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기지개를 쭈욱 펴며 상쾌한 토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하우...웅~~. 하아~.]
개운하게 기지개를 펴고난 유리의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 어려있었다.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어서 그런걸까.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행복해 하는건 비단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어서 인것만은 아니었다. 유리는 아빠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빠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빠는 자신이 키스를 하는것도 모른채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고 그것은 유리에게는 참을 수 없을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빠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애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아빠를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빠는...단지 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유리의 조용한 음성이 울렸다. 하지만 곤히 잠들어 있는 태현이 유리의 물음에 대답을 할리가 없다. 유리의 말이 이어졌다.
[...난 아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
유리는 다시 아무말 없이 아빠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아빠와 처음으로 프렌치 키스를 하고난 다음날부터 아빠의 자신에 대한 태도가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보통때라면 절대로 키스도 먼저 해주지 않고 자신에 대한 제일 진한 애정 표현이라고 해봐야 겨우 안아주는 것뿐이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하루에 한두번 정도는 아빠가 먼저 키스해주기도 하고 또 어떨때는 아빠가 스스로 자신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오기도 했던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자신이 아빠와의 키스에 빠져서 간절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면 어떨땐 가슴까지 만져주기도 했다. 이렇게 유리는 갑자기 아빠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한것에 처음엔 무슨일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그녀는 금세 그 궁금증을 접어버리며 아빠가 자신을 여자로서 대해주는걸 행복해 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으음...]
그때 태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유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에게 인사했다.
[아빠~~. 잘잤어?]
[응...유리도 잘잤니~?]
태현은 아직 잠에서 덜깬듯이 초점흐린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음지었다. 그러자 유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불을 확 젓히며 아빠의 몸에 올라타서는 아빠를 마구 흔들었다.
[에이~. 아직 잠 덜깬거야~~? 얼른 일어나아~~.]
[하하. 하하하~. 알았어~~. 아빠 일어날께~. 잠 다깼어~.]
태현은 유리의 장난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고 유리는 그제야 아빠를 흔들던걸 멈추곤 생글거리며 아빠를 바라봤다. 한편 태현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유리의 예쁜 미소를 볼 수 있어 너무 즐거웠다. 짧은 트레이닝 복 반바지에 헐렁한 낫시티 차림. 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유리의 뽀얀 우윳빛 살결이 빛나고, 그 햇살 때문에 유리의 솜털마저도 남김없이 보인다. 태현은 왠지 보드라울것 같은 그 솜털을 손으로 느껴보고 싶어서 유리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하지만 손에서는 보드라운 감촉이 아니라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만 전해져 왔다. 왠지 안타까운 느낌이 든 태현은 다리는 어떨까 싶어 유리의 늘씬한 다리를 쓸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녀의 매끈한 다리는 태현이 원하는 그런 감촉을 전해주진 않았다.
[아빠 왜에~?]
[응?]
[왜 아무말도 없이 그러고만 있어?]
태현은 유리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왜--. 아빠가 만지니까 싫어?]
[응? 아,아냐~. 싫긴...]
유리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고 태현은 그런 유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를 해주었다. 아빠의 입술을 느끼자 유리는 금세 그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태현은 유리에게 잠시동안 그렇게 모닝 키스를 해주었다.
[뭐? 나도?]
[응~. 괜찮지?]
[괘,괜찮을리가 없잖아. 내가 어떻게 네 친구들도 모이는 그런 자리에 가?]
[에이~. 뭐 어때~. 아빠는 내 애인이잖아.]
유리의 말에 태현은 기가 막혔지만 곧바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유리야. 너랑 나랑 그런사이가 되기로 하긴했지만, 그 이전에 나는 네 아빠야.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 노는곳에 내가 갈 수 있겠어? 친구들도 아빠가 가면 불편해 할꺼야.]
[뭐...? 그런사이?]
[으,응? 그..그러니까. 연인. 연인사이.]
눈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노려보는 유리의 말에 태현은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고, 유리는 그런 아빠를 잠시동안 노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빠 맘대로 해.]
유리는 그러곤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화났다는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문을 쾅 닫고 나갔고, 태현은 애꿎은 꼴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니. 도대체가 친구들이랑 같이 노는 생일 파티에 아빠보고 같이 가자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거기다가 레스토랑 일은 어쩌구? 태현은 그대로 털썩 드러누워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담배생각이 나서 침대밑에 숨겨놓았던 담배갑을 꺼내었다.
