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7)

“ 호호호.됐어.선물은 정말 고마워.입은 건 네게 꼭 처음으로 보여줄 게.”

“ 뭐, 뭐야? 그 말은?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주겠다는 소리야?”

“ 이 녀석 봐라? 벌써부터 남편 행세를 다하려고 드네?.까불래? 정말 국물도 못 얻어먹고 싶어?.

이 녀석아.네 아빠는? 헬스장에서 옷을 갈아 입다가 다른 여자들이 볼 경우는?

목욕탕이나 찜질방에 갔을 때는? 넌 그런 것도 생각할 머리가 없어?

아휴. 똑똑해서 좋은 대학을 갔나 싶었더니 순. 엉터리네?

너 커닝을 했었니? 아니면 그날따라 찍기가 무지 잘 되었던지?

우리 집이 돈이 많아서 너희 학교 도서관 앞에다 잔디를 깔아준 것도 아니고.

난 머리가 좋은데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네 아빠를 닮은 건가?

아닌데? 네 아빠가 가끔 바보짓을 하기는 해도 머리는 좋은 사람인데.

어머낫.!! 너 혹시 병원에서 바뀐 게 아닐까?.” 

“ 어, 엄마.!!!! 미안, 미안.내가 잘못했어.그만해.” 

“ 호호호. 짜식이. 그러게 애초에 왜 까불어?.자. 얌전히 이거 가지고 집에 먼저 가있어.”

“ 또 헬스클럽에 가는 거야? 그거.나 피하려고 그랬던 거 아냐? 이제는 필요 없잖아?.”

“ 호호.아주 바보는 아니었네?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걸 보니까.

이유야 어찌되었던 돈이 아깝잖아? 뭐.운동을 하면 나한테 좋고, 그리고 너한테는 더 좋을 걸?”

“ 아, 알았어.빨리 갔다 와.나 먼저 가 있을게.”

“ 어머? 쟤 좀 봐? 그런 건 또 잽싸게 알아듣네? 어린애가.아주 웃겨.호호호.”

아들을 놀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든 다영은 정말로 순진한 영계를 두고 

잡아먹기 전에 장난을 치는 아줌마 같은 기분이 되어 야릇한 흥분마저 느꼈다.

아들과의 관계를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자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장난 삼아 던진 자신의 운동이 아들에게도 좋을 거라는 은근한 말을 즉시 알아듣고서 

얼굴을 붉히며 도망가듯이 사라지는 아들의 모습에는 다영도 조금은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 그나저나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겠지.할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은.”

다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린 다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다영아.오랜만이야.”

“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누나의 이름을 막 부르고?”

“ 후후. 어째 넌 나이를 꺼꾸로 먹냐? 갈수록 예뻐지네?”

“ 호호호.그래도 아주 쬐금은 제정신이 돌아왔구나?.”

“ 어쩐 일이야? 네가 나한테 먼저 연락을 다하고?”

기철은 샤워라도 한 건지 촉촉하게 젖은 머리결로 들어선 다영을 보면서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다영의 말처럼 비록 3개월 차이라지만 엄연히 출생 년도가 달라 

나이에 차이가 있으니 어쩌면 누나라 불러야 하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릴 때는 누나누나 하고 부르면서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자신이 

언젠가부터 다영을 누나라고 부르려고 해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때문에 처음에는 주위의 집안 어른들에게 꾸지람도 무척이나 많이 들었었지만 

결국엔 기철의 고집과 다영의 옹호로 그냥 동갑내기로 취급을 해주게 되었다. 

“ 나, 너한테 어려운 부탁을 한가지 하려고.”

“ 뭐든 말만해.어릴 때부터 네가 내편을 들어주고 커서도 이것저것 도와준 걸 생각하면.”

“ 저.기철아.네가 손을 씻었던 그 일.날 위해 한번만 해주면 안 되겠니?.”

“ .무슨 일이야?.”

다영과 친척 뻘이 되는 기철은 학창시절부터 껄렁한 아이들과 어울리더니 

결국 퇴학을 당하고는 뻔한 과정을 거쳐서 뒷골목의 주먹 세계로 들어섰다.

그러나 겉보기에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것과는 달리 그다지 독하지 못한 심성 탓으로 

그 세계에서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서 만날 싸움판에서만 겉돌며 교도소를 드나들다가, 

다영의 눈물 어린 질책과 도움으로 몇 년 전에는 드디어 손을 씻고 장사를 시작해서 

지금은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며 늦게나마 가정을 꾸리고 아기자기하게 잘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도록 해주었던 다영이 자신에게 그런 일을 요구하자 

기철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것까지 부탁하는지 걱정부터 앞섰다.

“ 미안해.기철아.정말 너한테 이런 일을 부탁하긴 싫었지만.”

“ 빨리 이야기부터 해봐.일단 들어보고서 판단을 하게.

나도 그쪽으로 손 씻은 지가 좀 되어서 들어봐야 알겠어.

내가 할 수 있는지.정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더라도.”

“ 응.사실은 내가 실수를 좀 해서 어떤 남자에게 약점을 잡혔어.

그래서 그 남자가 자꾸 협박을 해오는데.그게 네 매형도 얽힌 문제라서 경찰에다 이야기하기는.”

다영이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는 동안 기철의 주먹이 몇 번이나 테이블 밑으로 쥐어졌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긴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다영에게 기철은 조용히 말했다.

“ 알았어.다행이야.사실 나도 많이 긴장했거든?.과거에 하던 일이라기에.

그 정도는 딱히 내가 했던 일이라기 보다야 주변에 남자가 있으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네?.

뭐.물론 나 같은 경우야 좀더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

알았어.날 믿고 맡겨.그리고 그 남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고.”

“ 고마워.기철아.”

“ 그리고.정말.그것만 회수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따끔하게 맛만 보여주면 돼?

혹시.그 자식이 널 강제로.?”

“ 아니야.기철아.그런 건 없어.정말이야.

너 엉뚱한 생각하지마.네가 얼마나 어렵게 자리를 잡았는데.

나도 딱히 해결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크게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그러니까 절대로 문제가 생길 일은 만들면 안돼.알았지?.”

“ 알았어.그러면 내가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짓고 연락을 할게.그것도 회수하고.”

“ 고마워.기철아.내가 꼭 신세를 갚을게.”

“ 됐어.네가 지금까지 내게 해준 것만 해도 차고 넘쳐.

그리고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린 용감한 남매 아니냐?.하하.”

“ 기철아.”

다영은 웃으며 사라지는 기철의 등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모를 일이 남아있었기에.

물론 두렵기도 하지만 달콤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 가지 일이.

“ 엄마.아”

“ 엄마가 그렇게도 좋아?”

“ 응.당연하지.”

“ 하아.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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