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다이아 티어가 되다
방문 소리는 아레스 교관님 방이 아닌 분명 준수가 들어간 자신의 옆 방문이었다.
만약 이렇게 조용한 새벽이 아닌 낮이었다면 비록 옆방이었다고 해도 들리지 않았을 아주 조심스런 소리였다.
‘화장실을 가나?’
지금 시간에 방을 나온다는 것은 화장실을 가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헌데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는데 아무 기척이 들리지 않다가 갑자기 자신의 방문이 아주 살며시 열리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지..?’
은지는 이 시간에 아레스 교관도 분명 잠들었을 시간에 자신의 방문이 열린다는 것에 대해 무척 의아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 가지 생각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준수가 날 원하고 있는건가..?’
이 시간에 그것도 살며시 방문이 열린다는 것은 은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자가 술을 먹고 늦은 저녁 모두 잠든 시간에 여자방문을 이렇게 조용히 연다는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만약 할 말이 있었다면 아까 술을 먹을 때 했었거나 아니면 남들이 들을 말이 아니라면 내일 일어나 같이 집에 갈 때 말하면 될 일이었다.
두근두근..
원래부터 방문과는 등지고 누워 있었기 때문에 심장이 벌름대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비록 자고 있다지만 교관님도 한 공간에 있고, 아무리 술을 먹었다지만 이렇게 남의 집에서 이러는게 어디 있담.’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 해도 준수가 결코 이런 친구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술을 너무 마시고 예전 자산이 했던 고백에 대한 답을 술김에 몸으로 말하려는 것이라 생각해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은지 자신은 준수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틀 후 함께 듀오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내일 슬쩍 준수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있자고 하거나, 아니면 은지 자신의 집에서 같이 밤을 지내고 게임에 참가하자고 했으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수는 역시 오늘 술이 취해 참지 못하고 이렇게 결심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준수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여친을 원할 때는 자신을 일순위로 생각한다고 했으니 이번 술 먹은 김에 결심을 내린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준수와 자신이 연인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아레스 교관도 은근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른 집에서 이러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만 준수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입으로 손을 꼭 막고 있거나 입술을 깨물어서라도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할 텐데.. 혹시 교관님이 깨면 창피스럽잖아.’
두근대는 마음으로 준수가 침대로 슬그머니 파고들면 어차피 그의 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었기 때문에 이참에 모른 척 그냥 받아 주기로 했다.
‘헌데 듣기로 처음 처녀가 깨질 때 는무척 아프다고 들었는데 아프다고 소리치면 안될텐데.. 제발 아프지 않게 살살 해줘야 돼 준수야.’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이제 결심을 굳힌 후 준수가 들어와 자신의 등 뒤를 살며시 안아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이게 웬걸.
스르르..
마음을 모질게 먹고 준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방문이 스르르 다시 닫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이미 들어와 방문을 닫은 것은 아닌가 했지만 아무리 귀를 귀울여 봐도 개미새끼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있던 은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준수는 들어온게 아니고 그냥 문을 열었다가 닫은 것밖에 없었다.
‘화장실 가는 중에 내가 잘 자나 확인하려 했나보네, 그럼 그렇지 준수가 그럴 친구가 아니지.’
괜히 혼자 별별 상상을 다 했다는게 부끄러워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준수가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해 주었다는 그 자체가 고마웠다.
그리고 준수가 혹시 자신을 원할 때는 언제고 괜찮다고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됐다.
딸깍.
잠시 후 숨죽인 발소리와 함께 역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에 들어가는 소리인가 하고 이제 정말 자려고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화장실 문은 미닫이라 드르륵 소리가 나야 하는데..? 그리고 화장실은 내 옆이라 이렇게 작게 들리지 않을 텐데?’
소리만으로는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준수가 다시 제방으로 들어가는 문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은지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겠지 생각했다.
헌데 하필 이때 소변이 마려울게 뭐란 말인가.
잠시 생각하던 은지는 자기 전에 그토록 좋아하는 준수의 얼굴도 한번 보고 싶었고 또 술김에 장난도 한번 치고 싶어 몰래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다가 준수가 나오면 놀래켜 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가가 화장실 앞에서 이런 장난을 친다는게 조금 이상하겠지만 뭐 어떤가.
언젠가, 아니 머지않아 자신은 준수의 여자가 될 것이 뻔한데 소변본다는 것으로 창피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킥킥, 머리를 앞으로 모두 넘기고 문 앞에 서있으면 나오다가 기겁을 하겠지? 어디 다이아는 얼마나 강심장인지 한번 두고 보겠어.’
준수가 문을 열고 나오다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랄 생각을 하니 너무 웃겨서 속으로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연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옆에 있는 화장실로 살금살금 다가간 후 머리를 전부 앞으로 내려 얼굴을 가린 후 두 손을 고양이처럼 번쩍 쳐들고 문 앞에 섰다.
헌데 이상했다.
