀에게 말했다.

"뒤로 물러서요!"

뭐랄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지현의 모습에 태현과 유리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지현도 대충 두 부녀와 발을 맞춰 선 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가장 가까운 객실의 유리창을 향해 총을 쏘았다.

푸슝! 푸슝! 챙..푸슝! 쨍그랑~! 

대충 유리창을 깬 뒤 지현은 급히 태현에게 말했다.

"정태현씨부터 빨리 올라가세요!"

왠지 절대로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은 지현의 분위기에 태현도 군말 없이 힘차게 도움닫기를 해서 뛰어올랐다. 대충 창틀까지 2m50~60쯤 될 듯 했다. 한 손으로 창틀을 잡은 태현은 재빠르게 창틀에 남아있는 유리 조각들을 탁 탁 쳐내어 방 쪽으로 떨어뜨리곤 그대로 4층의 그 객실로 올라갔다. 그리곤 곧바로 먼저 손을 뻗어 유리를 올려준 태현은 지현에게도 손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지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하는 게 더 빨라요. 창에서 비켜주세요."

태현도 이쯤되서는 대충 지현의 본래 정체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것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태현은 아무런 말 없이 창에서 비켜나주었다. 지현은 태현의 모습이 창가에서 사라지자마자 겨우 두 발만 탁 탁 뛰어 점프하더니 놀라운 몸놀림으로 창틀을 손으로 짚어 내리며 방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그런 그녀를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고있던 두 부녀. 지현은 일단 급한 위기는 피했다고 생각했는지 빠른 말투로 두 사람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두분께 그 동안 제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 사과드려요. 사실 저는 어떤 국가비밀기관의 수행요원입니다. 임무 수행의 용이함을 위해 위장 신분으로 살고는 있지만, 어쨌든 자세한 설명은 해드릴 수 없구요. 현재 이 배는 국제 강도에게 점거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기 승선한 것도 그런 정보가 들어와서구요. 현재 같이 잠입한 다른 요원은 일부러 파티장에 인질이 되어 있구요. 우리는 만약 정보가 사실일 경우 구원 요청을 하고 승객들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승선했습니다. 그래서..."

지현의 말에 놀라움으로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 유리와는 달리 태현은 얼굴을 이미 지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굳히고 있었다. 태현도 물론 지현이 사실 이런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황당스럽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 뿐.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단지 분노가 치밀어 오를 뿐이다. 태현이 뭔가 다른 말을 이어나가려는 지현의 말을 끊으며 노기가 가득 서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기관에서 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만약 그런 정보가 들어왔으면 출항을 취소시켜야 할 거 아냐!"

"아..빠?"

너무나 강한 분노가 담겨 있는 아빠의 음성에 마치 자신이 꾸중을 듣는 것처럼 유리가 떨리는 음성으로 아빠를 불렀다. 하지만 태현의 눈동자는 지현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네들이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한 것 때문에 방금 나와 유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

태현의 머릿속에 다시금 유리를 향해 날아오던 수십발의 총알이 스쳐지나갔다. 마치 천운이라도 작용한 듯이 그 위급한 상황을 겨우 자신의 허리에 두발 맞는 것으로 모면할 수 있었지만 만약 유리가 그 총알을 한발이라도 맞았다면 지금 자신의 심정이 어땠을까. 태현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 빌어먹을 쇳조각에 아내를 잃었으면 된 거다. 딸까지 잃는 것은 죽어도 싫다. 한편 방금 전의 그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지현은 가슴이 철렁하는 살기 어린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는 태현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밑으로 내려깔며 말했다.

"죄..죄송해요. 하지만 확실치 않은 정보로 이런 호화 유람선의 출항을 취소시킬 수는 없었어요. ...한번 출항에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사업인 만큼 여객회사측에서 본기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겨우 한다는 말이 이따위 입에 발린 변명이다. 태현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더 이상 불편한 분위기를 이어 간다면 안 그래도 너무나 끔찍한 이 상황에 가슴 조리고 있을 유리가 더욱 불안해 할까봐 그 눈빛에 살기는 지워버리며 지현에게 말했다.

"이제 어떡할 건지 계획을 말해봐."

어느새 하대로 바뀌어 있는 태현의 말투. 하지만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그 엄청난 무게의 살기가 걷혀감에 마음을 놓은 것일까, 지현은 태현의 그런 말투에 신경쓰지 않으며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태현에게 말했다.

"예. 일단 먼저 6층에 있는 선장실로 가서 그곳의 통신 설비로 구원 요청을 하는 게 일순위예요."

"그런 다음은?"

"예. 그 다음은..."

그런데 그 다음 말을 이어가려던 지현의 눈에 태현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허리부분이 불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진 경황 중이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는 아까부터 계속 유리를 왼쪽편에 세워두고 있었다. 자기가 총에 맞은 사실을 딸에게 숨기려고 하는 것일까? 

