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돈이 필요해
“야, 닦아줄 테니까 고개 들고 입술 내밀어봐.”
“킥킥.. 왜 뽀뽀해 주려고..?”
“내가 니 남친이냐. 됐고.. 고개나 들어보란 말야.”
“니가 내 남친이면 왜 안되는데? 딸꾹!”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굴이나 앞으로 내밀어 보라니깐.”
마주앉아 있는 은지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묻고 있어 손이 닿질 않았다.
“니가 내 남친 돼 준다면 입술 내밀게.”
“미치겠네. 그럼 니가 알아서 닦아라, 난 모르겠다.”
“치사한 놈. 그깟 남친 돼 주는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딸국! 너도 알다시피 내가 교육원에서 퀸카 아니었냐. 다른 자식들은 내 눈에 띄기 위해서 두 눈들이 시뻘건데 넌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뻐기는데, 이 나쁜 자아.. 식아.”
욕까지 하는걸 보니 확실히 멋이 간게 틀림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술 취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하나도 틀린게 없었다.
교육원 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내에서도 은지의 미모는 소문이 나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다른 녀석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직 여친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데이트 할 시간에 수련이나 더 하는게 낫지.’
솔직히 여친 만들어서 데이트 하는 것이야 나중에 레벨이 충분히 올랐을 때 그때 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죽지만 않는다면 계속 25살에 멈추어져 있는데 그것은 그리 급할 것이 없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그때가 되어 아직까지 은지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때는 나도 물론 오케이 할 것이다.
‘지금 내 몸 하나 챙기기도 빠듯한데.’
당장 생활비와 일반게임 그리고 상위 레벨자들의 전투를 관전할 돈이 없어 권한증까지 발급받은 나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말은 그냥 흘려버렸다.
헌데 입술 주변에 시빨건 국물이 묻어 자꾸 신경 쓰여 술 취한 그녀가 자신이 한 말은 기억도 하지 못할뿐더러, 정말 진심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지저분한 찌꺼기나 닦아주려고 지나가는 말로 무심코 말해버렸다.
“알았으니까 몸 앞으로 숙이고 얼굴 들어봐.‘
“뭐..어? 정말 내 남친이 되어 준다고오?”
“알았으니까 얼굴이나 이리 가까이 대보라고, 보기에도 찌꺼분하잖아.”
“히힛 알았어. 분명히 니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아. 나 술 취하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기억할거야.”
“알았으니까 어서 얼굴이나 디밀어봐.”
이렇게 술이 취해서 내 말을 기억할 리가 없다.
아니 이미 얼마 전부터 필름이 끊겼을 것이라 생각했다.
곧바로 그녀가 몸을 기울이는데 몸이 옆으로 오다가 갑자기 옆으로 휘어지며 쓰러져 버렸다.
“아호홋.. 왜 소파가 내게 다가오는 거..지이.”
‘아, 이 초진상을 정말 그냥 두고 갈 수도 없고..!’
이제 정말 더는 마시지 못할 것 같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가서, 소파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주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휘청.. 휘청..
헌데 몸을 일으켰지만 은지는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더니 기어이 테이블의 한쪽 모서리를 짚어 몸의 중심을 잡으려 했다.
순간 그녀의 누르는 힘에 의해 한순간 탁자가 한쪽으로 쏠리며, 그 위에 있던 술병이나 안주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려 바닥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그때 은지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술병으로 얼굴을 쳐박으려 하자 내가 재빨리 그녀의 몸을 껴안다시피 안아 다시 일으켰다.
‘젠장!’
그녀를 붙잡느라 떨어진 안주를 밞아 신발에 온통 안주가 묻어버렸다.
급히 휴면형 안드레이드 종업원이 달려와 바닥을 치우는 사이 곧바로 계산을 치루고 은지를 안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은지가 이렇게 취한 모습은 정말 처음 본다.
오늘은 그만큼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 좋게 생각하고 그녀를 부축해서 가려는데 걷지를 못하고 질질 끌려오는 꼴이었다.
‘할 수 없군.’
곧바로 그녀를 들다시피 해서 등 뒤로 보낸 후 걸쳐 업고 가니 이제야 나도 편해졌다.
택시를 잡을까 하다가 그리 멀지 않았고 내일 마땅히 할 일도 없어, 나도 술기운이 올라온 김에 시원한 밤공기나 마시고자 그냥 걷기로 했다.
“히힛, 딸꾹.. 니 등에 업혀가니 좋은데에. 이렇게 편할 줄 알았으면 저번에도 술을 취했을 건데.”
“그렇게 좋냐? 하지만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이렇게 취해서 걷지도 못하면 그냥 놔두고 갈 테니까 알아서 해.”
“딸꾹! 야 니 여친이 술 먹고 쓰러졌는데 그냥 간다는게 말이나 되냐?”
“여친은 무슨..”
“너 분명히 아까 말했잖아. 입술 내밀면 내 남친 된다고.”
“그건 네가 하도 말을 안들어서 그런 거지.”
