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의문의 여자
전화를 끊고 은지와 마셨던 술집 주소를 알아보고 곧바로 그녀에게 주소를 찍어 주었다.
‘국장보다 높은 마스터급인 귀족이 나 같은 브론즈에게 저러는걸 보니 애가 타기는 타는 모양이군.’
여자가 나를 만나려는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해 만나는 보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저런 높은 여자와 친분이라도 쌓아두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될지.
한마디로 사회 초년생인 천민인 나로서는 저런 높은 분과 인맥을 쌓아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비록 내 레벨이 낮아 그녀에 비해 한참 낮은 천민이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지금 상황은 어찌됐든 내가 갑의 입장인 셈이다.
두 시간이 되지 않아 어느덧 도시에 도착해 렌트카를 다시 반납하고 술집으로 바로 가니,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 나 혼자 먼저 술을 시켜놓고 먹기 시작했다.
“캬, 시원하다! 역시 이럴 때는 카이스주가 최고란 말야.”
시원한 카이스주를 단숨에 한잔 들이키니 컬컬했던 목과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오래전에는 이 술을 맥주라고 불렀다지?”
역시 술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질 수 없는, 인간과는 정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한 병 정도를 단숨에 비우자 그제서야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그녀가 검은 바지 정장에 흰 브라우스를 입은 채, 나를 발견하고 정말 도도한 표정과 고고한 모습으로 내 탁자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남자들은 그녀가 등장하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에게 저절로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귀족이라고 해서 이런 술집에 오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천민이나 평민이 아니라는 것이 온몸에 배어있는 듯 도도함이나 고고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 있어, 결코 자신이 평범한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뿜어지는 아우라로 인해 스스로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껄떡거렸다가는 호되게 당할 수도 있었기에 남자들은 표정에서만 찬사를 보낼 뿐 감히 입으로는 그 어떤 말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한잔 드시고 계셨네요.”
그녀가 내 앞에 와서 존대를 하며 깍듯하게 말하자 그녀를 보고 있던 시선들이 이제는 모두 내게로 향했다.
귀족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는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정중하다면 나 또한 귀족으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할 터.
비록 옷이나 모든 것에서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눈앞의 여자로 인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부러움과 질투의 눈길이 느껴지자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우선 앉으십시오.”
“주소만 입력하면 자동차가 알아서 오는데 고생은여.. 하지만 혼자 긴 시간을 오려니 조금 답답하긴 하네요, 저도 한잔 주세요. 카이스주는 저도 자주 먹거든요.”
그녀가 자리에 앉자 거품이 넘치도록 한잔 따라주니 그녀도 목이 답답했던지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햐, 역시 카이스 주는 이 맛에 먹는다니까.”
그녀도 술맛을 제법 아는지 목에서 시원한 찬사를 토해내며 카이스 주에 대해 찬탄했다.
하긴 그녀가 나보다 한참 선배는 맞을 테니 술맛은 나보다도 당연히 더 잘 알고 있을 터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몇 잔을 마시고 나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녀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국장님보다 마스터 순위가 높으신 것 같은데 직급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그래도 부를 호칭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호칭이라..? 기관 사람과 상관이 없어도 국장님 보다 제가 순위가 높다면 당연히 국장님이라도 제가 상위 신분인걸 아시잖아요. 특별한 호칭은 없으니 그럼 그냥 이름을 부르세요.”
“이름을요?”
사실 브론즈가 마스터급으로 짐작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그러라고 하고 또 호칭할 수 있는 마땅한 직책이 없다고 하니 계속 ‘그쪽’ 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러기로 했다.
“제 이름은 이지아라고 하니 그냥 지아씨라고 부르면 되겠죠. 저도 그냥 편하게 준수씨라고 부를 테니까요.”
“그럼 저야 좋지만 그쪽이 괜찮겠습니까?”
“준수씨가 언제까지 브론즈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만약 계속 브론즈에 머물 것 같았으면 편하게 호칭하자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전에 당연히 저는 이 자리에도 없었겠죠. 하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준수씨가 저 보다 더 높은 신분이 되더라도 오늘 저도 양보했으니 그때도 이 호칭은 계속 사용할거예요. 그걸 허락해 준다면 제 이름을 불러도 좋아요.”
“그쪽은 제가 그쪽보다 더 높은 마스터가 될 거라고 확신하시는 모양이군요.”
“준수씨의 레벨 승급 속도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국장님께서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준수씨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에요. 이렇게 빠른 승급을 보인 플레이어는 지금껏 단 한명도 없었거든요.”
“........,”
“또 혹시 알아요? 마스터급보다 더 높은 승급을 할지. 혹시 그때가 돼도 지금 호칭은 그대로 사용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헌데 듣기 불편하게 저에게 계속 그쪽이라고 할 껀가요? 그러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좋습니다, 지아씨보다 더 높은 순위의 마스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호칭이 문제니 우선은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이라는 말은 이제 없어요. 한번 지아라고 불렀으면 저도 이제부터는 준수씨가 어떤 신분이 되더라도 끝까지 준수씨에요.”
여자는 마치 당연히 내가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떤 근거로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손해가 아니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런 속도로 승급을 하다가 언젠가 내 한계를 느끼고 승급이 정체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금 그녀와의 이런 호칭이 무척 부담스러울 것 같기는 했다.
