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75화입니다. (75/75)



〈 75화 〉75화입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공기를 터트렸다. 살아 있는 갑주 형태로 화한 바제리 백작이 휘두르는 본 소드는 그 크기만 하더라도 용사의 성검보다 배는 컸다.

압도적인 질량과 힘으로 찍어누르는 공격은 평범한 기사라면 당장 고깃덩이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격이었으나 상대 역시도 평범한 기사가 아니었으며 하물며 홀로 그를 상대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뒤늦게 도착한 마법, 마나 체인이 발하며 악마의 팔다리를 꽁꽁 싸매었다. 하지만 고작 이정도의 마법으로 움직임을 제어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아르윈이 주문을 읊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파렐이 검을 튕겨내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마법으로 잠깐 주춤하고 있던 악마의 머리 위로 신성력의 폭포가 쏟아져내렸다. 보조 주문을 외우고 곧바로 공격 주문을 외운 파이가 발한 신성 마법이었다.

[오오오ㅡ!]

치이익,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악마가 비명과 함께 몸을 크게 흔들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몸을 구속하고 있던 체인이 박살나며 한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잔상처럼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그가 빠른 속도로움직인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보다 커다란 갑옷의 악마가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며 달려들었다. 용사는 양손으로 잡은 성검을 어깨에 걸치며 다가오는 악마를 노려봤다. 마치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오라! 지옥의 겁화여!”

뒷편에서 쏘아지는 불덩어리가 악마에게 향했다. 악마가 황급히 그것을 피하고자 발을 틀었으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보이는 용사가 검을 크게 휘둘러왔다. 다급히 들어올린 검으로 그것을 받아쳤으나 자세가 무너지는 것은 어쩔  없는 일이었다.

[크오오오ㅡㅡㅡ!!!]

그 결과 쏘아진 마법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악마에게 적중되었다. 철로 이루어진 신체가 뜨거운 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마지막 발악을 하듯 용사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미 기세는 기울었다. 몸에 중첩되는 보조 마법을 느끼며 용사가 크게 진각을 밟으며 도약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만들어지는 마법진을 밟으며 악마에게 쇄도했다.

머리 위로 검을 들어올리며 내려 찍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과 닮아 있었다. 악마 역시도 순순히 당해주지 않으려 검을 들어올렸다.

성검과 본 소드가 부딪쳤다. 그러나 최초의 충돌과 같은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썰려나가는  소드를 지나 갑주에 닿았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떨어져내렸다.

검이 바닥으로 향하고 용사가 거센 호흡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갑주를 태우고 있던 불길을 사그라들고 안쪽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길만이  기세를 키우고 있었다.

끼기긱, 기분 나쁜 소음을 일으키며 검을 든 악마의 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고작 검신이 한마디 정도 남은 검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곧 지친 용사의 머리 위로 떨어질 듯 했다.

[오, 오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던 악마의 몸체가 반으로 갈라져 무너졌다. 둔중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지고 용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쓰러진 악마를 바라봤다. 푸르게 타오르던 불꽃은 어느새 조각나 서서히 그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용사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행을 바라봤다. 엘프 마법사도 성녀도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게 타오르던 불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했다.

마침내 악마, 디젤로 바제리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었다.

*

샬럿은 그 모습을 보며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그러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육신도 회수하고 싶었지만, 다른 네 마리의 악마와는 달리 회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쉽지 않다 뿐이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은 용사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그것을 따를 뿐이었다.

‘어쩔  없이 영혼만 회수하고 가야겠네요.’

푸른 불꽃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샬럿의 모습은 곧 어디에서도 찾아   없었다.

*

“크허어…”

“뭐, 뭐야?!”

갑자기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에 페이가 화들짝 놀라며 두리번 거렸다. 아르윈과 파렐은 곧바로 영주좌로 마도구와 성검을 겨누며 말했다.

“누구냐!”

“크흐… 과연, 다들 이런 식으로 당한 건가…”

목소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 영주좌의 뒷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머리였다. 바제리 백작의 얼굴을 가진 머리. 그것이 데굴데굴 굴러오자 용사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살아 있었나?!”

“아니, 저건 살아 있는  아니다.”

“엘프의 말이 맞다… 나는 이미 죽었다. 영혼마저도 악마에게 빼앗겨버렸지…”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에 당황하던 페이와 파렐조차도 의아한 눈으로 바제리 백작을 바라봤다.

“이건 내 마지막후회다.”

오직 그 일념 하나만으로 마력을 남겨두었다. 그 악마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는 눈을 희번뜩 거리며 말했다.

“우리를 악마로 만들어준 악마가 있다.”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악마가 있다고?”

아르윈이 놀라 바제리 백작을 바라봤다.

“샤를로트… 우리는 그녀를 샬럿이라고 불렀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예요.”

“마찬가지다.”

용사의 시선에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큭, 당연하다.  악마는 진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러고는 용사를 향해 말했다.

“용사여, 그대는 메르씨엘 남작을 아는가?”

