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의문의 여자
얼마 후 전철을 타고 집근처에 내려 걸어오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오는 사이 어쎄신에 대한 생각을 하니 정말 기가 막힌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맵에서 보고 귀환해서 다시 볼 수 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고 했는데,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지지리도 없는 건지..?’
하지만 역시 반가운 마음보다는 맵에서의 그녀 행동을 생각하니 똥 밟은 기분이 훨씬 더 많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도태자를 사냥하기로 했다.
역시 렌트카 한 대를 대여해 다시 도시 외곽을 이번에도 주작으로 하여금 수색하게 했다.
청룡까지 불러내서 수색하게 하고 싶었지만 칩은 한 개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통장에 4천 셀링과 전달 월급이 조금 남아있어 안심은 됐지만, 역시 다른 상위 플레이어의 게임을 꼭 한번 관전하고 싶어 돈이 더 많이 필요했다.
실버티어 레벨자의 관전은 1만 셀링 골드티어는 2만 셀링 그리고 플레티넘 티어는 4만 셀링으로 티어가 한 단계 오를수록 무조건 두 배의 관전료를 지불해야 한다.
골드티어 이상의 레벨자들은 과연 어느 정도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나는 꼭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높으면 높을수록 더 좋겠지만 관전료가 너무 비싸 지금 당장 골드 티어 이상은 무리였다.
‘실버티어야 내가 머지않아 직접 참가하면 알 수 있을 테고..,’
골드티어 관전만 해도 지금 내 월급의 거의 7배 가까이 들어가는 엄청난 돈이었지만 결코 아깝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보고나면 분명 그만큼 느끼고 얻어지는 것이 있겠지.’
만약 아무런 수확이 없더라도 아직까지 나에게는 꿈의 티어라고 할 수 있는 골드 레벨자의 능력을 한번쯤은 꼭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그런 고차원적인 능럭자들의 싸움을 보고나면 뭔가 느껴지는 것이나 정신적으로 얻어지는 수확은 있을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2만 셀링에 골드티어의 전투를 관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주작으로도 도태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아 정오가 지나 날이 어두워가기 시작할 때까지도 허탕만 쳤다.
‘역시 쉽지가 않아.’
이제 9레벨로 승급했으니 도태자를 처치할 수 있는 폭이 훨씬 더 넓어졌다.
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접어야겠군.’
근처에서 묵을까 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출 퇴근 한다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헌데 집으로 가는 사이 손등에서 진동이 울려와 화면을 열어보니 은지였다.
[두번씩이나 얻어먹어서 이번에는 정말로 내가 한잔 쏘려고 하는데 어디야?]
“볼 일 보고 집으로 가는 중이야.”
[그럼 그 술집으로 올래?]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해도 또다시 내 등을 쳐먹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어쩌나 한번 두고 보기로 했다.
“알았어, 1시간 후에 보자.”
확실히 하루 종일 창문을 열고 차를 달렸더니 시원한 카이스주가 한잔 저절로 생각나 얼마 후 랜트카를 반납하고 술집에 도착하니 이번에도 은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매일 내가 쏜다고 해 놓고 얻어먹어서 정말 미안,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아예 100 셀링을 미리 선불로 계산해 놓았어.”
역시 은지는 일부러 날 등쳐먹은 것이 아니었다.
“무슨 100 셀링씩이나..,”
“먹을 때 실컷 먹어야지, 이제 다음 주면 월급이잖아.”
그러고 보니 교육원을 졸업한지가 벌써 한 달이 거의 되어 갔다.
그 사이 나는 전과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물론 그 중에 제일 큰 변화는 9레벨로 승급했다는 것이다.
“너 이번에는 몇 레벨 승급했니? 5레벨에서 설마 또다시 승급한 것은 아니겠지?”
교육원에 일부러 알아보지 않은 이상 당연히 은지도 내가 얼마나 승급한지는 모를 것이다.
“9레벨까지 승급했어.”
“이런 미친..! 정말 미쳤어. 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됐어, 이번에 하드 게임에 참가해서 플레이어 외에 다른 놈들을 몇 놈 죽였거든.”
“벌써 하드게임에 떨어졌다고? 그 맵 무척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곳에서 4레벨씩이나 올렸단 말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급 레벨자에게 하드 맵은 확실히 쉽지 않지만, 중급 레벨만 되도 노말 맵보다 경험치 획득하기가 훨씬 쉬운 것 같더라고. 그리고 아이템을 적절히 잘 사용한다면 놈들에게 체력바가 없으니 단숨에 죽일 수 있어 이득이고.”
나는 하드 맵에 대해서 내가 경험한 것에 대해 은지에게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은지가 그럴리는 없겠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도태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고, 나를 너무 부러워하는 것 같아 그녀에게는 내 경험을 어느 정도 공유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사실 그녀와 같은 맵에서 만난다고 해도 이제는 결코 내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생각을 바꾼 것이기도 했다.
물론 다른 동기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한동안 내가 겪은 일과 내가 어떻게 놈들을 상대했는지 설명하고 나자 그녀는 많은 도움이 됐는지 전보다 표정이 무척 밝아져 있었다.
사실 자신보다 상급 레벨자가 이렇게 경험을 말해주고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는 것은, 앞으로 은지가 그런 상황에 닥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바로 판단할 수 있어 무척 도움이 될 터다.
