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70화입니다. (70/75)



〈 70화 〉70화입니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이른 아침. 비올렛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차림으로 한가운데 서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잡고 허공을 베어냈다. 그 움직임은 지난 일주일 전보다 훨씬 더 정교했으며 예리했다. 쉼 없이 훈련을 했던 결과였다.

비올렛은 정말 끊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밥을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연무장에서 보냈다. 베냐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으나 그것조차 무시하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알폰스는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도 단 한번도 연무장에서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식사조차도 집무실로 올려보냈기에 장장 일주일이 넘게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도대체 뭘하고 있길래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건지   없었다.

사실, 보려면  수는 있었다. 알폰스는 항상 집무실에 있다고 베냐가 말했다. 그러니 직접 자신이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찾아가서, 어째서 검술지도를 하러 오지 않느냐고 따지면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집무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제 방에서 문을 열고 오른쪽 복도를 걸어 끝에 보이는 문을 지나면 알폰스의 집무실이었다. 그러니 가서 문을 두드리건, 부수고 들어건 그렇게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어째서 자신이 알폰스를 만나기 위해서 직접  집무실로 가야 하는가.

애초에 그곳에 갔다가 좋았던 기억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항상 대련에 패배해서 억지로 그의 정욕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마치 내가 알폰스를 만나고 싶어서 안달난 것처럼 보이잖아.’

저가 생각하기에도 미친 소리였다. 그 녀석의 어디가 좋다고 만나고 싶겠는가. 항상 자신을 힘들게하고, 괴롭히고, 고통만 주는 놈을 말이다.

감정을 털어내듯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알폰스의 환영이  앞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비올렛은 올게 왔다는  그것을 향해 뛰쳐나갔다.

알폰스가 연무장으로 내려오지 않게 된 이후로 비올렛은 그의 환영과 싸웠다. 정확히는 여태까지 대련의 기억들이 형상화 되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에 굳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검을 들고 휘둘렀다.

환영은 강했으나 진짜 알폰스 만큼은 강하지 못했다. 지나간 기억과 싸우는 것은 마치 상대를 알고 싸우는 것과 같아서, 반복하다보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환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고는 했다. 마치 잘했다는 것처럼.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몇 번의 공방 끝에 검을 놓친 환영의 목에 비올렛의 검이 겨눠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비올렛은 사라진 그의 모습을 보며 검을 내렸다. 그리고 넓은 연무장을 둘러봤다.

오늘도 혼자였다.

-

날이 어두워지고 검을 휘두르는 것도 멈췄다. 사실 멈췄다기보다는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검이라는 것은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었고 그것을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휘두르니 팔이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즈음 되면 가슴보다 높이 들어 올리는게 불가능할 지경이라 휘두르고 싶어도 휘두를 수가 없었다. 비올렛은 몇  더 악을 쓰며 팔을 들어올려다 검을 놓치고 주저 앉았다. 얼굴 위로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입고 있던 와이셔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이제는 익숙해진 베냐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혀 진 뒤 침대에 눕혀진다. 창문 위로 커튼이 쳐지고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면 완전한 어둠이 방 안으로 내려 앉았다.

평소와 같았으면 지쳐 골아떨어졌을 비올렛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 분명 몸은노곤하고 눈은 무거워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잠들 수가없었다.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곤에 절은 머리는 아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스으,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 위로 서늘함이 내려 앉는다. 손등을 간지르는 정도였던 차가움은 어느새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추위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무거운 팔로 이불을 끌어 안고, 그것도 부족해서 머리 끝까지 끌어올렸다.

이불 안의 공기는 따뜻했다. 하지만 비올렛은 여전히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마치 임산부의 배 안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호흡과 느릿하게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비올렛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바람 한 점 불지도 않는데도, 따뜻한 공기 속에 둘러쌓여 있는데도 사무치는 추위가 몸을 지배했다. 마치 한겨울에 얇은 옷을 하나 걸치고  위를 걸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랍장에있는 종을 떠올렸다. 밤이 깊었지만, 분명 종을 울리면 베냐가 찾아와 이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게 뭐지?’

비올렛은 멍하니 생각했다.
따뜻한 차나, 잠들기 전에 했던 목욕 같은 것.

그리고 누군가의 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릴이었다. 그녀는 잠버릇이 심했다. 거리를 두고 잠들어도 어느 순간 제 품에 자신을 끌어당기고는 했다.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따스했고, 안심이 되었으니까.다.

이릴. 그녀를 떠올리니 다시금 속이 울렁거렸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흐느꼈다. 전신을 덮는 추위와 달리 눈물은 뜨거웠다. 그녀의 품이 그리웠다. 조용히 울려퍼지던 목소리가 그리웠고 제게 해주던 옛날 이야기가 그리웠다.