[라이터는 또 어디간거야? 에고.. 되는 일이 없네.]
태현은 담배갑 위에 올려놓았던 라이터가 없자 푸념을 늘어놓으며 책상 서랍을 뒤져 라이터를 찾아 가지고 왔다. 유리도 화나서 나갔기에 다시 들어올 일은 없고, 태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놓곤 담배 한개피를 꺼내었다. 아니, 꺼내려 했다. 그런데 담배갑 안에는 담배는 하나도 없고 종이 쪽지 하나만 덩그러니 넣어져 있는게 아닌가. 태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종이 쪽지를 펴들었다.
<이런데 숨겨 놓으면 내가 모를줄 알고? 담배랑 라이터는 압수야. 메롱~♡>
태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리가 써놓은 글 밑에 뭔가를 더 적어놓곤 쪽지가 접혀있던데로 다시 똑바로 접어선 담배갑에 넣어서 있던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나서 방을 나서는 태현의 얼굴에는 왠지모를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태현이 대충 얼굴과 머리만 씻고 나오자 부엌에서 통통거리는 칼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이 부엌으로 가보니 거기엔 유리가 도마에 뭔가를 썰고 있었고 부엌엔 온통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태현은 언제 샤워를 했는지 물기에 젖은 머리를 하고있는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야~. 삐졌어?]
[......]
하지만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하던일만 계속하고 있었고, 태현은 빙그레 웃으며 유리의 날씬한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유리가 아빠의 손을 탁 치며 풀더니 썰어놓았던 감자를 된장찌개에 넣었다. 머쓱해진 태현은 멀뚱히 서서 유리가 이제 두부를 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제밤에 자신이 카레를 만들어 준다고 설치다가 버려버렸기 때문에 유리는 에이프런도 없이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그 모습은 또 그 모습대로 너무나 어여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뒤로 다가가서 확 끌어안아버리지 않고는 못참을 정도로...
태현도 역시 남자였기에 그런 충동을 이기지 못했고, 그는 천천히 다가가 유리를 다시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리는 역시 삐졌는지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자신을 무시했고, 태현은 그녀의 이런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유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춰주었다.
통..통..통....통.......통...........통.......................
서서히 칼소리가 멈춘다. 태현은 빙그레 웃으며 유리의 목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몸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그대로 가만히 서있던 유리가 잠시동안 아빠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더니, 곧 입을 열었다.
[비겁한짓 하지마.]
[...응? 비겁한..짓이라니?]
유리의 말에 태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고 유리는 몸을 홱돌려 아빠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우습게 보여?]
[응? 그..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에게 유리는 보골보골 끓고 있는 된장찌개의 불을 끄고는 화난 음색이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나 만져주면. 내가 금방 헤헤거리면서 화풀줄 알았어?]
[유,유리야. 무슨 말이야. 아빤 그저...]
[맞잖아 내말. 평소에도 아빠가 나 만져주면 난 금세 정신을 못차리고 황홀경에 빠져버리니까. 아빤 방금 그거 이용해서 내 화를 풀려고 한거잖아.]
전혀 뜻밖의 유리의 말에 태현은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은 전혀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은 요리를 하고있는 유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랬던것 뿐인데...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실을 말해주려 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야. 사실 아빠는...]
[나한테 손대지마!]
유리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자신을 감싸 안아오는 아빠를 뿌리치려했다. 그런데 그때 유리의 손길이 너무 거셋던 탓일까. 아빠를 밀치려던 손이 그만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던 된장찌개 냄비를 쳐버리고 말았다.
[꺄악!]
뜨거운 국물이 담겨있던 냄비는 가스레인지에서 떨어져 버렸고, 방금전까지 끓고 있던 뜨거운 국물이 유리의 살갗에 닿을려는 찰나. 태현이 급히 유리를 감싸안으며 몸을 날렸다.
탱~!
부엌 가득히 냄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빠에게 감싸여 바닥에 쓰러진 유리는 너무나 놀라서 급히 몸을 일으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괜찮아?!]
