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68화입니다.
비올렛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제가 내뱉는 숨과 열에 달아오른 이불 속 어둠이 보였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이불을 들추며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공기가 달은 몸을 식혀 주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제, 알폰스의 도발에 넘어가 새벽까지도 검을 휘두르다 겨우 돌아와서 잠에 들었다. 너무 피곤해서 땀만 닦고 잔 터라 몸이 찝찝하기 그지 없었다.
샬럿이 오면 바로 목욕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샬럿이 창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뜨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스스로 눈이 떠졌다.
비올렛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샬럿을 찾았다. 방 안에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창문에는 커튼까지 모조리 처져 있었기에 밤처럼 어둡기 그지 없었다.
그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설마 저 스스로를 완벽한 메이드라고 자칭하는 샬럿도 늦잠이라는 걸 잔 걸까. 비올렛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쓸어내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밤 사이 닫혀 있던 커튼 옆으로 치고 창문을 열었다. 햇빛이 어두운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눈을 감고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만끽하던 비올렛은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 걸 보니 빨라도 이른 점심 때였다. 보통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일어났던 것을 떠올려보면 늦잠을 자도 대단히 늦잠을 잔 것이었다.
샬럿도 샬럿이지만, 알폰스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 역시도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일어나 함께 연무장에서 검을 맞대었으니 분명 자신이 늦잠을 잤다면 찾아올 것이 당연했는데,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나와 대련을 하는 것이 지겨워지기라도 한 걸까. 비올렛은 어제 밤에 들었던 알폰스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손목에 노예의 인장을 차고서 저택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남은 건 그와 했던 내기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이릴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어떻게든 아득바득 달라붙어 대련을 해야했다. 그리고는 반드시 그에게 자그마한 생채기라도 만들어서 내기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릴을 만나 탈출을 계획해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얼굴 위로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 씹. 진짜 짜증나게…”
별로 슬프다는 감정이 들지도 않았는데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나왔다. 정말 무슨 정신병자도 아니고. 비올렛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편이 목표에도, 정신에도 좋을 것이었다.
비올렛은 화장대 서랍을 열어 샬럿이 주었던 종을 들었다. 분명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걸 울리라고 했었지. 짧게 손목을 흔드니 딸랑하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빨리 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비올렛 님, 들어가겠습니다.”
“어, 어?”
샬럿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비올렛이 버벅거리며 답하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샬럿이 입고 있던 메이드복과 비슷한 복장이었으나 좀 더 너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당분간 비올렛 님을 보필하게 된 베냐라고 합니다.”
“...샬럿은?”
“메이드장께서는 주인님의 명을 받아 현재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곳에 없다고?”
“네, 그렇습니다.”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간다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나.
'아니지, 걔가 뭐라고 섭섭해 하는 거야?'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리 생각했으나 몸이쳐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얼굴을 맞댔다. 심지어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샬럿일 때가 많았으니 싫다고 해도 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자신을 보고는 매정하다고 징징거리더니 정작 본인도 다를 바가 없었다. 비올렛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베냐가 어쩔 줄 몰라했다.
“제가 만족스럽지 않으신다면 다른 사람을…”
“아니, 큼, 아뇨. 불만은 갑자기 사라진 녀석에게 있죠. 당신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반말을 내뱉던 비올렛은 헛기침을 하며 고쳐 말했다. 항상 자신에게 적대적인 놈들과 푸닥거리다보니 입이 험했지, 그런 게 아닌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나이가 있어보이는 여성이라면 더욱이 말이다.
하지만 그 배려가 베냐에게는 독과도 같았다. 비올렛은 그녀의 상관인 메이드장에게도 막말을 퍼붓고 하물며 이 저택의 주인인 알폰스에게까지 독설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한참 낮은 시종에게 존중을 표하며 말을 높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십중팔구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목이 달아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더라 하더라도 절대로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베냐는 갑자기 비올렛이 제게 존대를 했을 때부터 시시각각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은연중 어떤 무례를 내비쳤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비올렛 역시도 딱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는 목이 날아갈 거라 생각하고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비올렛 님. 제가 무례를 저질렀다면 어떠한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벌을 받는다면 메이드장이나 알폰스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해결을 하는 것이 나았다. 당사자가 벌을 내린다면 조금 탐탁치 않을 지어라도 그 선에서 끝날 것이었다. 만일 추가로 벌을 준다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 될 테니 말이다.
메르씨엘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녀였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의 메이드들이었다면 어버버거리다 되려 큰 일을 당했을 것이었다. 물론 비올렛이 평범한 귀족 영애였다면 말이다.
‘갑자기 왜 무릎을 꿇고 난리야?’
