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실버티어 맵
곧바로 놈이 들어가 있는 물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가 숨어 있는 나무 뒤 잎사귀가 무성한 허공에 부적을 하나 던져 청룡을 소환해 냈다.
사신수는 현세의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력이나 기를 느낄 수 없어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청룡은 아직 강력한 번개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한 고압 전류 정도의 번개를 발산해 웬만한 플레이어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놈에게 번개를 내쏘기 전에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게 먼저였다.
만약 놈의 레벨이 터무니없이 높다면 청룡의 전류만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어 괜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놈의 레벨이 높다면 청룡이 희생될 각오는 이미 하고 있던 터였다.
곧바로 청룡에게 명령을 내려 허공에서 호수가 있는 곳으로 서서히 날아가게 했다.
놈은 설마 허공에 누가 있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물놀이를 즐기면서도 땅 쪽만 경계하고 있었다.
50미터.. 45미터.. 40미터.. 35미터.. 30미터
놈과의 거리가 30여 미터쯤 되자 드디어 청룡과 공감한 내게 놈의 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놈이 나보다 상위 레벨이었다면 결코 기는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얼핏 가늠해보니 놈은 14-15레벨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곧바로 청룡에게 번개를 날리도록 하고 다시 품속에서 부적 세 개를 꺼내 주작 현무 백호를 모두 소환해 냈다.
츠아앗.. 츠츠츳
세 신수가 나타나기 무섭게 번개가 놈이 있는 물에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지지지직.. 지지지.
“으어어억..!
마치 고압전류가 흐르듯 한순간 물위에 푸른 전기막이 생성되며 놈이 두 눈을 까뒤집은 채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만약 더 강력한 번개였다면 물속 바닥까지 파고들어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어 냈겠지만 아직 그 정도 위력은 내지 못하고 이렇게 물에 전기류만 발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놈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순간 소환된 현무와 백호가 재빨리 호수가 근처로 가서 물위의 전류막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푸른빛의 전류가 사라지자 재빨리 물로 뛰어들어 놈에게 접근해 갔다.
이때 주작과 청룡은 허공에서 놈의 머리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헌데 현무가 물속으로 들어가자 등에 달라붙어 있던 10여 마리의 구렁이들이 입을 쫙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꼬리가 등에서 떨어져 나가 물속에서 놈에게 접근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뱀이 땅에서도 빠르지만 역시 물속에서는 더 없이 빨라 제일 먼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놈에게 다가가 목이며 얼굴 가슴 등 온몸을 마구 물어대기 시작했다.
한순간 뱀들에게 온몸을 물린 놈의 온 몸이 순식간에 검은 빛으로 변하더니 두 눈을 까뒤집으며 몸체가 물위에 둥둥 떠올랐다.
아마도 온 몸이 마비되어 한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체력이 남아있어서인지 놈의 검게 변한 몸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현무가 거북이답게 가장 빨리 놈에게 도착해 신수의 상징인 양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놈의 어깨를 한입에 깨물어 버렸다.
“크어억!”
놈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이번에는 청룡이 양발로 놈의 머리를 낚아채더니 하늘로 떠올랐다.
이것은 호수의 물이 피바다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청룡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비록 아직 완전체가 되지 못한 청룡이었지만 몇 십 미터는 이 정도 무게를 들어 옮겨 놓을 수 있었다.
순간 놈이 발악하듯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청룡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지지직..!
청룡이 발악하려는 놈에게 다시 전류막을 흘려 넣자 놈의 몸이 자지러지며 이내 다시 마비가 됐다.
그렇게 놈을 나무 뒤 호수와 떨어진 곳에 옮겨 놓자 그 뒤를 따르던 삼신수가 곧바로 놈의 몸체를 분해해버려 놈은 이내 허공중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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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이름 : 최준수
종족 : 인간 (인간)
직업 : 도사
티어 : 실버
레벨 : 16
경험 : 195/1600
능력 (도력) : Lv 17
특수능력(도술) : Lv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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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을 확인해보니 놈은 14레벨이었다.
놈을 사냥하고 나자 다른데서 헤맬 필요도 없었고 또 안전지대로 가서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이득이라 역시 이곳에서 사냥하기로 한 결정은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오아시스의 물은 지하수로 끊임없이 순환이 되어 놈이 흘린 피는 곧바로 희석되어 이내 맑은 물이 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한 놈이 나타나 똑같은 방식으로 사냥을 하고 레벨을 확인하니 13레벨이었다.
그렇게 내가 지원해줄 필요도 없이 다시 15레벨 한 놈과 11레벨 한 놈을 사냥하고 나니 경험치는 어느새 585/1600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나보다 레벨이 높은 놈이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기장의 거리도 처음 7키로에서 4키로로 좁혀져와 슬슬 플레이어들이 이곳을 지나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나보다 상위 플레이어들이 분명히 있을 터.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안전지대 안에서 보다는 이곳이 지금 내 레벨로는 사냥하기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돼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기로 작정했다.
과연 얼마 후 한쪽에서 또 한 놈이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나는 모습이 보여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놈을 사냥할 마음에 사신수를 소환할 준비를 하려 품속에 손을 넣고 있는 그때.