다행히도 냄비가 저쪽 방향을 향해 떨어졌기에 뜨거운 국물이 태현에게로는 몇방울 튀지 않았다. 태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괜찮아? 다친데 없어?]
[나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야! 아빤 괜찮아? 안 데였어? 나 때문에..어떻해..]
유리는 금세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아빠가 화상을 안 입었나 살펴보았고 태현은 그런 유리의 머리를 콩 쥐어 박으며 말했다.
[이 녀석아. 아빠 앞에서 나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야라니.]
[미안...근데 아빤 정말 괜찮아?]
태현은 바닥에 쏟아진채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된장찌개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행히 아빠쪽으론 안 튀었어. 유리도 괜찮지?]
태현의 물음에 유리는 울먹 울먹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아빠가..훌쩍...지켜줬..으니까...끅..흐윽...아빠..미안해...훌쩍..]
[아니야. 미안해 할필요 없어..그래도 네가 괜찮다니까 정말 다행이다..]
태현은 유리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빠의 목소리에 유리는 아빠를 와락 끌어안으며 울음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흑..나 걱정돼서..죽는줄 알았어..흐윽...]
태현은 빙긋 웃으며 그런 유리를 달래주었고, 자신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달래주는 아빠 덕분에 유리는 곧 진정을 할 수 있었다. 아빠품에 안겨있던 유리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여전히 눈물이 고여있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미안해..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야. 유리 네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태현은 유리의 얼굴에서 눈물자욱을 지워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얼른 바닥 치우자. 얼룩 묻겠다. 알았지?]
[응...]
유리는 고개를 주억였고, 태현은 유리와 함께 바닥에 쏟아진 된장찌개를 닦아내었다.
[에고...우리딸이 끓인거. 먹어보지도 못하고...아까워서 어쩌나-.]
태현의 푸념에 행주를 씻고있던 유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내가 또 끓여주면 되잖아~.]
[정말이지~? 오늘 끓였던 거랑 똑같은거?]
태현은 바닥을 마저 다 닦고는 닦는데 쓴 행주를 싱크대 안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유리는 손을 씻고는 생글거리며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응. 똑~같은거.]
유리는 그러며 아빠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유..읍..리야. 아빠 아직 손도...읍.. 안 씻었는데..]
[치이. 그럼 빨리 씻어.]
유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아빠를 놓아주었고 태현은 빙긋 웃으며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아빠..]
[응?]
유리가 태현을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는다.
[아까 나 만지지 말라고 한거..미안해.]
[하하. 그게 뭐 미안할 일이야.]
[아니야. 정말. 정말루 미안해. 난 아빠껀데...]
태현은 옆에 놓여있던 수건으로 손을 훔치며 뒤돌아섰다. 유리는 아빠가 뒤돌아 서자 어쩔 수 없이 포옹을 풀었고,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리야. 사랑은 소유가 아니야.]
[무슨..말이야?]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고해서 그 사람의 소유가 되는건 아니란거야.]
[...그럼 그 사람도 자신의 소유인건 아니란 거네?]
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리는 그런 아빠를 노려보며 말했다.
[동의할 수 없어.]
[......??]
[사랑은 소유하는거야.]
유리의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태현은 약간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유리는 아빠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는거. 그게 사랑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자신만 생각하게 하고, 자신만 보고 웃게 하고싶은거. 그게 사랑인거야.]
[유리야..그건...]
태현은 유리의 말에 사랑은 그런게 아니라고. 사랑은 그렇게 이기적인것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해주려 했지만 유리의 화난 표정이 마치 씻은듯이 갑자기 사라지며 대신 그자리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곤 할 말을 잃어버렸다. 표정이 바뀌어도 어찌 저렇게 순식간에 바뀔수가 있나?
[아빠.]
[으,응?]
[나 배고파아~. 그러니까 우리 얼른 밥먹자~. 웅~?]
태현은 귀여운 유리의 목소리와 그녀의 애교에 순간 당황해버렸다. 그녀가 분위기가 방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였을까. 하지만 유리는 이렇게 당황해하는 아빠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으며 활기찬 웃음으로 아빠를 이끌어 식탁에 앉히고는 냉장고에서 통에 담긴 카레를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뎁혀 왔다.
