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69화입니다. (69/75)



〈 69화 〉69화입니다.

"...괜찮으세요?"

베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흙투성이의 비올렛은  보기에도 많이 지쳐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 그보다 목욕을  번  해야  것 같은데, 괜찮을까?”

“물론이죠. 곧 준비해드릴게요.”

“응, 고마워.”

비올렛은 테이블에 앉아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베냐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메이드 몇을 선별해 복도 위에 떨어진 흙을 치우게 하고 물을 길러오게 시켰다. 샬럿이 비올렛의 시중을 맡기며 메이드장 대리 또한 맡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니 금세 준비가 갖춰졌다. 베냐의 인도에 비올렛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따스한 공기가 몸을 감싸니 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황급히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었다.

“미안,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네.”

“그런 말 하지 않으셔도 되요.”

베냐는 측은한 눈으로 비올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런 시선에도 대꾸하지 않고 몸을 축 늘여뜨렸다. 결국 옷을 벗기는 것은 베냐의 몫이었다. 옷을 벗을 때마다 흙이 한무더기로 쏟아졌다. 얼마나 험하게 굴렀으면 이렇게 됐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나신이 되었음에도 하얀 피부는 흙먼지로 더러웠다. 이대로 탕에 들어갔다가는 씻는 것이 무의미했기에 물을 끼얹어 씻었다. 손으로 피부를 문지르며 박박 닦고 나서야 겨우 빛을 되찾았다.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비올렛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들어올려  안으로 집어 넣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올렛은  속에 잠겨드는 느낌에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머리를 기대었다. 이대로 잠이 들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의식이 가라앉았다.

"어머나."

잠시 숨돌리는 사이 잠들어버린 비올렛을 보며 베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마나 지쳤으면 고작 고개를 기대는 것으로 잠들어 버린 걸까. 절로 측은함이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는 연무장에서 비올렛이 검을휘두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모시는 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하는 것이 메이드였기에 조금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검을 모르는 무지렁이였으나 비올렛의 검은 분명 대단한 것 같았다. 무거운 진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기사와 닮아 있어 놀라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여리여리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 수가 있는지.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의 행동이었다.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일순간 멈칫하더니 마치 누군가와 싸우는 것처럼 움직였다. 마치 상대를 죽이려는 것처럼. 그러다 곧장 몸을 날려 땅을 굴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비올렛이 미쳤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 터져나온 절규와도 같은 울부짖음에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슬픔, 분노, 괴로움. 온갖 감정들이뒤섞인 목소리에 그제야 베냐는 제대로 비올렛을 바라봤다.

그녀는 노예였다. 자유민이자 정당한 삯을 받고 일하는 메이드인 자신과는 달리 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고 죽으라면 죽어야하는 노예.

게다가 주인의 밤시중까지 억지로 들어야 했으니 이만저만 고통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메르씨엘 남작의 총애는 총애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가엾게도…"

여태껏 멀리서 봐 온 그녀의 성격상 동정 받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이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베냐는 잠든 비올렛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편안할  있도록.

-

알폰스의 집무실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모두 바제리 백작 측과 용사 일행 측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문서들이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계속해서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음으로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정보가 바제리 백작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그것도 근시일 내에 말이다.

‘적어도 한 달은 걸릴  알았는데 말이지.’

두 세력이 맞붙고 고작 반나절도 흐르지 않았다. 수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용사 측이 불리했으나 문제는 황실기사단이 가담했다는 것이다. 백작 측에서도 기사가 적지 않은 수가 있었지만, 질적으로 차이가 심하게 났다.

애초에 귀족가에 소속된 기사보다 황실에 소속된 기사가 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귀족의 기사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나 황실의 검과 방패가 되는 건 어중떠중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의 근간이 되는 황실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니 말이다.

용사 일행 측에 가담한 기사의 수는 서른. 노귀족 넷이 모인 바제리 백작 측의 기사가 백오십 정도다. 간단하게 계산하더라도 황실 기사 한 명당 바제리 측 기사 다섯을 능히 상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반적인 구도라면 반드시 패퇴하는 그림이 그려질 테지만, 기사들 중에서도 특출난 놈들이 모이는 황실기사단 소속이다.