메르씨엘 남작,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페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곧 떠올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알에리 파벌의 명단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군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유명하다면 유명하죠. 우선 알에리 후작과 함께 전장을 누볐고 무엇보다도 제국의 삼공작 중 카르벤 공작의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카르벤 공작이라고 하니 기억이 났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과 장대한 기골, 무엇보다도 세월의 풍파가 얼굴에 남아 있음에도 여전히  벼려진 검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 메르씨엘 남작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죠?”

“샬럿, 그 악마와 계약한 인간이 바로 메르씨엘 남작이니까.”

“악마의 말이다. 순순히 믿을 수 없군.”

“나는 제국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다. 군사를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군을 향한 마지막 충정이었을 뿐, 제국을 뒤엎으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 이해하지.”

아르윈의 말에 바제리 백작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파렐은 순간적으로 머리만 남아 있는데 숨을 쉬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이 들었으나 재빨리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믿지 못해도 상관 없다.황태자라면 내 말의 진위를 의심하면서도 조사를 시작하겠지.”

그리고는 후회가 짙은 말을 내뱉었다.

"악마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군.”

“그래… 늦었지. 너무도 늦어버렸어.”

그렇게 중얼거린 바제리 백작의 머리는 한순간에 재가 되어 무너졌다.

뚫린 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 재를 멀리 흩어버렸다.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파렐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우선 전투가 끝났음을 알려야겠지.”

아르윈이 지팡이를 들어 바깥을 향해 마법을 쏘아보냈다. 소음을 일으키며 날아가던 그것은 하늘에서 밝은 섬광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그러자 얼마지나지 않아 멀리서 들려오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이것으로 나흘 간 펼쳐졌던 알카디 공성전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다음은, 네가 정하는 거다.”

“제가요…”

“그래. 용사, 어떻게 하고 싶지?”

황태자의 집무실에서와 같은 질문이다. 용사는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메르씨엘령까지 얼마나 걸리죠?”

“넉넉하게 잡아 엿새 정도입니다.”

“황태자님께 소식을 보내고 다시 지령을 받는다면 얼마 정도 걸릴까요?”

“빠르면 이틀이다.”

“그럼 결정된 것 같네요.”

두 사람의 말을 들은 파렐은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우리는 메르씨엘령으로 갑니다. 바제리 백작의 유언이 사실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사실이라면 저희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이겠죠.”

악마와  계약자를 토벌하는 것. 그것이 용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

그리고 용사가 토벌하기 위해 찾고 있는 악마는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있었던 거죠?”

집무실의 풍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쌓인 서류들로만 보면 역변한 거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딱히 크게 달라진  없었다.

한 쪽에서 부관이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었고 알폰스가 의자에 앉아 노닥거리는, 지금은 서류를 보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평소와 별 반 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알폰스의 무릎 위에 비올렛이 앉아 있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특히나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이라면 더욱이 말이다.

“뭐.”

“뭐.  아니잖아요! 도대체 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태연한 얼굴로 내뱉는 알폰스의 모습에 샬럿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저택을 비운 시간이 이 주 정도 되었으니 변화가 있다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끄러워…”

그 소리에 비올렛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샬럿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중얼거렸다.

“샬럿이다.”

“네, 맞아요. 비올렛이 좋아하는 샬럿이랍, 쿠엑!”

언제 놀랐냐는 듯 익살스럽게 대답하려던 샬럿은 배에 가해지는 충격에 뒤로 넘어졌다.

“어디갔었어?”

“그야 주인님의 명령으로 잠깐 다른 곳에…”

“다른 곳, 어디?”

“하하… 주인님? 뭐라고 좀 대신 해주실래요?”

언제 뛰어들었는지 모를 비올렛이 그녀의 배 위로 깔고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던 샬럿이 황급히 알폰스를 향해 구조 요청을 보냈다.

평소에는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던 그녀가 왜 이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 모습에 알폰스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앉아 있던 비올렛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아.”

“비올렛. 샬럿은 방금 돌아왔으니 조금 쉬게 해줘야한다.”

“그렇지만, 대답 안해줬어.”

“들어도 모르잖나.”

“그래도 알고 싶은 걸.”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비올렛이 볼을 부풀리고 허공에서 다리를 휘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샬럿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귀엽기는 했다. 화가를 초청해 그림으로 박제를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양손으로 얼굴을 짓누르며 온몸으로 충격을 먹었다는 표현해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알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됐다.”

“그렇게 됐다,  끝날  아니잖아요. 저건!”

“샬럿, 시끄러워.”

“아,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네요.”

닥쳐가 아니라 시끄러워인 것이 조금 불만이기는 했지만. 샬럿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잠깐. 불만이요?’

사실 자신은 비올렛에게 욕먹는 것을 즐기고 있던 걸까? 갑자기 자기도 몰랐던 욕망이 고개를 치켜들자 혼란스러워하던 그녀의 머리 위로 살포시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평소와는 달리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비올렛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돌아왔으니까 봐줄게.”

“비올렛…”

 아무렴 상관 없나. 샬럿은 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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