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나순진 공략
“아니, 내가 자네에게 무슨 부담을 줬다고 그런 막말을 하나?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뭐 별거 있겠나? 그냥 챌린저님을 뵈러가니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자는 취지에서 그런 것뿐이지.”
“제가 무슨 선보러 갑니까?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게.”
내가 하는 말에 옆에 있던 지아가 나를 거들어주었다.
“그건 준수씨 말이 맞아요, 챌린저님을 만난다고 해서 뭐 특별히 마음의 준비를 할 건 없어요. 그냥 다른 플레이어 한명 소개받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면 될 거에요. 챌린저님께서도 권위를 앞세우시는 분이 아니고 소탈하신 분이니까요.”
지아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금 세상은 티어의 구분으로 신분이 결정되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플레티넘이 되었다고 해도 최고 지위인 챌린저를 만나는 일은 심리적으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얽매인다면 정말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그런 일로 날 고깝게 본다면 방금했던 말대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 그만이다.
다크 사이어돈을 처치했을 때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마스터들 전번도 그대로 남아 있어 그쪽으로 이주한다면 대 환영일 터다.
내가 국장에게 그런 이야기도 하자 국장의 낮빛이 더욱 샛노래지며 나를 향해 조금은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내 말을 단단히 오해했군, 아니 내가 말을 실수 했다는 것을 인정하네. 사실 챌린저님께서는 지아님 말씀대로 무척 소탈하신 분이라네. 뭐 마음의 준비고 말고 할 것도 없네.”
국장은 처음 내가 챌린저를 만나는 일에 대해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고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내가 심드렁한 표정과 마음으로 대처하자 급히 꼬랑지를 내렸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만큼 빠른 승급을 하는 플레이어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한다고 하면 중앙 기관의 국장으로서는 무척 황당하고 당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말만 그랬지 나는 결코 이 지역을 벗어날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냥 내게 부담을 주지 말라는 차원에서 협박성과도 같이 그런 말을 했던 것뿐이다.
물론 이런 내 협박이 통할 것이란 것은 역시 이들이 날 그만큼 중요하게 여길 거란 생각 하에서였고, 그것은 국장이 당황하며 내 말에 꼬리를 마는 것으로 증명됐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플레티넘 플레이어가 많고 많은데 그중 한명일 뿐인 나를 챌린저가 특별히 만난다고 하는 것은 나로서는 솔직히 영광이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만약 그랬다가는 국장의 기가 올라가 무슨 말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장과 지아의 말을 들어보면 챌린저가 날 만나보려 한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헌데 국장은 한 기관의 장이라 챌린저를 자주 본다지만 보아하니 지아도 챌린저를 자주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챌린의 성격이 소탈하다는 것을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자고로 한 사람의 성격을 그녀처럼 단정짓 듯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자주 본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런데 지아님이 챌린저님의 성격이 소탈하다는 것을 어찌 압니까? 한 사람의 성격을 단정짓듯 알기까지는 그 사람과 보통 자주 만나서는 알 수 없는 일일 텐데요..?”
내 말에 지아는 물론 국장까지 조금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잠시 국장이 지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약간은 더듬거리며 지아 대신 내게 답해 주었다.
“그것은 음.. 어떤 일이 있어 내가 지아님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챌린저님께서 지아님이 마음에 들어 항상 옆에 두시기 때문에 지아님과 챌린저님은 자주 보는 편이라네.”
“챌린저님이 지아씨를 마음에 들어하셨다고요? 그럼 지아님이 혹시..? 챌린저님의 애인..?”
내가 혹시나 해서 묻자 두 사람이 갑자기 서로를 쳐다보더니 한바탕 크게 웃고는 지아가 나를 향해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챌린저님의 애인이라는 것은 말도 안돼는 소리에요. 아무튼 국장님 말씀대로 챌린저님이 절 맘에 들어 하셔서 거의 옆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전 통 모르겠습니다.”
“준수씨가 지금은 그런 것까지 알 필요 없어요.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전 챌린저님의 애인은 아니에요. 만약 제가 정말 챌린저님의 애인이라면 준수씨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나 있었겠어요? 그것도 밤새서...”
지아가 말을 하며 웬일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기까지 했다.
그것이 아마도 예전에 내 집에서 술을 먹고 같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잔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뭔가 숨기려하는 것 같아 기분은 나빴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남의 사생활까지 어거지로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어 나도 여기에서 의문을 접어야 했다.
순진이는 옆에서 잠시 왕따가 되어 혼자 술만을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술이 올라와서인지 다시금 예전 그녀가 내게 저질렀던 만행이 다시 떠올랐다.
얼음조각과 같은 냉정한 얼굴의 미인인 순진이는 내가 그때 일로 원한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하긴 인간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부상당했다고 인간이 그것을 기억할리 없는 이치일터다.
그만큼 그녀는 그때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이다.
