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64화입니다. (64/75)



〈 64화 〉64화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싱그러운 소리를 만들어내었고 그늘을 만들어내는 이파리 사이로 햇빛이 드문 얼굴을 간지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릴과 함께 산책을 하다 휴식을 취하는 공간. 알에리 저택 뒷편에 홀로 존재하는 커다란 나무였다. 이곳에서 항상 그녀는 무릎을 내어주며 자신을 눕히고는 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머리를 스윽스윽 쓰다듬는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는 눈을 감고 있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습관처럼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으니까.

그래서 비올렛은 지금이 꿈이라는 것을   있었다. 눈을 뜨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제게 무릎베개를 해주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느껴지는 감각은 그녀가 해주는 것과 다르다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꿈이었다. 눈을 뜨면 곧바로 사라질 꿈. 하지만 비올렛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저 꿈에 취해서 있고 싶었다. 설령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은 이릴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돼.”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꿈은 꿈일 뿐인 걸.”

꿈이라도 좋아. 나는 이곳에서 있고 싶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나는 진짜 이릴이 아닌데도?”

...그정도는 알고 있어.

“그녀가 슬퍼할 거야. 그래도 계속 꿈 속에 있을 거야?”

침묵. 입을 다물자 그녀도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불어와  사람의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잎사귀가 흔들리며 내던 싱그러운 소리도 지저귀던 새들의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소리가 지워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평온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나무 아래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을 뿐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내게 아무 말도 하지마.

“...영진.”

머리 위로 따스함이 내려 앉는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의지를 배신하고 멋대로 들어올려졌다.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푸름을 간직한 눈동자가 보였다. 흘러내린 금빛 커텐이 그녀와 자신을 제외한 것들을 차단하고, 오롯이 서로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아도 돼.”

그래. 이릴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겠지. 하지만 너는 그녀가 아니야.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 같은 거지.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고마워, 라고.

그 말에 비올렛은 멍하니 이릴을 올려다봤다. 분명 꿈이라는 것도, 그녀가진짜가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들자 이마 위로 키스를 세기고 멀어지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있어.”

잘 있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차례 시야가 점멸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렛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일어났군.”

알폰스는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이다. 비올렛은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알에리 저택으로 향했을 때 타고 있었던 그 마차였다.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휙휙 바뀌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어쩐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복부가 욱씬거렸고 입을 여는 것도 힘겨웠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비올렛은 입을 여는 대신 힘겹게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알폰스의 앞이었다. 그녀석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싫었다.

“흐으…”

하지만 얼굴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입술 사이로 감정이 세어나왔다. 한 번 그렇게 세어나오니 어쩐지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구멍이 뚫린 댐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쏟아졌다.

"흐아아…!"

눈물이 울컥 터지며 얼굴 위로 흘러내리고 비명을 내지르듯 울음을 토해냈다.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서 종국에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끅끅 하며 딸꾹질이 나왔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릴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불렀던 것 같았다. 영영 못보는 것도 아니건만, 어쩐지 더 이상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자꾸만 들어서, 꿈의 마지막에 작별을 고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쉬지 않고 울고 있으니 누군가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넓은 마차 안에서 사람이라고는   밖에 없었으니 알아차리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비올렛은 품 안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그것이 자신의 계획을 저지하고 괴롭혔던 알폰스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온기가 필요했다. 자신을 다독여  수 있는 버팀목을 원했다.

그리고 알폰스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해주었다.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껴안아 좀 더 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비올렛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차가 알에리령을 빠져 나와 드넓은 들판을 달릴 때 까지도 말이다.

 멀리 알에리 저택이 점으로 사라졌다.

-

밤이 되었다. 하늘에는 어느 때보다 커다란 달이 떠 있었으며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요사스러운 적월(赤月)은 마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의식을 진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밤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하하, 맞소이다. 때마침 적월까지 떠주다니 이것이야 말로 신께서 저희를 보우하고 계심이 아니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아! 신께서 우리를 보고 계셨으면 천벌을 내리시겠지!"

"그런가?"

 노인의 실없는 대화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샬럿 역시 미소를 지으며 모인 면면을 둘러봤다. 알에리 후작을 제외하고도 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이들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나이를 먹고 일선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속에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알에리 후작의 파벌인 것은 단순 우연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딱히 샬럿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계약의 악마. 대가와 재물이 충분하다면 어떤 요구도 이루어 줄 뿐. 그리고 대가와 재물은 준비되어 있었다.

거대한 마법진 한가운데 이지를 상실한 이릴이 주저 앉아 있었다. 그녀를 속박하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인형이나 다름 없는 그녀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다. 하얀 카츄사를 머리에 쓰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 메이드가 모습에 맞지 않는 커다란 도끼를 품에 안고 등장했다.

레니는 불안한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주인인 알에리 후작 외에도 높으신 분들이 많이 보였다. 동질감을 느낄  있는 메이드인 샬럿도 보였으나 어쩐지 오늘따라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다 주저 앉아 있던 이릴이 눈에 들어왔다. 대번에 레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토끼귀를 가진 여인, 비올렛이라 불리던 이와 함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선량한 사람이었다.

레니는 한달음에 다가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춰섰다. 멍하니 땅을 보고 있는 이릴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본 순간 레니는 공포에 빠져들었다. 만일 혀가 있었더라면 비명을 질렀을 정도로.

텅 빈 눈동자와 입을 다물지 않아 끊어지며 떨어지는 침방울. 무엇보다도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마치 시체 같아서 그만 뒷걸음치고 말았다.