비올렛은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이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벌을 받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머리를 긁적이고 깊게 한숨을 내쉬자 몸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저렇게 과민 반응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올렛은 그녀의 몸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왜 무릎을 꿇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나세요.”
“그럴 수는 없…?!”
베냐는 꿋꿋이 버티려고 했으나 몸을 쑥 일으키는 괴력에 깜짝 놀라 비올렛을 바라봤다. 여리여리해 보이는데도 힘이 무척이나 강했다. 비올렛은 그녀의 옷을 털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무례를 보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몰랐으니 상관 없지 않나요?”
“그렇다면 부디 말씀을 낮추어주세요. 저는 일개 메이드에 불과하니까요.”
“뭐 어때요. 저는 노예인걸요.”
손목에 착용된 인장을 흔들며 말했다. 베냐 역시도 비올렛이 노예라는 것즈음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백토 공주라는 마물이라는 것 역시도 말이다. 하지만 알폰스와 샬럿이 총애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신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조심해서 행동해야 할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완고한 표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표정을 짓는 베냐를 보며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아니, 그래.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목욕을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을까?”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평소처럼 말하자 그제야 얼굴이 활짝 피며 활력이 돌았다.
비올렛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
베냐의 도움으로 목욕을 마친 비올렛은 옷을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다 알폰스마저 없었으나 이제는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기로 생각했다.
‘적어도 그 녀석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정도가 되야 해.’
“스읍, 후우…”
짧게 호흡하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알폰스가 가르친 제국 검술의 기본은 이미 머리 속에서 각인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수 시간씩 반복하고 대련 중에도 끊임 없이 사용하니 숙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공을 가르는 검이 종횡무진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비올렛은 끊임 없이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더욱 깔끔하게 검을 사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알폰스를 이길 수 있을지.
생각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 호흡이 멎는다. 휘두르던 검이 멈춰지고 눈앞에 검을 맞댄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저택의 주인이었고 제게는 원수 같은 인간이었다. 은인이었던 이릴과 이별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이 세계에 떨어져 느낀 모든 고통의 대부분은 이 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망스럽고 증오스럽다. 당장 죽여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인간이었다. 자신이 느낀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 죽여야 겨우 끓어오르는 분노가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비올렛은 크게 검을 휘둘러 그의 검을 쳐내고 달려들었다. 그 역시도 피하지 않고 그녀의 공격에 어울려 검을 휘둘렀다. 얼마 간의 공방이 합을 맞춘 것처럼 이어졌다. 얼굴에 땀이 맺혀 턱을 따라 떨어지고 팔다리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라면 지난 날들과 다를 바 없는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비올렛은 검을 크게 쳐 올리며 상대의 몸 깊숙히 파고들었다. 높게 떠오른 자세를 곧바로 되찾고 반격을 하려 하나 파고드는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한대 엉켜 바닥을 구르고 위를 점한건 비올렛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검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오로지 맨손으로만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우위를 점한 비올렛에게 승산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주먹이 거침 없이 그의 얼굴을 두들겼다. 고개를 흔들며 팔로 막아보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비올렛은 맨손으로도 벽을 부수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 안가 팔에 힘이 풀려 가드가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비올렛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불쾌해서 양 손으로 목을 잡았다. 으드득 소리가 날 것처럼 조여지며 낯빛이 검게 물들어가는 와중에도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비올렛은 그것을 보고 콱 얼굴을 찌푸렸다. 이대로 힘을 주면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해보라는 것처럼.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입술을 씹으며 힘을 더했다. 그러나 곧 힘을 풀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그럴줄 알았다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으며 사라져갔다.
“젠장, 젠장!”
고작 환영에 불과한데도 죽이지 못했다. 비올렛의 주먹이 환영이 사라진 곳을 강타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옷이 더러워졌으나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때렸다. 주먹의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고 울부짖었다.
“아아아!”
그가 미웠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동시에,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원망스럽지도 않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에리 저택에서 돌아오던 마차 안에서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을 때? 아니면 발코니에서 실없던 말을 주고 받았을 때? 아니면, 아니면…
비올렛은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내리쳤다. 쿠웅- 하고 둔중한 충격이 바닥을 타고 연무장을 울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을 그대로 뒤집어 쓰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화창한 날씨임에도 피어오른 흙먼지에 뿌옇게 보였다.
더 이상 알폰스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투닥거리듯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검을 가르치면서 잡아 이끄는 손길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검을 섞는 것이 즐겁게 느껴졌고 패배는 분할 지언정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를 꺾어 놀라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여러 밤의 기억들도.
“미친년.”
비올렛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허망한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