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추억 제1부 번역물
"타이에서의 추억" 이라는 작품을 쓴 일본작가의 작품으로 타이의 추억과 같이 근무지
에서 만난 소녀와의 이야기가 주 내용입니다.
프롤로그
외자계 회사에 입사해 1년째, 나는 파리 지사의 말단의 자리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디자인 사무소와 일본 기업을 연결시키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일은 바빴지만, 프랑스는 당시부터 주휴 2일과 유급 90일의 제도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의 긴급 연락 대기 이외의 날은, 9시-5시까지만 일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
도 없었다.
처음 반년 정도는 업무 인수인계 몹시 바뻤지만, 반년정도 경과하자 완전하게 익히게
되어
일본인인 나는, 여과시간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런 한가한 시간을 주체 못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상사인 카트리누의 집에 초대
되었다.
집을 새로 인테리어 한 기념 파티라고 하는 것이었다.
동료 몇 명과 함께, 나는 꽃다발과 케이크를 직접 사 들고 그녀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우리의 회사는 스위스계의 기업이므로, 급료가 매우 좋다. 프랑스 기업과의 격차는 약
2.5배.
참고로 초 대졸의 나의 연 수입이 850만엔 정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아파트는 루블라고 하는 고급 주택지에 있었다.
그녀는 46세로 몇 년 전에 이혼해, 딸 2명과 그녀의 애인?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
만 그는 동성애자였다)과 팜·드·메나쥬로 불리는 포르투갈인의 가정부와 살고 있었
다.
그녀의 딸과의 최초의 만남 그곳에서 있었다.
언니가 이제 막 12세가 된 소피, 여동생이 9세의 미레이유 이다. 카트리누의 가장 큰
자랑 꺼리 들이었다.
(소피라는 이름은 프랑스에서는 표준적인 이름으로, 클래스에 반드시 3명은 정도 있다
)
「내 딸들은 아동복 모델을 하고 있어요」라고 소개했다.
부드러운 밤색의 머리카락, 회색의 눈동자, 투명하도록 흰 피부의 색이 인상적이다.
불란서인은 백인이라고 생각되어 지지만 일본인과 그렇게 차이가 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인의 피부가 더 희다.
아무튼 매우 귀여운 자매였다. 나는 멈춰 서서 인사를 주고 받았을 뿐,
특별히 그녀들을 신경 쓰지 않고 파티에 같이 온 동료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오후 4시를 지나 파티도 슬슬 끝나려고 했을 무렵,
카트리누가 어쿼스틱 기타를 가져 왔다.
샹송으로 파티의 마지막을 장식 할여고 한 것이다.
그녀의 연주는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고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 후에 조금 문제가 이었다. 기타를 다친 카트리누가 나에게 조금 심술궂게
말했다.
「기타 쳐볼래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나는 일순간 주저 했지만 「이 자리에 오직
한 사람의 일본인 에게 기타를 넘기죠」라고 해,
「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아~예」라고 애매하게 응했다.
하자 카트리누는 「자 연주해 봐」하고 기타를 나에게 전했다.
나는, 학생시절에 포크 기타를 가끔 연주하고 했었지만, 그 이후로 기타를 손대 본적
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학생시절에 연주한적 있는 비틀즈의 「렛잇비」를 연주한다고 말했다.
잘은 칠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렛잇비」는 영어를 모르는 프랑스 여성의 생각으로는 젊은 청년이 부르는 러브 노래
라고 생각 되어 지는 것 같았다.
카트리누는 기분이 좀 업 되어진 것 같았고 , 소피는 끝까지 박수를 쳐주었다
모두「다시 한번 연주 해죠요」하고 앵콜을 해 주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 앵콜송으로
일본 가수 사노의 「 물결과 같은 안녕이∼」이라는 노래를 일본어로 불러 주었다.
모인 사람 모두 크게 박수를 나에게 보내 주었고, 특히 소피는 박수를 치며 내 노래에
감명을 받았는지 눈물까지 글성 거렸다.
하지만 여동생 미레이유는 끝까지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파티의 연회가 끝나고, 그 날은 아무 일도 없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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