[짜잔~~. 사실 어젯밤에 아빠가 목욕하러 들어간 사이에 내가 새로 만들어 놨지롱~~.]
태현은 너무나도 환한 유리의 음성에 결국 유리의 말에 놀란 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접어버리며 빙긋 웃었다. 하긴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운 딸이 저렇게 애교를 떠는데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아빠가 어디있겠는가.
[하하. 정말이야? 어디, 어제 내가 만든것보다 더 맛있나 먹어볼까~?]
[헤헤~. 비교할껄 비교하시라구요~. 어제 아빠가 만든건 카레가 아니라 완전 짜장이었잖아~~.]
[뭐어~? 요녀석~. 하하핫.]
두 부녀의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 해졌다. 태현과 유리는 그렇게 즐거운 아침식사를 했고, 디저트로 커피를 마실때 유리는 아빠에게서 오늘 같이 가주겠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 그만 커피를 쏟을 뻔했다. 유리가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시간은 오후 2시. 태현은 오전에는 유리와 함께 레스토랑 일을 하고는 현석에게 양해를 구해서 유리와 함께 유리가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약속장소로 향했다.
[하하.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고마워 아빠~~.]
[네가 좋다니 아빠도 기쁘네. 하하.]
태현은 기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레스토랑으로 출발하기전에 자신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을 연신 어루만지며 헤헤거리는 유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음지었다. 유리의 생일선물로 뭘 줄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역시 유리 또래의 여자애라면 팔찌를 주면 좋아할것 같아서 투명한 보석(물론 인조다.)이 반짝이는 예쁜 팔찌를 선물로 주었다. 다행히 유리는 그 팔찌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고, 어찌나 그걸 마음에 들어했는지 아직까지도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하지만 선물은 받는것보다 주는게 더 기분 좋다는 말처럼. 태현은 지금 선물 준자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유리가 이렇게나 기뻐할 줄은 몰랐었다.
[어? 쟤네들 벌써 와있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약속장소에 다달았나보다. 태현은 저만치서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딸의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다닌다니, 태현은 벌써부터 밀려오는 걱정에 앞이 막막해오는걸 느꼈다.
태현의 예상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우려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유리 친구들이 자신을 거북스럽게 여길꺼라는 태현의 생각과는 달리 모두가 그를 거리낌 없이 대해주었다. 마치 친구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빠정도쯤을 대하는것과 같이. 그 덕분에 태현은 조금이나마 아이들이 노는 분위기에 어울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일단 모든 일행이 모이자 아웃백에 가서 유리에게 생일 축하를 해주었고 그자리에서 모두 유리에게 선물을 주었다. 유리가 선물을 개봉하는 순서에서 웃음과 탄성이 터져나왔고, 거기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두번째 순서로 모두 다같이 영화를 보러갔다. 무슨 코미디 영화같은 것이었는데 태현은 양키놈들이 나와서 웃고 방정을 떠는데 무슨소리인지 하나도 몰라 단지 유리가 웃을때 따라 웃어주며 시간을 겨우 때웠다. 그리곤 모두 놀이공원에 가서 신나게(태현은 원래 놀이기구 같은건 못타기 때문에 그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놀다가 다시 아웃백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인줄 알았더니만 이번엔 또 볼링을 치러 가잔다. 태현은 요즘 청소년들의 체력이 약해졌다더니 모두 뻥이었다고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으며 볼링장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빠~. 볼링 칠줄 알아?]
[아니.]
[헤헤~. 그럼 내가 가르쳐 줄께~.]
태현은 그자리에서 유리에게 즉석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볼은 어찌된 일인지 자꾸만 양갓쪽의 도랑으로 빠진다. 유리는 아빠가 이렇게 계속 실수하는 모습을 보며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연신 생글거리며 직접 아빠의 자세를 교정해주면서 가르쳐 줬다. 태현은 왠지 남자애들의 부러운 시선이 등뒤에서 느껴져 왔지만 애써 모른채 하며 유리가 교정해준 자세대로 볼을 굴려보았다. 그러나 공은 여전히 삐딱선을 탓고, 태현은 한숨을 푸욱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러다가 아이들은 편을 둘로 나눠서 음료수 내기 시합을 벌였다. 이쪽편은 유리와 태현, 서현우라는 애와 윤지. 그리고 윤지의 남자친구이고 저쪽편은 여자애 세명과 그 세명중 두명의 남자친구 둘. 이렇게 5:5 시합이 되었다.