‘어..? 한번에 두 놈이라..?’
다른 방향을 보니 그곳에서 또 다른 한 놈이 접근하고 있었다.
두 놈이라도 나보다 레벨이 낮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두 놈이 만나면 분명 싸울 것이고 두 놈 모두 체력이 바닥날 즈음에 짜잔 하고 나타나 두 명 모두 해치워 버리면 나로서는 그것이 더 이득이었다.
헌데 두 놈이 오는 방향이 오아시스를 꼭 거치지 않아도 될 방향인 것으로 보아, 두 놈은 이곳이 오아시스인 것을 알고 다가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긴 나는 초짜라서 몰랐겠지만 사막 맵 경험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멀리서 봤을 때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보이고, 그 근처에 모래와는 다른 검은 점들이 보였다면 그곳이 오아시스라는 것은 단번에 알아차렸을 터다.
이런 뙤약볕에 몸을 물에 담구고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유혹을 모든 플레이어들은 떨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놈이 모두 하위 플레이어들이기만을 고대하며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그 때 사방을 둘러보던 나는 눈살이 잔뜩 찌푸려져야 했다.
“두 놈이 더 온다!”
그랬다.
먼저 오던 두 놈 말고 다시 더 두 놈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다시 살펴보니 그 두 놈뿐만이 아니었다.
네 놈이 다가오는 저 멀리 뒤쪽에서도 군데군데 아련하게 먼지가 풀풀 날려 오고 있었다.
‘씨발! 이건 아닌데.’
먼지가 발생하는 장소를 세어보니 앞서오는 놈들 네 명 말고도 그 뒤에서 다가오는 놈들까지 모두 18명이었다.
‘안되겠다. 이곳에 있다가는 사냥은커녕 다른 놈들과 함께 도매처리 될지도 모른다.’
저 중에는 당연히 상위 플레이어들도 있을 것이고, 그 중에 혹시라도 19-20레벨의 플레이어가 있다면 내가 비록 이 높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내 기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나 또한 다른 하위 플레이어들과 함께 도매급으로 처분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더 이상 버티고 있어봐야 이득이 안될 것 같아 나무에서 내려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저건 또 뭐야!”
플레이어들이 다가오는 반대쪽인 안전지대 방향을 우연히 돌아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니.. 이곳에 다가오는 모든 플레이어가 가야할 안전지대로 향하는 방향에서 마치 사막폭풍이 몰아쳐오듯 뿌연 먼지 구름이 지상을 뒤덮으며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넓은 범위에 걸쳐서 포위해 오듯 말이다.
퍼뜩 생각나는 것은 플레이어 외의 다른 생명체였다.
그리고 당연히 지상에서 저런 먼지 구름을 일으킬 존재들은 그들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앞뒤가 모두 진퇴양난이었다.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은 아직 상황을 모른 채 물을 찾아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나무 위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했다.
이제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한편으로는 10위 안에 들지 못해 경험치가 조금 삭감되더라도 저렇게 무더기로 돌아다니는 경험치를 어느 정도만 사냥해도 몇 레벨 승급하기는 쉬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을 보니 문득 전에 브론즈 맵에서 고릴라와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이 임시 동업을 하고 흰개미들과 맞서 싸웠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도 만약 놈들과 맞닥뜨린다면 누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분명 임시 동업을 할 타이밍이었다.
‘상황을 보고 결정을 내리는게 낫겠지.’
레벨을 올리려면 어차피 내려가서 싸워야겠지만 지금 벌써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플레이어들끼리 완전한 동업이 이루어지고 난 후 내려가는게 안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잠시 후 먼저 다가오던 두 놈이 아무것도 모른 채 물가에서 마주쳤다.
두 놈은 몇 마디씩 주고 받은 후 곧바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싸우다가 누가 죽어버리면 안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한명의 플레이어가 소중했다
놈들의 숫자를 조금이나마 줄여야 그중 몇 명이라도 빠져나가 안전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1,2 등을 다툴게 아니라면 굳이 안전지대에 들어갈 필요 없이 이곳에서 최대한 경험치를 획득해 놓고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레벨이 낮을수록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라 여겼다.
‘지금 내가 16레벨인데 처음 실버맵에 참가해서 골드 티어까지 승급한다면 국장이나 지아가 뻔질나게 날 찾아오겠군.’
사실 나는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은근히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고, 또 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 이유가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든든한 수호신들인 사신수는 비록 내 능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각각이 최소 14레벨은 될 터다.
‘16레벨인 나와 각각이 14레벨 수준의 사신수라면..!’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 불끈 쥐어본다.
문득 싸우는 두 플레이어를 보니 레벨이 똑같았는지 단시간에 누가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 같았다.
‘14레벨들이군.’
16레벨이 되니 하위 플레이어들의 기나 싸우는 모습만으로도 몇 레벨린지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만약 두 놈을 죽여 내 레벨이 당장 승급된다면 주저 없이 죽여 버렸겠지만, 두 놈을 죽인다고 해도 레벨업은 할 수 없어 두 놈은 내가 안전지대로 가는 방패막으로 삼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