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앞으로 해야할 일들
‘역시 받아들이질 않아, 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신호가 길게 이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녀가 내 문자에 마음이 조금은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멈추지 않고 기가 끊어지면 계속 보내자 신호가 어느 때는 짧게 가고 또 어느 때는 길게 가다가 끊어져 나는 차를 돌려 그 잠깐 느껴지는 방향으로 차를 돌려 조금씩 전진해 갔다.
그녀는 도시를 벗어나 외지로 갔는지 내가 예전에 도태자 사냥을 나갔던 동쪽 지역으로 차는 조금씩이나마 이동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우가 한번도 없었기에 내가 이렇게 짧은 기를 이용해 추적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나도 이 방법을 방금 터득한 것이었으니까.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 짧은 기의 흐름이 이동을 하지 않고 한곳에 머물러 있어 한쪽 방향으로 향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기가 끊기기를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백여 번이 넘었을 때 나는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 집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정말 마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도시에 적응을 하지 못하거나 또는 이런 외떨어진 곳이 좋아 사는 사람들이나 살법한 곳까지 오게 됐다.
이곳에는 간간히 폐가들도 있었는데 생각하기로 은지는 그 폐가들 중 한곳에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서로 기를 나눈 랭커 중 한명이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렇게 시간과 노력이 가미된다면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됐다.
기를 보내는 나도 귀찮았지만 계속 끊어야 하는 은지도 꽤나 귀찮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녀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음 어느 때고 마음을 잘못 먹고 허튼짓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산 밑의 군데군데 있는 집들을 한동안 지나쳐 이제 집들이 거의 없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한참 동안 집은 보이지 않았지만 잠깐 동안 흐른 기는 계속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헌데 어느 순간 갑자기 기가 끊기지 않고 그녀가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됐다, 은지가 드디어 내 진심을 믿어준 모양이구나.’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이제 끊김없이 이어지는 은지의 고유기를 따라 차를 최대한 빨리 몰아갔다.
*
은지는 다 쓸어져가는 통나무집 구석에 두 다리를 모은 채 얼굴을 파묻고 한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그저 그렇게 계속 울고만 있었다.
게임이 끝난지 하루가 지났지만 지금 이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랭크게임에 참가해서도 전투를 할 의지가 없어 맵에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맵을 열어 안전지대와 자기장의 거리도 확인해 보지 않았다.
얼마 후 문득 뒤를 돌아보니 푸른색의 자기장막이 다가왔지만 계속해서 그냥 하늘만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자기장이 몸에 닿고 온 몸이 바스라지는 고통이 찾아 왔지만 차라리 이렇게 고통이 느껴져 잠시나마 준수에 대한 일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모두 떨어져 다시 귀환을 하고 아레스에게서 계속 전화가 오고 준수에게서도 간간히 전화와 기가 전해져 왔지만 모두 바로 끊어버렸다.
‘나만 사라자면 준수와 아레스 교관님은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자신 때문에 준수가 미안해하거나 불편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사실 준수와 자신과는 아무 사이도 아닌 그저 아직은 조금 친한 친구 사이일 뿐이다.
자신이 이러는 것도 오버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도저히 두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살아갈 의욕이 없어 이대로 그냥 죽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자살할 용기는 없고 이대로 있으면 굶어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아레스와 준수의 전화를 무의식적으로 계속 끊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준수에게서 문자가 두 통 올라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문자를 읽고 나자 더욱 서글퍼 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은지는 자신이 이정도로 준수를 좋아하고 있는 줄 몰랐다.
준수의 말대로 아레스와 자신이 함께 준수의 여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역시 자신이 둘 사이에 끼어들면 준수가 무척 불편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준수에게 여기저기 여자들이 꼬이고 있는 것은 아예 모른 채 말이다.
준수가 끊임없이 보내오는 기에 가끔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끊는 것을 잊어먹은 때도 있었다.
그만큼 지금 은지의 머리는 복잡하기도 하고 때로는 멍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헌데 문자를 확인하고 두 무릎을 모은 채 고개를 파묻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고 있는 어느 순간.
스스스.. 스럭.. 스럭
밖에서 아주 조용한 인기척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만약 자신이 움직이고 있었거나 또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면 이 소리는 결코 듣지 못할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산짐승인가..?’
아레스의 집을 나온 뒤 이대로 죽을 생각에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은지다.