경기는 시작부터 막상 막하였다. 이쪽에선 유리와 서현우라는 애의 실력이 굉장했고, 저쪽에선 남자애 둘중 하나가 볼링 선수라고 하니 스코어가 비슷 비슷하게 올라간 것이다. 물론, 태현이 이쪽편이 앞설 수 있는것을 다 까먹어 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막상 막하가 된 것이지만. 아무튼 치열한 시합은 양편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진행되다, 결국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되었다. 저편은 이미 모두가 볼을 던진 상태. 이쪽에선 마지막으로 태현만 남게 되었다. 방금전에 유리와 현우가 연속으로 몇번이나 스트라이크를 기록해서 태현이 이제 핀을 하나만 맞춰도 유리편이 승리하게 된다.
[아빠~. 화이팅~!]
[으,응. 화..이팅~.]
[아저씨 잘쳐요~~.]
[잘치세요~~.]
워낙에 박빙의 승부였기 때문일까. 시합은 굉장히 열기에 차있었고, 이제 다잡은 승리를 눈앞에 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는 벌써부터 승리의 기쁨이 느껴져 왔다. 태현은 모두의 응원속에 볼을 들고 섰다.
<휴우...어쩌다가 내가 이런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거냐...>
태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곤 열을 맞춰 선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핀들을 바라보며 정신을 차렸다.
<그래. 하나만. 하나만 맞추면 우리가 이긴다.>
태현은 정신을 집중하고는 신중하게 볼을 던졌다.
쿵-. 데굴.....데굴....데굴...데굴........
너무 신중하게 던진걸까. 볼은 애타는 태현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도 천천히 굴러갔다.
<제발...제발...그래! 똑바로...아,아니! 거기말고! 아니! 임마! 아니야! 그게 아니라...!>
데굴..데굴....텅...데구르르르...
<크악....!!>
야속하게도 볼은 결국 옆의 도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볼링핀들. 그리고 경악에 휩싸인 태현. 그런 그의 귓가에 뒤에서 터지는 안타까운 탄성과 동시에 저쪽편 애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태현은 주춤 주춤 돌아서서는 썰렁한 분위기의 같은편 애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미안...]
[푸훗-! 아하하하하하---!]
그때 갑자기 유리가 썰렁한 분위기를 깨며 웃음을 터트렸다. 유리의 웃음에 같은편 애들은 물론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하던 저쪽편 애들까지 모두 유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유리는 다른 애들이 자신을 바라보는건 신경도 안 쓰는지 태현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 바~보 아빠~~. 그거 하나 못맞춰? 푸후훗.]
[응? 하. 하하. 미안해..]
태현은 머쓱하게 웃었고 유리는 그런 아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아빠에게 키스를 해버릴 뻔했다. 하지만 간신히 그 충동을 참아낸 유리. 그녀는 생긋 웃으며 아빠에게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재미로한 시합이었는데 뭐~.]
하지만 시합은 재미였어도 내기는 진짜였다. 태현은 다잡은 승리를 놓친 자신의 책임을 지고 아이들이 괜찮다는데도 억지로 자신이 모두에게 음료수를 사주었다. 여하튼 볼링 시합은 그렇게 끝이났다. 유리를 뺀 나머지 아이들이 모두 돈을 모아서(물론 태현도 냈다.) 볼링비를 치르고, 다들 음료수를 홀짝이며 왁자지껄하게 볼링장에서 나오니 선선한 밤바람이 모두의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다. 이제 며칠 지나지 않으면 한여름의 열대야가 이렇게 시원한 밤바람마저 모두 앗아가버리겠지만, 태현은 그래서일까. 지금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식혀주는 밤바람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리고 이렇게 밤바람의 고마움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많이 몰려 나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응?)
[나왔다! 야! 죽여!!]
[뭐,뭐야?!]
태현은 난데없이 볼링장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사내들이 덤벼들자 당황하며 일단 급히 모두를 볼링장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문앞을 지키고 섰다.
[너희들 뭐야!]