서른 명의 기사들은 백오십의 기사를 도륙내고도 남을 것이었다.

‘...마지막에 변이를 하게 된다면 모르겠지만.’

악마와 계약을 한 자는  순간부터 악마가 될 가능성을 품는다. 개화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바제리 백작과 늙은이들은 틀림없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일이 흐르기도 했거니와 이미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변이를 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함락되기까지는 이 주가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샬럿이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전투는 최대한 길어져야 한다. 많은 사상자가 만들어져야 하고 많은 영혼들이 만들어져야 했다.

샬럿이라면 분명 제가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에 상념이 깨어진다.

“누구냐."

“베냐 입니다. 주인님,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냐?”

잠깐 생각을 하던 알폰스는 샬럿이 자신을 대신하여 메이드장 대리를 맡긴 시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샬럿의 대신이라면 분명 비올렛의 시중을 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알폰스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와라.”

“네? 아,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반문한 베냐는 곧 말을 고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집무실 안은 가히 서류의 무덤이었다. 일전에 집무실을 청소해 본 적이 있었던 그녀였지만, 이리도 많은 서류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베냐는 침울 꿀꺽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종이 주인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무례한 행위였다. 그 예전 멋모르는 소녀적에 귀족과 눈을 마주쳤다 눈깔이 뽑힐 뻔한 이후로는 습관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알폰스는 그런 베냐를 관찰하듯 바라봤다. 연령은 높아보였고 외모도 달리 특출나지 않았다. 한대 묶어 내린 갈색 머리카락은 생활감이 있어 보였다. 특히나 조금 너절한 메이드복이 그랬다.

"네가 샬럿이 말했던메이드장 대리인가."

"네, 그렇습니다."

"비올렛의 시중을 드는 것도 네가 하는 일이겠군."

베냐는 대답을 반복했다.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그저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할 건지 묻기 위해서 왔을 뿐인데 주인과 독대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그래서 벌을 주기 위해 부른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책잡힐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떨 필요 없다.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그런 거니."

물어볼 것이라고? 베냐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비올렛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지. 오늘 그녀는 뭘 하던가?"

"...검을 연습하셨습니다."

"검을 연습했다? ...다른 것은 묻지 않던가?"

"네? 무엇을…"

"어째서 내가 나오지 않았나, 같은."

어쩐지 알폰스는 기대하는 듯한 눈으로 베냐를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었단 말이지."

홀로 중얼거리는 알폰스의 모습에 베냐가 작게 식은땀을 흘렸다. 어쩐지 자신이 말을 잘못한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우려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짧게 생각을 마친 알폰스가 베냐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가보도록."

"알겠습니다."

베냐는 마음이 바뀔까 냅다 고개를 숙이고 문을 빠져나왔다. 결국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대답은 듣지못했으나 집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면 식당으로 내려오지는 않을 같았다.

샌드위치 같은 간편식을 만들어 올리면 되겠지. 베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폰스는 가만히 의자에 파묻혀 서류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서류를 보고 있던 부관이 그것을 슬쩍 내리며 그에게 물었다.

"실망하셨습니까?"

"무슨 말이냐."

"비올렛이 주군을 찾지 않았다는 것 말입니다."

"그 녀석이 날 찾지 않은 거랑 실망한 거랑 무슨 상관이냐?"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부관의 지적에 알폰스는 언제 그랬냐는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웃기는 소릴."

"하긴, 웃기는 소리기는 합니다. 주군께서 그녀를 어떻게 다뤘는지 생각하면 실망한다는 감정을 느꼈다는 자체가 양심이 뒤진, 아야."

"못하는 말이 없군."

"사실이지 않습니까."

뚱한 얼굴로 종이에 맞은 머리를 쓰다듬는 부관을 보며 알폰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집무실에서 질펀하게 즐긴 뒤로 저리 틱틱거리는 것이 늘었다. 돈을 들여 전부 새 것으로 바꾸기는 했지만,그렇다고 쓰던 물건이 되는 게 아닌지라 결국  잘못이기는 했다.