"태현씨..허리가...?"

지현의 말에 태현은 눈썹을 지푸렸다. 결국 유리가 알게 되고 만 것이다. 역시나 지현의 말에 무슨 말인가 자신의 오른쪽 허리를 본 유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빠?! 어..어떻게 된 거야??"

아빠의 허리를 빠알갛게 물들이고 있는 붉은 핏물에 유리의 두 눈망울이 흠짓 떨렸다. 너무나 놀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은 왜 이제까지 아빠가 다쳤다는걸 모르고 있었던 걸까!

"빨리 와이셔츠 벗으세요."

자신과는 달리 침착한 음성의 지현을 유리가 놀란 얼굴 그대로 돌아보았다. 그리곤 다시 별말없이 웃옷을 벗는 아빠를 바라본다. 유리는 지현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하얀 커튼을 찢어와 아빠에게 건내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빠는 그 커튼을 뭉쳐서 입에 물었다.

"아..아빠?"

자신의 부름에 아빠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웃음 지어준다. 유리의 눈물이 그렁 그렁한 눈망울에 지현이 조그만 주머니칼로 아빠의 허리에 천천히 찔러 넣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뭐하는 거..?!!"

"으음...!!"

자신이 미처 이 이해 못할 짓을 하고 있는 채지현을 만류하기도 전에 아빠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채지현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빨갛고 조그만 쇳덩이를 바닥에 툭 버렸다.

"자...한번 더 갑니다."

채지현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아빠. 그러고 보니 지금 채지현은 아빠의 몸 속에 박혀있는 총알을 빼어내는 것 같았다. 유리는 자신을 지켜주다가 저렇게 되어버린 아빠에게 지금 자신이 아무 것도 도움이 되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억울하고 슬펐다.

"흐윽..읍..!!"

살에 파묻혀 있던 또 하나의 쇳덩이가 빠져나가는 고통에 다시 태현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왔고, 지현이 태현에게 말했다.

"다른 곳은...?"

"없습니다."

태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에 물었던 커튼을 뱉어내며 말했다. 어느새 다시 존대로 바뀌어 있는 태현의 말투. 

"아빠 괜찮아...??"

딸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허리가 미칠 듯이 아파온다. 근 8년 만에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라 아무리 원래 익숙했던 고통이라해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하긴 다시는 이 고통에 적응이 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하지만 지금 이 고통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삼키고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였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 금세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눈 앞의 이 소녀. 더 이상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여린 마음이 아파하는 것을 보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기 때문에. 태현은 빙긋 웃으며 유리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태현씨. 소독해야 되는데..."

태현이 여전히 울먹이며 머리를 정리하는 유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지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총알 뚜껑을 열고 탄약을 칼심에 뿌리고 있었다. 그 기관 참 교육 잘시켰네. 태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커튼을 입에 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니예요."

유리가 이번엔 또 뭔가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지현이 탄약을 총상부위에 뿌렸다. 그리곤 가지고 있던 라이터로 상처 부위를 지져서 소독했다. 유리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태현은 눈만 살짝 내려 감았을 뿐. 이번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대충 조치를 취한 다음 물고 있던 커튼으로 상처부위도 싸매어 응급치료를 완료한 지현. 태현은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방금 전 그렇게 무례하게 대했던 것 사과드립니다."

"아,아니예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지요."

"아빠 이제 괜찮은 거야?"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의 유리가 아빠의 허리부근을 살펴보며 물었다. 유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태현 대신 지현이 웃음을 지으며 해주었다.

"응. 나중에 추가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일단은 이걸로 된 거야."

"그럼 이제 어떻하면 됩니까."

태현이 지현에게 물었다. 지현은 태현의 물음에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그에게 되물었다.

"태현씨 총 쏘실 줄 아세요?"

지현의 물음에 순간 난처해진 태현.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물론 알긴 아는데 안다고 했다간 유리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태현의 대답은 지체되지 않았다.

"네. 압니다."

"다행이네요. 지금 제 방에 여분의 총이 있거든요."

"지현씨 방이 어디죠?"

"아까 제가 뛰어내린 곳이에요."

태현의 뇌리에 아까 지현이 4층의 어떤 객실을 향해 계속 엄호 사격을 하고 있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거기로 가야겠군요."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을 섰다. 태현은 유리를 뒤에 세우고 지현의 뒤를 따랐고, 유리는 아빠의 바지 벨트를 잡고 아빠를 따라가며 말했다.

"아빠 이제 정말 괜찮은 거야? 그냥 우리 여기서..."

그런데 더 이상 아빠가 다치는 것을 보는 게 너무나 두려워 그렇게 말하던 유리가 갑자기 말을 그쳤다. 왜 지금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몰랐지만 유리는 갑자기 지현이 너무나 미워 보였다. 아빠를 치료해준 것에 감사를 해야 될 처지인데...역시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가 아빠를 멋지게 치료해 냈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자존심 상하고 질투가 날 일인데, 하물며 그냥 여기서 숨어 있자는 말을 하면 자신이 너무나 철이 없어 보일 것 같았다.