말이 그렇지 한적한 도로.. 그것도 집까지 150여 키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로 한가운데 떨궈 놓고 그대로 가버린 것이 나로서는 엄청난 상처로 남아 있었다.
전에도 생각한바가 있었지만 나는 은혜는 몰라도 원한은 천만배로 갚아줘야 성이 차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 원한은 오늘 꼭 갚아주기로 마음먹고 있는 터다.
물론 그 방법이 어떤 식이던 상관없었다.
오늘 헤어지면 다음에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를 일이라 오늘 기회를 봐가며 어떻게든 꼭 되갚아 주기로 다짐 또 다짐하며 여기로 넘어온 것이었다.
술자리는 한동안 이어져 어느새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되자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만 가려고 했다.
“나는 그만 마셔야겠네. 내일 아침부터 바쁜 일이 생겨 이제 그만 들어가 쉬어야겠어. 그리고 지아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차로 왔는데 지금 가신다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럴까요? 준수씨가 같은 방향이면 더 마시고 가겠는데 완전히 반대방향이니 데려다 달라 그러기도 뭐하고.. 저도 그만 일어나야겠네요.”
“지아도 가려하자 나 혼자 남아 있기 뻘쭘해 같이 일어나려하자 국장과 지아가 나를 말렸다.
“우리들 때문에 자네까지 일어날 필요는 없네, 아직 시간도 있고 하니 자네는 순진이와 더 마시다가 가게.”
“그래요, 괜히 저희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생일인데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같이 있어줘야지요. 저야 뭐 국장님이 가셔야 한다니 어쩔 수 없이 가지만요.”
국장과 지아의 만류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못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언제 다시 순진이를 만날지 알 수 없을 터였다.
오늘같이, 특히 자연스레 마련된 이런 술자리를 이용할 날이 언제 또 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 가신다니 저러도 남아서 우리 순진이 생일을 축하해 줘야겠습니다.”
내가 일부로 우리 순진이라는 말에 약간 힘을 주며 말하자 순진이 갑자기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마치 이게 말이야 방귀야 라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국장과 지아는 그런 내 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내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고 이제 둘만 남게 되자 분위기는 급 썰렁해졌다.
자연히 두 사람은 말이 없고 술만을 연이어 들이키고만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문득 생각난 듯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제법 매력있게 생겼는데 아직 남친이 없는 거야? 너 같은 대단한 미인이 아직 남친이 없다는건 어딘가 조금 이상한 일인데.. 세상 남자들이 모두 눈깔이 삐었나? 너 같은 매력적이고 예쁘장한 여자를 이렇게 혼자 있게 하다니 말야.”
갑자기 터져 나온 엉뚱하다고도 할 수 있는 추켜 세워주는 내 말에 웬일이냐는 듯 그녀가 이번에는 제법 호의적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웬일이지? 나에게 그런 말을 다 할 줄도 알고. 사실 저번에 내가 널 도로가에 떨궈 놓고 가서 날 무척 미워할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일에 대해 찔려하고 있었던 같기도 했고.
하긴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만행을 저질러 놓고 찔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지만 겉모습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긋 미소 지은 채, 무척 대범한 양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내가 쓸데없는 일에 화가 나서 내가 먼저 내려 달라고 했잖아. 나 그런 사소한 일로 쪼잔하게 구는 남자 아냐. 덕분에 달리기 수련도 됐고 아주 좋았는걸. 그 달리기 수련 덕에 내가 오늘 이렇게 플레티넘 티어까지 승급된 것 같아 그때 날 내려준 너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말도 안되는 말을 해가며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그녀가 조금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주니 다행이네, 그럼 정말 그때의 일로 내게 악감정이 없다고 믿어도 되겠네?”
“그럼 당연하지,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 그렇게 속 좁고 쪼잔한 놈 아냐. 만약 그렇다면 네 생일을 축하하러 내가 이렇게 올수나 있었겠어. 그런 사소한 일은 그만 잊고 우리 잘해보자, 같은 아시아 지역에 사니 우린 한 편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지. 난 또 네가 그때의 일로 앙심을 품고 있을까봐 경계했었거든. 사실 난 아직 골드티어고 언제 골드를 벗어날지 알 수 없는데 넌 벌써 플레티넘 티어잖아. 지금 너 성장 속도로 보면 다이아로 승급되는 것도 멀지 많은 일인 것 같은데 솔직히 네가 내게 앙심을 품는다면 나로서는 정말 큰 부담이었거든.”
그럼 그때 같은 골드일때 도로 한가운데 떨궈놓는 우는 범하지 말았어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미 그건 엎질러진 물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대단한 앙심을 품고 있는 상황이라 그녀의 그 말은 때늦은 후회였다.
그녀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렇듯 자신보다 위에 티어의 사람이라면 신분이 높아진, 아니 앞으로 내가 더욱 높아질 것이란 점을 예상했는지 내게 저지른 만행을 조금은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