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귀환
전 우주의 무수한 브론즈 티어 중에 다시 그녀와 같은 맵에 랜덤으로 정해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했다.
하지만 더 상위 티어로 올라갈수록 그래도 가망성은 조금 있었다.
그때까지 도태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강해져야 했다.
한편으로는 그녀로 인해 이런 다짐을 한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그건 일종의 자기 최면과도 같았다.
어차피 그녀로 인해서든 아니든 상관없이 강해져야 살아남는다.
그녀로 인해 조금이나마 이런 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녀의 비웃음과 행동을 되새기며 조금이라도 더 투지를 불태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얼마 후 깨어보니 벌써 5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약속장소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게임을 마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사람들 중에 내일이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
이중에는 분명 10년 안에 20레벨인 실버 티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태되는 플레이어들을 죽이는 기관에 소속된 요원들을 키르맨이라 불렸다.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10년이 아니라 그 전에 실버티어를 벗어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이 싹트기 시작한다면 능력의 발전은 이루어 질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감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지만 자만심이 싹튼다면 노력을 게을리 할 것이기에 특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다.
얼마 동안 걸어가자 눈앞에 미넬이라는 간판이 보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느새 동기들이 모여 이미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벌써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시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오며 은지가 급히 자기 옆자리를 권했다.
“야, 최준수 왔다.”
“저 자식 저렇게 대단한 녀석인지 알았다면 조금 더 친해지는 것인데, 에이 아깝다.”
“준수야, 여기 자리 마련해 두었어. 이리 앉아.”
은지가 옆의 빈 의자를 팡팡치며 말하자 다른 녀석들이 은근 놀려댔다.
“김 은지 너 원래 이렇게 준수한테 관심 있었냐?”
“그럼, 내가 준수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직까지 몰랐단 말야?”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퀸카인 은지가 관심을 가져주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다른 여동기생들이 시샘이 난다는 듯 말장난을 하며 놀려댔다.
한조가 20명으로 정해진 내가 속한 반의 동기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같이 생활해 온지라 모두 형제와 같은 녀석들이다.
그 때문에 은지가 여자로 보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같은 맵에 이들 중 누군가와 함께 정해진다면 자신의 체력바가 줄어들지 않은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서로 도와가며 갈수 있을 때까지 가야하는 것은 은연중 서로간에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레벨이 더 상승한 후의 일이겠지만 그렇게 해서 혹시라도 안전지대 안에 두 동기만 남아 있게 된다면 1,2등을 다투기 위해 최후에는 당연히 서로 죽기 살기로 겨뤄 사살해야했다.
그때는 동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고통 없이 죽여주는 것이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지만 은지가 내게 이처럼 살갑게 대하는 것은 어쩌면 다른 흑심이 있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랭크게임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내가 첫 참가한 게임이 솔로 랭커게임이었고 또 하나는 듀오 랭커게임이라는 것이 또 있었다.
말 그대로 솔로 게임은 당연히 혼자 맵으로 가는 것이었고, 듀오게임은 누군가와 함께 맵으로 출발해서 같은 맵에서 서로 파티원이 되어 전투를 치르는 방식이다.
몰론 같은 지구인뿐 아니라 다른 행성의 플레이어중 누군가와 같이 움직여도 된다.
당연히 듀오 랭크게임의 맵에는 참가한 모두가 두 명이 한 파티원이 되어 맵에는 총 200명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경험치는 파티원이 된 두 플레이어에게 똑같이 주어지고 삭감이 된다.
맵으로 가는 방식은 수요일 정오에 시간이 멈춰지기 전 서로 손을 잡고 있거나, 또는 신체적 접촉을 하고 있으면 두 사람이 듀오 게임의 맵으로 소환되는 방식이다.
레벨이 약한 플레이어들은 더 상위의 플레이어와 듀오가 되기를 원하지만, 레벨이 높은 듀오가 약한 플레이어와 듀오가 되는 것은 당연히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플레이어들은 그냥 마음 편하게 거의 솔로 랭크게임으로 가는 것이었다.
물론 같은 레벨의 친한 플레이어들은 듀오게임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만약 은지가 나에게 듀오게임을 제안해 온다면 나는 당연히 거절할 것이다.
혹시 그녀가 나와 같은 레벨이 된다면 그때는 혹시 모를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첫 게임에 참가하고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니 내 생명을 돌보기도 힘든 판국에 1레벨인 은지까지 챙겨줄 여력은 없어, 참가하자마자 은지는 죽고 나 혼자 두 플레이어를 상대해할 것은 뻔했다.
은지도 첫 게임에 참가해서 레벨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해 혹시라도 나와의 듀오게임을 생각하고 이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자, 그녀가 갑자기 내게 잘 대해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허나 그녀도 이런 내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동기중 한 녀석이 조금은 부러운 듯 짐짓 장난스런 말투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야 준수야, 교육원에서 졸업할때의 등급이 비록 A- 였다지만 어떻게 3레벨까지 올린거냐? 비결이라도 좀 알려주라.”
“비결이 뭐가 있겠냐,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지.”
솔직히 비결이라고 해봐야 머리를 조금 굴린 것뿐이었고 정말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동기생이 비록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 역시도 그 말은 그냥 해본 말장난일 뿐이다.
설사 비결이 있다해도 그건 자신만의 노하우로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언젠간 동기생과 같은 맵에 소환되어 만나지 말란 법도 없다.