은지는 고개를 들기조차 힘겹고 만사가 귀찮아 자그마한 산짐승이겠거니 하고 얼굴을 파묻은 채 그대로 멍한 상태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만약 직접 자살을 한다면 다시는 환생할 수 없다는 말이 있어 그것은 무서워 그렇게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일부러 굶어 죽는 것이 자살인지 아닌지 애매했지만 아무튼 직접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니 그거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헌데 잠시 후 아주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삐그덕..!
문은 밖으로 잡아당겨야 열리기 때문에 짐승이 문고리를 잡아당겨서 열 수는 없었다.
순간 은지는 혹시나 하고 흐르는 눈물이 더욱 쏟아져 나온 채 고개를 반짝 들었다.
혹시 준수가 어떠한 방법을 찾아내 자신을 추적해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만큼 지금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통나무집에 들어오고 난후 밖으로 나온 적이 한번 없었기 때문에 은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은지의 지금 심정은 자신이 준수의 전화와 기는 모두 끊기는 했지만 어쩌면 어떻게 해서든지 준수가 자신을 찾아내 주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증거로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빛이 조금 밝아진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본 순간 은지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오무렸던 다리와 큰 눈망울이 한없이 떨려왔다.
눈앞에 선 사내는 나이는 젊었지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땅딸막한 남자였다.
한마디로 언젠가 하드 맵에서 한번 본적이 있는 드워프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내는 조그리고 앉아 있는 은지를 쳐다보며 연신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 표정과 눈빛만 봐도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음침한 눈빛의 드워프와 같은 남자가 역시 음침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며칠 전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우연히 봤지, 이 폐가에 왜 너같이 예쁜 여자가 들어갈까 이상했었지만 그 후 밖으로 한번도 나오지 않고 계속 안에 쳐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는 무척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남자는 마치 추리를 하듯 큰 눈망울을 빛낸 채 겁을 먹고 있는 은지를 보며 입맛을 다시듯 붉은 혀로 입술을 한번 훔치더니 말을 이어갔다.
“뭐 뻔한 것 아니겠어?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무슨 죄를 짓고 도망치는 중이겠지. 아니 지금 그 표정을 보니 남자에게 버림받은 것이 확실하군, 내 말이 틀렸나?
남자의 말에 은지의 눈빛이 흔들리며 자신도 모르게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남자가 역시라는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내 말이 맞는 모양이군. 어떤 새끼가 저렇게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여자를 버렸을까? 도시 어디를 가도 너보다 예쁜 여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텐데 말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남자로 인해 받은 상처는 남자로 치료하면 되거든. 크큭.. 물론 당연히 지금은 내가 널 치료해줄 남자일 테고.”
땅딸보 남자가 입가를 말아 올리며 다가오자 은지가 벌떡 일어나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위협하듯 말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
은지의 말에 남자가 실실 쪼개며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네 레벨이 나보다 한참 낮은 걸 알고 있어. 난 지금 실버 티어인 13레벨이거든. 뭐 이제 한 달 후면 도태자가 될 것이 확실하겠지만 말야. 그런데 도태자가 되기 전에 너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겼나봐. 이제 넌 나와 같이 깊은 산속에서 살아야 돼, 내가 밤일은 아주 끝내주게 잘하니까 너한테도 결코 손해는 아닐 거야.”
남자의 더러운 말에 은지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저놈과 싸우다가 죽으면 모든게 다 끝나는 거야.’
은지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굶어 죽으려면 아직도 며칠을 더 있어야 할지 몰랐는데 남자에게 덤벼들면 금방 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비록 놈이 강간을 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반항하면 강간이 쉽지 않아 결국에는 자신을 그냥 죽여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은지는 다가오는 놈을 향해 아레스와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염력 술사인지라 한쪽에 있는 과도 칼이며 포크같은 날까로운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허공에 띄어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사사삭. 스스스.. 퍼퍼퍽!
남자의 몸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이더니 은지가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녀의 몸 몇 군데를 찔렀다.
“흐윽..!
챙그랑
한순간 온 몸이 마비되며 남자에게 쏘아 보내려고 했던 도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움직일 수도 없을뿐더러 기력도 모아지지 않았다.
그때 이미 코앞에 서있던 남자가 자신보다 더 큰 은지를 올려다보며 징그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내공이라는 기를 다루는 무술가야. 내가 방금 시전한 것은 보법이라는 것이고 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수법은 점혈법이라고 하는 것이지. 말을 하지 못하면 재미없어서 말은 할 수 있게 해놨어. 소리 치고 싶으면 치고 신음 소리를 내고 싶다면 마음껏 내도 돼.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제발 부탁이야, 그냥 죽여줘,”
은지가 애원을 하듯 부탁했지만 남자가 냉소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