"근데 아빠는 어떻게 총을 쏠 줄 알아?"

그래서 유리는 재빨리 말을 돌려버렸다. 한편 유리가 만약 자신이 어떻게 총을 쏠 줄 아는지 물어오면 어떻게 변명을 댈지만 생각하고 있던 태현은 유리의 말이 어색하게 돌려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나름대로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남자는 군대 갔다 오면 다 총 쏠 줄 알게 되어있어."

어차피 그리 궁금하다거나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이상하다면 오히려 아빠의 그 신기에 가까운 싸움 실력이 이상했다.) 유리는 자신의 말이 잘 돌려진 것에 안심하며 아빠의 대답에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같은 시간 5층 파티장. 2000여명을 훌쩍 넘기는 숫자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머리에 손을 올리고 파티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파티장 무대 위에는 본보기인지 머리가 희긋한 선장이 가슴을 붉은 피로 물들인 채 쓰러져 있었다. 승객의 수가 워낙에 많았기에 사람들은 오락 시설등이 위치해 있는 6층으로 이어지는 계단(파티장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에 까지 올라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6층의 난간과 5층 파티장 곳곳에서 검은 복면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카지노의 룰렛 게임장. 그곳엔 몇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못 찾았나?}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은 복면에게 중국어로 말했다. 복면의 사내는 고개를 쪼아리며 청년의 물음에 역시 중국어로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아마도 그 이벤트가 끝난 뒤 곧바로 방으로 간 듯 합니다.}

{그래서. 객실은 다 뒤져봤나?}

{송구하오나 아직 Y조가 수색을 다 끝마치지 못했기에......}

청년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임으로 복면의 사내를 물러가게 했다. 그런 청년을 보며 30중반의 강인한 인상의 남자가 하던걸 멈추곤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

{아까 낮에 봤던 부녀를 기억하냐?}

청년의 되물음에 잠시 기억을 되살리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하지. 딸이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던데 굉장한 외모를 지니고 있더군. ...아, 하핫. 그럼 지금 그 소녀를 찾고 있는 건가?}

{뭐, 반은.}

청년의 대답에 남자는 재밌다는 얼굴로 청년에게 되물었다.

{반은?}

{음. 물론 그 여자애에게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아빠쪽이 사신 정태현이거든.}

남자의 얼굴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변했다.

{그랬어?}

{부하들이 자료를 가지고 오면 좀 봐. 그게 두목으로서 할 일이잖아. 아까 Z조 녀석이 가지고 있던 사진이 그 남자였어.}

{그런데, 왜 그렇게 그 둘을 찾는 거야?}

청년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재미있는 내기를 할 생각이어서 말이야.}

남자는 동료의 그 웃음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자신도 스스로를 잔인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눈 앞의 이 남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남자는 시선을 동료에게서 돌려 맞은편에 덜덜 떨며 앉아있는 뚱뚱한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왜 안 마시고 그러고 있나. 좋은 칵테일이야."

유창한 한국말. 남자가 빙긋 웃음 지으며 들고 있던 총으로 중년 사내의 앞에 놓여있는 칵테일을 가리켰다. 그러자 앞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저 총에 맞는 줄로 안 중년 사내는 기겁을 하며 놀랐다.

"히,히익!!"

그러자 남자가 큭큭 거리며 웃더니 옆에 앉아서 인상을 찌푸린 채 칵테일을 홀짝이는 청년을 툭 쳤다.

{이봐. 이번엔 자네가 걸지 그래.}

남자의 말에 청년은 재미없다는 얼굴로 금색의 칩을 튕겨 빨간색이 표시된 룰렛 판에 올렸다.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중년 사내에게 말했다.

"내 친구가 빨간색에 걸었으니 당신은 검은색에 걸어야겠군. 큭큭큭."

진정으로 재미있다는 얼굴의 남자. 그의 눈짓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던 딜러가 룰렛을 돌렸다. 제발 검은색에 구슬이 흘러들어가기를 바라면서. 

빙글 빙글 돌기 시작하는 룰렛. 

팅-티딩, 팅. 팅. ...데구르르르르......탁.

빨간색 10번. 결과가 나오자마자 청년이 남자의 총을 잡아들곤 지체없이 중년 사내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꺄아아악------!!

또 한명의 죽음에 파티장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핫!! 그러니까 젊을 때 돈 좀 많이 벌지 그랬어! 큭큭큭. 그랬으면 이쪽에 있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크하핫!"

룰렛 게임장 뒷편으론 미리 조사되어 따로 분류된 백만 장자들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남자의 유희에 동참하지 않아도 된다.

"Next!!"

남자의 외침에 중년 사내의 시체가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지고 다음 차례의 희생자가 검은 복면에 의해 이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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