떠오른 것은 샬럿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짓궂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약올리듯 하지 않나, 아니면 멋대로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질 않나. 그 주인의 그 종자라고 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다. 놀리듯 치근거리던 행동들도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전생에서 자신에게 그렇게 행동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에 오히려 조금은 호감을 품었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알폰스였다. 무척이나 증오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노예가 될 필요도 없었고 이릴과 헤어질 일도 없었다. 강간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괴로움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밉고 원망스럽다. 하지만 알에리 저택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겼던 품을 기억한다. 자신의 등을 두드리던 손길도,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어느 순간 상냥해졌던 행위들 역시도.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비올렛은 눈물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제야 몸을 감싸는 추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의 이름은 고독이었다.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병.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것이  이상 버티기 괴로울 정도였다.

"흐으, 흑, 흐윽…"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제 것이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연약하고, 가녀린 것이었다. 과연 이게 자신의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 넓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 대여섯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큰 침대 한가운데서 훌쩍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깨달으니 외로움이 커져 슬픔이 밀려왔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안아줄 것도 없었다. 곁에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제게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릴은 저멀리 알에리 저택에 있을 것이었고, 잠들기 전까지 치근덕 거리던 샬럿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알폰스는, 집무실에 있었다. 방을 나와 오른쪽 복도를 걸으면 보이는 문을 열면 앉아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  중인데 집무실에 있을까. 그가 잠드는 방의 위치는 알지 못했다. 혹여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어느새 비올렛은 알폰스를 만나러 간다는 전제하에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밤이 늦은 시간에 그를 찾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몸을 섞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차라리 그것이 나을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러는 동안 몸을 사무치는 추위, 고독과 외로움은 느끼지 못할 테니까.

이불을 거두고 비올렛은 상체를 일으켰다. 엉금엉금기어 침대에 벗어나 땅에 발을 딛고 일어서자 휘청거렸다. 몸을 혹사시키듯 검을 휘두른 터라 그런지 제대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비올렛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눈물로 번지는 시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눈으로 보는 것은 무의미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방 안과 다를 바 없이 조용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는 촛불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복도 위를 휘청거리며 걸었다.  위로 흐르는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져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방에서부터 이어지는 눈물 자국이 어느덧 한 지점에 멈춰 그 크기를 불렸다.

비올렛은 멍하니 서서 집무실 문을 바라봤다.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틀림 없이 알폰스의 것이었다. 대련을 하면서 수도 없이 느꼈던 존재감이 집무실 안쪽에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 문고리를 잡은 손을 돌리기만 하면 문이 열리고 그의 모습이 보일 것이었다.

“...”

분명 그럴 턴데. 어쩐지 쉽사리 행할 수가 없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으면서 망설이는 감정이 손을 머뭇거리게 했다.

비올렛은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돌리려고 했다. 미워하는 감정이 손을 붙잡았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처럼.

서서히 사그라들던 눈물이 다시금 울컥 흘러넘쳤다. 울먹이는 얼굴로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얼굴을 가렸다. 소리를 죽인 울음이 끅끅거리며 터져나왔다.

알폰스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계속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게 했었더라면, 계속해서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제와서.

비올렛은 주저 앉아 소리 죽여 울음을 터트렸다. 문 건너편에서 앉아 있을 알폰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오랫동안.

하지만.

"누구냐."

너머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도 않고 눈물만 흘려대고 있으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닫혀 있던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집무실에서 쏟아지는 빛이 비올렛의 머리 위로 내려 앉았다.

"너…?"

당황어린 알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비올렛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수 있었다.

그런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감싸는 손길이 고개를 들게 했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 사이로 알폰스의 모습이 보였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자신을 안아들었다.

"곤란하군. 부관은 지금쯤 잠들어 있을 텐데…"

"아냐…"

"응? 뭐라고했지?"

"아픈게… 아니라고 멍청아…"

"아픈게 아니라고?"

비올렛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는 이해할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픈 것이 아니라면 왜…"

"너 때문이야…"

"그건  무슨…"

"왜 나였던 거야?"

"뭐?”

"왜 내가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며 당했어야 했지? 왜 내가 노예가 되어서 네 것이 되어야 했지? 왜 이릴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거지?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거야?"

"..."

터져나오는 말의 폭포에 알폰스는 할말을 잃고 비올렛을 바라봤다.

"난 정말로 네가 싫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워…"

울먹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독기라고는 찾아볼  없었다. 듣는 사람도 슬퍼질 정도로 애달펐다.

한참을 훌쩍거리던 비올렛이 말했다.

"왜 그랬던 거였어?"

"...."

"알에리 저택에서 돌아올 때, 왜 나를 안아주었어? 왜 나를 위로했던 거야?"

"난…"

"왜 이제 와서 내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지? 왜, 이제 와서? 차라리 계속 날 괴롭히고 가지고 놀아…"

너를 아무 생각 없이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도록. 비올렛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알폰스는,

아무런말도 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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