하지만 태현의 외침을 무시하며 사내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태현은 대충 이들의 목적이 자신인것을 눈치채고는 여기서 싸우다가 자칫하면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재빨리 사내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반사람은 무리를 셀때 두명내지 세명정도를 묶어서 센다. 하지만 어느정도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다섯명에서 많게는 열명까지를 묶어세고, 태현은 한번에 스무명씩 묶어서 센다.
<모두 스물넷...>
저번에 폭주족들이랑 싸웠을때 보다는 적은 수이지만 그때는 좁은 골목길이었고 여기는 2차선 정도의 도로폭을 가지고 있는 길 한복판이었다. 태현은 이들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덤벼드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일단 방금전에 자신을 향해 죽이라고 외친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그가 이들중의 리더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들이 뭔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덤벼드는것이라면 두목이 제압 당한 후에는 더이상의 공격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현은 자신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그 사내에게 가까이 붙어서 그의 허리를 힘껏 쳤다. 그 직전에 그에게 쇠파이프로 한대 얻어 맞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그런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
퍼억-! 우지근-!
[크윽!!]
갈비뼈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그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주춤 주춤 물러선다. 태현은 그를 붙잡기 위해 다가서려 했으나 주위 사방에서 휘둘려 오는 쇠파이프나 각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포기하고 다른 사내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해..! 어떻해...!]
한편 유리는 건물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우와...근데...]
[너희 아빠 정말 싸움 잘하신다...?]
아이들은 신기에 가까운 태현의 싸움 실력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고 유리는 그런 친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는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유리의 말에 아이들은 금세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편, 현우는 태현이 싸우는걸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칫. 나도 저정도는...>
[꺄악! 어떻해!!]
그때 유리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태현이 그만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만것이다.
[어! 현우야!]
그때 영민의 놀란 음성이 터져나왔다. 결국 현우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나가 버리고 만것이다.
[넌 왜 나왔어!]
태현이 방금 맞은 등이 욱신거리는걸 느끼며 달려나온 현우에게 고함질렀다.
[아저씨 도울려구요!]
현우는 그렇게 외치며 각목을 든 남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리다고 얕잡아 본걸까?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들은 몇 안 되었다. 현우는 자존심이 상하는걸 느끼며 달려온 사내들에게 주먹을 힘껏 날렸다.
[남고짱을 무시하지마라!!]
현우가 날린 주먹에 사내 한명이 정통으로 얻어맞고 주춤 주춤 물러섰다.
[크윽..이 새끼가..!]
그는 각목을 집어 던지며 현우에게 달려들었다. 현우는 재빨리 몸을 숙이며 그가 날리는 주먹을 피했지만 연이어서 날아오는 다른 사내의 각목을 피하진 못했다.
퍼억-!
[크윽!]
현우는 허리가 욱신거리는걸 느끼며 각목을 날린 남자의 면상을 걷어차버렸다. 그러나 그 남자가 얼굴을 감싸쥐며 물러날때, 현우는 또다시 어디에선가 날아온 각목에 등을 얻어맞고 말았다.
[크으윽!]
새삼스레 유리의 아빠가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겨우 서너명을 상대하면서 벌써 이렇게 당하는데, 유리네 아저씨는 그동안 스무명이 넘는 남자들을 상대하면서 겨우 단 한대만 맞고 버티다니. 더군다나 힐끔 아저씨를 보니 벌써 열명이 넘는 남자들을 쓰러뜨려 놓은 상태였다.
[어딜 봐 이새끼야!]
퍼억-!
[크윽!]
겨우 그 한순간 한눈을 판사이 태현은 누군가에게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맞은 남자다. 태현은 이를 악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날아온 현우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더니 다시 현우의 얼굴에 주먹을 꼿아넣었다.
퍽!
[크으윽...제길...]
[하하. 이 병신아. 남고 뭐라고? 여기서 왕년에 학교 대가리 안 먹어본놈 누가 있냐?]
사내의 조롱에 현우는 이를 사려물며 다시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볍게 발을 한번 뒤로 물리는 것으로 현우의 주먹을 피해버린 사내. 그리고 현우는 주먹을 날린 댓가로 뒤에서 누군가에 다시한번 각목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냥 저 사내와 1대1의 대결이라면 충분히 해볼만 하겠는데, 도저히 다른 남자들 때문에 실력 발휘를 할 수가 없다.