내가 말을 바꾸자 등에 대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들리는 느낌이 전해지더니, 돌연 내 한쪽 볼에 안주가 묻었던 입술이 순식간에 다가와 뽀뽀를 해버린다.
“뭐야?”
내가 깜짝 놀라 말하자 그녀가 꼬부라진 혀로 대꾸했다.
“뭘 뭐야, 딸국! 니 여친이 뽀뽀한 거지. 사내자식이 한입에 두 말 하기 없기다, 좀스럽게.”
내일이면 오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웃어 넘겼다.
한동안 밤바람을 맞으니 역시 상쾌한 것이 술기운이 조금 달아나는 기분이다.
문득 등 뒤에 업혀 있는 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은지라면 매력이 있고 마음씨도 까칠하지 않은 괜찮은 여자였다.
한순간 그냥 확 사귀어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벨을 먼저 올리는게 순서다.
나도 물론 피끊는 25살의 청춘인데 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 세상은 모두가 25살에 신체가 멈추어져 있어 모두가 피끊는 청춘들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아무리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레벨업이 먼저였다.
여친을 만들면 우선 시간을 쪼개어 시도 때도 없이 데이트라는 것을 해서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막말로 말해서 육체적으로 여자가 그리우면 랭크게임에서 내게 패한 여자를 상대로 풀어주면 그만이다.
몰론 은지도 이미 랭크게임 내에서 그렇게 당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랭크게임의 육체는 새로 생성되니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교육원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여자 교육생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지 않도록 따로 충격 요법을 교육 시켜주기도 했고.
여기에서의 여자 친구란 물론 육체적으로도 당연히 그랬지만 정신적인 면이 컸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가족이라는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나마 제일 가까운 가족이라는 느낌은 연인들끼리 느끼는 감정이 최고로 가족과 가까운 의미를 부여했다.
한동안 은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걷는데 문득 등 뒤에서 세근거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그렇게 진상을 떨더니 기어이 잠이 들었군.’
은지가 진상을 떨었지만 왠지 모르게 밉지는 않고 귀엽기만 했다.
그것은 아마도 나 또한 은지를 싫지는 않은, 아니 좋아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집은 나도 알고 있어 얼마 후 도착해 간신히 비밀번호를 알아내 안으로 들어갔다.
은지의 깔끔한 성격답게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대로 방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삭막한 내 방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침대에 눕히고 집을 나와 다시 걸어가며 오늘은 하루를 그래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라..”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것은 역시 나중이다. 이제 당장 생활비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인데.’
남은 800셀링으로는 일반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 월급이 나올 때까지 버틸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 술값이 72셀링이나 나와 더욱 줄어들어 있었다.
‘앞으로는 술도 자제해야겠군.’
이제 수련은 둘째 치고 당장 도태자들부터 찾아다녀야 할 판이다.
대도시에서는 찾기가 힘들어 그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을 알아보는 게 급선무다.
지점 직원의 말대로라면 무인도나 산속, 혹은 대도시가 아닌 아주 인적이 드문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에는 숨어 살 수도 있다고 했다.
도태자들이 범죄자도 아니고 다만 자질이 떨어져서 도망다니는 선량한 플레이어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도태자들은 기관에서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만들어 놓은 룰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 중 최강자들인 챌린저들이 모여 만든 우주의 법칙이었다.
물론 인구수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 법칙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알 수 없는 존재가 만든 룰은 랭크게임에 관한 것이 전부였고, 그 외의 법칙은 우주의 각 챌린저들이 모여 만든 법들이었다.
내가 생각할 때는 꼭 도태자라는 듣기 싫은 명칭으로 그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지구는 물론 다른 행성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력으로 불모지 행성을 개발해, 그곳으로 따로 그들을 이주 시켜도 될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었다.
‘모든 생명체가 무한한 생명이니 그렇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법칙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내 이중적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지금 도태자를 죽여 돈을 벌려고 하고 있으면서 이런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곧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그들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사치스럽기까지 한 그들에 대한 동정어린 감정을 애써 지워버리며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다음날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얼마 후에 어쩐 일인지 전화가 걸려왔다.
“얘가 아침부터 웬일이지..?”
손등 위 자그마하게 올라온 홀로그램에 김은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혹시나 내가 남친이 되어주겠다는 말을 확인하려고 전화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은지의 자존심상 설사 기억이 난다해도 그런 말은 먼저 꺼내지 못할 것이라 자신했다.
나는 예전 아레스 교관님과 같이 만나던 날 은지를 집으로 데려다 주며, 지금은 여자 친구를 사귈 마음이 아직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아 놓았었다.
어제는 은지가 술이 취해 막무가내로 말도 안되게 우겨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녀도 혹시 어제 일이 기억난다 해도 내 뜻은 분명 알고 있어 사귀자고 우기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생각한 후 화상 통화를 터치하자 은지도 화상 통화를 터치했는지 곧바로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침이라 생얼이었지만 역시 그 미모가 어디 가지는 않아 귀엽기만 했다.
헌데 그녀가 조금은 수줍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 나는 약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제 일을 꼬투리 잡고 우기면 난처한데..?’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썩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