‘이거 이 여자와의 호칭 문제 때문이라도 필히 이 여자는 뛰어 넘어야겠는걸.’
한편으로는 굳이 자존심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은근히 이런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확실히 그쪽이라는 호칭보다 지아씨라는 호칭을 사용하자 딱딱했던 분위기가 훨씬 자연스러워지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이 여자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춰가면서까지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하자 역시 승급에 대한 부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한 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나자 그녀가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준수씨 정말 기관에 들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요? 기관에 들면 물론 자유스러운 부분에서는 조금 속박을 받는다고 해도 이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요.”
“아무리 이득이 있다고 해도 제가 속박 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속박이 없어요, 지금은 준수씨에게 아무런 일도 맡지기 않을거란 말이죠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준수씨가 기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든요.”
“하지만 나중에 제가 승급이 되고 강해진다면 그때부터는 기관 명령에만 따라야 하겠죠.”
“그건 당연한 거예요. 대신 그만큼 다른 쪽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 이득보다 저는 자유스러운게 좋다는 겁니다.”
“국장님 말씀대로 과연 고집이 세네요. 뭐, 좋아요 당분간은 그런 말은 하지 않을게요.”
“앞으로 그런 일로 절 만나자고 할 거라면 전 거절하겠습니다.”
“알았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언젠간 꼭 준수씨를 기관에 소속되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물론 강압적이 아닌 준수씨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말이에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지아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무척 자신만만하게 확신하듯 말했다.
한편으로는 지아 자신이 기관에서 직책이 없다고 하면서 왜 나를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아마도 국장과의 의리나 혹은 챌린저와 인연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닐까하는 짐작뿐이었다.
지아가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알콜이 들어가니 역시 술은 취하기 마련이라, 일찍 만나서 그런지 아직 초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많이 취해 보였다.
하지만 술 먹은 사람들이 의례히 그렇듯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연신 우겨대고 있었다.
마스터쯤 되면 누구처럼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 헤롱대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그냥 내벼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저지해야할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였기 때문에 더욱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준수씨, 카이스 주가 정말 괜찮긴 해요, 나도 예전에 브론즈 골드 티어 때는 이 술을 자주 먹었는데, 글쎄 어느 정도 레벨이 승급되고 월급이 많아지다 보니 내가 아는 인간들은 고급 양주만 먹지 뭐예요. 사실 나는 이게 더 입맛에 맞는데 말이죠. 딸꾹!”
‘어쭈..?’
이제 혀가 꼬부라진 것도 모자라 딸꾹질까지 해대고 있었다.
조금 불안불안 했지만 역시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때 손등이 울리며 전화가 오는 것이 아닌가.
곧바로 화면을 확인하니 은지였다.
분명 술 마시자고 할게 틀림없어 앞에 여자가 있기도 해서 영상 통화가 아닌 음성통화로만 연결했다.
[준수야, 오늘 한잔 어때?]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힘들겠어.”
[그래..? 너 동기들과도 만나는 얘들이 없잖아. 졸업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사회에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누굴 만난다는 거야?]
“내가 너밖에 아는 사람이 없는 줄 아나보네, 아무튼 오늘은 힘들고 다음에 마시자.”
[그래, 알았어. 그럼 캐시한테 연락해서 한잔 하자고 해야겠다.]
은지와 통화를 끝내자 지아가 이제 눈까지 게슴츠레해진 채 나를 쳐다보았다.
“애인인가 보죠?”
“그런거 안 키웁니다,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애인입니까. 교육원 동기입니다.”
“그래요? 준수씨 정도로 빠른 승급을 하는 플레이어는 인기 짱이라 애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딸꾹! 아 왜 자꾸 딸국질이 나오지?”
왜 나오긴, 술을 저렇게 퍼마시니 당연히 나오지.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술이 떡이 되어 지아의 처음 도도하고 고고해 보이던 모습은 이제 많이 퇴색되어져 있었지만, 역시 은연중에 그런 아우라는 몸에 밴 듯 술이 떡이 된 상태에서도 웬일인지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온 몸에 은근히 서려 있었다.
‘역시 마스터급은 뭐가 틀려도 틀린 모양이군.’
하지만 6시에 만나서 지금 10시가 되가니 아무리 도수가 약한 카이스 주라고 해도 가랑비에 옷 젖듯 나도 취했지만 이제 지아는 예전 은지보다 더 취해보였다.
사실 도수가 높은 술보다 이런 술이 한번 취하면 끝없이 더 취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은지를 통해 이미 알고 있기는 했다.
때문에 이제 정말 더 이상 마시다가는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것 같아 내가 다시 은근히 한마디 했다.
“이제 그만 마시는게 낫지 않을까요?”
“아,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전 더 마실 겁니다. 정말 오랜만에 취해보는 건데 그냥 놔두세요, 딸꾹!”
“그럼 맘대로 하십시오.”
생각해서 말해주니 정중히 거절을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취한 와중에도 문득 생각난 듯 한마디 했다.
“아 참! 그리고 나 이렇게 취했다는거 국장님에게 장난으로라도 말하면 안됩니다.”
“왜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창피하잖아요. 그래도 국장님 앞에서는 내가 높은 사람이라고 항상 폼잡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 보여서야 되겠어요? 안 그래요!”
“아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