[크윽...젠장...]
한편 태현은 달려나온 유리 친구가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곤 재빨리 그녀석에게로 달려갔다.
[괜찮니?!]
태현은 유리 친구와 대치하고 있던 남자의 멱살을 쥐곤 그의 명치에 주먹을 힘껏 꼿아주고 나서는 유리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크윽...죄..죄송해요...괜히 나와서...]
[이 바보녀석. 그러니까 아저씨가 저기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태현은 유리 친구녀석을 보호하며 급히 그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내들은 태현의 무서움을 알게 된걸까. 그가 현우를 건물로 들여보내는 동안 섣불리 태현에게 달려들지 못했고, 태현이 다시 자신들에게로 다가오자 이제는 슬슬 발걸음을 뒤로 물리기 까지 했다. 그들에겐 처음에 달려들던 때의 그 기세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보낸 녀석들이냐.]
사내들은 태현의 조용한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며 서로의 눈치만 봤고, 태현은 그런 그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가만히 노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새끼들은 뭐야?! 형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태현은 목소리가 들려온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거기엔 크고 작은 두 사내가 부하들 몇명을 데리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마초와 쌍칼이다! 야! 튀어!!]
그리고 그들을 본 남자들은 쓰러져 있던 동료들을 부축해서는 황급히 도망쳤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부하들을 이끌고 헐레벌떡 달려온 두 사내의 얼굴을 본 태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니-. 우철이와 길수 아니냐!]
[예! 형님 괜찮으십니까!]
[하하. 등쪽에 한대 얻어맞은것 빼곤 괜찮다.]
태현의 웃음짓는 얼굴에 그제야 안심이 된걸까. 우철과 길수는 이제서야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형님! 그간 광영하셨습니까!]
[그래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뒤쪽에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태현은 서둘러서 우철과 길수, 그리고 그들의 부하를 일으켰다.
[근데 방금전엔 누구였습니까?]
[아빠-!]
길수가 염려어린 얼굴로 태현에게 물었을때, 뒤쪽에서 유리가 태현에게로 달려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아빠 괜찮아? 다친덴 없어?]
[응. 아빤 괜찮아 유리야.]
태현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꼬옥 끌어안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의 걱정이 가득어린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아까 그 사람들 누구였어..?]
[아빠도 잘 모르겠어. 분명히 아빠를 노린건 확실한데 말야..]
[아빠를 왜..? 아빠 뭐 잘못한거 있어?]
[아니. 그런적 없는데...]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설마!]
[...배신...?]
우철과 길수가 서로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신이라니?]
태현은 배신이라는 말에 의아한 얼굴로 길수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유리가 아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빠. 이 아저씨들 누구야? 그리고 배신이라니?]
[응? 아. 이 아저씨들? 아빠가 예전에 일하던 직장 후배들이야. 인사해. 이쪽은 지우철 아저씨고 이쪽은 유길수 아저씨야.]
유리는 왠지 인상이 험악한 두 아저씨에게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아빠의 후배라면 나쁜사람일리 없으니 생긋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유리에요.]
[응. 어..안녕.]
[하하..정말 많이 컷구나. 예전에 봤을땐 아직 아장아장 걸을때였는데.]
너무나 예쁘게 커버린 유리의 모습에 왠지 적응이 안 되는지 두 사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유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인사를 빙긋 웃으며 바라보던 태현은 길수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
[배신이라니. 무슨소리야?]
[예. 그게 저...]
태현의 물음에 길수는 비밀스런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유리가 두눈을 똥글똥글하게 뜨고 무슨 얘긴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더이상 말을 잇지 않고 태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태현이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잠깐만 친구들한테 가 있을래?]
[어..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야?]
유리는 왠지 아빠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는게 싫어서 자신이 좀 눈치없어 보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아빠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빠는 난처한지 대답하기를 주저했고 유리는 그런 아빠의 표정을 보곤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빠가 난처해 하는건 더 싫었기에 아빠를 살며시 흘겨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치이...알았어.]
유리는 그렇게 친구들이 있는곳으로 가버렸고 태현은 다시 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던 얘기 마저 해봐.]
[예. 근데 유리가 참 예쁘게 컷네요. 하하.]