'애초에 전부 내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봐야 삐친 부관이 집무를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일만 못했으면 어디  구석에 박아놨을 텐데. 알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주군."

"또 뭐냐."

"비올렛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왜 자꾸 그 녀석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군."

"주군께서 그녀를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투에서 빼는 것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냐. 왜 다시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라. 알폰스는 서류를 놓고 부관을 바라봤다.  역시도 보고 있던 것을 책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바제리 백작 측은 반드시 패배할 것입니다. 그들은 태생이 문인이었으며 싸울 줄 아는 거라고는 책으로 본 병법서가 전부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샬럿을 보낸 게 아니냐."

"그것이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것도 아시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던 그 이후까지 말입니다."

알폰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부관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주군께서는 저희가 용사와 싸운다면 승산이 몇 할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9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제리 백작이 사망하고 샬럿이 모든 준비를 마쳐 돌아오면 곧바로 의식의 준비를 할 것이다. 그리고 의식을 마치게 된다면 제 아무리 용사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리라.

"9할. 꽤 높군요."

"너는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지?"

"5할입니다."

한순간 반토막이 났다. 알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부관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는 용사입니다. 용사가 가진 성검은 마에 대한 절대적인 물리력을 행사하고 사용자를 보조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 말입니다. 게다가 용사가 된 시점부터 그는 단순 평범한 농민이었던  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겁니다."

"이유는?"

"그가 황실기사단장 대리와 호각을 다투었다는 내용이 있었을 겁니다. 그것도 어떠한 손속을 두지 않고 말입니다. 고작 용사가 된 지 두 달만에 평범한 농민이 황실기사단장 대리와 호각을 이룰 정도라니 이상할 정도로 빠른 성장세입니다."

그러나. 부관은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것의 원인을 찾는  저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순간에도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제리 백작이 무너지는 걸 짧게  주 정도라고 생각하고, 그가 정비를 마치고 빠르게 이곳으로 당도하기까지 일주일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부관은 손가락 세 개를펼치며 말했다.

"3주 입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강해지겠습니까? 그즈음이면 황실기사단장 대리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으로 강해지겠지요. 주군이 생각하신 계획을 감안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5할 인가."

"예."

알폰스는 곰곰히 생각했다. 확실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비올렛을 전투에 투입하라는 건 말이 안된다. 그 녀석은 약해."

"그녀 또한 계약의 의식을 진행하면 됩니다. 본질은 마물이니 어렵지 않게 성사될 겁니다."

"결국 녀석을 죽이는 일이 된다."

"저는 주군의 안위가 최우선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이 맞서야 할 싸움입니까? 도망치는 것은 안되는 겁니까?"

"부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죽을 수도 있는 선택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장 남쪽 항구로 내려가 대륙을 이동하는 것도…"

"나는 도망치지 않아.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다. 그가 어째서 제국에 남기를 고집하는 건지. 하지만 그것도 살아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차라리 그때 저를 구하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바보같긴. 살려달라한게 누구였는데."

"이렇게 개처럼 부려먹힐  알았더라면 그곳에서 죽는게 나았습니다."

"이미 늦었다. 넌  거야."

끌끌 웃으며 말하는 알폰스의 모습에 부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비올렛을 풀어주십시오."

"왜지?"

"저희가 이긴다면 상관 없겠으나, 만일 지게 된다면 비올렛은 반드시 죽을 겁니다. 그녀는 마물에 심지어 검을 배웠으니 말입니다. 절대로 황실에서 그녀를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별로 내키는 선택은 아니군."

"압니다. 하지만 안되는 것을 자꾸요구하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내 잘못이군."

알폰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바제리 백작이 몰락하기 전까지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 이후로는 황실이 저희 영지를 포위할 테니 말입니다."

'2주인가.'

어쩌면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알폰스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류를 바라봤다.

밤이 깊어갈 수록 생각 또한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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