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귀환
헌데 놈이 주먹을 휘둘러올 때 그 주먹의 궤적이 보이고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레벨이 올라가며 육체의 민첩이나 속도 또한 같이 레벨업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이 물러난 후 한동안 술자리가 더 이어지고 이제는 정말 모두가 곤드레가 되어 얼마 후 모두 술집을 나왔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 난 그만 집에 들어가 봐야겠다.”
“나도 술이 많이 취했어, 나도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이제 헤어져야 할 분위기가 조성되자 모두는 각자 서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은지와는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나와 그녀는 자연스럽게 함께 집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걸어가며 그녀는 은근히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본 채 평소의 은지답지 않게 조금은 수줍은 듯, 술기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가끔은 살짝 붉히고 있었다.
교육원에서도 그렇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나 몰라라 할 정도는 아닌 그저 평범한 친구였는데, 오늘은 그녀의 표정을 보니 나를 평소와는 다르게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갑작스레 3레벨로 올라간 것과 방금 전 네 놈을 물리친 것이 큰 작용을 한 모양이다.
얼마 걷다가 그녀가 나를 다시 힐끔 쳐다보며 지나가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고 아까 아레스 교관님과 나누는 대화를 얼핏 들었는데, 기관에서 널 스카웃할 것 같다고 하시던데 넌 거절할 거지?”
“그래. 교관님 말씀대로 요원이 된다면 난 그저 그들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꼭두각시가 될것 같아서 말야.”
“잘 생각했어. 비록 월급이 일반 플레이어들에 비해 월등하다지만,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곳에는 웬만하면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혹시 키르맨이 되어 10년 후에 날 사살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단 말야. 물론 10년 안에 골드 티어가 되는 것은 자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도태자들이 워낙 많이 생겨나기 때문에 키르맨들 역시 항상 수많은 숫자를 유지해야 했다.
물론 도태자들이 브론즈나 실버 티어였고 키르맨들은 골드 티어인지라 강함에 있어 차이가 있었지만, 도태자들은 시간이 지나 10년이 가까워지면 자신이 도태자가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어 그 도태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키르맨들에게 저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도태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지의 깊은 숲속이나 또는 무인도 혹은 다른 행성으로 도망쳐 살아가는 자들도 무수히 많았다.
그래서 그만큼 키르맨들의 숫자도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였다.
사실 도태자란 시스템은 랭크게임을 창조한 알 수 없는 존재가 만들어 놓은게 아니라 전 우주의 첼린저들이 모여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그것은 물론 당연히 넘쳐나는 각 행성의 인구수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다고 도태자들이 영원히 도태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태자들 역시 매주 수요일에는 랭크게임에 소환이 되기 때문에 몸만 잘 숨기고 있다가 랭크게임에 참가해서 골드 티어로 승급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도태자라는 마치 범죄자와도 같은 딱지를 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주의 각 행성 기관에서는 역시 인구수 문제로 도태자로 낙인이 찍힌다면 골드 티어로 승격하기 전에 사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10년이라는 기간은 교육원에서 졸업하고 첫 랭크게임에 참가한 날로부터 하루도 틀리지 않았기에, 나또한 10년 후 오늘까지 20레벨인 실버티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도태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오늘 만난 모든 동기들과 코레일 교육원의 다른 조에 속한 수천 명 동기들도 모두 마찬가지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교관의 말대로라면 첫 랭크게임에서 3레벨을 올린 나를 키르맨 정도로 육성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키르맨이라면 일반 골트티어를 스카웃하면 된다.
아마도 날 스카웃하려는 것은 더 큰 무언가로 육성하려 한다는 것이 아레스 교관의 생각이었고 나또한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잠시 도태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은지가 다시 나를 힐끔 보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몇 번이고 그만두더니, 이내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조금은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교육원에 있을 때부터 널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넌 믿지 않겠지?”
갑자기 들려온 은지의 엉뚱한 말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믿지 않는다.
아니 믿지를 못하겠다.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내가 3레벨이 오르고 난 후 그런 말을 하니 누가 믿겠는가.
당연히 날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런 내 생각을 캐치했는지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마주 바라본 채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믿지 않을 줄 알았어. 넌 내가 너와 함께 듀오게임에 참가하자고 이러는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너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나 막되 먹지도 않았고 양심도 없지 않아,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리고 솔직히 넌 교육원때 오로지 수련에만 관심이 있어서 여자는 물론 다른 동기들과도 그렇게 친하지가 않았었잖아."
" 뭐 그랬긴했지
"그런데 말야 사실 그런 네가 멋있어 보여 널 남몰래 좋아하고 있는 여자 동기들이 제법 많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해. 그중에는 물론 나도 있었고. 네가 그런 쪽에 관심이 없어 보여 여자들이 말을 하지 못한 것뿐이지. 뭐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혹시 말했다가 퇴짜 맞으면 어쩌나 하는.”