헌데 나만의 생존에 대한 비결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물론 그것을 물었던 동기도 내가 운이라고 말하자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가 버린 것은 당연했다.
한동안 보리와 밀로 만들어진 가슴을 시원하게 쏘아주는 아주 오래전 맥주라고 불리웠던, 카이스라는 누런색의 도수가 그리 세지 않은 술을 마시며 잡답을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레스 교관님이시다.”
“아레스 교관님이?”
아레스 교관님은 졸업생인 우리 조를 마지막으로 담당하셨던 교관이다.
이름과는 달리 아레스는 조금은 갸날퍼 보이는 여자였고 상당한 미모 또한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김새와 가냘픈 몸매와는 달리 철의 여인이라고 불릴 만큼 무척이나 강직하고 우직한 성격을 지닌 여인으로, 평소 얼굴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는 남자보다 더 화끈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교관이었다.
“안녕 하십니까 교관님.”
“어서 오세요 교관님.”
나를 비롯해 동기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아레스 교관을 맞아주니 그녀가 교육원에서 보여주었던 평소의 무표정과는 달리, 제법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준수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네가 우리 코레일 교육원의 자존심을 살려 주었어. 사실 요 몇 백년 동안 우리 교육원 출신에서 인재가 나오지 않아 교육장님께서도 심려가 무척 크셨거든, 헌데 마침 그런 때에 네가 3레벨로 첫 랭크게임을 마친거야"
"..........."
"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첫 랭크 게임에서 3레벨을 올린 것은 사실 우리 지구는 물론 다른 행성에서 조차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성과지.”
아레스 교관의 목소리는 고왔으나 역시 내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고 말하는 투는 영락없는 남자였다.
교관은 모두 골드 티어였고 교육장은 다이아 티어였다.
그것은 어느 교육원이나 마찬가지로, 지구의 모든 학원들 사이에서도 모두 자신들 학원의 명예를 걸고 자존심 싸움이 무척 치열했다.
사실 3레벨을 올리는 것에 대해 나는 물론 쉬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죽을 만큼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이처럼 모두 정말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처럼 나를 추켜세우며 이런 말을 하자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쑥스럽기도 했다.
내가 할 말은 아레스 교관에게도 그저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당연히 어느정도 운이 따라줘서 그랬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언젠가 말했듯 그 운도 네가 하기 나름이고 그 또한 네 능력임을 알아야 해. 사실 오늘 수업이 있었지만 교육장님께서 특별히 날 보내신거야. 그러니 나도 오늘은 너희들과 함께 교관으로서가 아닌 같은 플레이어로서 잠깐 즐기려고 하니 아무 부담 갖지 말길 바란다 얘들아."
“환영해요 교관님.”
“정말 오늘만은 교관님이 아닌 같은 플레이어로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 오늘만은 특별히 너희와 같은 플레이어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니 내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마시고 즐겨. 물론 여기 계산은 모두 교육원에서 치룰테니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마셔도 좋아.”
“야홋, 교관님 최고.”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배터지도록 마시겠습니다. 고맙다 최준수, 너 때문에 오늘 죽도록 한번 마셔보자.”
“고마워 준수야 네 덕분에 오늘 간만에 포식 한번 해보게 생겼다.”
동기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런 말을 하자 조금 쑥스럽기는 했다.
모든 우주의 생명체가 육체적으로 최전성기인 상태가 항상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지구에서의 육체적 최전성기는 25살이라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누구나가 25살에서 멈춰져 있었다.
그것은 물론 아레스 또한 마찬가지로 모습이나 육체적 나이는 25살에 멈춰져 있었다.
한동안 아레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녀가 카이스 한잔을 들이키고 나더니 조금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기관에서 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사실 오늘 기관에서 우리 교육원에 사람이 찾아와 교육장님과 면담을 했었거든. 물론 나도 너를 직접 교육시킨 교관으로서 교육장님과 자리를 같이했지. 그들이 너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묻더구나. 물론 네 세세한 정보라고 해봐야 네 졸업 성적과 자질, 그리고 성격이나 그 밖에 그리 특별할게 없는 것들이지만, 내 생각에는 그들이 아마도 널 기관 요원으로 스카웃하려는 것 같았어.”
“저를요?”
“그래, 너 정도 싹수가 보이는 플레이어를 그들이 가만 놔둘리 없지 않겠니. 하지만 내 생각은 그들이 혹시 너를 찾아와 너에게 어떤 대단한 조건을 제시한다 해도 넌 기관쪽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한단다. 기관에 속하게 된다면 안정적이고 더 특별한 교육을 받아 더 빨리 강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때부터 넌 그들의 명령에만 움직여야 될거야.”
“.........?”
“내 생각에 넌 지금 이대로 일반게임으로 수련하고 랭크게임에 참가해도 충분히 남들보다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다고 보거든. 물론 기관에 소속된다면 더 빠른 성취를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건 처음 잠시 뿐일거야. 네가 어느 정도 레벨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너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분명 깨우치게 될 거야. 물론 선택은 네 몫이니 모든건 네 생각에 달렸지만.”
“저도 예전부터 기관에서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후훗, 그래 잘 생각했다. 그들이 널 키르맨 정도로 키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관 소속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뜻이지.
내가 요원이 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자 아레스 교관이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