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74화입니다. (74/75)



〈 74화 〉74화입니다.

침대 위로 퀭한 얼굴을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부관이라고 불리는 알폰스의 보좌관이었고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안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는 모습은 병자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늦었다.’

본래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창밖을 보면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즉,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게 일어난 것이었다.

물론 열흘 가까이 쉬지도 않고 서류를 보고 있었으니 이정도 수면을 취해주지 않으면 몸이 버티지를 못한다. 치유능력이 있었기에 고작 하루 수면을 취하는 것으로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지,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아마 며칠을 골아떨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용사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시점. 당장이라도 알카디 성이 함락되고 바제리 백작이 패배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군인 알폰스가 상황을 보고 받고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쪽이 어울렸다.

그래도 이 시간까지 아무 일 없이 잠들어 있는게 가능했다는 건 달리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리라.

부관은 얼굴을 문지르며 탁자에 올려둔 종을 울렸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메이드 한 명이 들어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부관님.”

“좋은 아침… 아니 점심이군요, 베냐.”

“예, 그렇군요.”

베냐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지금은 샬럿을 대신하여 저택의 메이드를 총괄하고 비올렛의 시중을 드는 그녀였으나 본래는 부관의 전속 메이드였다. 알폰스에게 거둬져 이 저택으로 왔을 때부터 그랬으니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꽤나 길었다.

“식사와 목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목욕은 바로 준비해주시고, 식사는 커피로 대신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여전히 집무실에 계십니까?”

“주인님께서는 현재 비올렛 양과 함께 계십니다.”

“...비올렛과 있다구요.”

익숙한 문답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스트레칭을하던 부관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아마도 밤을 함께 하신듯 합니다.”

최소 반나절은 비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정보가 얼마나 많이 쌓여 있을지 부관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공백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한다면…

부관은 잠시 정신이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으나 정신을 잃기에는 촌각을 다투는 시점이었다. 황급히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목욕은 취소하겠습니다. 집무실로 커피를 올려보내 주시고 주군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잠옷 위로 케이프를 두르며 씹어 먹을 듯 말을 내뱉었다.

“다음 생에는 당신 부관 안한다고.”

-

“-라고 하셨습니다.”

“...부관이 화가 많이 났나보군.”

베냐의 말에 알폰스가 중얼거렸다.

하긴, 대신 보고 있을 테니 휴식을 취하고 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정작 눈을 떴을 때 집무실에 없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생인가.’

과연 부관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알폰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부관에게는 내가 알아서 말하지. 너는 원래 일로 돌아가도록.”

“알겠습니다.”

베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을 보며 알폰스는 제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비올렛을 바라봤다.

욕실에서 잠든 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깨어날 줄을 몰랐다. 덕분에 몸에 물기를 제거하고 옷까지 갈아 입히는 것도 전부 알폰스의 몫이었다.

한번도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생각인건지.”

“으응…”

괜히 심술이 나서 오똑한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잡으니 칭얼거리며 뒤척인다.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퍽이나 귀여운것이여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곧 입꼬리를 내리며 침전한 눈으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그럼, 저, 버리지 말아요…’

잠들기 전에 비올렛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아련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어려 있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거냐.”

그래서는 안되었다. 언제나 괄괄한 성미로 자신을 죽이겠다며 날뛰는 비올렛이여야 했다. 그런 나약한 말을 내뱉으며 제게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되었다.

지금은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말이다. 알폰스는 비올렛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눕혔다.

한참을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또 다시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

용사, 파렐은 알카디 성의 최상부에 위치한 대회의실 입구를 바라보며 긴장의 숨을 내쉬었다.

알카디 공성전이 시작된  나흘, 드디어 반역자 바제리 백작의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비록 황실기사단과 황실군의 도움은 더 이상 받을  없었지만, 이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힘을 써준 것만 하더라도 어디일까.

“조심하십시오. 안쪽에서 악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성녀 페이의 말에 파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용사 일행은 네 마리의 악마와 마주쳤다. 그들은 하나 같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아무리 성검의 주인인 파렐이라고 할 지라도 그들을 상대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알카디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 기습해온 악마는 강함의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순식간에 기사 두엇을 도륙내고도 용사 일행과 황실기사단의 협공을 오랫동안 버티면서 전력을 갉아먹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 악마의 육신이 무너지며 자멸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머지 악마들도 강하기는 했으나 첫번째 악마와는 다르게 무난하게 처리할  있었다.

그러나 대회의실 내부에 악마가 있다는 소리에 파렐은 쉽게 표정을 풀  없었다. 여태껏 악마가 출현했을  용사 일행 뿐만 아니라 황실기사단과 군대가 뒤에서 지원을 해주었지만, 지금은 오직 자신들로만 악마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밭을 일구던 평범한 농민에 불과했던 자신이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까. 물론 황실기사단장 대리와 대련에서 우세를 점하고 악마까지 베어넘긴 전적이 있는 자신이 평범한 농민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우스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잠들 때마다 이 모든 일들이 사실 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버지의 호통에 부리나케 일어나 밭으로 향하고 똑같이 일을 하기 위해 나온 한스와 시시덕거리며 이야기를 하다 마을의 미인 지니아를 보고 멋대로 얼굴을 붉히는, 그런 평범한 일상들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다.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엘프 마법사, 아르윈의 말에 파렐은 사실대로 말했다.