그러다  뒤를 무언가 가로막은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메이드 샬럿이 웃음기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가시는 건가요?"

레니는 입을 벙긋거리며 이릴을 가리켰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하. 이릴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구요? 정답 이에요, 레니. 그녀는 죽었어요. 물론 몸은 살아있지만 정신이 죽어버렸죠."

그리고 그걸 죽인 건 저예요. 아주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한 목소리에 레니는 한순간 몸짓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샬럿을 바라봤다. 왜냐고 묻는 것처럼.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굳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빨리 끝내서 알폰스의 곁으로 가고 싶었으니.

꾸드득, 무언가 짓잇겨지는 소리가 샬럿에게서 들려왔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푸확 하고 돋아났다. 일련의 변화를  눈으로 지켜본 레니가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뒷걸음질 쳤다.

"오오… 저것이 샬럿, 샤를로트 님의 본 모습…"

귀족  하나가 감격한 듯 중얼거렸다. 그 시선 끝에는 악마가 서 있었다.

메이드복에 가려져 있던 육감적인 몸이 국부만을 가린 채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으니.

역관절의 다리, 머리 양쪽에 돋아난 말려진 뿔, 이질적인 푸른 피부와 가로로찢어진 눈동자. 무엇보다도 등 뒤에서 꿈틀거리는 십개의 두꺼운 촉수.

그것이야말로 샬럿, 악마 샤를로트의 본모습이었다.

"휴우, 역시 이 모습이 제일 편하다니까요.”

목소리는 변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샤를로트는 기지개를 핀 다음 레니를 바라봤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역시 그녀가 고려해야할 부분은 아니었다. 날개처럼 펼쳐진 촉수가 쏘아져 레니의 몸을 휘감았다. 본능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저항했으나 무의미했다.

팔다리를 꽁꽁 구속한 샤를로트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조종했다. 나아가지 않으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주저 앉아 있는 이릴에게 향했다.

[――――――]

 한 걸음 한 걸음에 언어가 아닌 무언가로 이루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레니는 발 아래로 모여드는 눅진한 기운에 절로 오금이 저려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플 정도로 꽉 조여대는 촉수들이 그녀의 몸을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덧 이릴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녀는 레니가 가까이 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팔이 멋대로 올라가 도끼를 내려찍을 듯 높이 들어졌다. 레니는 눈을 질끈 감으며 끔찍한 장면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허밍이 들려왔다. 마치 마음을 안심시켜주는 듯한 잔잔한 멜로디에 레니는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릴을 바라봤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나 분명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의식을 진행하던 샤를로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이릴을 노려봤다. 저 자장가 같은 허밍이 의식을 이루는 마력을 꼬아버리고 있었다. 반푼이 주제에 꼴에 엘프라고 마족의 마력에간섭하는 건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고작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마력간섭에 순순히 당하는 저급한 악마가 아니었다. 샤를로트는 다시 한번 악마의 언어를 중얼거리며 의식을 이어나갔다. 마력이 꼬이던 것이 거짓말처럼 금세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

이미 죽은 년 주제에 발버둥치기는.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의식을 중지시키려는 것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이릴은 여전히 허밍하며 이름 모를 곡을 연주했다. 레니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같다고 생각했다. 굳이 힘겹게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괜찮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혀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하다. 허밍이 끝나기도 전에 버티던 힘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도끼가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장작을 패기 위해 날을 날카롭게 갈은 도끼가 순식간에 이릴을 지나쳤다. 비명은 없었다. 그것을 지를 이는 말을 할 수 없었고 관객들은 모두 그녀의 죽음을 바랬기에

툭, 목이 떨어지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마법적으로 조치를 해두었기에 온전히 그 몸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핏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고 깨끗했다.

레니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고 엉엉 울었다. 바람만 쉭쉭 빠지는 울음이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팔다리에 기괴한 두께의 촉수가 묶인 채로 엉엉 우는 소녀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해보였으나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의식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재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대가를 취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식에서 대가란 바로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영혼이었다.

레니는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울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쩌억, 벌어진 아가리에  천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 있었다.

“레니, 수고했어요.”

텁, 하고 닫혔다. 우즉, 우드득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지다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촉수들과 다를 바 없는 크기로줄어들었다.

샤를로트는 제 안으로 들어온 영혼을 맛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순결한 영혼을 먹을 수 있는 게 몇 년만 일까. 그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였다.

“자아, 그럼…”

샤를로트는 떨어진 머리와 몸을 들어올리며 관객들에게 물었다.

“어떤 요리를 해드릴까요, 신사 분들?”

곳곳에서 요구사항이 빗발쳤다.

-

연회가 한참 지속되고 있는 별관의 지하에서  다른 만찬이 펼쳐졌다. 초대를 받은 노인들은 기쁘게 착석해 메이드가 만들어내는 요리를 배당 받았으며 그 맛에 메이드를 극히 칭찬했다. 특히나 핏빛처럼 붉은 술은 그 어떤 술보다도 황홀한 맛을 자랑했다.

식사가 이어질 수록 노인들의 얼굴에서 주름은 사라져갔으며 몸에 활력이 깃들었다. 식사가 끝나갈 때즈음 그들을 더 이상 노인이라고 부를  없었다.

중년의 귀족들은 가만히 마지막 요리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메이드가 가져온 음식이 주최자의 앞에 놓여졌다. 뚜껑을 열자 노릇하게 구워진 머리와 심장이 있었다. 주최자는 기쁜 얼굴로 그것을 하나도 남김 없이 먹어 해치웠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주최자에게서는 더 이상 노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는 갓 성년을 넘은 듯한 젊은 귀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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