화장실 안에서는 물 내려가는 소리는커녕 누군가 있을 것 같은 인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곧바로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확인해보니 역시 준수는 그곳에 없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아주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아련히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집에는 아레스 교관과 준수 그리고 은지 자신밖에 없다.
그렇다면..?
준수는 자신의 방에서 나왔고 화장실을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이 야밤에 교관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간 건가..? 내일 얘기하면 될 것이지 이 늦은 밤에.. 아무튼 준수가 술이 취하긴 취한 모양이네.’
머리를 그대로 앞으로 내려 얼굴을 가린 채 준수가 교관님 방에서 나올 때 놀래켜 주려고 교관님의 방문 앞으로 다가가서 준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때, 듣고 싶지 않은 얘기가 저절로 귓가에 청천벽력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교관님도 내가 그리웠지?”
“몰라, 왜 이렇게 모험을 하려고 하니, 내일 아침에 은지 가고 다시 와도 되잖아.”
“급해서 그렇지, 은지는 잘 자니까 걱정하지 말어.”
“정말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어, 은지 보기 미안해서...,”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헌데 잠시 후 아레스 교관의 입에서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소리를 듣고 은지는 몸이 심하게 떨리며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으읏.. 준수야.. 살살해, 아파..”
“교관님 젖꼭지는 언제나 맛있단 말야.”
“그렇게 맛있니? 꼭 애기 같아.”
“교관님이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거 몰라? 교관님은 꼭 소녀 같단 말야. 다리 벌려봐 내가 즐겁게 해줄게.”
“아읏! 준수야.. 어떻게 해.. 하으응..”
아무리 남자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은지였지만 이건 일반적인 대화 소리가 아닌 남녀간에 행하는 이상한 행위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교관님이 입을 막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참느라고 입술을 깨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이 소리는 절대 아레스와 준수 사이에서 흘러나와야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한순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은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그리고 처음 자신이 준수에게 고백했던 때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때 준수는 고백을 듣고 아직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만약 애인을 만들고 싶을 때가 오면 은지 자신을 첫 번째로 생각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그동안 준수가 안정이 되고 그 고백에 대한 답을 내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 준수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 답을 해줄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렸던가.
하지만.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물론 지금 시대에는 나이가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아레스 교관과 준수가 연인이 됐다고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하지만 형식상이나마 아레스 교관은 은지 자신의 스승이었고 준수의 스승이었다.
그런 아레스 교관님과 한 남자를 두고 다툴 수는 없었다.
아레스 교관님은 은지도 정말 좋아하는 스승으로 서양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고 얼굴도 무척 귀여우면서도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뛰어난 미모 덕분에 아레스는 코레일 교육원에서 여 교관님들 중에서도 으뜸인 여신으로 통할 정도였다.
‘그래, 다이아 티어가 된 준수가 브론즈 티어에서 헤매고 있는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여자를 좋아 할리 없지. 나와 이번에 듀오 게임에 참가하자고 한건 날 동정해서 그런 거였어.’
안에서 야릇한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사이 은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떠나면 그만인걸.. 준수 옆에서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내가 떠나면 그만인걸. 그리고 오늘 일은 가슴 속에 깊이 묻고 영원히 준수만 마음속에 품고 살면 그만인데..’
준수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레스 교관님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아니 준수와 자신은 지금 아무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워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아레스 교관님의 교성이 어느 정도 고조에 올라가자 은지는 다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고양이처럼 앞으로 세웠던 두 팔을 내리고 온 몸이 축 쳐진 채 뒤돌아섰다.
방이 아닌 밖으로 나가는 현관문으로 다가가는 사이에도 은지의 눈물은 아직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니 집으로 돌아가서 이 대륙을 떠날 때까지도 아마 눈물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동안 고마웠어, 준수야. 너 같이 좋은 술친구가 있어서 재미는 있었잖아. 교관님이랑 행복하게 잘 살아야해. 안녕.’
현관문을 소리 없이 열고 밖으로 쓸쓸히 사라지는 은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레스의 방에서도 마지막을 치달리는 아주 조용한 교성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한숨 자고 새벽녘이 되어 팔벼개를 베고 누워 있는 아레스를 보며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헌데 그때 아레스도 눈을 반짝 뜨며 알몸을 이불로 가리며 제 딴에는 불안했는지 느닷없이 나를 재촉했다.
“이제 그만 방으로 가봐, 이러다가 은지 일어나겠어.”
“은지가 술 먹고 이렇게 일찍 일어날 애로 보여? 아마 점심때까지 골아 떨어져 있을걸. 아무튼 우리 교관님 은지는 끔찍이 생각한단 말야?”
“생각 안할 수 없지, 은지한테 미안한 부분도 있지만 은지도 날 많이 좋아하고 나도 은지를 다른 생도들보다 조금은 더 생각하고 있거든. 그런데 은지가 다른 생도들보다 빠르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 레벨이 너무 낮아 맵에서 조금 힘들어 하는 것 같아 그게 걱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