두렵다. 미치도록 두렵다. 악마라고 한다면 그 옛날 초대 용사의 앞을 가로 막았던 큰 장애물 중 하나였다. 그들은 온갖 술수를 사용하며 용사를 방해했고 그들의 계략에 무너질 뻔 하기도 하였다.

그 위대한 초대 용사, 제국의 시조조차도 어려움을 겪게 만든 존재들이다. 여전히 평범한 농민의 마인드를 가진 파렐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아르윈이 어이 없다는 듯 바라봤다.

"평범한 농민이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 말이 우습게 들린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악마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용사, 고작 악마 따위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악마 따위가 아니라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부활하는 마왕을 처단할 인류의 검입니다."

페이가 그를 힐난하며 말했다.

그래, 결국 자신이 최종적으로 상대해야할 것은 악마가 아니라 마왕이었다.

그리고 마왕은 악마보다 수백배 강한 존재일 것이었으니 악마 따위에 겁을 먹어서 안된다는  또한 말이다.

하지만 아르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성녀의  또한 맞다. 그러나 두려워 하는 것이 잘못 되었을까?”

“그게 무슨…”

“미지의 존재에 대해 두려운 감정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하물며 여전히 자신을 평범한 농민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얼간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힐난 받을 일이 아니지.”

“어, 얼간이…”

신랄하게 내뱉는 말에 파렐은 물론 그에 대한 힐난을 입에 담았던 페이조차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윈을 바라봤다.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않으며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얼간이는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있다. 평범한 농민임을 자처하면서도, 이  너머 악마가 있음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이 용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마법사 님…"

“물론이미 악마를 넷이나 처리한 시점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그, 그렇군요…”

한치도 방심할 수 없는 입담이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고압적이고 과묵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말도 많이 하고 자신을 골리는 말도 많이 하고는 했다. 의외로 장난기가 넘치는 성격이라고 할지.

파렐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아르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두려운 감정은 사라졌나?”

그러고보니 어느 순간부터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평소와 같아진 몸상태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파렐을 보며 아르윈이 등을 두드렸다.

“여태껏 잘해왔으니 이번에도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다.”

“마법사 님…”

“또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짓는군. 자, 이제 슬슬 악마도 우리를 기다리느라 지쳤을 테니 들어가지.”

그녀의 말에 파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향해 나아갔다. 페이 역시도 불퉁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자신이 말할 때는 항상 불편한 표정만을 지으면서 저 엘프가 말할 때는 얼빠진 얼굴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용사에게 불편할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 그게 다 저가 좋으라고 하는 말이던가. 전부 용사로서 자각을 하길 바라며 하는 말이었지.

그런데 그런 것도 몰라주고 매번 제게는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저 엘프랑 시시덕 거리고 있으니 왠지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소외된 기분을 가질 필요도 없지. 어차피 마왕만 토벌하고 나면 다신 볼 사람들도 아닌데 말야.’

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성녀, 자네도 조금 여유를 가지게.”

“제가  말입니까.”

아르윈의 말에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내뱉고도 자신이 놀라 몸을 움찔 떨었으나 다행히 그녀는 별로 신경을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깨에 힘을 빼란 말일세. 아직 마왕은 부활하지 않았고 용사의 성장은 날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어. 굳이 그대가 닥달하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용사의 이름에 걸맞는 인물이  게야.”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용사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평범한 농민 출생이 이만큼 강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얼빠진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이 남자가 용사로서 사명을 다 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말이다.

“너무 그를 몰아세우지는 말게. 그대의 가슴처럼 용사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내이니 말이지.”

“알고 있, 뭐요?”

“음?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방금 내 가슴을 가지고 뭐라고…”

“성녀 님, 마법사 님. 이제 열겠습니다.”

“그래, 지금 가지.”

“잠깐, 마법사 님 그게 무슨, 야!”

마치 물흐르듯 용사의 뒷편으로 걸어간 아르윈을 보며 페이가 씩씩거렸다.

저 엘프는 틈만 나면 가슴으로 놀리고 있어! 은근히 크기가 작은걸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뒤로는 더욱 빈번해지고 있었다.

용사는 화난 얼굴로 아르윈을 노려보는 페이까지 도착하는 것을 본 다음 천천히 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적막한 대회의실의 전경이 보였다. 한 쪽 벽에 커다랗게 생긴 구멍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위쪽에자리한 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바제리 백작.”

반역자 바제리 백작.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내려보았다.

“라움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지 마소서.”

우드득- 말과 동시에 목이 한바퀴 돌아가더니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변이가 시작되었다. 그로테스크한 소리와 함께 녹아내린 바제리 백작의 몸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갑옷 안으로 불꽃이 파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투구로 변한 머리와  소드(bone sword)를 들어올린 악마가 말했다.

[오라.]

신성마법의 보조를 받은 용사가 마법사의 마법과 함께 악마에게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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