“훗, 나같이 멋없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는게 정말 의외인 걸.”
“그게 네 매력이라고 생각하면 돼. 무뚝뚝하면서도 오로지 수련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데.”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이제 졸업도 했고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으니까 너한테 자주 연락할건데 그래도 괜찮지?”
“그래, 하지만 난 아직 여자 친구 만들 생각은 없어. 그냥 술친구나 동기로서 연락하고 만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아직도 수련 때문이야?”
“그렇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네가 부담 없이 연락하면 나도 부담 없이 널 동기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연락할게.”
“그럼 내가 고맙지.”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하고 나를 바라보더니 조금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하구나 넌. 이거 괜히 자존심 상하는데? 퇴짜 맞은 것 같아서.”
“퇴짜가 아니라 지금 난 어떤 여자가 그런 말을 했어도 지금처럼 말했을 거야.”
“이럴까봐 여자 동기들이 너에게 말을 못했던 거란 말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긴 하다.”
코레일 전 교육생중에 최고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김은지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척 의외였고 놀라울 일이었다.
하지만 김은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속으로는 은근히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여자보다는 수련을 더해 랭크게임에서 레벨을 더 끌어 올리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지금으로서 제일 목표는 실버 티어를 벗어나 골드 티어로 승격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계속 끊임없이 수련을 해야 되겠지만 우선 도태자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혹시 여자 친구를 사귀어볼 의향은 있었다.
은지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집 앞까지 바라다 주고 이내 나도 집으로 향했다.
‘은지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니 정말 의외인걸.’
혹시 내가 골드티어로 승격이 된 후 그때까지도 은지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그녀를 여자 친구로 받아들일 마음은 있었다.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걷는 사이 어느덧 집에 도착해 침대에 바로 누워, 오늘 게임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해 있었던 일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사이 술기운 때문인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
다음날은 일반게임으로 수련을 할까했지만 역시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고 랭크게임으로 인한 정신적인 피로도 풀어줄 겸 하루는 쉬기로 하고, 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하루를 그냥 보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제일 가까운 기관에서 운영하는 일반게임 수련장으로 가서 홀로그램으로 펼쳐진 가상게임을 거의 하루 종일 수련하고 4시나 되어서야 건물을 나왔다.
헌데 건물을 나오자 검은색 슈트를 입은 다부진 체격의 사내 두 명이 건물에서 나오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최준수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그 두 사내를 보는 순간 나는 아레스 교관이 했던 말이 생각나 그들이 기관 요원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런 행동 기관 요원들이라면 최소한 골드 티어 이상일 텐데 깍듯하게 존대를 해주며 무척 예의를 갖추고 있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사실 상급 티어가 자신들보다 아래인 플레이어들을 깔보고 막말을 해도 아래 티어들은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지금 시대에서 그것은 당연하면서도 보통 일상적인 일이었다.
물론 이들도 평상시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 나에게 실수를 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을 것은 당연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희들은 기관에서 나왔습니다. 상의드릴 일이 있는데 같이 가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들도 교육원을 찾아가서 나에 대해 알아본 걸, 교육원에서 내게 언질해 준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요원증을 내보이며 신분을 확인시켜 주자 나는 그들이 상의할 일이란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거절하려다가, 이들에게 거절해 보았자 소용없음을 알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바로 앞에 있는 반중력 자동차를 타자 곧바로 차가 도로에서 30여 센티 정도 떠오르며 아무 소음 없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도로는 랭크게임에서처럼 산악지대가 아니라 반중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잘 다듬어진 도로였다.
따라서 속도는 무척 빨라 2시간 정도 달리자 어느새 700키로 이상 달려 아주 오래전 일본이라고 불렸던, 커다란 섬과 연결된 다리를 지나 50여 층 되는 그리 높지 않은 건물에 도착했다.
‘이곳이 아시아 첼린저가 다스리는 기관 중 한곳인 모양이군.’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그들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자 순식간에 50층 꼭대기에 도착했다.
곧바로 국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으로 가서 한 사내가 문 옆에 붙어 있는 스캔에 손바닥을 대니 문이 좌측으로 스르르 열렸다.
“데리고 왔습니다.”
나를 데리고 온 사내가 턱에는 수염을 약간 기른 사각턱의 제법 잘생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보고하자, 국장인 듯한 의자에 앉아 있던 자가 두 사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그만 나가보도록.”
“알겠습니다.”
두 사내가 나가자 그가 내게 빙긋 웃으며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며 말을 편하게 하고자 했다.
"내가 연장자 같으니 말을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우선 앉으시게."
어울리지 않게 사내가 제법 친절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내가 곧바로 의자에 앉으니 사내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혼자 말하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