[하핫. 그렇지? 다행히 날 안 닮고 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건가. 하핫.]
유리가 예쁘다는 길수의 칭찬에 태현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렸다. 아무튼, 길수의 이야기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아무래도 내부에 배반자가 있는듯 합니다.]
[내부라면...?]
[아, 참. 먼저 이것부터 말씀드려야 하는데...]
길수는 우철에게 눈치를 주었고 우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둘은 갑자기 동시에 무릎을 털퍼덕 꿇었다.
[형님!]
[아,아니. 왜이래?]
놀란 얼굴의 태현을 올려다보며 길수가 말했다.
[형님. 부디 도와주십시오.]
[무슨일인데 그러는거야? 일단 일어나.]
[형님께서 부탁을 들어주시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헛, 거참. 무슨 부탁인데 그래?]
태현은 길수와 우철앞에 쭈그려앉아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그러자 길수가 면목없는지 고개를 푸욱 숙이며 말했다.
[형님께서 피땀흘려 안정시켜 놓으신 이 바닥을 지금 삼합회와 야쿠자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삼합회...와. 야쿠자?]
길수의 말에 태현은 어이없다는듯이 말했다. 길수는 고개를 푹 숙인채 고개만 끄덕였고 우철도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고개를 숙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태현은 그들을 보며 아직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 녀석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을텐데, 여기엔 뭐하러?]
[...그게..아마도 지난 5년간 치뤄진 신(新)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승리한 야마구치구미파가 내부의 분열을 막기위해서 해외로 눈을 돌렸는데...형님이 사라진뒤에 아직까지도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만만해 보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녀석들이 한번에 모두 꼬붕들을 우리쪽으로 돌리자니 스미요시카이같은데서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중국 삼합회한테 도움을 요청한것 같습니다. 그래서...지금 저희들로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흐음...그래서.]
태현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고, 그러자 우철이 번쩍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그래서라니요 형님-. 지금 저희들에겐, 아니. 지금 한국 건달들에게는 오직 형님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니까...나보고 도와달라고?]
[예. 부탁드립니다.]
길수와 우철은 고개를 땅바닥에 닿을듯이 숙이며 간청했다. 그러나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내가 무슨 수로 그런 녀석들을 막아줄 수 있겠나?]
[아닙니다 형님!]
태현의 말에 우철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말했다.
[형님만 나서주신다면 초야에 뭍혀계신 영식이 형님. 철상이 형님. 상백 형님. 성수 형님. 모두다 도와주실거 아닙니까? 거기다 형님이 복귀하신다는 소문이 돈다면 이 바닥을 떠났던 수많은 주먹들이 다시 형님 밑으로 몰려들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런 쪽바리나 떼놈 새끼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부디 돌아와 주십시오. 형님만 돌아오신다면 우리 태현파가 다시한번 대한민국 건달계는 물론 쪽바리나 떼놈까지도 제패할 수 있습니다. 형님이 계실땐 그까짓 삼합회나 야쿠자 새끼들이 우리 밑에서 빌빌 기어다니지 않았습니까?]
[씁. 목소리가 크다.]
점점 우철이 흥분해서 말하자 태현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그런 우철을 제지했다. 우철은 태현이 그러자 급히 입을 다물었고 태현은 씁쓸한 인상으로 말했다.
[너희들도 내가 내딸한테만은 과거를 비밀로 하고 있다는거 알지?]
[죄,죄송합니다...]
태현의 말에 우철은 급히 고개를 쪼아렸고 길수는 그런 우철의 뒤통수를 탁 때려버렸다.
[하여튼 목소리만 커가지고서는..]
길수는 그러곤 태현을 바라보며 정중히 말했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담배있나?]
[...예? 아. 예.]
태현은 길수에게서 담배를 받아선 피워물었다.
...쓰읍...후우------.
하얀 담배연기가 몽글몽글 피워 올라간다. 눈썹을 찌푸린채 뭔가를 생각하는 태현. 그때 그는 문득 유리가 생각이나 고개를 돌려 유리가 있는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볼링장 건물입구 계단에 친구들과 앉아있는 유리가 도끼눈을 한채 이쪽을, 아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태현은 움찔하며 급히 담배를 바닥에 비벼껐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걸까.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봐 길수. 우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