그녀도 내가 경험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궁금한 것은 마치 교육생처럼 자세히 물어보기도 하며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한동안은 마치 내가 교관이 된 듯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주며 내가 생각하고 겪은 부분을 토대로, 그녀가 더 빨리 레벨업을 할 수 있도록 도움되는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기회를 포착해 상대방 두 명을 동시에 처치했던 경험까지 얘기해주자 그녀가 눈빛을 반짝 빛내며 무척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경험이 무척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사실 맵에서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나타나면 나는 무조건 도망치기에 바빴거든. 이제부터는 어차피 죽더라도 너처럼 모험을 한번 해 봐야겠어. 헌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내가 너같이 했다가 상대를 죽이지 못하고 잡히게 되면 넌 남자라서 죽으면 끝나지만 나는..?”
은지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고개를 숙였다.
다른 모든 초짜 플레이어들도 은지처럼 상위 플레이어를 만난다면 거의가 모두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가는게 대부분일 터다.
나처럼 행동하기가 말은 쉬워보여도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다.
헌데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짐작을 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해주듯 말해주었다.
“은지야, 네가 생각하는 부분이 뭔지 알겠고 교육생일 때 여자들이 받는 교육도 그런 부분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에 네가 그런 부분을 감수하지 못한다면 레벨 올리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물론 맵에서의 육체도 분명 네 육체겠지만 진짜 본체는 지구에 있는 육체라고 생각하는게 그나마 마음이 편할 거야.”
은지가 내말을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빙긋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이제부터는 네 말대로 생각해야 할까봐.”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리고 뭐 꼭 그렇게 내가 당하란 법도 없지 않겠어? 네가 알려준 대로 기회만 잘 포착해 성공하면 되잖아, 그리고 솔직히 맵에서 자기장이 계속 좁혀져오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데, 내 기습이 실패했다고 해도 상대가 나를 어찌할 여유 시간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레벨을 빨리 올리려면 그렇게 단단히 마음 먹는게 나을거야.”
오늘 은지와의 술좌석 주제는 끝날 때까지 계속 맵에서의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늦은 저녁이 되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그녀는 내가 보기에 전처럼 많이 취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밖으로 나오자 또 흐느적거리며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 걷지를 못하겠어, 나 업어줘.”
오늘은 분명 연극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냥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래, 알았다. 자 업혀.”
내가 등을 내밀자 그녀가 등에 폴짝 뛰어 오르며 곧바로 뒤에서 내 목을 두 팔로 감으며 등에 볼을 기대왔다.
“아, 좋다. 그런데 이제 술만 먹으면 네 등에 업히고 싶어서 큰일 났다. 앞으로 나 술 먹으면 네가 나 업어서 데려다주면 안될까?”
“네가 정말 걷지 못했을 때는 그렇게 해줄 수 있지. 헌데 너 오늘은 술 안취했지?”
내가 짐짓 의심스런 말투로 말하자 그녀의 혀가 이내 꼬부라지며, 내 목을 더욱 꽉 끌어안은 채 마치 아기처럼 볼을 등에 비비며 엄살을 부렸다.
“아냐, 정말 취했어. 정말 걷지도 못하겠단 말야.”
“알았다, 오늘은 내가 봐준다.”
“정말 취했단 말야. 음냐 음냐.”
은지가 이내 아기처럼 옹알이를 하듯 장난치자 그녀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느긋하게 걸어 밤바람을 맞으며 드디어 그녀의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려는데 은지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살며시 침대에 눕히고 보니 잠든 얼굴이 너무 귀여워 예전처럼 이마에 키스를 한번 해주고 곧바로 집밖을 나왔다.
‘잘 가르쳐 주었어.’
내가 레벨을 올렸던 조금은 얍삽한 방법을 잘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정말 내 여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은지가 빨리 강해져야 맵에서 다른 놈들에게 치욕스러움을 당하는 일이 덜할 것이라 생각했다.
***
어제 술을 마셔서 오늘은 조금 늦게 나왔는데 역시 오늘도 어김없이 허탕을 쳤다.
헌데 그 다음날 드디어 한 놈을 발견하긴 했는데 아직은 내가 쳐다도 보지 못할 실버티어인 16레벨이라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9레벨로도 역시 쉽지가 않군.’
그러고 보니 처음 4레벨의 도태자를 만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 전이라 다른 놈을 찾아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오늘도 운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해 이내 집으로 향하는데 손등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은지가 또 술이 고픈가?”
다른 동기들과는 거의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았고 또 교육원을 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화가 올 사람이라고는 은지밖에 없어 곧바로 손등을 터치하니 이름이 뜨지 않았다.
‘누구지?’
국장도 이름을 저장해 놓았기 때문에 국장도 아니다.
화상통화로 와 있어 고개를 갸웃하며 터치를 하자 이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 동안 잘 있었나요?”
“아, 예.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요, 저번에 다음에 또 자리를 만들기로 했잖아요.”
“전 그냥 형식적인 인사말인 줄 알고 솔직히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이거 섭섭한데요, 전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죄송합니다, 요즘 조금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여자는 며칠 전 만났던 국장의 상관이고 내 팬이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조금 오버스런 액션과 말투를 보이고 있었다.
“오늘 제가 그 지역으로 넘어갈 테니까 최준수씨가 그 근처에 괜찮은 음식점이 있으면 대접 좀 해주실래요.”
“정말 오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럼 이렇게 전화해 놓고 제가 빈말을 하겠어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무튼 오시겠다면 그렇게 특별나게 맛있는 음식집을 제가 알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예전 그런 고급 음식점보다 지금은 시원한 카이스주가 마시고 싶거든요, 안주로 푸짐한 것을 시키면 배도 차니 일석이조이기도 하고.”
“그럼 거기로 가요, 저도 카이스주 좋아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주소를 전송해드릴 테니까 두 시간 후에 거기서 뵙죠. 대신 술값은 그 쪽이 내는 겁니다.”
“알겠어요, 그건 저번에 그러기로 했잖아요.”
“그럼 두 시간 후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